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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비운의 천재가 가다

草霧 2013. 7. 31. 11:47

 

 

김종학, 비운의 천재가 가다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컬처 톡’ ⑤

 

하재근(문화평론가) | 2013.07.30

 

별 생각 없이 TV를 보고, 노래를 듣는 것 같지만, 그럴싸한 해석을 달아 놓고 보면 대중문화 속에서는 사회의 현주소가 보이고 사람들의 인식이 보고, 심리가 보인다. 별 생각 없이 접하는 것 같은 대중문화에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별 별 생각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다. 그걸 콕콕 짚어내는 하재근 문화평론가의 '컬쳐 톡'이 매주 수요일, 여러분을 찾는다.

 

 

[서울톡톡] 한국 드라마를 상징하는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학 PD가 세상을 떠났다. 사고사도 아니고, 어느 고시텔에서 혼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어떻게 한국을 대표하는 드라마 PD이며 제작자였던 사람이 이렇게 쓸쓸히 갈 수 있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김종학 PD는 1977년에 MBC에 입사에 1981년 <수사반장>으로 연출을 시작했다. 이 드라마는 40대 이상의 국민들에게 지난 세월 추억의 상징과도 같은 역사적 작품인데, 여기에도 그의 손길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1970년대부터 방영된 <수사반장>을 다 만든 건 아니고, 중간에 연출 자리를 이어받아서 작품의 명성을 쌓아나갔다.

 

그의 심상찮은 연출력은 <동토의 왕국>이나 <인간시장> 같은 작품들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동토의 왕국>에선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하는 연출기법을 활용해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인간시장>은 당시 신인이었던 박상원을 스타 연기자로 올려 세우며 이후 김종학 드라마가 '스타 등용문'으로 불리는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92년, <여명의 눈동자>다. 이 작품은 한국 드라마 역사상 처음으로 이념대립의 틀에 갇히지 않은 시대극으로 기억된다. 일제 말에서 한국전쟁까지 이어지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최재성, 채시라, 박상원의 이야기가 장대하게 펼쳐지는 대작이었다. 이 작품은 한국사회에서 신드롬을 일으켰고, 이때부터 김종학 PD는 당대를 대표하는 드라마 감독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후 프리랜서로 독립한 그는 SBS에서 방영된 <모래시계>를 연출해 다시 한 번 한국 드라마의 신기원을 이룩한다. <모래시계>는 '귀가시계'라고 불릴 정도로 국민적 성원을 받았고, 번듯한 인정을 받지 못했던 SBS의 브랜드 가치도 이 드라마 한 편으로 대폭 상승한다. 종편이 초기에 무리를 해가며 막대한 제작비의 대작 드라마들을 만든 것도 <모래시계> 효과를 고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제2의 김종학 PD를 발굴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편의 대작 드라마는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모래시계>는 그때까지 유망주 정도로 인식됐던 고현정과 이정재를 당대 최고의 톱스타로 만들었다. 배경음악도 사나이의 로망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오늘날까지 패러디 된다. 90년대엔 지방 선거 유세음악으로 종종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이 작품은 한국을 대표하는 '상남자', '마초남' 캐릭터를 탄생시키는데, 그가 바로 최민수다.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넌 내 여자니까!"

 

이 대사는 드라마가 방영된 지 20여 년이 지난 요즘도 예능에서 수시로 인용된다. 최민수는 <모래시계>에서 만들어진 '싸나이' 캐릭터를 너무 오랫동안 고수했기 때문에 다소 비현실적인 인물로 비쳤고, 그래서 권위파괴가 진행됐던 2000년대에 네티즌에게 희화화의 대상으로 찍히기도 했다.

 

<모래시계>는 한국에서 그때까지 대중문화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80년 5월 광주'를 이야기해서 시청자를 충격과 감동으로 몰아넣었다. <모래시계>로 인해 한국 드라마가 비로소 현실을, 현대사를 이야기하게 됐다.

 

김종학 PD는 거대한 역사와 운명의 흐름 속에서 풀잎처럼 나약하지만 강한 의지를 가진 개인들의 삶을 서사적으로 그려냈는데, 그것이 굴곡 많은 현대사를 겪어온 한국인의 공감을 자아냈다. 또 그는 예술적 영상미를 통해 한국 드라마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리기도 했다. 한 마디로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제작자로 변신한 이후 많은 성공작을 내놓기도 했다.

 

그랬던 이가 쓸쓸히 갔다는 건, 한국에서 드라마 제작자들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있는가를 말해준다. 경영자로서 그가 잘못한 부분도 당연히 있겠지만, 드라마를 제작원가 미만의 가격으로 방송사에 팔아야 하는 구조에선 누구든 자금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김종학 PD의 비극을 계기로 방송사와 제작사가 상생할 길을 찾아, 다시는 제작자가 자살을 선택하는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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