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달라도 나라를 위해서라면
신간회 본부, 경성지회 터
[서울톡톡] 1919년 3·1운동과 1926년 6·10만세운동을 겪으면서 1920년대 국내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로 양분되어 전개되었다. 민족주의계는 민족의 정신 개조에 의한 문화운동 혹은 실력양성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독립을 이루고 자유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반면에 사회주의계는 혁명으로 정치 · 경제 · 사회의 체계와 구조를 바꾸어 계급의 해방을 이루고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상호 이질적인 노선은 결국 민족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였고, 결과적으로 일제를 도와주는 모순을 낳기까지 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대립과 반목을 지양하고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어야 만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양 진영을 하나로 묶는 조직이 필요함에 따라 나온 결과가 1927년에 창립된 신간회(新幹會)이다. 1927년 2월 15일 서울 종로구 관수동 143번지(현 종로 3가 국일관 뒷골목)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250여 명의 회원과 700여 명의 청중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간회 창립의 깃발을 올렸다. 창립모임에서 회장은 이상재(李商在), 부회장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권동진(權東鎭)이 선출되었다. 간부진은 민족주의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 불교 · 천도교 · 유림 계열과 조선공산당 및 학계 출신의 인물로 구성되었다. 전국 단위로 120~150여 개의 지회에 2~4만의 회원을 가진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단체였지만, 창립하던 해 7월 학생들의 동맹휴학 문제가 터지면서 사회문제 해결에 고군분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조선총독부에게 경계의 대상으로 비쳐졌고, 급기야는 정치적인 투쟁의 내용을 담은 집회의 개최 불허로 이후 정기 전체대회조차 열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이렇다 할 행동을 펼칠 수 없었다. 신간회는 1929년 6월 편법으로 복대표대회를 개최하여 기존의 회장, 간사제를 중앙집행위원제로 개편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허헌을 선임하였다. 복대표대회를 통해 창립 당시의 간부 다수가 교체되고 사회주의자들이 본부 간부진으로 대거 진출한 가운데 집행부는 그해 11월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민중대회를 계획하는 등 합법단체라는 한계로 유보되었던 당초의 '민족적 정치투쟁'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12월 허헌을 비롯한 간부 44명이 일제에 의해 구속되면서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이후 새로 구성된 김병로 집행부가 합법 운동노선을 고수하자 사회주의계와 노선과 방향에 대한 마찰을 겪고 해체론이 확산되어 1931년 5월 전체대회에서 신간회의 해산이 결의되었다. 신간회 운동은 비록 4년여 만에 중단되고 말았지만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화된 가운데 전개된 민족협동전선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서울에는 신간회의 본부 외에도 경성지회 · 경서지회 · 경동지회 등 3개의 지회가 있었다. 이 중 신간회 경성지회는 본부가 창립된 지 4개월 뒤인 1927년 6월 10일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되었다. 회장은 만해 한용운 스님이었고, 부회장은 허헌이었다. 창립당시 임원은 종교계 · 언론계 인사 및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주도세력은 천도교 청년동맹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구파와 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이 주를 이루었다. 그해 12월 회장 한용운이 사임하자 유진태가 신임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청진동 126번지에 대한제국의 참정대신을 역임한 한규설(韓圭卨)이 기부한 3,000원으로 회관을 건립하고 이전하였다. 경성지회는 시국강연회를 통해 신간회 운동에 대한 청중의 참여를 촉구하였으며, 정치 · 경제 ·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 활동을 통해 여론을 환기시켰다. 1929년 말 갑산 화전민 사건에 대한 항의문을 전달하면서 당국에 방화에 대한 문책, 책임자의 징벌 등을 주장하였다. 또 동맹휴학으로 퇴학당한 100여 명의 연희전문생의 복교를 요구하였다. 경성지회 역시 민족독립협동전선 간의 불협화음으로 1931년 4월 해체되기에 이른다. 신간회 본부는 현 종로2가 46번지 YBM 빌딩 자리에 있었던 덕원빌딩에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고 다만 표석만 위치하고 있다. 버스 편으로는 101, 140, 143, 150, 160, 262, 270, 271, 273, 370, 710, 721, 721번을 타고 종로 3가에 내리면 바로 보인다. 경성지회 터인 청진동 126번지는 현재 재개발 구역으로 고층건물 신축 중이어서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 신간회본부 터 표석, 경성지회 터 찾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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