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스페이스 풀]≪경계 위를 달리는≫ ET Lab #04 김남수
07.19 Fri & #05 권명아 07.21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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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 Lab #04 김남수 <마음의 생태학에서 호출하는 고아 무의식>
- ET Lab #05 권명아 <바람과 법 -
사랑과 간통 사이의 혁명>
≪경계 위를 달리는≫ ET Lab # 05 <권명아 : 바람과 법 - 사랑과 간통 사이의 혁명> 21.Jul.2013 - 28.Jul.2013
ET Lab # 05 권명아 <바람과 법 - 사랑과 간통 사이의 혁명> 2013. 7. 21. 일요일 오후4시, 아트 스페이스 풀
《경계 위를 달리는 : 문화교섭과 사유의 모험을 위하여》 의 교육 프로그램인 5회차는 한국 사회의 현실 문맥 위에서 정동(affect) 이론을 재조명하여 오신 문학비평가 권명아 선생을 모신다. 정동 affect은 개인의 너무나 절실한 ‘내적인 마음 상태’를 일컫는 말이면서 이는 필연적으로 다른 신체들과 ‘함께-있음과 맞물려 있는 부대낌’이라는 공동체적 관계맺기에 걸쳐있는 개념이다. 단순히 정서의 차원이 아닌, 사회적 신체들 간의 힘의 충돌, 조성원리를 의미하는 용어라는 말이다. 이러한 “정동”에 대한 연구가 주로 기존의 정동 이론을 통해 한국사회를 대비해 보는 시각이 많은데 비해, 권명아 선생은 한국의 자기-현장을 설명하는 프레임에 정동이론을 참조하여 매우 구체적인 “정념”(영혼의 동요)의 목록을 추려내고 대중정치, 라이프 스타일, TV 드라마, 문학소설, 영화 등 일상에 밀착된 문화현상들과 함께 분석함으로써 정동 이론을 한국형으로 다시 써내고 계신 분이다. 권명아 선생은 특히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지난 20년의 사회변화지형에서 환멸, 슬픔, 애도, 상실, 불안, 외로움, 사랑으로 이어지는 정념의 목록을 세우고 그 파토스 상태가 어떻게 정치적, 윤리적인 주체성을 획득하는데 실패 혹은 성공하고 있는지 분석해 감으로써 이른바 정치적인 것의 관점에서 “부적절한 정념”을 변별해 내는 날카로운 비판도 서슴치 않으신다. 그의 시각은 지극히 내적인 개인의 감성 지형과 정치, 윤리, 사회적 신체, 공동체의 지형을 서로 고립되지 않게 연결지어 내고자 하며, 한국의 집단의식에서 그야말로 답이 안 나오는 가족주의, 노동, 성별, 타자의식, 식민성, 차이의 정치지형을 정념의 정치학으로 대응해 가는 길을 열어가고 있다.
원래 불문학을 전공하신 권명아 선생은 현재 연구모임 aff-com(아쁘-꼼)의 연구자이자 부산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계신다. aff-com은 정동 affect의 aff와 코뮌 commune의 com을 연결한 단어로서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부대끼는 인터페이스를 인정한 상태에서 정념을 근거로 재구성되는 어쏘시에이션을 일컫는다. aff-com은 학문과 삶이 연동된 삶-연구-글쓰기 방식으로 정념의 공동체를 실천하고자 하며, 정념, 공동체, 정치적인 것, 식민성, 냉전 등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여 아쁘-꼼 총서 시리즈를 발표하고 있다.
추천 도서 『음란과 혁명 : 풍기문란의 계보와 정념의 정치학』, 권명아, 책세상, 2013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 한국사회의 정동을 묻다』, 권명아, 도서출판 갈무리, 2012 ‘죽음과의 입맞춤 : 혁명과 간통, 사랑과 소유권’, 권명아, 『문학과사회』, 2010 봄호 『환멸과 생존 : 협력에 대한 담론의 역사』, 권명아, 책세상, 2009 『식민지 이후를 사유하다』, 권명아, 책세상, 2009 『탕아들의 자서전』, 권명아, 2008 『역사적 파시즘 : 제국의 판타지와 젠더 정치』, 권명아, 책세상, 2005 『문학의 광기』, 권명아, 세계사, 2002 『맞장뜨는 여자들』, 권명아, 소명출판, 2001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권명아, 책세상, 2000
참고 도서 『조건들』, 알랭 바디오, 이종영 옮김, 새물결, 2006 『이론 이후』, 테리 이글턴, 이재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0 Judith Butler, Precarious Life : The Power of Mourning and Violence, Verso : London and New York, 2004 Judith Butler, Frames of War : When is Life Grievable?, Verso : London, New York, 2009
ET Lab # 06 백원담 7월 26일 금요일 4pm, 아트 스페이스 풀 ≪경계 위를 달리는 : 문화교섭과 사유의 모험을 위하여≫ 05.Jul.2014 - 13.Jan.2014 Part I 2013. 7. 5 - 9. 1 아트 스페이스 풀 2013. 8. 4 - 8. 18 아트 스페이스 풀 2013. 7. 5 - 8. 30 아트 스페이스 풀 Part II 2013. 11. 28 - 2014. 1. 5 Gallery Houg, Lyon Part III 2013. 12. 14 - 2014. 1. 13 Jim Thompson Farm, Bangkok 《경계 위를 달리는 : 문화간 교섭과 사유의 모험을 위하여》는 서울, 리옹, 방콕이라는 각기 다른 문화 지역의 상이한 성격의 기관들에서 펼쳐지는 3부작 시리즈입니다. 시리즈는 동일한 사업의 순회전이 아닌, 매번 다른 프레임에서 다른 형식으로 고안된 세 편의 프로젝트들입니다. 동시대 미술계에서 아시아의 현대미술을 둘러싼 새로운 지형그리기가 한창입니다. 민간 대안공간이 기획하고 있는 본 사업의 구성만 보아도, 이제 문화예술계에서 국내/외, 중심/주변의 이항대립적 설정은 무의미해졌습니다. 그런데 널리 회자되고 있는 아시아에의 관심을 자칫 아시아 미술에의 환호로만 좁게 해석하는 미술계의 착시현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21세기의 첫 십년이 9.11 테러로 시작해 3.11 후쿠시마로 정리된다고 보는 학자들은 이제 동·서양, 서구·비서구의 구분을 넘어서는 총체적인 인류문명사의 재검증과 미래 설계를 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때 소위 “아시아“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은 한낱 한류나 미술컨텐츠를 넘어서는 전환적인 인식론에의 기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90년대 초부터 숨가쁘게 탈식민과 탈근대의 행보를 지속하며 모종의 ”중심“에 대한 상대적인 위치설정에 익숙해 있던 아시아를 비롯한 제 3세계 권역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고민에 빠집니다. 전 세계를 사유하기에 앞서, 아시아가 아시아를 주체적으로 서술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자국중심주의와 배외주의가 뿌리깊은 아시아의 국민국가 질서 속에서 지역문화간 차이와 동질성을 인정하는 지형도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아시아는 둘째치고 자국내 타자성도 인정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전 지구적인 범위의 대안적인 인식론을 어찌 꿈이나 꾸어볼 수 있을까. 도대체 한국과는 다른 대안적 인식론과 사유와 감성체계란 어떤 것들이 있단 말인가. 본 사업은 이러한 솔직한 질문들을 손에 쥐고, 모호하지만 절실한 탐구의 첫 걸음을 떼고자 합니다. 이 사업은 ‘아시아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정체성 탐구나, 지리적 경계긋기에 목적을 갖지 않습니다. 적어도 문화예술계에서만큼은, 국민국가체제의 거시적 경계 뒤에서 기실 과도한 자국중심주의와 결탁하는 생각의 경직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도전적 사유, 사유의 이동, 전환적 상상이 오직 이 사업이 환기시키려는 주제어입니다. 인지 작용이라는 것은 원래 상호 간극과 불일치를 안고 가는 실존적 조건입니다. 이때 “소통”이라는 단어는 끊임없는 타자와의 교섭의 과정이고, 그 조우의 접촉면에서는 호미 바바가 표현한 “이접적 발화”를 만들어가는 인지적 수행성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보편적이고도 원론적인 인식과 소통의 수행성은, 각종 경계들을 규정하는 현실 조건에 강력한 영향을 받습니다. 소위 개방과 데땅뜨, 글로벌 모드라는 탈경계의 공론이 지배적인 현실조건에서는 개인의 인지적 경계도 개방적이 되고 그 사유반경에도 여유를 줍니다. 반대의 경우는 당연히 사회적 심리적 경계들이 경직되면서 상상과 사유반경이 위축됩니다. 21세기 초반 국내외의 현실정치 환경은 국민국가 경계가 방어적으로 강화되면서 민족, 인종, 종교, 계층 등 근본주의적인 경계들이 급속히 부활되고, 인식의 경계 안팎을 분리하는 배외주의로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시 경계들의 강건한 부활은 사유와 상상의 경계를 압박합니다. 이때 탈경계, 지역간 문화횡단, 학제간 소통의 공론은 실제로 그 밑에 내제한 견고한 경계들을 일거에 무화시킬 수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인지적 한계를 자극하고 인식의 경계를 유연하게 유지해주는 리마인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로컬-글로벌, 자국문화와 타지역문화 간의 경계라는 교접 전선은 실제 사이의 막심한 차이를 극복하여서가 아니라, 국내의 사회적 하부 경계 지형에 대안지형을 발견케 하고, 개인에게는 인식의 벽에 숨통을 틔워주는 해방구가 됩니다. 그런데, 어느덧 아시아나 글로벌이라는 전환적 상상의 장이 자국중심주의와 경제논리를 구현하는 외연의 장으로 인식된 채 자기중심주의, 역이국주의, 역식민주의가 뒤섞인 기이한 문화수출산업과 트레이딩의 판로 개척지로 전유되어 가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열리는 1부는 아시아로서 한국이 한국을 넘어 타문화와 교접하기 위해 익숙해져야 하는 사유체계의 혼돈을 경험하는 장입니다. 생각 흔들기, 생각 뒤집기, 예상 가능한 전제들을 넘어서기, 그리고 인식의 혼돈을 새롭게 바라보기 등을 경험해 보겠습니다. 혼돈의 난맥을 짚어가려면 여러 대안적 인식의 나침반들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1부에서는 특히 여러 다학제 학자들이 모여 그들의 초경계적인 횡단지식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프랑스 리옹에서 열리는 2부 전시는 흔히 서구에서 “아시아적”이라 느껴옴 직한 아시아의 전통 기호나 정신가치들을 동시대 아시아 작가들이 낯설게 조우하는 지점을 다룹니다. 이는 글로벌이라는 반경에서 유통되고 있는 “아시아”라는 텍스트 기호들을 개념적으로 재발견해 들어가는 발굴과 재구성의 시도로서, 시각정치 체제에 종속되어 버린 기호들에서 정신적 가치를 복원해 내는 시도들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방콕에서 열리는 3부는 방콕 인근의 열대 농장에서 리서치 기반의 현장 작업으로 4개월간 펼쳐지는 프로젝트입니다. 근대의 개발산업주의에 익숙한 도시 기반의 동시대 작가들이 아시아의 또 다른 소수민족들이 영위해 온 삶의 방식, 예술, 환경과 조우하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 낯설고 생경한 이웃 아시아끼리의 조우는 사실상 공식 지식체계에서는 접하지 못한 경험으로써, 역설적으로 가장 황망하고 어려운 작업이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퇴행과 증오, 혼돈이 복합적으로 뒤엉킨 상황에서 정치와 교육 개혁을 일거에 단행할 수 없을 때 예술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사유와 상상의 반경이 현실에 포획되지 않도록 하는 것 뿐일 것입니다. 권역간 차이를 전제로 이접적 발화를 드러내고 국내에서 문화권역간 번역, 사유의 모험을 지속함으로써 경계지형을 확장하고 또 새롭게 제시하는 일, 그것이 Running on Borders가 도전하는 과제입니다. 김희진 (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ET Lab 후원 : 풀, 공공미술삼거리, 문예위 ≪경계 위를 달리는≫ ET Lab #04 <김남수: 마음의 생태학에서 호출하는 고아 무의식> 19.Jul.2013 - 19.Jul.2013 ET Lab # 04 김남수 <마음의 생태학에서 호출하는 고아 무의식> 2013. 7. 19. 금요일 오후4시, 아트 스페이스 풀 《경계 위를 달리는: 문화간 교섭과 사유의 모험을 위하여》 의 교육 프로그램인은 원래 사유자들의 집합 지성 네트워크를 구상하면서 시작되었다. 각자의 탐구 속에서 유동하는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고 자료도 축적되며 드문드문 연구가 조우하는 생각 노동자들의 사유 모임이 있었으면 하는 열망 때문이었다. 이 열망에 가장 큰 실천적 영감을 제공해 주신 분이ET Lab 네 번째 모임에 모실 김남수 선생이다. 김남수 선생은 미학을 전공하시고 무용평론으로 데뷔하신 안무비평가이자, 백남준아트센터와 국립극단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신 현장 기획씬 기반의 연구자이시다. 학계가 아닌 현장 기획씬 기반의 연구자라는 포지션이 여기서 매우 중요한데, 몸-미디어-무의식-몸짓 언어가 충만한 사건의 현장에서 연구하는 이는 그것이 일으킨 감흥(자신의 언어로 “쨍”, 일종의 현현epiphany)의 성격을 온전히 규명하고자 지식의 계보를 추적해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동시대 문화예술계에서 이 역할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실천하고 계신 학인 學人이자사유의 개척자, 방랑자 중 하나가 김남수 선생이라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7월19일 마련되는 선생과의 대화 자리는, 문화인류학, 미학, 고전인문학, 민생사, 철학 사이를 횡단하는 김남수 선생 특유의 마음의 생태학 지형과 이때 자연스레 호출되는 “고아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 들어보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의 “고아 무의식”이 감흥 없이 커뮤니티의 형식만 재건시키는 예술에서의 소모적 제스쳐를 관통하는 어떤 무의식적 연대 가치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김남수 선생은2001년 제9회 무용예술상 무용평론 부문 당선과 함께 무용평론 활동을 시작. 2003년 무용월간지[몸] 편집위원을 거쳐, 2006년 퍼포밍 아트지[판] 창간 작업과 함께 현재까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원(3년), 2011년 국립극단 선임연구원(1년)으로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백남준의 귀환』 등을 편저 및 출간 했고, 아트 콜렉티브Ob. Scene 활동과 함께[계간 연극]을 창간했다. 지난5-6월, 경기문화재단 기획강연 시리즈로<커뮤니티와 감흥의 미학> 8강을 마친 바 있다. 추천 도서 및 링크 - 백남준 총서I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글 백남준, 엮은이 에디트 데커, 이르멜린 리비어, 번역 임왕준, 정미애, 김문영, 백남준아트센터 발행2010 - 백남준 총서II 『백남준의 귀환』 백남준아트센터 총체 미디어 연구소 저, 백남준아트센터 발행, 2010 - 마음의 생태학 그레고리 베이트슨 저, 박대식 역, 책세상, 2006 윤리학은 퍼지fuzzy 논리의 세계이다. 즉'적당히'가 필요한 세계이다. 그런데 그'적당히'가 어느 만큼일까. 윤리학은 이 판단기준을 생각한다. 포스트모던이란 기준의 공중분해라는 조건이기 때문에 이 생각은 방황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술문화 역시 퍼지 논리의 대상이다. 그러나 현실은 인사불성을 지향한다. 왜? 무의식적으로 그렇다. 무아 상태에서 서로가 연결된 듯한, 계급장을 떼고 만나는 듯한, 그런 야릇한 무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퍼지의 한계 너머로 곧잘 나아가면서 극한에 재겨 디디려고 하는 이 사회적 습속. 문화복제자 밈의 관점에서 현재까지 살아남은, 아니 갈수록 맹렬해지는 아비투스들을 보면 영락없이 발효된 샤머니즘의 재출현이 가져온 어떤 효과 같다는, 기원은 이미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인류학적 시선으로 사회의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를 자꾸 갖는다. 주위에 아직까지 권할 만한 단계는 아니지만... 리얼리즘은 비대칭적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모토는 선불교의 견성과 같지만, 리얼리즘은 비대칭적이고 견성은 대칭적이다. 대칭성이란 이 세계를'에너지의 장'으로 볼 때1) 시간적 호환2) 부분과 전체의 호환이 일어나는 특성이다. "폴은 피터의 아버지다"와"피터는 폴의 아버지다"가 공존한다. 겨자씨 속에 우주가 담기고 찰나 속에 영원이 잠재한다. 견성은 대칭성을 마주한다. 리얼리즘의'있는 그대로 본다'의 대상은'물질의 장'이다. 물질의 분절을 응시하는 것을 통해서는 에너지의 장을 느낄 때처럼 유동적인 흐름을 보기가 힘들다. 전자음악가 리샤르 팽하가"금속타악에서 전자음악을" 느끼며 물체-에너지, 물체-흐름이란 개념을 쓴 것은 아주 특기할 만하다. 야금술적 울림은 물질에서 에너지의 공명을 느끼는"쨍"이다. "엇"의 박자, 음악, 편집은 그러한"쨍"의 기반 위에서 일어난다. 보통의 리얼리즘으로는 근처도 가기 힘들다. 예외적인 것은 있다. 가령, 마술적 리얼리즘은'물질의 장'을'에너지의 장'으로 유동화시키는 남미 샤머니즘이 문학에 개입한 결과이다. 마술은 단순한 환영이나 눈속임이 아니라 현실의 변형이다. 무의식의 세계 개입을 통한 변형, 이는 샤머니즘의 동시성이 지향하는 수행성이라고 할까.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보거나 눈을 감고 보는 상태의 표현이다. 반관일체라고 해도 되고 심안이라고 해도 좋다. 이슬람 회화나 중국 회화에서 원근법, 투시도법의 거부와도 관련된다. 미디어학자 키틀러는 명청 시대 서구 선교사에 의한 투시도법의 수용불발을 동아시아 수학의 부재로 진단하지만 그보다 전체에 대한 통찰의 지나친 몰입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이 타당하다. 즉 전체를 보는 어딘가가 안과 밖을 모두 포괄하기에 일점의 카메라삼각대의 시선을 설정할 수 없다. 편재한 시선. 멜리에스의 판타지가 카메라삼각대의 고정된 시선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의식하면, 그 판타지의 의의는 반감된다. 편재한 시선에서는 비대칭적 시선의 개입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대칭적 시선으로 이미 성립해 있다. 말하자면5,6세의 아이들이 혼자서 여러 캐릭터를 동시에 소화하면서 여분으로 전체를 해설하는 목소리까지 담당하는 놀이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타고난 두뇌는 대칭적 시선과 목소리의 극장이다. 상상계란 얼마나 신선한지. 유동하는 마음과 마음들을 연결하는 울루스 체제에 다시 참여할 수 있을까. 울루스의 사회체적 구성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말탄 대장장이 샤먼들이 활시위 깨나 당겨본 자들, 즉 인궁지민인 것은 알겠고, 인궁지민이 인궁지민을 알아본다는 것도 알겠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간장종지'를 깨뜨리고 뇌세포의 내부섬광들끼리 마치 반딧불이의 싱크 현상처럼 다시 동조하기 시작하는 것일까. 이것이 어쩌면 현대 정치학의 공화주의를 참조해야 하는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현대의 정치학적 헤게모니는 여전히 자유주의에 놓여 있고, 간섭의 배체라는 소극적 자유 개념에 기초하여 일인의 자의적 지배 체제를 결과적으로 용인하여 공화국의 가치를 뭉개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단기필마 문화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다. 공화주의의 고뇌는 그 용납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적극적 자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점에 있는지 모른다. 토지균분, 아리스토텔레스적 덕, 일원적 가치, 스파르타식 공민 교육 등등이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코뮤니즘과 같은 전체주의로 귀결될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해온 것이다. 어쩌면 민주공화국이라는 타이틀 속에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듯, 공화주의가 전체주의일 리가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이데올로기 공세의 선전전이고, 어느 측면에서는 공화주의가 말도 안되는 종북좌파 매카시즘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엄연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공화주의의 유연한 이론 변신은 아마도21세기에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나야 잘 모르는 일이나, 그래야 한다는 기대와 요청까지 묻히면서 하는 말이다. 결국 작금의 한국은 공화주의가 표방하는 공공의 것과 공공의 이익 그리고 공공의 선이라는 자연법적 절대 가치가 뭉개지고 있다. 왕정과 다름없는 자의적 권력, 이것은 자유주의자들도 취향적으로 혹은 기질적으로 싫어하는 것일테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둿구멍이란 게 있다. 하지만 공화주의자에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불편함 그 이상으로 분노하고 행동한다. 물론 이 공공성의 가치를 당위적으로 지나치게 생각해서 영국의 공화주의자 러시처럼 자살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지만 좌우간 지금의 한국이 공화국이라는 가치- 공민의, 공민에 의한, 공민을 위한 스스로의 지배- 라는 관점에서 부정적인 형태로 출현한 현재의 상황이 꼭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실행해야 하고 연대해야 하고 나아가야 한다. 단기필마의 수틀리면 잠수타는 기질지성을 갖고도 그렇게 해야 한다. - NamSoo Kim 페이스 북에서 인용
ET Lab # 05 권명아 7월 21일 일요일 4pm, 아트 스페이스 풀 ET Lab 후원 : 풀, 공공미술삼거리, 문예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