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 강세황 탄신300주년 기념특별전 2013.6.25-2013.8.25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1713-1791)의 또 다른 얼굴은 셀프 포트레이트의 마니아였다. 300년 전에 태어난 표암이지만 그는 요즘의 셀카 유행처럼 자기 얼굴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는 자기 얼굴이든 남의 얼굴이든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셀프 포트레이트, 즉 자화상(自畵像)를 4점이나 그렸다. 그리고 다른 화가를 시켜 그리게 한 초상화도 3점이나 남겼다.
<자화상(自畵像)> 1782년 70살 견본채색 88.7x51.0cm 진주강씨 백각공파 종친회 국박 기탁
이렇게 많은 자화상, 초상화를 남긴 사람은 조선시대 전체를 봐도 극히 드물다. 그는 왜 그토록 자화상과 초상화에 집착했는가. 그의 탄생 300주년을 맞아 열린 이번 특별전은 2003년 겨울 서울 서예박물관 전시 이래 최대 규모이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알려졌던 주요 작품이 총망라됐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안복(眼福)을 누릴 수 있는 기회이다.
이명기 <강세황 초상> 1783년 71살 견본채색 145.5x94.0cm 진중강씨 백각공파 종친회 국박기탁
물론 여기에는 그의 자화상은 물론 동시대 화가가 그린 초상화도 등장한다. 이들 자화상과 초상화 속에서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그림 밖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외부로 향한 그 시선은 바로 18세기 거의 전부를 살아갔던 한 문인화가 표암의 회화 세계를 이해해줄 수 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 1747년 35살 지본수묵 34.9x212.3cm (부분) 개인소장
이해 여름에 복날을 지내며 그린 그림으로 가장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표암이다.
18세기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세계사가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지리상의 발견이후 세계는 18세기 들면서 동서(東西)가 하나의 역사로서 굴러가고 있었다. 조선도 이런 세계를 의식하고 있었다. 중국은 과거의 중국이 아니라 이민족의 청(淸)으로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됐다. 그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주적 정신이 싹트게 됐다. 그림에서 이는 사실주의 경향의 진경산수와 실경산수를 낳게 한 원동력이 됐다.
<죽서루>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 중 한 점. 1788년 76살 지본수묵 35.0x25.7cm 국립중앙박물관.
이해 9월에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그린 화첩이 《풍악장유첩》이다.
또 이민족의 청과는 별개로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중국을 보는 눈도 생겼다. 그래서 세계 문화의 중심에 대한 갈망을 커지면서 중국의 새로운 사조인 남종 문인화와 그림 감상의 저변화를 적극 받아들인 시대였다. 표암은 이런 18세기를 살면서 이 두 경향을 모두 의식하고 있었다.
<초당한거도(草堂閑居圖)> 《첨재화보(添齋畵譜)》중 한 점. 1748년 36살 지본담채 18.7x22.2cm 개인소장
실제 그의 그림은 한 세대 앞선 정선(鄭敾, 호는 겸재(謙齋), 1676-1759)이 이룩해놓은 진경 내지는 실경산수의 세례를 받았다. 젊은 날의 모임을 그린 그림과 기행에 관한 사실적인 그림들은 사실주의적 경향을 담고 있다.
<초당한담도(草堂閑談圖)>(왼쪽) <강상조어도(江上釣魚圖)> 1776년~78년 64~66살 지본담채 각 58.0x34.0cm 삼성미술관
반면 그는 당시 세계의 중심에서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신경향에도 민감했다. 사실주의와는 달리 낭만주의 계열이라고 할만한 남종산수화를 몸소 그려 보이는 것은 물론 주변에 이를 적극 소개한 것이 그였다
《표옹선생서화첩(豹翁先生書畵帖)》의 한 점. 1789년 77살 지본담채 28.5x18.0cm 일민미술관
그는 평생 이 두 세계 사이를 왕복하고 있었다. 사실주의와 낭만주의는 사실 공존이 불가능한 정신 체계이다. 물과 기름처럼 애초부터 이질적인 체계가 18세기의 문인화가 강세황을 만년까지 끌어안고 고민했던 과제이기도 했다. 그는 금강산 여행에서 본 피금정의 경치를 일년 간격으로 나란히 2점을 그렸다.
<피금정도(披襟亭圖)> 1788년 76살 지본담채 101.0x71.0cm 삼성미술관
<피금정도(披襟亭圖)> 1789년 77살 지본담채 126.7x69.4cm 국립중앙박물관
먼저 하나는 76살 때 겸재가 틀을 잡아놓은 그대로 그린 사실주의 계열의 그림이다. 피금정은 지금은 북한 땅인 금화군 남대천 가에 있는 정자이다. 예부터 금강산 여행객들에게 유명했던 명소였다. 강가 버드나무 사이의 정자와 강 건너 대안의 내금강 모습이 정선 스타일 그대로이다.
반면 일년 뒤인 77살 때 그린 피금정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우선 그림에 피금정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지팡이를 집은 노인이 동자 하나를 데리고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그 앞으로 높다란 봉우리들이 S자로 연속되며 멀리 바위산들이 아득하게 보인다. 산의 형상을 이상적으로 변형시킨 이런 형식의 남종산수화는 낭만주의 계열이라 할 수 있다.
표암은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2년 뒤에 세상을 떴다. 이렇게 보면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사실주의와 낭만주의의 이룰 수 없는 대통합을 꿈꾸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추측해보게 된다. 그리고 피금정이란 실제 경치에 남종산수화를 대입했다는 점에서 사실보다는 낭만에 더 기울었던 화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1763년 51살 지본담채 112.5x59.8cm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의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새로운 볼거리의 출현에 있다. 이 전시에는 당장 국보로 지정되어도 무리가 아닐 새 자료가 나왔다. 표암은 잘 알다시피 심사정(沈師正, 1706-1776)과 가까웠으며 시인이자 화가였던 허필(許佖, 1709-1768)과 절친했다. 또 화가 최북(崔北, 1712-1786)과도 두루 친했고 천재화가 김홍도(金弘道, 17456-1806)는 직접 가르쳤다. 이들은 모두 18세기 화단의 주역들인데 이들이 한 화폭에 그려진 그림이 소개된 것이다.
<균와아집도>의 부분
그림 제일 안쪽에 책상에 기대 거문고를 타는 사람이 표암이며 그 옆의 아이가 김덕형 그리고 탕건만 보이는 사람이 심사정이다. 망건 차림으로 바둑을 두는 사람은 최북이며 담뱃대를 문 바둑 상대는 추계이다.(추계는 미상) 그리고 이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은 표암의 절친한 친구였던 허필이다. 앞쪽에 안석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사람은 균와(미상)이며 그 옆에서 퉁소를 부는 소년이 바로 김홍도이다. 이 그림 속에서 스승과 제자는 거문과와 퉁소 이중주를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 그려진 때는 1763년이며 표암이 전체의 구도를 잡고 소나무와 돌은 심사정이 그렸고 채색은 최북이 했으며 인물은 김홍도가 그렸다. 당시 표암은 51살이었고 심사정은 58살, 최북은 52살 그리고 김홍도는 19살이었다. 이런 주역들이 한 화면에 그려진 사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당연히 국보가 되고도 남을 만한 신자료이다.(y)
전시명:야나기 무네요시
기 간: 5. 25-7. 21
장 소: 덕수궁미술관 제1,2전시실
식민지 조선에서 희끗희끗하게 배를 드러낸 생선처럼 기사가 깎인 신문의 지면은 그리 낯설지 않다. 1920년 4월 15일자 『동아일보』 2면의 일부도 깎인 채 발간되었고, 이튿날 같은 면에는 ‘당국의 忌諱에 觸하야’라며 검열에 따른 게재금지로 기사의 일부를 삭제하느라 배달이 지연되었노라고 사과문이 실렸다.
삭제된 기사는 대개 확인할 길이 없지만, “역사를 가르치지 않으며, 외국어를 피하고, 주로 일본어로 일본의 도덕이나 그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본의 황실주의를 중심으로 그들의 사상마저 바꾸려는 것이었다. 새로운 교육에 전혀 친근감을 갖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조선인은 자신들에게 약탈자로 보이는 자를 가장 존경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기이하고 모순에 찬 소리로 들릴 것이다.”라는 문장이었음을 알만한 이는 안다. 1919년 3.1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 가 요미우리신문에 게재한 글을 염상섭이 번역하여 실은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적극적인 관심 표명은 오늘날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가진 특유의 휴머니즘에 기반한 것이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파괴될 광화문에 경의를 표하고 조선의 도자를 극찬하는 그의 글들과 성악가인 부인 가네코와 함께 보여준 조선의 문화진흥을 위해 애쓴 행동들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그를 애모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조선의 도자는 미와 추를 논하기 이전의 미로서 사람이 아닌 자연이 주는 미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식민지 조선에서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절절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풍토결정론에 입각한 반도적 미에 대한 단상과 전쟁 후에 발표한 몇몇 글들은 제국주의 시대 근대 일본인으로서 넘지 못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음 또한 지적되어 왔다. 이번 덕수궁미술관의 전시를 결정하고 진행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고 전시를 바라보는 눈 또한 다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의 몇몇 전시가 그의 사상과 행동 혹은 조선 민예관을 드러내 보여주는 데 집중하여 왔다면, 이번 전시는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인물이 지니고 있는 물건을 통해 인물을 평가하게 만든다. 특정 인물이 소장한 여러 ‘물건’들을 나열함으로써 전시자의 판단적 시각을 지우고 관객으로 하여금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연구자가 되어 그를 판단하게 함으로써, 전시의 주체는 대상 인물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 민감한 사안을 다루는 현명함 혹은 영악함에 미소를 지으며 3개로 구분한 전시장을 돌며, 1전시장에서 3전시장으로, 다시 2전시장으로 영역을 오가야 파악할 수 있는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 조선과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의 영역을 넘나든 야나기 무네요시를 만난다.
야나기 무네요시, 『공예』(창간호), 1931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관심와 버나드 리치와의 교유에 집중한 <1부 유럽근대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서는 이성의 시대에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세기말에 이르러 재조명된 블레이크의 영성에 관심을 기울인 야나기 무네요시를 만난다. 종교에의 열정만큼이나 순박한 그레고리안 성가의 악보, 동서양의 어느 지점에도 속하지 않지만 그 어디에서나 이해되는 버나드 리치의 도자기 등은 해박한 근대인 야나기 무네요시를 본다.
버나드 리치, 자화상, 1914년, 22x17cm, 에칭
전시의 중심은 단연 제2부라 할 수 있는데 ‘조선과의 만남’이 주제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양의 조형미에 대한 의식’으로 부언 설명함으로써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에 대한 관심이 조선민족미술관의 설립 등으로 이어졌을지라도, 학자로서 혹은 안목있는 예술가로서 조선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이는 당시 시대의 반영임을 넌지시 드러낸다.
백자철사 운죽문 항아리, 17세기, 24.7×22.5cm
<조선민족미술전람회>를 위해 야나기 무네요시가 선정한 출품작 스케치, 1921년 5월
<제3부 주변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민예>에서는 너무나도 소박한 우키요에와 반복적인 무늬가 놓인 서민들의 유카타에 이르기까지 지금 보아도 하급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물건들’에서 미를 발견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시각을 만난다. 그는 고급예술에 한정되어 향유되어온 공예에 ‘민중적 공예’를 삽입함으로써 생산주체를 드러내었다. 종교적이고 소박한 것에의 가치 부여는 윌리엄 모리스의 공예부흥운동과 닮아 있다.
붉은 색과 청화로 화초와 울타리를 그린 청화접시, 에도시대 이마리 도자기, 18세기, 높이 31x6.2cm
봉건에서 근대로 진입한 짧막한 변화의 시기를 겪은 다음 세대이자 지식인이었던 야나기 무네요시가 본 자신의 시대는 기억되어야 할 많은 과거의 수공이 사라져가는 시기였으며, 소비의 주체가 되지 못한 민중이 만든 생활용품은 산업화에 밀려 더욱 그러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조선의 민예 또한 그러한 판단 아래 보존되고 가치를 규정한 것임을 전시장을 돌아 나오는 이들은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전시명: 김정숙展 장소: 인사아트센터 기간: 2013.7.3-7.9 |
김정숙, 축복, 한지에 채색,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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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란 생의 근원적인 인식소다. 그것은 그 공간에 거주하는 이의 심성과 정신, 그리고 사물과 세계를 보는 눈을 형성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한 작가의 작품을 설명하거나 특정 문화권의 미술을 논의하고 설명하는 경우 이른바 '환경결정론'이란 것이 유효하게 개입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인의 그림, 한국 미술에는 당연히 한국 자연의 특질이 스며들어 있고 숨 쉬고 있다. 그것은 단지 전통미술에만 국한되지 않고 지금 현재의 시간에서 이루어지는 작업들에도 적용된다. 특히나 자연을 소재로 다루는 이들의 그림 내지는 도시가 아닌 자연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작업이 그러하다. 분명 작가의 작업은 그의 삶의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편이다. 반면 자연은 너무 압도적이고 대단한 존재여서 그것이 작업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때 그 힘에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자연과 나 사이의 긴장이 형성되고 자연과 미술이 대등한 차원에서 길항해야 하는데 그래야 그 사이에서 미술이, 작업이 가능한데 그 거리, 틈을 만들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미술은 자연으로부터 파생되고 자연만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에 미술은 그에 의존하는 관계지만 자연과는 다른 또 다른 작가에 의해 창조된 세계, 자연으로부터 파생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미술화 된 자연', 개인화되고 인문화 된 자연이어야 한다.
김정숙은 오랜 세월 외지에 있다가 최근 친근한 고향 전주로 귀환했다. 그리고 비로소 다시 눈에 들어온 정겨운 자연, 특히나 산 주변에 위치한 작업실과 그로인해 수시로 자신의 눈에 들어온 수령이 오래된 나무와 숲과 온갖 꽃들, 그 위로 수시로 덮치는 계절의 변화와 기후의 변화무쌍함이 그대로 그림 위로 내려앉아있다. 작업실에서 내다 본 자연의 변화무쌍함을 따라간 자신의 마음들이 전주 한지위로 비처럼, 안개처럼, 바람처럼 지나간다. 그 안으로 맑고 습하고 청명하며 스산한 기운들이 수시로 엉긴다. 따라서 그림은 선명한 형상을 지우고, 또렷한 색채의 단락이나 분절을 밀어낸 자리에 경계를 지우고 뒤섞이며 펴져나간다. 화면은 옆으로 길게 이어지는 수평의 화면, 횡폭을 지녔고 그 안에 나무와 숲들의 무한한 공간감이 옆으로 펼쳐지고 있다. 동양화는 유한함을 지우고 무한함을 표현해왔다. 여백이 주고자 했던 힘이기도 하다. 유한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이 지닌 무한함을 상기시켜주고 눈에 보이는 형상만이 아니라 그것을 감싸고 있는 우주의 모든 기운들을 내밀하게 마음의 눈으로 감지하라는 것, 상상하고 추체험하라는 것이 여백이다. 무한성의 의미다. 화면에 무한감(여백)을 설정하는 이유는 결코 그릴 수 없고 재현할 수없는 것의 역설적인 표현이자 이미지가 그친 빈자리를 통해 그림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망막만으로 가능치 않음을 겸손한 표방이다. 동양인들은 자연을 외경하면서 자연의 기운이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어왔다. 자연과의 조화가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고 바람과 물이 인간의 문제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머무르는 것과 사물과 그리고 세계,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조화로운 총체를 이루며 있는 어떤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동양의 예술이고 그림이다. 모든 것의 근본은 자연의 유기적 일체성이고 이것은 자연의 체험에서 궁극적으로 증거 되는 것이다. 동양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 '현상의 경험’이었다. 단순한 물리적 재현이 아닌 정신적 재현이라는 얘기다. 그것은 눈으로써 사물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심안으로서 관조'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활력을 자극해 실세계를 지각하고 그림 너머의 세계로 몸과 정신을 유인해주는 것이 바로 산수화이기도 했다. 그림을 보면서 실재하는 자연을 소요하는 체험(정신적 활력)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관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동참시키며 그의 상상력과 지각작용을 독려하는 것이 동양화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김정숙의 최근작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산수화에 깃든 의미망을 헤아려 이를 채색화로, 자연 풍경을 색으로 환원하고 그 정서와 무드를 구현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만나고 있다.
전시명: 吉祥 우리 채색화 걸작전
장 소: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기 간: 2013.06.20~08.20(1부 6.20~7.14, 2부 7.18~8.20)
채색화는 수묵화보다 역사적 시간의 길이가 훨씬 오래다. 채색화의 기원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을 수 있지만, 삶의 일부로 자리했던 친숙함 때문인지 수묵화에 비해 그 소중함과 가치를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는 조선시대를 이끈 사대부들이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인격 수양의 방편으로 인식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먹으로 그려낸 수묵화, 즉 문인화만을 높이 평가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채색화는 조선 건국 이전부터 왕실은 물론 사대부, 일반 백성의 생활공간을 꾸미는 실용화로서 다양한 종류의 그림이 제작되어 삶을 여유롭게 윤택하게 하였다.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 8폭 병풍, 19세기, 비단에 채색, 140×384cm
이번 전시에 소개된 채색화와 자수는 대부분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병풍으로 일상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종류도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 요지연도(瑤池宴圖), 책가도(冊架圖), 십장생도(十長生圖), 호렵도(胡獵圖), 궁중행사도(宮中行事圖), 모란도(牡丹圖), 서수도(瑞獸圖), 용호도(龍虎圖), 문자도(文字圖) 등으로 다양하여 생활공간을 장식한 채색화의 뛰어난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산과 바다를 배경으로 파도 위의 신선들을 비롯해 각각의 화면에 등장하는 소나무, 바위, 영지, 복숭아, 포도, 학, 사슴, 거북이, 용, 호랑이, 서책과 각종 고동기, 모란, 연꽃을 비롯한 각종 꽃과 새, 문자 등이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낸 독특한 조형성과 탁월한 색채감각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호렵도(胡獵圖) 8폭 병풍(일부), 19세기 후반, 종이에 채색, 104.5×412cm
또한 각각의 지물에 담겨진 장수, 부귀, 복록, 다산, 출세, 벽사(辟邪) 등의 상징적 의미들은 채색화가 인간의 소망이나 행복을 의탁하는 구도적(求道的) 역할도 동시에 겸하였음을 알려준다. 결국 채색화는 살아가는 공간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실용화(實用畵)로서 눈은 즐겁게 하고, 소망을 함께 기원하며 마음에 위안과 평안을 주는 활력소였음에 틀림없다.
책가도(冊架圖) 10폭 병풍, 19세기, 비단에 채색, 149.5×450cm
책거리(冊巨里) 8폭 병풍(일부), 19세기 후반, 종이에 채색, 각각 63×33.5cm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색화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였는데, 이는 사용하다가 낡으면 버리는 실용화로 대부분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들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 화가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던 것이나, 수요자의 신분과 경제력에 따라 그림의 수준 편차가 너무 컸던 것도 올바른 연구에 적잖은 장애가 되었다. 이로 인해 채색화는 기존에 민중을 위해 민중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라는 의미에서 민화(民畵)라고 정의되었다. 하지만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에 의해 붙여진 명칭으로 최근 연구가 진척되면서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사용한 것과 백성들이 사용한 것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해 기존에 민화라는 용어가 지닌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채색화라는 시점에서 재조명한 것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채색화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에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근대 한국 화단에 이식된 일본적인 색채를 정의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해방 이후 화단에서 일본색의 청산이 채색화를 배제하고 수묵화로 한국적 정통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는 한국 채색화의 역사를 되새겨보고 이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을 일깨움과 동시에 몇 가지 중요한 논점을 제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채색화를 수묵화와 어떠한 시각에서 균등하게 연구할 것인가, 또는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채색화를 일본색이라 매도하기보다는 전통 채색화의 연장선상에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모란도(牡丹圖) 6폭 병풍, 19세기, 비단에 채색, 각각 192.5×71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