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시교(因材施敎)는 획일적이 아니라 저마다 타고난 소질에 맞게 교육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공자의 논어(論語) 선진편(先進篇)에 나온 말이다. 자녀에게 내재된 저마다의 특성을 잘 살려 행복한 삶으로 이끈 부모의 성공 교육철학을 연재한다. | ▲ 아버지 조의현씨와 아들 조영헌 교수(고려대 역사교육과·오른쪽)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
30년째 가족신문을 발간하는 가족이 있다. 한국화장실연구소 조의현(69) 소장과 두 아들 조영헌(41)·조영한(39) 형제 가족이다. ‘비둘기집’은 조영한씨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84년 학교 숙제로 시작한 이후 한 차례의 휴간 없이 발간됐다. 매달 발간하던 신문은 형제가 입시생이 되던 20년 전부터 격월간으로 발간 중이다. 이 신문의 독자는 150여명이다. 나이 드신 분들께는 종이신문 형태로 전하고 젊은 세대들에는 PDF 파일로 만들어 이메일로 발송한다. 가족신문의 보이지 않는 힘은 컸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동발행인으로서 기삿감을 발굴하고 기사를 써온 형제는 나란히 교수가 됐다. 조영헌씨는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동생 조영한씨는 한국외국어대 한국학과 교수다. 지난 4월 16일 대표 발행인 조영헌씨와 아버지 조의현씨를 만났다. 조영헌씨는 비둘기집 창간호부터 차곡차곡 보관 중인 파일 원본 꾸러미를 펼쳐 보였다. 30년의 시간을 머금어 누렇게 변색된 신문을 한 장 한 장 보물 다루듯 넘겼다. 비둘기집 창간 25주년이 되는 해에는 신문을 엮어 책자 형태로 만들었다. 일부만 편집해 엮었는데도 400쪽 넘는 두툼한 책 두 권 분량이다. 비둘기집은 창간 10주년이 되는 1994년에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에 탑재됐다. 가족신문이 이 가족에게 끼친 영향력은 막대하다. 아버지 조의현씨는 “비둘기집은 우리 가족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말한다. 비둘기집을 만들지 않았으면 두 아들의 직업이나 가족 간 관계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가족의 역사를 기록하는 가족신문을 만든 조영헌 교수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나와 역사학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가족신문을 만들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역사란 남아있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고 역사학자란 남아 있는 기록의 행간을 읽어내는 사람 아닌가”라고 말했다. 아버지 조씨가 처음부터 거창한 의도로 발행한 것은 아니다. 그저 ‘한번 시작했으니 힘 닿을 때까지 이어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가족신문은 중독 같았다. 발간 호수가 늘어갈수록 가족신문의 힘을 하나둘 느끼면서 중단할 수가 없었다. 외연적 효과는 ‘가정의 화목’이지만 두 아이에게 끼친 교육적 효과가 컸다. 조의현씨는 “신문을 만드는 과정은 총체적 공부였다. 사물을 보고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능력, 편집자로서의 책임감과 리더십 훈련이 자연스럽게 됐다”고 말했다. 아들 조영헌 교수 역시 “지나고 보니 가족신문의 효과가 엄청났다. 무엇보다 꾸준함의 힘을 길렀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 10년 동안은 월간, 이후에는 격월간 발간하면서 아버지는 마감을 꼭 지키게 하셨습니다. 제가 원래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고 아이디어는 많은데, 일을 한번 벌이면 마무리를 잘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석·박사 과정을 통틀어 10년 넘게 한 우물 파듯이 공부하는 건 제 성향과 맞지 않아요. 기획하고 진행하고 마무리까지 해야 하는 가족신문을 지속적으로 만들면서 꾸준함의 힘을 길렀어요. 가족신문을 만들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또 하나, ‘글쓰기 훈련’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매달 수십 매의 정갈한 기사를 써 오면서 자연스레 글쓰기 훈련이 됐다. 그는 “지면을 채우기 위해 꾸준히 글을 쓰다 보니 글쓰기 실력이 늘었다”고 말했다. 초창기 기사를 보면 ‘어머니 온천 다녀오다’ ‘망년회로 바쁜 아버지’ ‘개학 준비 서둘러야’ 등 소소한 일상을 담은 기사가 눈에 띈다. 초등학생이 뽑은 제목치고는 제법 깔끔하다. 조 교수는 “기사를 쓰면서 소년조선일보와 소년한국일보의 기사를 꼼꼼히 연구했다. 기사의 문체나 제목 뽑는 스타일을 흉내 내면서 성장한 것 같다”고 말했다. NIE(신문 활용 교육)를 일찌감치 체화한 셈이다. 형제가 중학생이 되면서 시사 뉴스를 한 꼭지씩 싣기 시작했는데 이는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혀주는 공부가 됐다. 비둘기집에는 두 개의 머리기사가 나란히 등장한다. 가족 관련 머리기사와 시사 관련 머리기사. 이때부터 형제는 두 개의 촉수를 세우고 다녔다. 하나는 가족 내에서 의미있는 뉴스를 찾는 촉수, 또 하나는 집 밖에서 발생하는 빅뉴스를 찾는 촉수. 올림픽, 대통령 이취임식 등이 비둘기집에 등장한 시사 머리기사다. 이런 굵직한 이슈를 자기식으로 소화해 기사를 쓰는 과정은 살아있는 논술 수업이었다. 성격적인 면에서 예상 못한 효과도 얻었다. 아버지를 닮아 내성적이었던 형제는 가족신문을 만들면서 외향적인 리더로 성장해갔다. 기사의 주인공이 되고 주인공을 발굴해 가는 과정을 통해 주인공 의식이 생기고 자존감이 커진 것. 초등학교 때부터 가족신문이 화제가 되면서 방송사나 언론사 등의 주목을 받은 것도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됐다. 가족신문은 소통의 매개체가 됐다. 기삿거리를 찾고 기사를 쓰는 데 있어서는 편집자의 독립권을 보장했지만 커버스토리 감을 정할 때만큼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회의를 거쳤다. 그간 가족 내에 어떤 이슈가 있었고 가장 가치있는 이슈는 무엇이며, 왜 가치를 가지는지 등의 대화를 하면서 작은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의미 부여하는 방법을 배웠다. 비둘기집은 한 차례 큰 변화를 겪는다. 발신자 위주의 신문에서 수신자 위주의 신문으로 바뀐 것. 조영헌 교수는 “신문을 만들어서 친척들에게 보내다 보니 자신들의 이야기가 없어서 흥미를 잃어갔다. 독자가 재미있게 읽으려면 그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만든 제도가 ‘가족 특파원’. 한 가족당 대표 특파원을 정하고 뉴스를 작성해서 보내게 했다. 목에 걸고 다닐 수 있는 ‘가족 특파원 기자증’도 만들었다. 정치 이슈를 다룰 때에는 세대 간 갈등을 조장할 수 있는 내용은 배제했다. 조영헌 교수는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친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존재의 소중함을 배웠다”며 이렇게 말했다.
- ▲ 30년간 단 한 차례도 휴간 없이 발간한 가족신문 ‘비둘기집’. 아버지 조의현씨는 “신문 만들기는 총체적 공부다. 사고력과 글쓰기, 책임감과 리더십 훈련이 자연스럽게 된다”고 말했다.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친지 중 누군가 돌아가시면 그분의 삶을 정리하는 특별기사를 씁니다. 얼마 전 할아버지, 할머니 작고 후 특별기사를 쓰면서 그분들의 인생을 다시 보게 됐어요. 존재의 소중함이 새롭게 다가오더군요. 살다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만 볼 뿐 독립된 개체로서의 인생을 진지하게 들여다볼 기회가 없잖아요.” 30년 동안 단 한 차례의 휴간 없이 가족신문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신문을 만든다고 누가 상이나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안 만든다고 벌을 받는 것도 아니다. A4 사이즈 4쪽짜리 신문을 만들려면 짧게 잡아도 꼬박 이틀은 걸린다. 제각기 바쁜 삶 속에서 ‘이제 그만하자’는 목소리도 컸다. 특히 두 차례의 큰 폐간 위기가 있었다. 첫째 조영헌씨가 삼수를 하면서 형제가 나란히 수험생이 됐을 때와 형제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을 때. 위기 역시 가족의 협심으로 극복했다. 형제가 수험생일 때는 아버지가 ‘이솝 우화’를 손글씨로 한 자 한 자 적어 공백을 메웠고, 해외 유학 중에는 이메일과 전화로 서로의 소식을 물어 결국 정상적으로 발간했다. 조영헌씨에게는 중학교 2학년이 된 딸 수하와 초등학교 2학년 아들 수근이가 있다.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은 수하 역시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 시 쓰기를 좋아해 가족신문에 종종 자작시를 올리고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소년조선일보 비둘기 기자로 활약했다. 수하의 나이 15세. 조영헌 교수가 처음 발행인을 맡던 13세를 훌쩍 넘겼으니 세대교체의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조 교수와 수하 모두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한번 맡으면 물러날 곳 없는 막중한 자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이 자리는 강압적으로 시켜서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수하가 스스로 적극적인 의지를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라고 말했다. 아버지 조씨는 “손자 손녀들에게까지 대대손손 이어서 최장기 가족신문의 역사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말보다 글의 힘이 세다. 말은 허공에 흩어지지만 글은 기록으로 남아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다. 이 가족은 ‘가족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과 가족의 역사를 기록하고 삶의 각오를 다지고 그 면면을 친지나 지인과 공유했다. 조영헌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가족신문을 통해 주인공 의식을 키웠다.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기분으로 살아온 것 같다. 지나고 보니 성장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됐다.”
uTabby :: 세바시 15분 16회 - 가족신문이 가져온 조용한 혁명 @ 조영헌 교수 in.utabby.com/v?i=ewRcZ54QD34 2013. 4. 8. VIDEO : 조영헌(홍익대학교 교수) : 가족신문이 가져온 조용한 혁명 강연내용 소개 : 28년 전 초등학교 6학년 시절부터 가족신문을 만들어왔습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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