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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능(陵) - 2. (1)제1대 태조(太祖)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貞陵

草霧 2013. 7. 26. 17:50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2.왕조, 문을 열다 (1)

 

 

 제1대 태조(太祖)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貞陵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 ~ 1408)  건원릉健元陵제릉齊陵정릉貞陵

 

   


새로운 왕조의 문을 여니 영웅의 삶은 고단했다

 

건원릉 健元陵

 

    

 

태조고황제 태조(太祖, 1335 ~ 1408), 1408, 경기 구리 193, 동구릉(東九陵)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거의 따르고 있다.

   

1대 태조(太祖) 건원릉 두번째 작은이미지1대 태조(太祖) 건원릉 세번째 작은이미지1대 태조(太祖) 건원릉 첫번째 작은이미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

 

1대 태조(太祖) 건원릉 큰이미지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높고 웅장한 봉분의 아래 부분은 다양한 문양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다. 병풍석에는 열 두 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왕을 지키는 영물들로, 밖을 향하여 언제든지 방비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조선 초기의 혼유석 북석은 4개가 아닌 5개가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다. 한 단계 아래쪽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그보다 더 아래쪽으로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다.

 

동구릉

건원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중앙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넉넉한 크기의 봉분 아래 부분을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고, 봉분 앞 혼유석 밑을 도깨비가 새겨진 고석 5개가 받치고 있으며, 양 옆으로 망주석이 서 있다. 특이하게도 봉분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심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을 덮어주었다고 전해진다.

 

 

 
 

 

1408(태종 8) 태종은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 조선초기 천재 건축가 박자청의 건축 습관은 건원릉과 후릉, 헌릉의 석물을 보면 동일한 잣대가 드러난다.

 

1408년(태종 8) 태종은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하였다. 태조는 14085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그해 612일 검교 판한성부사 유한우, 전 서운정 이양달, 영의정 하윤 등이 원평, 봉성, 행주 등의 길지를 후보지로 내세웠으나 채택되지 못하였고, 628일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의 검암에 산릉지를 정하였다.

 

75일에 충청도에서 3,500, 황해도에서 2,000,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여 7월 말을 기하여 산릉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고 석실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는 97일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아가 견전례를 행하고 영구를 받들어 발인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건원릉 억새풀이야기

 

푸른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사초한 건원릉 봉분

 

1. 돌보지 않은 듯한 태조의 능

건원릉을 제외한 다른 조선왕릉의 봉분은 푸른 잔디가 덮여 있으며 반듯하게 손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을 세운 태조의 위엄있고 웅장한 건원릉에는 언뜻 보면 마치 한동안 손보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무성하다. 왜 그럴까? 인조실록1629(인조 7) 319일의 첫 번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2.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은 다른 뜻

동경연 홍서봉이 아뢰기를, “건원릉 사초(莎草 : 무덤에 잔디를 입히는 것)를 다시 고친 때가 없었는데, 지금 능에서 아뢰어 온 것을 보면 능 앞에 잡목들이 뿌리를 박아 점점 능 가까이까지 뻗어 난다고 합니다. 원래 태조의 유언에 따라 고향의 억새풀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무뿌리가 그렇다는 말을 듣고 어제 대신들과 논의해 보았는데, 모두들 나무뿌리는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사초가 만약 부족하면 다른 사초를 쓰더라도 무방하다고들 하였습니다.”

   

 

 600년 함흥 갈대의 새싹이 돋아나는 건원릉 능상.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식(寒食)에 쑥뿌리 등을 제거할 때 나무뿌리까지 뽑아버리지 않고 나무가 큰 뒤에야 능 전체를 고치려고 하다니 그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지금이라도 흙을 파서 뿌리를 잘라버리고 그 흙으로 다시 메우면 그 뿌리는 자연히 죽을 것이다. 예로부터 그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던 것이니 손을 대서는 안 된다.”

 

3. 고향땅에 잠들고 싶었던 조선의 창업주

인조의 언급에서처럼 태조의 건원릉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덮여있는 까닭은 태조의 특별한 유언 때문이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는 위업을 이뤘지만, 그 후 왕자들이 형제간의 살육을 마다하지 않으며 벌이는 권력 다툼을 겪는 등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안은 채 말년을 보내야 했다. 승하하기 전 태조는 왕 이전의 한 사람으로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 땅의 흙과 풀 아래 잠들고 싶은 마음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재궁에서 원찰로, 개경사 이야기

 

 조선을 열었던 태조 이성계도 원했던 강비와 잠들지 못했다.

 

1. 첫 왕릉의 재궁, 개경사

왕릉의 홍살문 밖에는 으레 재실이라는 건물이 있다. 왕릉의 재실은 왕릉을 수호하고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제관이 휴식을 취하고 제기를 관리하였다. 조선 최초의 왕릉인 1대 태조의 건원릉에도 이러한 재실이 있었는데, 태종이 1408(태종 8)에 이 재실을 개경사(開慶寺)라고 이름붙이고 조계종에 속하게 하여 왕실의 원찰로 거듭났다. 태종실록1408(태종 8) 729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건원릉에만 나타나는 네모난 돌 정중석은 불교 양식으로 절을 하던 곳이다.

산릉의 재궁(齋宮)에 개경사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조계종에 귀속시켜 노비 150명과 농사지을 땅 3백결을 내렸다. 임금이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불교가 그른 것을 내 어찌 알지 못하랴마는, 아버님이 돌아가시니 시시비비를 따질 겨를이 없다. 내 생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제정하여 후손에게 전하겠다.”라고 하였다.

    

2. 불교에 귀의했던 태조를 위한 공사

개경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졌다. 1409(태조 9)에는 송림현 선흥사의 탑을 이 사찰로 옮겨왔으며, 1412(태종 12)에는 경주 백률사에 있던 관음상을 이전해왔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개경사에 안치할 목적으로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태종실룩1413(태종 13) 311일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대장경(大藏經)을 해인사에서 인행하게 하였다. 풍해·경기·충청도 관찰사에게 전지하여, 그 도에서 만든 경지(經紙) 260속을 경상도에 체수하게 하고, 또 경상도 관찰사에게 전지하기를, “지금 보내는 경지를 해인사에 전하여 대장경을 인행하라. 이 작업에 동원되는 승려 2백 명에게도 삭료를 모두 지급토록 하라.”

 

하였다. 임금(태종)이 태조가 부처를 좋아하여 일찍이 개경사를 세웠는데, 이곳에 대장경을 인출하여 안치하기 위해 이와 같이 명한 것이다.

 

3.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찰

개경사는 원래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 검암산 현릉이 자리 잡은 곳의 동쪽에 위치하였다. 단종 때 한 차례 이 사찰의 이전 문제가 제기된 일이 있었으나 그대로 이전되지 않고 있었는데, 1779년 이전에 폐사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이 그 터만이 남아있다.

   

      

                       

      

   

   

 

용의 선택, 용의 분노, 용의 눈물

 

태조 이성계 (太祖, 1335 ~ 1408)

함경도 영흥(永興) 지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의 쌍성이었던 함경도 지방에서 세력을 떨친 이자춘이다. 1356(고려 공민왕 5) 부자가 함께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켜 함주 이북의 땅을 회복하였고, 그 후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았다. 홍건적, 원나라, 여진족의 잇따른 침입을 막아내며 점차로 높은 벼슬길에 올랐으며, 1388(고려 우왕 14)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당시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빼앗으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고려에서는 요동정벌을 결정하였고, 출군을 반대하다가 거절당하자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392(고려 공양왕 4)에 새 왕조를 세웠으니, 이 나라가 조선이다. 태조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새 왕조를 세운지 6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다. 말년에는 그 아들들의 왕위쟁탈전으로 인해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았으며, 불가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다.

 

심부름을 보냈는데 감감무소식인 사람을 일컬어 흔히 함흥차사라고 한다. 함흥차사는 원래 태종이 함흥에 있는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보낸 사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훗날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국을 어지럽히자,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나 한양을 떠났다. 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로는 문안을 위하여 태조에게 차사를 보냈으나, 그 때마다 돌아오지 않아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태종이 차사를 보낼 때마다 태종에게 몹시 화가 난 이성계가 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고 하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에 대한 분노를 삭히지 못한 태조는 경기도 양주 땅에 있는 회암사와 강원도 오대산, 함경도 안변, 항주 등으로 다섯 번이나 홀연히 한양을 떠났다. 이때마다 태종은 이성계에게 차사를 보내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는데, 그 중에서 희생된 사람은 마지막 차사인 박순과 내관 노희봉 뿐이며, 이들도 이성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반란군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함흥차사에 관한 이야기는 후세에 와서 호사가들이 태종과 태조의 갈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부풀린 것이다.

음택에서는 우측이 높다

정자각에는 계단 하나가 없다

강 위에 능원 있다

함흥차사와 억새풀

태조 왕릉이 명당인 것은?

온 나라를 꽃밭으로 가꾸려 한 왕

태조 이성계의 취미는 꽃 가꾸기였다?

조선’, 아름다움의 터전

정원으로 가꾸고 싶은 한양

한양 천도와 지방 도시의 출현

혁명을 인정한 최초의 법전, 조선경국전

떠도는 구름, 흩어지면 그림자도 남지 않는 것을

무학대사가 없었다면, 그는 단지 사나운 장수에 불과했을 것

   

 

 

 

한 여인의 혈손으로 5백 년 왕업을 잇다

 

제릉 齊陵

    

 

1대 태조 원비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1337 ~ 1391), 1391, 개성

 

제릉은 현재 북한 지역인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위치한 신의왕후의 능이다. 신의왕후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1년 전인 1391923일 세상을 떠났으므로, 개성 근교에 터를 정하여 일반 능제로 묘를 조성하였다, 조선 건국 후 신의왕후의 능을 왕비릉의 규모로 확장하였으나, 현재 북한에 위치하고 있어 자세한 능의 규모와 구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신의왕후는 1391923일 지병으로 5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해풍군 치속촌에 장사를 지냈으나, 조선을 건국한 뒤 시호를 절비라 추존하고 능호를 제릉이라 하여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봉릉하였다. 1407(태종 7)에는 왕비릉의 규모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제릉의 확장 공사를 하였다.

 

   

 

 

제릉의 신도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1744년에 세워진 신도비.(조선 초기였던 태종 4년 1404년에 세워졌던 원래의 신도비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고, 현재 제릉에 남아있는 신도비는  영조 20년인 1744년에 비문의 원문을 다시 쓴 비문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1900년 광무제국 시절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비각. 신도비는 남한에서 1대 태조의 건원릉(建元陵)이나 3대 태종의 헌릉(獻陵)에서도 보이는데 거대한 비석에 왕릉의 주인에 대한 일생을 소상하게 적어놓은 비문이다. 조선 초기의 왕릉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4대 세종의 영릉(英陵) 이후부터는 사라졌다. 비각에는 '대한 신의고황후 제릉'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조선국이 아니라 대한이라고 새겨져 있는 비각은 1대 태조계비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이나 23대 순조의 인릉(仁陵) 등 26대 고종이 황제로 추숭한 왕들의 능의 비석에서 살펴볼 수 있다.


※ 제릉 신도비를 영조 시대 때 다시 세웠다는 기록은 아래와 같이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나와있으며, 이 때 다시 세웠다는 신도비의 비문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태종 4년 2월 18일 2번째 기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제릉(齊陵)의 신도비(神道碑)를 고쳐서 세웠다. 비가 임진년10617) 왜놈의 변란에 파괴되었는데, 열성조(列聖朝) 때에 고쳐서 세울 겨를이 없었다. 임금이 종신(宗臣)의 소청(疏請)으로 인하여 영건 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해서 고쳐서 세우되 《열성지장(列聖誌狀)》에 기록된 권근(權近)이 찬한 비문을 다시 쓰라 명하고, 또 봉조하(奉朝賀) 이의현(李宜顯)에게 명하여 비의 음기(陰記)를 짓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일을 끝마쳤다고 보고하자, 영건한 노고에 대하여 영건 도감의 여러 신하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리고, 참판 유엄(柳儼)과 참의 정익하(鄭益河)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 영조 20년 1744년 11월 4일

 

 

 

 

굽은 나무처럼 선산만 지키다 간 여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1337 ~ 1391)

신의왕후는 안천부원군 한경의 딸로 1337년에 안변부에서 태어났다. 1351년 영흥에 있던 태조 이성계에게 15세의 나이에 시집을 왔고, 방우, 방과(훗날 정종), 방의, 방간, 방원(훗날 태종), 방연 등 6남과 경신, 경선 등 2녀를 낳았다. 그러나 남편이 새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 채, 조선 건국 1년 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과욕이 화를 부르고 쌓인 한이 비 되어 내리니

 

 

 

정릉 貞陵

 

 조선 태조왕비 정릉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 정릉 첫번째 작은이미지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 정릉 두번째 작은이미지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 정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태조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56 ~ 1396), 1396, 서울 성북구 208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으로 원래 정동(貞洞)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던 것을 태종 9년에 옮겼다. 이성계에게 버들잎을 띄워 물을 준 버들잎 설화의 주인공으로 태종은 태조가 애지중지하던 정릉을 태조의 사망(1408)후에는 파괴하고 이전했다. 태종 91409년 정릉은 도성 밖 양주, 현재의 서울시 성북구로 옮겨졌다. 태종은 더욱이 정릉의 원래 자리의 정자각을 헐고,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없애도록 명했으며,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릉은 단릉으로 조성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처음에는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역이 조영되었으나, 태조가 승하한 후, 원비의 태생인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고, 현재의 위치로 천장되었다. 따라서 왕릉제인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봉분에서 사라지고, 4각 장명등, 고석, 상석 등만이 원래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

 

정릉의 공간은 일반 왕릉의 영역이 직선축을 이루는 데 비해,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어 있다. 능역 입구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터 양 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보호수도 살펴 볼만한 가치 있는 역사경관이다.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능역을 조성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하여 능호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아울러 능의 동편에 흥천사(興天寺)라는 절을 지어 재궁으로 삼고 능침사찰로 하였다.

    

그러나 잘 조성된 정릉은 신덕왕후의 왕자인 방번과 방석이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살해되고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소생인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정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는 것을 허락하고, 청계천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하도록 하였다. 정릉이 있던 이 일대는 지금까지 정동(貞洞)으로 불리고 있다. 그로부터 260여 년이 지난 1669(현종 10) 신덕왕후는 현종에 의해 복권되면서 그 능이 현재와 같이 재조성되었다.

 

정릉은 정동에 없다

 

    도성 밖 (현재의 서울시 성북구) 으로 천장한 정릉의 석물들.

 

정릉의 영역에 집을 지은 하륜(河崙, 1347~1416)

태종실록1406(태종 6) 47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전한다. 정릉(貞陵)의 영역(塋域)을 정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데도 그 영역이 너무 넓으니, 청하건대, 능에서 1백 보 밖에는 사람들에게 집을 짓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세력 있는 집에서 분연하게 다투어 좋은 땅을 점령하였는데, 좌정승 하륜(河崙)이 여러 사위를 거느리고 이를 선점하였다.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 추정되는 곳에 능역을 조성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하여 능호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계모인 신덕왕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다.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 조영한 능

태조는 계비 신덕왕후를 매우 사랑하여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궁에서 가까운 곳인 황화방(현재의 정동)에 웅장하게 능을 조영하였다. 그리고 능의 동쪽에 흥천사라는 원찰을 세워 자주 왕래하였고, 능에 재를 올리는 흥천사의 아침 종소리가 궁에서 들리면, 그제서야 아침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세자 책봉에 반발한 왕자의 난

태조의 뜻에 따라 궁궐의 가까운 곳에 정성스럽게 지어진 정릉은 태종이 즉위하면서 푸대접을 받기 시작하였다. 태조는 원비 신의왕후에게서 6명의 아들을 두었고, 그 후 계비 신덕왕후에게서 방번, 방석 2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세자를 책봉하면서 장성한 신의왕후의 아들들을 제쳐두고 어린 신덕왕후의 소생 방석을 선택한 것이 왕실에 화를 불러일으켰다. 신의왕후 소생의 여섯 왕자, 그 중에서도 방원, 즉 훗날의 태종이 이에 커다란 반감을 갖게 되었고, 신덕왕후가 승하한 후,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들을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허물어지는 정릉의 숲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르는 수순을 밟은 태종은 계모인 신덕왕후의 능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1406(태종 6) 정릉의 능역이 도성 안에 위치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능역 또한 너무 넓다는 논란이 있자 태종은 정릉 100보 밖까지를 주택으로 허가하였다. 따라서 하륜 등 당대 세도가들이 정릉의 숲을 베어내고 저택을 짓게 되었다.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태조는 애써 조성한 사랑하는 아내의 능이 초토화되는 것을 보고 남몰래 눈물지었다고 한다.

 

광통교 다리 밑에 밟히게 된 정릉의 석재

 

1409(태종 9)에는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전하자는 상소가 올라왔고, 태종이 이를 허락하여 지금의 정릉 위치인 도성 밖 양주 땅 사을한록으로 천장하였다. 태종은 이때 능을 옮기면서 봉분을 깎아버리고 정자각을 헐었으며, 석물들을 모두 땅에 묻도록 하였다. 1410(태종 10) 여름에는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로 인해 무너지자 예전 정릉의 석물이었던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들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하였고, 그 밖의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따라서 백성들은 왕비의 능을 구성하던 석재들을 밟고 다니게 되었다.

    

광통교 다리 밑에 사용된 정릉의 석재

현재는 다리를 떠받드는 석재이지만, 과거의 영화를 말해주듯 병풍석의 구름문양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현재는 다리를 떠받드는 석재이지만, 과거의 영화를 말해주듯 병풍석의 구름문양이 섬세하고 아름답다.광통교 다리 밑에 사용된 정릉의 석재

 

세원지우(洗寃之雨)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며 내린 비

태종은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태종과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왕후만을 함께 모시고, 신덕왕후의 신위는 모시지 않음으로써, 그녀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켜 버렸다. 이로써 태조가 사랑했던 신덕왕후는 죽은 후에도 새어머니를 미워한 아들에 의해 한참을 푸대접 받다가, 그로부터 260년이 지난 1669(현종 10) 다시 정릉의 상설을 복구하고 종묘에 배향을 결정하게 되어 그 한을 풀게 되었다. 이 때 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져서 사람들이 이를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불렀다고 한다. 세원지우란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정릉

(우136-876) 서울시 성북구 능길 74. 4호선 성신여대 6번출구에서 아리랑고개방향 100m지점으로 버스승차 하셔서 오실 수 있습니다.-태조실록1396(태조 5) 813일조.

밤에 현비가 이득분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임금이 통곡하고 슬퍼하기를 마지아니하였고, 조회(朝會)와 도성 내에 장이 서는 것을 10일간 정지하였다.

 

-태조실록1396(태조 5) 821일조.

임금이 안암동에 거둥하여 능을 조영할 곳을 결정하였고, 이튿날 참토(斬土)하고 땅을 파보니, 물이 솟으므로 중지하였다.

 

-태조실록1396(태조 5) 928일조.

현비의 존호를 신덕 왕후로, 능호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능을 조영하기 위하여 개석을 운반하다가 전라도의 인부들이 넘어져서 손발이 부러진 자가 89명이나 되었다.

 

-태종실록1406(태종 6) 47일조.

의정부에서 아뢰기를,“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데도 능역이 너무 넓으니, 청하건대, 능에서 1백 보() 밖에는 사람들에게 집을 짓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세력 있는 집에서 분연히 다투어 좋은 땅을 점령하였는데, 좌정승 하륜(河崙)이 여러 사위를 거느리고 이를 선점하였다.

 

-태종실록1409(태종 9) 223일조

신덕왕후 강씨를 사을한(沙乙閑)의 산기슭으로 천장하였다. 의정부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에 가까우니,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1409(태종 9) 413일조.

태평관(太平館) 북루를 새로 지었다. 임금이 이귀령에게 일렀다. “정릉의 정자각을 헐어서 누 3칸을 지으면, 재료를 아끼고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정릉의 돌을 운반하여 쓰고, 그 봉분은 자취를 없애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하는 것이 좋겠으며, 석인(石人)은 땅을 파고 묻는 것이 좋겠다.” “석인을 가지고 주초(柱礎)를 메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귀령에게 이르기를, “옳지 못하다. 묻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

 

-태종실록1410(태종 10) 88일조.

큰 비가 내려 물이 넘쳐서, 백성 가운데 빠져 죽은 자가 있었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광통교의 흙다리가 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청컨대 예전 정릉 자리에 있던 돌로 돌다리를 만드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왕조의 시작, 여인의 파란만장도 시작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56 ~ 1396)

신덕왕후는 상산부원군에 추증된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친가는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인 향처(鄕妻)와 서울에서 얻는 새 부인인 경처(京妻)를 두는 것이 풍습이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경처였는데, 향처인 한씨 부인이 태조가 즉위하기 전인 1391년 세상을 떠났으므로 조선이 개국된 1392년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와의 사이에 방번, 방석 두 아들과 경순공주를 두었으며, 태조가 그녀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1396(태조 5) 813일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집에서 병환으로 승하하였다. 사랑하던 신덕왕후를 잃은 태조는 정릉을 조영하고, 능 동쪽에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흥천사를 세웠다. 이 원찰에서 정릉에 재를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아침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2년 후에는 그녀의 소생 중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데 원망을 품은 방원을 비롯한 전처 소생 아들들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과 방석을 살해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태조는 신덕왕후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계기에 대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의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매우 말라 우물을 찾았다고 한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아리따운 그 고을의 처자에게 물을 청하였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 한 웅큼을 띄워 그에게 건네주었다. 태조가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뒷날의 신덕왕후가 된 그 처녀는 갈증이 심하여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하여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