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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능 (陵) - 2 (3) 제3대 태종(太宗) _ 헌릉 獻陵

草霧 2013. 7. 29. 16:15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2

 

 

 

(3) 3대 태종(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3대 태종(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http://pds26.egloos.com/pds/201305/21/15/f0018015_519b7ec33fd0a.png?width=240

 

피를 묻히고 손발을 잘라 국초의 기반을 세우다

 

헌릉 獻陵

 

3대 태종(太宗) 헌릉 큰이미지 

태종(이방원, 1367-1422, 재위 18, 상왕 4),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

1422, 서울 서초구 194, 헌인릉(獻仁陵)

 

3대 태종(太宗) 헌릉 첫번째 작은이미지3대 태종(太宗) 헌릉 두번째 작은이미지3대 태종(太宗) 헌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조선 3대 태종(太宗) 헌릉 태종(이방원 :1367-1422 : 재위 18, 상왕 4)과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1365-1420)의 쌍릉(雙陵) 형태의 헌릉(獻陵)은 창업수성(創業守成)의 업적인 조선 개국(開國)과 왕실의 기반을 공고하게 만든 태종의 치적답게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형식을 따른 헌릉은 원경왕후 승하 후 태종의 명으로 조성되었으며, 건원릉과 같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워놓고 있습니다. 같은 경내(境內)23대 순조(純祖)의 인릉(仁陵)이 함께 모셔져 '헌인릉(獻仁陵)'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헌릉(獻陵)은 태종과 원경왕후를 같은 언덕에 무덤을 달리하여 안장한 쌍릉으로 두 무덤 모두 아래 부분을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세웠으며, 그 밖으로 각 무덤에 12간의 난간석으로 서로 연결하였다.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4, 상석(床石) 2, 망주석(望柱石) 1쌍을 3면의 곡장(曲墻)으로 감싸 안으며 무덤 위의 한 층이 이루어졌다. 그 아래로 한 단 낮추어 중간 층에는 문인석(文人石) 2, 마석(馬石) 2, 팔각형 명등석(明燈石) 2좌가 각 무덤에 설치되었고, 그 한 단 아래에 무인석(武人石), 마석 각 4좌가 아래 층을 이루고 있다. 웅장한 규모로 조선 왕릉중에 가장 크다고 전해진다. 특히 세종의 효심을 읽을 수 있는 배려가 곳곳에 숨어 있다. 승하후 세종의 묘역도 유언대로 한동안 이곳 지역에 조성되어 있었다.

 

Taejong.JPG

 

헌릉은 3대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의 봉릉이 같은 언덕에 조영된 쌍릉 형식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병풍석의 규모와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초기 조선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헌릉의 능 앞 석물들은 망주석, 혼유석, 장명등은 1쌍이고 양석, 호석은 각각 4, 문무인석과 마석은 각각 2쌍씩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왕조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한 것이며 조선시대에서는 가장 웅장한 배치 방법이다.

 

    헌·인릉-헌·인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헌릉이 지닌 조선 초기 왕릉으로서의 특성을 두 가지 꼽자면 소전대와 상석 아래 놓인 고석의 개수를 들 수 있다. 정자각 북서측에 있는 소전대라고 하는 석물은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지방을 불사르는 시설로 태조 건원릉과 이곳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석물이다. 한편 봉릉 앞 상석 아래에 놓인 고석의 개수가 5개인데, 이와 같이 고석이 5개인 능은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으로 모두 조선 초기 상설제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헌릉에는 불교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법석은 물론, 원찰의 설립을 금하였다.

    

 

원경왕후가 1420(세종 2) 710일 수강궁(창경궁) 별전에서 태종보다 일찍 세상을 뜨자, 태종의 명으로 같은 해 917일 대모산 기슭에 건좌손향으로 왕후의 능을 조영했는데, 억불정책으로 원찰을 세우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22(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아들 세종은 같은 해 96일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 옆에 봉릉을 따로 만들어 아버지를 모시고 난간으로 연결하여 쌍릉을 조성하고 곡장을 둘렀다.

 

(우137-180) 서울시 서초구 헌인릉길 42. 3호선 양재역 7번출구,  2호선 강남역 6번출구로 나와 버스  140, 407, 408, 440, 462, 471 로 환승해서 헌인릉 버스정류장, 강남서초구예비군훈련장 (서울시립어린이병원 다음 정류장)에 하차하셔서 오실 수 있습니다.능원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손상된 원래 신도비와, 1695(숙종 21) 하나 더 증설하여 세운 것이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조의 건원릉, 정종의 후릉, 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 때까지 세웠다가 그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했는데, 현재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과 헌릉에만 볼 수 있으며 세종의 영릉 신도비는 서초구 내곡동 원래의 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73년에 발굴하여 현재의 청량리 홍릉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입구에 있다.

 

이렇듯이 헌릉의 석물은 고려시대 현릉·정릉(玄陵·正陵), 조선시대의 후릉(厚陵)과 같은 형태지만 망주석 이외는 각각 하나씩을 더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셋째 아들이었던 세종은 부친의 무덤에 각별한 정성을 보였으며 난간석을 만들만큼 부모님의 화해를 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죽어서도 부모곁에 묻히기를 바랄만큼 애틋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승하하여 18년간 이곳 헌릉의 서쪽편에 모셨다가 예종(睿宗) 원년(1469)에 지금 경기도 여주의 영릉으로 모셨다. 헌릉에는 쌍봉으로 있는 무덤 언덕 아래에 정자각(丁字閣), 2기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碑閣),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헌릉의 지문을 지어 올린 변계량(卞季良, 1369~1430) 

 

홍살문 쪽에서 바라본 헌릉의 전경이다.정자각 오른편으로 비각이 서 있다

 

세종실록1420(세종 2) 824일자 기사에는 원경왕후 승하 시 변계량이 지어 올린 헌릉의 지문이 기록되어 있다. “태후 민씨(閔氏)는 여흥(驪興)의 세가이시다. (중략) 태후가 어려서부터 맑고 아름다우시며, 총명하시고 인자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출가할 나이에 배필을 고르시다가 우리 성덕 신공(盛德神功) 상왕의 빈()으로 들어오셨다. 상왕이 젊어서부터 세상을 경영할 뜻을 두시고 경사(經史)에만 마음을 쓰시고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아니하셨으나, 태후께서 살림하는 데 능숙하시고 주부로서 남편의 공을 이룩하도록 힘쓰셨고, 여러 아들을 가르쳐서 옳은 데로 따르게 하셨고, 시첩들을 예로 대하여 부인의 도리에 극진하셨다.

 

관련사진(중략) 경자년 525일에 태후가 병환이 드시었는데, 상왕은 매일 오셔서 보시었고, 주상은 곁에 모시고서 부채로 서늘하게 하며 침석을 보시고 친히 탕약(湯藥)을 받들어 무릇 구료하심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710일에 수강궁 별전에서 훙()하시니, 춘추가 56세이시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아래로 복예(僕隷)에 이르기까지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아아, 슬프도다. 상왕이 슬퍼하심을 이기지 못하시어 조금 평안치 못하시니, 주상이 대신을 보내어 육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흰옷과 소찬으로 30일을 지내셨으며, 주상은 애통함이 다할 데 없으시어 양암(樑闇) 에 거처하시니, 상왕이 장례 뒤에 복을 벗으라 허하셨다. (후략)” 고 하였고, 판돈녕부사 권홍(權弘)을 시켜 돌에 쓰게 하였다.

 

 

 

 

헌릉 오리나무숲 이야기

 

헌릉의 오리나무숲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이 꽃은 숲 주변에 무리를 지어 피는 고마리 꽃이다.

1. 작은 생태 파수꾼, 오리나무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오리나무숲

양재동 동쪽 대모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헌인릉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가 모셔진 헌릉, 조선 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이 합쳐진 이름이다. 능 아래쪽에는 17,000여 평에 오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이 숲은 2005년에 서울시에서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하였다.

 

2. 정성 들여 가꾼 능역의 전통 숲

조선 왕릉은 능 조영 당시 입지 선정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고, 풍수지리상의 길지를 엄선하여 결정하였으므로,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입지를 지녔다. 이렇게 풍수지리에 근거한 자연경관에 입지하고 있어 특별한 관리나 계획이 필요치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일부 사료에 따르면 능역의 산림은 인공적으로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철저히 관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능을 조영할 당시에 새로 심었거나 관리된 나무의 종류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나무들과 1915~1935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사,발행한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능 조영 시 능의 좌우 및 후면에는 소나무를, 전면인 남쪽의 낮은 지대에는 오리나무를 심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리나무는 우리나라에 집단적으로 자생하는 지역이 희귀함을 감안할 때 능의 전면에 인공적으로 심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3. 오색딱따구리가 출현하는 왕릉의 숲

오리나무는 5리마다 한 그루씩 심어놓고 이정표로 썼다고 해서 이와같은 이름이 붙여질 만큼 예전엔 흔했던 나무이다. 그러나 산기슭, 밭둑길, 개울가와 같이 새로 개발하기 딱 좋은 곳에 살곤 해서인지 지금은 매우 보기 어려운 나무이다. 헌인릉 주변 오리나무숲 일대는 지하수가 풍부하고 토심이 깊어 서울에서는 둔촌동 생태경관보전지역과 더불어 오리나무 군집을 형성하고 있다. 또 곳곳에 물웅덩이와 소규모 수로가 있어 물봉선, 삿갓사초, 애기나리, 둥굴레, 붓꽃 등 다양한 습지성 식물이 자라고 오색딱따구리, 꾀꼬리, 박새 등도 출현하고 있다.

    

 

 

4. 조선 왕릉이 후대에 물려준 선물

조선 왕릉을 조영할 당시 왕실에서 들였던 공은 현재 우리에게 당시 왕실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게 하는 문화적 유산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도심 속에서 한국 전통 숲의 맑은 공기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쉼터를 안겨주었다. 조선 왕릉은 후대의 우리에게 맑은 역사의 숲을 산책할 수 있는 큰 선물인 셈이다.

   

 

 

비로 내리는 태종의 영혼, 태종우

 

치세를 이룬 태종의 헌릉에는 다른 왕릉의 두배나 되는 석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1.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은 태종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권력 획득을 위한 분란의 소용돌이가 거셌던 조선 초기에 그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1400년 왕이 된 후 1710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왕조의 기반을 닦았으며, 많은 치적을 남겼다.

    

2. 비로 내리는 태종의 영혼

이러한 그의 말년에 하나의 일화가 전해진다. 태종 말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온 나라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고 한다. 태종은 눈을 감으면서도 가뭄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이 염려가 되어 내가 죽으면 마땅히 상제께서 비를 내리시도록 청하여 우리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리라.”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자 하늘에서 바로 비가 내려 오랜 가뭄이 풀렸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뒤부터 태종이 승하한 날인 음력 510일이 되면 항상 비가 내렸으므로 이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불렀다고 한다.

태종우와 관련된 일화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태종이 임종을 맞이할 때 세종에게 "현재 가뭄이 심하니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이 날 비가 오게 하겠다."했는데, 그 뒤 기일마다 비가 왔고 이 비를 태종우(太宗雨)라 했다.

 

3. 치세를 이끈 왕에 대한 기억

농촌에서는 태종우가 오는 해에는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하였다. 태종우는 20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해인 1591(선조 24)부터 멈췄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태종의 전쟁에 대한 경고라고 전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나름의 방식으로 조선 초기 왕조의 기틀을 닦은 왕을 기억해왔다.

 

 

 

몸과 마음이 강건한 왕

 

태종 (이방원, 1367-1422, 재위 18, 상왕 4)

http://pds26.egloos.com/pds/201305/21/15/f0018015_519b7ec33fd0a.png?width=240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의 개국(開國)1등 공신(功臣) 역할을 했습니다.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高麗)의 충신들을 제거하고 개국한 새왕조 조선이었기에 이방원의 야심은 당연히 왕권(王權)에 있었습니다. 세자(世子)였던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소생 방석(芳碩)을 제거한 제1차 왕자의 난과 형 방간(芳幹)을 제거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은 즉위 후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확립하고 세종대(世宗代)의 성대(盛代)에 기반을 세웠습니다.

태종은 18년간의 왕위(王位) 동안 국가의 모든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명(), 일본(日本), 여진(女眞) 등 주변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국가의 기초를 확립했습니다. 특히 세종(世宗)에게 선위한 후에도 병권(兵權)은 장악하고 세종 원년의 대마도(對馬島) 정벌(征伐)을 주도했으며, 그 후 별궁(別宮)에서 여생(餘生)을 즐기다가 56세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 등과 대립하여 세자 책봉에서 탈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더불어 정도전이 재상 중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왕자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이방원은 결국 1398(태조 7) 8월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방원은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등의 일파를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도 아울러 살해한다.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 난을 통해 태조는 방원의 형인 영안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교지를 내렸고, 영안군은 곧 조선 제2대 임금 정종으로 즉위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신의왕후의 소생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불공평한 논공행상으로 이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중신 박포가 이방원의 넷째 형 이방간으로 하여금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이로 인해 이방간과 이방원은 개경 시가지에서 무력 충돌을 하게 되었는데, 이방원이 승리하고, 박포는 사형에 처했으며, 이방간은 유배됨으로써 진정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지위가 더욱 확고해진 이방원은 그해 2월 세자로 책봉되고, 11월에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되었다.

태종왕릉과 정중석

몸과 마음이 강건한 왕

사냥 마니아

세자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려는 뜻은

선비도 활을 잡아라

화살에 담긴 지혜

강무는 쉴 수 없는 것

국가유공자 자녀를 등용하라

왕도 자식만은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왕이 하는 것을 세자는 왜 못합니까?

신문고의 진실

척불의 회오리가 시작되다, 아비를 부정하리라

업장은 짧고 과보는 길다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

고려말기의 신하였던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태어나 슬하에 세종(世宗)과 양녕, 효령, 성녕의 3대군(大君)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의 4공주(公主)를 두었습니다. 말년에 태종과의 불화(不和)로 처남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의 처형 등 정치적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습니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보다 두 살이 많았는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형제들을 동원하여 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이 승리할 수 있는 계략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겼다. 결국 태종은 원경왕후의 도움으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후에는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권력의 분산과 왕권의 강화를 위해 친족배척의 정책을 쓰는 한편 후궁을 늘려나갔는데, 원경왕후는 이에 크게 질투하고 불만을 품게 되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태종은 자신의 왕위 등극에 공을 세운 원경왕후의 형제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유배 보내고 자결하도록 했다.

 

친정에 이러한 불화가 계속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막내 성녕대군이 14세의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자 원경왕후 민씨는 묘앞에 대자암을 지어놓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으로 말년을 보내다가 1420(세종 2) 710일 수강궁 별전에서 춘추 56세로 승하하였다.

 

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정도전 등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득세할 수 있었던 데에는 원경왕후 민씨의 도움이 컸다.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열흘 전,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였다. 이 때 사병을 거느린 왕족과 귀족들은 병사 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무기며 군장비를 모두 내놓았어야 했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얼마간의 사병과 무기를 친정집에 숨겨두었다.

 

1398826, 당시 태조의 병환이 깊어서, 왕자들은 근정전 문 밖 서쪽 행랑에 모여 숙직을 하고 있었다. 원경왕후는 집사를 보내 자신이 갑자기 복통이 심하다는 핑계를 들어 이방원을 불러내었다. 집에 와서 갑옷을 입고 거사함. 그리고는 자신의 친형제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숨겨둔 사병과 무기를 풀어 이방원에게 내주었다. 이로 인해 1차 왕자의 난은 성공하였고, 이방원은 왕위 계승을 위한 수순을 한 차례 밟게 되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