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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근대화 과정 및 그 쟁점

草霧 2013. 2. 11. 00:00

 

 

 

서구의 근대화 과정 및 그 쟁점

 

 

1. 근대화를 보는 관점

 

1> 근대화라는 개념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 구조와 사회관계를 바꾸고 그것을 통하여 인간 삶을 개선시키는 과정을 의미.

 

2> 근대성 이란

근대를 특징짓는 상태, 특히 합리성으로 대표되는 사고방식을 의미.

 

3>근대화 과정

서구화 혹은 유럽 화와 동일시되면서 보다 세부적으로는 공업화, 민주화, 도시화, 합리화라는 의미를 함축

 

4>근대라는 개념

프랑스혁명 이후 제국주의시대에 이르는 기간. 근대화는 산업화라는 경제적인 의미와 민주화라는 정치적인 의미, 그리고 세속화 및 합리화라는 사회, 문화적 의미 등을 포괄한 함의를 지님. 근대국가는역사시간을 통하여 형성되었으며, 통상적으로 근대화의 시점은 정치혁명과 경제혁명의 이중혁명이 진행된 18세기 말을 근대화의 주된 기점으로 간주.

 

5>근대화과정의 지역적인 편차

18세기 말 영국과 프랑스

19세기 중엽에 네덜란드,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등 중북부 유럽의 국가들

19세기 말 남동부 유럽과 러시아가 참여

근대화는 단지 서구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님.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비유럽의 서구화된 국가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아시아와 북아프리카 국가 근대화로 감

마지막은 20세기 후반에서야 근대화과정을 겪게 된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

 

2. 대내적인 관점에서 본 근대화

1>정치적 관점 : 통합된 영토와 주권에 입각하여 대내외적인 정당성을 확보한 국민국가형성

2>경제적 의미 : 산업화에 따른 생산과 소비를 통한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수립

3.사회적 국면 : 사회적. 성적 분업 및 차별화된 사회구조가 성립되어 계급과 젠데 등이 불평등의 주요 축을 이루며, 이에 대한 반발로 자유 및 권리와 평등 개념 등장.

 

1)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형성과 주권의 개념

근대국가의 형성 및 전개와 관련하여 그 주요 특성은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국가권력 즉 주권의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국가는 일종의 초월성과 공정성을 보유할 필요가 있다. 즉 사회의 제반 계급과 집단의 움직임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의지를 반영한 객관적인 기준과 절차에 따르는 독립된 권위라는 이미지를 확보할 때 대내적인 정당성과 대외적인 경쟁성을 기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주권의 소재와 운영을 둘러싸고 왕정, 공화정, 민주정 등의 체제 갈등, 혹은 보수주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등의 제반 이데올로기가 교차하면서 혁명과 개혁에 따르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2) 근대화의 사회경제적 측면

·경제적 측면-근대화는 산업화에 따른 생산과 소비를 통한 교환 경제체제에 기반을 두고 진행. 자본주의적인 산업기술문명 출현, 화폐경제 도입, 상업자본의 축적은 18세기부터 본격화. 한편으로 소외와 부작용을 초래하고 자연환경과 생태를 파괴시킴

 

·사회적 측면-계급 불평등과 젠더 즉 성 불평등이 두드러짐. 1950년경까지 유럽은 엄격한 계급사회 였으나, 사업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성적인 노동 분업이 뚜렷해지면서 젠더 및 계급에 따른 사회. 경제 관계가 공고해 짐으로 남성지배와 가부장주의가 강화됨.

 

한편 이러한 체제 비판적 움직임은 자유와 권리, 평등의 개념을 성취하여야 할 이상으로 설정하고 이러한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노동운동과 여권 운동등 많은 저항시도는 서양 근대화의 면모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

 

3) 근대화의 문화적 측면

·서구 근대 산업 문명은 세속화, 합리화, 개별화를 증진시킴

·지식을 산출하고 분류하는 방식에 변화-과학적인 지식을 수집하고 기술적으로 적용.

사회 규제적 측면-신분 집단과 동업 조합, 지역집단이 행사하던 전통적응집성과 결속력약화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기술과 조직의 우위는 개인을 원자화 시키고 자발성 역시 위축.

·민중문화와 엘리트문화가 상호 단절되는 경향은 강화·

종교개혁은 명확하게 양 문화를 단절시킴. 특히 국가와 결탁한 기독교 문화는 민중의 통제에 기여.

세속적 공권력은 그 통제를 보다 체계화했고 산업화 과정에서 강화된 노동통제는 민중문화를 더욱 위축시킴.

 

3. 근대화의 국제적 측면

 

1) 서구의 근대화와 지리적 팽창

서구의 근대화과정은 비서구 지역으로의 팽창 및 침투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대략 1450년경부터 시작된 유럽 팽창의 과정은 대체로 다섯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단계는 유럽이 넓은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던 팽창의 시기.

 

두 번째 단계는 이 신세계의 광범위한 부분들이 정치적으로 유럽에 부속되거나, 국제적인 상업체제에 편입되었던 초기의 정복 및 식민화의 시기이다.

 

세 번째 단계가 유럽적인 자본주의가 지구 전역의 시장으로 출현했던 시기

 

네 번째 단계는 1,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제국주의가 절정을 맞는 시기

 

마지막 단계는 세계의 많은 부분이 공식적으로는 독립되고 탈식민화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서구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의 시기, 서구의 발달된 문물 역시 비서구 지역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자극을 가했고, 서구사회는 비서구사회의 문화적 유산을 자의적으로 외곡, 해석하고 전유하는 오리엔탈리즘을 형성했다.

 

2) 문명 충돌론과 문화적 제국주의

유럽에서 자유정신과 평등정신이 비서구 지역에서는 착취하고 억압하는 요소로 변질.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는 비서구 지역의 물질적인 자원을 약탈했지만, 동시에 다른 문화와 민족을 자신과 구분되는 타자로 지칭하면서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해 갔으며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식민지인들의 정체성을 왜곡시키기도 했다.

 

새무얼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

서구와 타자간의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문명권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야기하는 것으로 파악.

헌팅턴은 냉전의 종식 이후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 및 남북의 빈부 대립이라는 비교적 단순했던 세계구도가 8개의 문명권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다극, 다문명세계라는 복잡한 구도로 바뀌고 있음을 지적한다. 현재의 진영은 크게 서구와 비서구사회로 구분되며, 각 문명권 사이의 환원될 수 없는 상이성이 교류와 상호이해보다는 충돌과 대립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특히 8개의 문명권 중에서도 이슬람과 중국이 가장 큰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헌팅턴의 논지는 현재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과 미국 스스로 대변한다고 믿고 있는 서구의 입장에 입각한 전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구와 비서구사회의 갈등을 단순히 차이에서 비롯하는 충돌로만 인식하는 것을 다소 무리일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적 제국주의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행적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문화적 담론을 추적하여 식민지인들의 정체가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확인함으로써 제 3세계 뿐 아니라 지구사회의 새롭고 생산적인 길을 모색코자 했다. 이런 점에서 사이드는 탈 식민지인들이 분노와 좌절의 감정을 떨쳐버리고 반성과 성찰, 그리고 결단을 통한 인식론적 전환을 촉구하기도 한다.

 

4. 근대화를 둘러싼 제반 논쟁

 

1) 근대화이론, 종속이론, 세계체제론

 

근대화이론

서구적인 이념형으로 근대화와 서구화를 일치시켰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서구사회만이 진정하게 근대적이거나 혹은 그 원형이고 다른 사회들을 상대적으로 덜 진보되고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화론은 산업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 발전에 설명을 집중하고 있어서 대외적인 측면에서 뿐 아니라 대내적인 측면에서도 편파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종속이론

3세계의 이해관계에 입각해 있는 종속이론가들은 근대화론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중심-주변의 전세계적 잉여수탈구조를 인식하고 탈종속심지어 혁명을 통한 제3세계의 발전을 모색. 종속이론은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라고 지적되기도 한다.

 

세계체제론

월러스틴을 비롯한 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체제라는 개념을 통해 종속이론가들의 주장을 보다 구체화하고 객관화했다. 즉 기술과 자본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중심부 국가들의 주변부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비판하였으며, 근자에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화 역시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경제적 근대화과정에서 세계 자본주의체제로 편입되면서 국제적인 계층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각 국가의 경제적인 편제는 다른 부문에까지 확산되어 정치, 경제, 군사적인 힘에 따라 그 위상이 결정되었다. 즉 핵심지역과 반 주변 및 주변지역으로 구분되었으며, 핵심 지역의 주도권은 서구 지역의 비서구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식민화라는 형태를 띠었다.

 

2) 탈근대주의

1960년이후 근대문화로 인한 부작용과 한계에 대한 탈근대주의적인 비판이 제기되었다. ‘탈근대주의의 영향력은 1990년 무렵 현실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를 근대성이 종말에 이른 현상으로 간주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근대성의 승리와 성공은 단순히 진보와 계몽 뿐 아니라 폭력과 압제 및 배제도 초래했으며, 결과적으로 근대 사회는 탄압적인 국면에 뿌리박고 있다는 고통스러운 인식도 나타났다. 근대성이 인간적인 성취의 정점으로 간주될수록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그 어두운 면은 더욱 두드러진다. 근자에 들어서는 환경오염과 지구자원의 낭비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탈근대주의자들은 서구철학의 전통이 집약된 것으로 지목된 계몽주의적 사회이론 모델에 그 비판의 초점을 맞추어서 비관주의적인 평가를 내린다. 탈근대주의자들은 이러한 보편성 및 객관성에 대한 믿음, 특히 지역을 향한 문화적 제국주의의 전선일 뿐 아니라 백인 중산층의 남성중심주의가 반영된 것이라고 파악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다양성의 세계에서 지식인이 행해야 할 역할은 다양한 문화전통을 존중하고 그 연관과 교류를 읽어낼 것을 촉구한다.

 

5. 근대화의 문제와 전망

서구에서 진행된 근대화 과정은 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민주화,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제공했다. 그렇지만 지나친 물질주의와 엘리트주의를 초래하기도 했고, 또 그에 대한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움직임은 최근의 NGO운동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를 근대화의 또 다른 성과라고도 할 수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화를 비판하는 탈근대주의의 움직임과 연결시킬 수도 있겠다. 분명 근대화는 국내적으로 국제적으로 불평등과 갈등의 소지를 산출했으며, 환경파괴의 위협까지도 초래한 면을 부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모든 인류에게 유익한 전 지구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의 가치와 계획 및 사회 질서를 제공하는 것이 근대 문명의 과제라 할 수 있다.

 

근대화가 초래한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우리의 입장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대화의 움직임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고 종래의 서구 중심주의적인 관점으로부터 탈피할 필요가 있겠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지식과 견문, 정확하고 신중한 판단, 그리고 도덕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하겠다.

 

2장 동양의 근대화

 

1. 근대 직적의 동양 다시 보기

1) 동양의 대항해 시대와 무역 붐

1520년대 전 : 명의 조공 책봉 체제가 주를 이룸

1520년대 이후 : 동아시아에 무역의 변화가 생김

 

일본

은의 생산량이 증가(세계유통의 1/4):중국의 회취법 도입

중국의 비단과 차 등을 수입(은을 지불) : 무역의 담당(왜구)

 

포르투갈

1511년 말라카 점령 >중국과 일본 진출

1543년 조총 일본 전수

1557년 마카오 거주권 획득 >마카오와 일본서단의 나가사키를 잇는 무역항로를 개설, 왜구세력과 경쟁

 

스페인

1571년 마닐라 건설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삼음

남미의 은을 마니라 경유 중국 대륙으로 쏟아 부음.

 

네덜란드

1624년 타이와 남부에 성을 쌓고 1644년 인도네시아 자바를 점령 후 무역을 함

1567년 명은 민간 무역 금지를 해제

동아시아 무역과 경제의 급격한 변화는 정치적. 군사적변화를 가져옴

 

일본 : 조총 대량수입>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통일

북방 : 1588년 누루하치 여진족의 건주부 통일하고 후금 건국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대포를 수입, 명과 결전 되풀이

 

몽골 : 무역확대요구로 명은 긴장 상태>중국은 막대한 양의 은을 북방 전선의 군수자금으로 투입

일본과 만주 : 1592(임진왜란), 1627(정묘호란), 1636(병자호란) 조선 침략

일본은 실패 했지만 여진족의 청은 성공하여 1644년 쯔진청을 함락하고 명을 멸망시킴.

이처럼 왕성한 무역 붐과 이에 따른 재편의 결과 17세기 말까지는 청-조선-도쿠가와 바쿠후가 각각 성립하였고 이후 18세기부터 서양세력이 등장하는 19세기 중반까지 약200년 동안 동아시아는 평화시대, 근세를 맞이하였다.

 

2) 동양, 세계경제의 중심

역사상 유럽 중심주의로 비판하면서 실제로는 적어도 산업혁명 전까지는 동아시아, 특히 중국, 인도, 일본의 경제적 수준이 동시대 유럽의 그것보다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주장이 늘어나고 있다.

 

16-18세기 동아시아의 경제 상황

(1) 선진적인 중국 경제

18세기 양쯔강 하류 지역의 농촌 수공업과 상업발달

전통적인 인기제품인 도자기, 비단, 차 등을 생산하여 세계에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대량의 은이 청에 유입됨.

임금, 기술, 법적제도, 신용 등의 측면에서도 유럽이 중국 양쯔강 지역보다 뚜렷하게 선진적인 면은 없었고 두 지역 은 거의 동등한 수준의 발전단계를 보이고 있다.

 

(2)중국 기술이 주변 지역으로 이전

중국인에 의해 주변으로 이전된 선진기술

비단- 주요 소비국인 일본으로 해상봉쇄정책에 의해 수출할 수 없게 되자 중국의 비단 상인들은 베트남의 통킹을 근거지로 해서 비단을 만들어 일본에 수출함. 이 과정에서 비단 제조 기술이 동남아시아에 전해짐.

 

선박- 타이의 양질 목재는 중국보다 쉽게 구할수 있어 중국 상인들은 중국 기술자를 방콕으로 데리고 가 선박을 만들어 중국으로 되팔았다.

 

제당- 16세기 말 필리핀에 중국 착즙기가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17세기에는 타이, 베트남, 자바 등에 보급되었고, 류큐에는 1623, 일본에는 1726년경에 착즙기술이 이전되었다.

 

주변국의 독자적인 노력으로 중국의 기술을 따라 잡은 경우

고려인이 송나라의 청자 기술을 받아들여 고려청자를 생산

 

비단, 면화, - 도쿠가와 바쿠후는 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18세기 중반 비단, 면화, 차를 자체생산에 성공하였고 훗날 일본을 대표하는 수출품이 되었다.

 

근세 일본의 경제적 성장: 일본의 수입 대체 산업의 성공적 요인은 농업 생산력의 상승이다.

- 경지개간 >정농주의 >근면혁명 등을 바탕으로 농업의 생산력을 높였다.

 

2. 동양에서 근대의 전개

1) 중국적 세계 질서의 동요와 해체

(1) 아편전쟁과 서양의 충격

1820년대부터 은의 순유출시기가 시작되면서 중국과 유럽의 위치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아편전쟁- 영국의 급성장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아편전쟁에서 승리리 거두고

애로호사건- 애로호 사건으로 다시 서양 열강과 전쟁을 벌여 패배를 당하였다.

양무운동- 서양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군사려과 경제력만을 육성하기 위한 양무운동을 전개하였다.(전통적인 통치 방식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국력은 강화할 수 없었다.)

청일전쟁-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청이 패배하자 조선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청불전쟁 이후

베트남이 청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과 더불어 중화 체제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2) 동양의 근대화와 일본

 

(1)중화 체제에 대한 일본의 도전

서양에 대한 태도- 불평등 조약을 바로잡기위해 근대화 정책에 박차를 가함.

 

아시아에 대한 태도

- 청과조선의 근대화를 도우면서 정한론(조선을 정벌하자)이 일어남.

- 조선에는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였고 타이완에는 군대를 파견함.

- 1880년대 초반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으로 조선과 청의 대립이 심해지자 두 나라를 경멸하기 시작함.

- 1885년 조선과 청의 절교를 선언하며 탈아 입구론(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의 일원이 되자는 주 장)을 주장.

- 1890년에는 주권선, 이익선(일본을 지키기 위해 주권선인 일본열도를 방어해야 할 뿐 아니라,

일본의 이익에 관계되는 이익선, 즉 한반도까지 군대를 파견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움

 

(2) 일본 근대화의 성공요인

사무라이 계층의 특징

- 일본 전체인구의 약7퍼센트를 차지.

- 청의 신사나 조선의 양반과는 달리 토지를 소유한 지주 계층이 아니었다.

- 16세기 말의 병농 분리 정책에 다이묘로부터 봉록을 받는 봉록 생활자였다. 봉록을 쌀로 지급 받았으나 다른 상품가격은 급등하였으나 쌀값은 완만하게 상승하여 급격한 사회변동이 닥쳤을때 이들을 변혁운동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 무인들 이었다. 19세기 중엽 서양의 위협을 군사적 위협으로 민감하게 받아들였고 이에 대응했던 것이다.

 

새로운 정보에 대한 수용 양태

- 중국: 서양의 정보가 일본보다 빨리 흘러들어갔으나 균등하게 전국적으로 파급되지 않았고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들지 않았다.

- 일본: 정보가 각계각층으로 퍼졌다. 아편전쟁이나 폐리내항의 소식은 풍설서라는 필사매체를 통해 단기간 내에 전국 구석구석까지 전해졌고, 이들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바쿠후와 한의 당국자들은 서양정보에 가장 밝은 집단이었다.

 

위기의식의 차이

- : 18세기부터 대란위기보다 빈번하게 발생하는 내란의 방비를 우선시 했다.

문화적우월성을 중시하여 국지적인 군사적 패배는 그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 조선: 군사적 승산에 대한 고려보다는 명분에 입각해 군사적인 모험을 감행했다. 대원군 때의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 일본: 군사적 위기로 받아들임. 바쿠후는 무력으로 압도적 우위로 지탱되는 정권이었기 때문에 군사적 승패에 민감하였다. 바쿠후는 멸망할 때까지 서양과의 교전하지 않았다. 대신 바쿠후에 도전하는 조슈를 정벌하려둔 두 차례의 전투에서 패하자 곧바로 권위를 상실하고 무너져 버렸다.

 

국제적 환경의 차이, 외압의 차이

중국: 서양 열강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일본: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긴 하였으나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내란에 휩싸여 일본에 많이 간여할 수 없었다.

 

(3) 동양의 근대화와 일본의 충격

 

동아시아 근대의 특징

일본이 근대화에 일찍 성공하여 타국의 근대화 세력에게 모범이 되고 전근대적인 질서에 충격을 가했다

- 조선은 중국보다 일찍 1881년 정부사절단인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도 일본형 근대화모델에 깊은 관심을 가짐.

- 중국의 지식인들은 청일전쟁 패배에 충격을 받고 일본을 찾았다. 훗날 신해혁명의 주역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의 지식인들도 도쿄로 유학 가자는 동유운동을 벌였다.

 

근대화로 강국이 된 일본이 위협적인 존재로 타국에 다가왔다

- 1876년 강화도조약과 1880년대 갑신정변을 통해 조선을 청의 국제 질서로부터 떼내려 했다.

- 청과 도쿠가와 바쿠후에 동시에 조공하고 있던 류큐왕국(현재의 오키나와)을 멸망시키고 메이지 정부의 직할 현으로 삼았다.

-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승리함으로써 청 중심의 국제 질서에 종지부를 찍었다.

- 1905년 을사조약을 맺어 보호국으로 만들고 1910년에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옹호한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합병해 버렸다.

 

3) 근대 동아시아의 경제

 

근세 동아시아 경제의 특징

- 소농 경영이 발달: 가족을 단위로 한 농업 경영이 가능해지면서 의욕이 고조되어,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각종 방법이 고안되었고, 근면하게 일하는 노동 윤리가 확립되어 노동 시간이 길어졌다.

- 공업과 상업유통망은 19세기 중엽 이후 경제적으로 우월한 서양의 공세를 만나 매우 고전했지만, 서양 상품과 경쟁하여 살아남은 것들이 많았고 자국내의 산업혁명 과정 속에서도 생존했다.

- 인도의 뭄바이가 아시아의 면업 생산기지로 발전한데 이어 일본에서도 19세기 후반 방적업과 방직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 동아시아 무역은 중국상인, 인도상인, 화교상인들이 주도하여 유럽의 침투 속에서도 건재하였다.

- 일본은 동아시아인들에게 소비품을 대량으로 공급하고 유통시킴으로써 동아시아 경제권의 성장에 기여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엔블록 경제권을 만들려고 하다가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

 

3장 영국의 근대, 근대화

1. 산업혁명과 근대

서구의 근대 기점: 정치 혁명과 경제 혁명의 이중 혁명이 진행된 18세기 말

- 정치 혁명: 프랑스 시민혁명(급진적)

- 경제 혁명: 영국 산업혁명(점진적)

 

2. 영국의 산업혁명

1) 산업화의 명암

 

영국 산업혁명의 긍정적인 면

1851년 수정궁에서 대형 박람회(?세계의 공장?-영국이 지닌 장점과 우위를 과시, 보호무역의 시대가 끝나고 자유 무역의 시대가 열렸을 암시)

박람회 당시 영국: 세계의 철, 석탄, 직물의 절반을 생산하는 세계최대의 공업 국자이자 무역국가.

기술과 생산 방식의 변화로 대량생산, 광범한 유통이 가능해지면서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는 기반 마련

 

영국 산업혁명의 부정적인 면

급속한 도시 성장으로 인해 주거 환경이나 급수 등 위생 여건이 악화되어 콜레라 유행으로 31000명이 사망

자본과 이윤의 집중, 계층 간의 격차 심화, 경기 변동과 기술 변화로 인한 주기적인 실업, 생활여건을 악화시키는 도시화를 초래.

 

2) 산업혁명의 원인과 전개

 

산업혁명은 왜 영국에서 가정 먼저 진행되었는가?

군주의 간섭을 견제하고 지주와 상공업 세력 사이에 일종의 정치적 타협을 이끌어 기업하기에 좋은 조건이 조성

이윤 활동을 합리화하는 프로테스탄티즘 및 경제적 개인주의와 합리주의가 빨리 확산

17세기의 과학혁명

농업 부문의 변화: 인클로저(양을 치기 위해 목초지를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울타리를 치는 것)

18세기 말에 더 광범하게 진행으로 소농의 몰락

: 노퍽식(농사짓는 데 노동 집약적인 방식 대신 토지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경작으로

농촌 인구는 새로운 공업 도시로 이동해 산업 노동력 공급원이 됨.

영아 사망률이 줄어 노동력 확보와 구내 시장 확대를 유리하게 함.

석탄, 철이 풍부하고 해외 진출이 용이한 입지 조건을 갖춤.

생산방식과 기술의 혁신

: 케이가 자동 북 발명(면직물 생산, 손으로 할 때보다 2배 이상 빨라짐)

: 하그리부스의 제니 방적기

: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

: 제임스와트의 증기기관(수력발전에 비해 입지조건이나 기후에 구애받지 않는 동력 제공)

-증기기관을 만들기 위해 철의 제련법이 발달, 연료로 나르는 교통수단 발달, 자동차 등장, 철도망형성, 이동망이 좋아지면서 유행이나 사상이 쉽게 전파, 지역간의 교류 확대등 연쇄적인 파급 효과를 일으킴

 

3) 산업혁명이 삶과 노동에 끼친 영향

출퇴근이나 휴식시간이 엄격하게 통제

노동시간이 증가: 들여놓은 기계를 계속 돌려야 수지타산을 맞출수 있기때문.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마다 새로운 기술자를 필요로 함.:주기적인 실업 유발.

경기에 따라 주기적으로 닥치는 경제 불황: 사회보장이 없던 시기라 노동자의 어려움이 큼.

노동자의 가정생활변화

: 인구가 밀집한 도시의 주거환경 불결.

: 숙련이 필요치 않은 분야에 남성노동 대신 여성노동력과 아동고용

4) 근대화의 모델로서의 산업혁명

 

* 영국의 근대화란 산업화를 의미하게 되었고 최초의 대표적인 산업국가로 자리 잡음으로써 정치. 사회. 경제적 여건을 두루 갖춘 이상적인 모델로 부각

 

영국의 산업혁명 모델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

산업화의 성과 자체는 긍정적으로 보더라도 영국의 사례가 생각보다 대단하거나 급속한 것은 아니었다 시각: 1970년대 이후 장기적인 경기 침체되면서 역사적 재평가에 의해

영국의 특수성에 따른 산업화의 한 방식일 뿐 다른 나라가 애써 추구해야 할 모델은 아니라는 평가로 연결됨.

근대화 자체에 대한 비판: 산업화로 인한 물질적 진보가 사람들의 삶을 개선했는가라는 근본적인 회의가 바탕에 존재. 이런 입장은 한동안 사회주의적 산업화라는 대안으로 연결되었다.

생태주의 대안 등장: 산업화의 결과를 비판하면서 환경이나 삶의 질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

 

3. 근대 사회와 국민 정체성

근대성을 측정하는 지표 가운데 한 나라, 한 국민이라는 의식이 어느 정도 형성되었는지의 여부도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부른다. 근대는 국민으로 통합되는 과정인 동시에 국민 내부의 다양한 정체성의 분리, 충돌을 경험한 시기이기도 한다.

 

1) 영국민의 형성- 일글리시와 브리티시

* 영국의 국민적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정치적 통합: 잉글랜드를 넘어서 대 브리튼을 포괄하는 국민 정체성이 형성된 것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의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진 18세기 초부터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사이다.

종교: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유대감과 프랑스와의 갈등은 가톨릭에 대항하는 신교 세력으로서 영국민의 일체감을 북돋았다.

전쟁: 18세기 말에는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등 프랑스와 충돌속에서 애국심이 고취됨.

제국: 영국 근대 내셔널리즘의 결속을 공고하게 만든 것이 식민지 진출이다. 1870년대 이후 신제국주의 시대, 특히 아프리카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국민으로서의 일체감을 가지려면 비국민인?타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식민지는 바로 그 타자의 이미지를 제공했다.

 

4. 하나의 국민? - 인종, 계급, 젠더

* 근대의 국민 형성 과정은 통합의 과정인 통시 분열과 차이가 드러났다.

인종: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는 더 이상 여유롭고 관대한 제국 국민의 이미지를 표방하기가 어려웠다. 인종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계급: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르주아지가 사회적. 정치적 중심세력이 되어 스스로를 중간계급이라고 정의하는 부류가 등장함으로서 상공업충과 농업에 기반을 둔 지주층 사이에 충돌이 일어남.

젠더: 근대인이란 구분은 성별이 표시되지 않았지만 남성적인 개념이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독립의 조건이 봉쇄된 여성들로서는 성취할 수 없었고, 여성은 남성가장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가사와 임금노동을 동시에 하는 이중부담을 져야 했다.

 

4장 프랑스의 공화국 건설과 식민주의 문제

1. 프랑스의 근대화

* 우리가 바라보는 프랑스: 혁명과 왕의 나라, 문화와 지성의 나라

* 베트남인, 북아프리카인, 서부아프리카인, 카리브해인: 식민지를 겪은 나라들은 우리나라와 사뭇 다를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프랑스는 어떠한 근대적 가치를 세상에 내놓았으며 그것이 프랑스 밖의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2. 정치적 의미의 근대화

* 프랑스는 1789~1792년 왕정 폐지 이후 1870년 제3공화국 수립까지 혁명과 쿠데타의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두 번의 공화국과 두 번의 제국을 세우고 붕괴 시켰다. 3공화국은 19406월 나치 독일의 침공을 막지 못하고 패배하여 무너질 때까지 약70년 간 유지되었다.

공화주의란 프랑스인들의 기질과 역사 담긴 민주주의이며, 그 제도의 확립은 바로 제3공화국에 의해 이루어졌다.

 

1) 공화국

* 공화정: 1인의 지배가 아니라 인민에 의한 지배를 목적으로 함. , 사회의 거의 전 계층이 인민이었다. 따라서 부르주아와 농민과 소생산자, 노동자들이 모두 인민이었다.

 

* 프랑스에서의 공화국 형성

전쟁이라는 비상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체제-17924월 프랑스 혁명을 두려워하는 이웃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후9월 초까지 전황은 계속 프랑스에 불리했다. 따라서 혁명가들은 혁명을 수행하면서 전쟁을 해야 하는, 다시 말해 전쟁에 지면 혁명도 실패하는 이중의 압박 아래 긴장했고 이를 타결한 방법은 전 국민의 결집된 혁명지지이고 전쟁 노력이었다. 그러한 국민적 의지와 참여를 유도하면서 동시에 국민에게 보장과 보상을 공약한 것이 공화국이었다.

 

농민과 노동자를 포함한 이들 소생산자와 중간 부르주아가 합세하여 혁명과 전쟁, 경제위기 속에서도 합의와 분열을 거쳐 이루어 낸 체제였다. 공화정은 생산자가 사회의 근간이며 또 개인적으로 가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공화정은 소재산으로 영위하는 인민의 삶에 대해 안전과 안정을 보장해 주려고 했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이 선언한 자유, 평등의 구현을 위해 갈등 속에서도 인민이 하나의 공화국을 이룩한다는 역사의식이 세워졌다.

 

프랑스에서 근대화는 기계화와 자본주의적 산업 생산 뿐만 아니라 인민주권 의식을 지닌 근대인의 창출이 근대화의 필수요소였다.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합리성을 의식하는 삶의 방식이 필요했다. 이러한 인간형을 급하게 창조하고자 한 것이 혁명기이며 느리지만 한 사람, 한 사람씩 변화를 부르려고 한 것이 프랑스 정치 용어로 공화주의였다.

 

3. 프랑스 제국의 확립과 공고화

* 제국주의의 진행

1500년대 초 이후 영국, 네덜란드, 스펜인과 함께 주요한 식민 제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1500년대 왕정기에는 브라질의 식민지 건설이나 플로리다 장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아메리카 대륙을 놓고 영국과 전쟁을 했지만 패배로 돌아갔다.

1600년대 영국, 스페인 세력과 공방전 끝에 확보한 지역이 중남미의 카리브 해 연안에 위치한 섬들인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 기아나 등이다.

17세기의 식민지 건설은 민간 차원의 동인도 회사에 위탁했지만 국가도 적극적으로 개인했다.

: 흑인법 제정, 종교를 통한 정신적 제압, 기독교 전파 활동, 공적인 신앙행위 금지,

1760년대에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폐함으로써 인도에서 밀려났고

1789년부터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팽창 정책은 주춤했다.

식민지 팽창과 정복은 혁명과 전쟁을 끝내고 정치적 안정을 찾은 1830-1840년대에 재개되었고 이제는 국가가 개입했다. 나아가 식민주의 정책이 한층 가시화된 것은 제3공화정기이다.

1830년 아프리카 서해안의 세네갈과 기니에 상관을 설치 남태평양의 타이티와 주변 섬들은 1842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830년부터 수행된 알제리 정복과 1860년대의 인도차이나 점령. 인도양의 마다가스카르는 1896년 점령.

1890년대에서 10년간 아프리카 대륙 분할하여, 19141100만 제곱킬로미터의 면적과 48000만 명의 주민을 소유하여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 식민지 정복의 사례-알제리

알제리는 프랑스 국토의 5배가 넘는 땅덩어리이며 석유와 광물, 사하라를 가진 자원의 보고였다. 18307월 군 병력을 파견, 공격하여 점령 지역의 주민을 강제로 소개시키거나 농토를 뻬앗고 이에 저항하는 주민과 집단은 구금, 추방, 살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침량이란 군사적인 것만이 아니라 농토를 박탈하고 생존경제를 피폐하게 하는 경제적 압박이었다. 그들의 고유한 종교인 이슬람을 금지, 언어말살, 프랑스어 공용어로 책정, 학교 교육은 프랑스어로만 시행, 프랑스인들이 식민사업자가 되어 강력한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알제리 고유의 언어와 전통과 의식이 파괴되고 백인기독교인이 산업과 경제,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식민지체제가 더 공고해졌다.

 

4. 공화국과 제국주의

* 프랑스의 근대화는 곧 산업화이자 정치적 근대화였다.

정치는 정치 체제, 정권의 변화, 정당과 통치 기구, 선거, 여론조사 같은 제도와 기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공적인 태도와 생각, 행동이 모두 정치에 포용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원칙 자체는 공화정이 사회구성 개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 대접받고 서로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 원칙과 현실은 달랐다.

프랑스 사회에서도 부르조아와 노동계급사이에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격차는 심대했다. 특히 다수의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고등 교육에 대한 기회는 오랫동안 거의 막혀 있었다. 그러한 그 격차가 더 현저한 차이를 벌인 것은 식민 복국인들과 식민지인들 사이에 벌어진 것이었다. 식민지인들을 바라보는 프랑스인들의 시각은 대체로 그들과 자신을 동등하게 보지 않았다.

 

* 식민지 실태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려는 프랑스 사회의 원칙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었던가?

정복과 점령의 실태가 식민 종주국인 프랑스 사회일반에 상세하고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1880년대에는 일간지나 잡지들이 쏟아져 상세히 보도 되었으나 식민지인들을 바라보는 프랑스인들의 시각은 대체로 그들과 동등하게 보지 않는 것이다.

 

생물학적 인종 우열론이 대두하면서 인간 차별이 당연 한 것으로 보였다. 1930년대의 식민지 박람회가 그 점을 말해 주는 하나의 징표이며, 근대 서구 문명이 기술문명을 아주 수준 높게 성취하자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서구 우월주의를 믿었다. 그래서 그런 인종주의와 더불어서 특히 인간의 자유의 자유, 평등을 제창했던 프랑스의 이념은 다른 지역이거나 다른 문화이거나 그런 사람들도 반드시 동화시켜야 한다는 사명론을 끌어내게 된다.

 

* 하지만 프랑스에서 만인보편사상으로 인해서 식민지배가 정당하지 않다는 반론이 많이 제기되었다. 하나는 식민지를 통해해야 하지만 합리적이고 인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현실 비판이었고, 다른 일각에서는 식민지를 지배해야 한다는 관념 자체가 정당하지 않다는 이론을 전개했다. 그런 비판에는 당도 참여했고 노동자도 참여했고 지식인 예술가도 다같이 공감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은 1930년대 한층 심화되어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비판의 선두에 섰다.

 

*반대로 식민지를 겪는 민족의 문제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숙고하고 결정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식민지 비판은 피식민지 자신의 각성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물론 민족자결주의가 1차대전이후 일어나지만 아프리카 식민지인들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희생된바가 크다. 1920,30대에 인도차이나나 다른 프랑스 식민지에서 민족운동은 고조된다.

 

520세기 후반의 프랑스와 탈식민주의

 

1. 프랑스의 새로운 근대화

* 2차 대전 후의 프랑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점령기에 근대사에서 처음인 시련을 겪게 되었다.

시련을 과거의 폐단을 물리치고 소생의 가능성을 열어 주어는 기회로 삼았다.

세계 권력의 중심이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정세 속에서 프랑스 국민은 세계적인 위상보다는 평등한 사회를 요구하게 되었으며, 정치와 사회는 국민의 열망을 따라갔다.

사회 내부의 변화에 비해 타 민족과 타 인종에 대한 사고의 전환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2. 식민지 해방(1945~1962)

* 세계 식민지들 변화

세계적 규모의 전쟁은 약소민족들의 내부의 사회적이며 정신적인 각성의계기마련

사회 경제적 변화: 도시화, 전통적 가족형태의해체, 식민본국의 교육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엘리트의형성

사회주의 사상은 제국주의를 물리칠 대안으로 등장

* 1945년 이후 식민지들의 해방

- 프랑스 해외 영토인 생트도맹고, 마르티니크,과들루푸은 변함없음.

- 서부 아프리카아와 흑아프리카 지역 독립

- 인도차이나: 1946-1954까지 전쟁 후 독립

- 알제리: 195411월 시작되어 19623월 휴전 협정까지 7년 이상 계속되었다.

- 마다가스카르: 1960년 독립국으로 인정

* 알제리 독립이후 프랑스는 모든 식민지를 내놓았지만 프랑스사회에서 제국주의적인 의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경영자들뿐 아니라 국민사이에서 식민 지배를 당연시하고 식민지인들을 하대하는 풍조는 잔존했다. 하지만 반식민주의 운동 역시 과감하게 전개되었다.

 

3. 프랑스사회의 탈바꿈: 1960-1980

* 1960-1980년대의 프랑스는 농민의 감소와 도시화, 고도의 산업화로 지난 100년간의 안정된 전통적 사회와 아주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 사회변동과 국민의 정치의식은 어떻게 연관되었던 것일까?

1) 부의 분배 문제

유산상속에 의한 불평등이 많이 완화, 20세기 후반은 유산가치 하락.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근로의 대가로 살아가는 봉급생활자가 되었고 불로 소득으로 계속 소득을 갖는 층이 극히 제한되었다.

 

2) 교육의 문제

1950년대 전까지 고등 교육의 기회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3) 평등

2차대전 후 평등의 감각이 크게 상승효과를 올림.

민간 기업에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가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졌고 사회적 독점을 정당하게 여기는 관행은 바뀌었다.

 

4) 정권

평등의 기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정권의 성격에 따라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4공화국: 권위적 통치로 프랑스의 현대화 주도

5공화국(드골): 생산을 중요시함으로써 경제와 사회를 탈바꿈.

68운동(드골 퇴진 요구): 프랑스를 전면적 반성의 기회 제공

프랑스가 세계의 패권을 쥔 강대국이 아니며 대학생이 많아졌으며 이제 농업사회가 아니라는 선언

샤방 델마스와 지스카르 데스탱의 우파 정권: 신사회의 가치를 내걸고 경제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사회당: 지방화를 비롯한 현대화 작업을 추진하면서 국민의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의식이 고양을 정책 목표로 삼았다.

70-80년대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는 좌우의 문제라기보다 사회문화적인 것이었다.

 

5) 종교

종교관행 변화: 어린이 세례가 50퍼센트 선으로 하락

결혼식은 55퍼센트 선으로 하락

예배 참석율이 80년대 이후 전 국민의 10퍼센트에 불과

종교에 대한 소홀함이 아니라 1980년대 이후 가톨릭적인 문화를 지키고 공동의 가치체계를 더 신임한다고 믿고 있었다. 종교성이란 정신적인 가치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다양한 의견에 대한 존중이다.

 

6) 국민의 지성

근대화는 국민의 독서를 통해 가능했다.

국민의 지성은 프랑스 사회가 어느 한편의 이데올로기나 선동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장치일 것이다.

 

4. 식민주의의 연장인 이민 노동자

* 인구 증가율은 낮고 공업 노동력은 계속 필요하자 1880-1890년대에 벨기에,이탈리아,스펜인,포르투칼,폴란드에서 노동자들이 들어왔다.이들은 거주와 출생을 기준으로 프랑스 국적을 부여 받았다

* 1901년 이민노동자가 2.6퍼센트로 증가했다.

1931년 이민자는 290만 명으로 7퍼센트로 증가

1974년 이민 규제법 시행으로 증가는 없었다.

이민자 가족의 1962-1974까지 200만명에서 400만명으로 늘어났다.

* 이민자들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칼, 폴란드: 공업 노동자

북아프리카, 서부 아프리카: 빈곤을 피해 생계 위해

 

5. 다문화사회의 통합 과제

* 프랑스 변화

1970-80년대 극우 이념이 대중의 호응을 얻음,특히 1981년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을 보면서 좌파에 대항하는 극우의 인기가 높아졌다.

종교와 문화가 다른 유색인을 프랑스인으로 받아들일 수없다는 극우 논리는 지지를 받을 만한 호소력도 있지만 그 안에는 타 문화,타 인종에 대한 배척과 불관용이 도사려 있다.

 

* 이민자들의 목소리

이민자 공동체는 60년대의 빈곤과 저교육 수준을 크게 벗어났고, 자유직, 기자, 교사 등 중간층으로 올라선 이들고 많다. 그러자 작가와 연극인, 사회학자, 역사학자 등 이민자 출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 대해 비판의식을 발휘해 자신들의 정신적 가치와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프리카 여성 단체도 지방과 전국 단위로 활동하면서 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인들의 전통적인 것을 잃어버리고 낯선 문명에 무조건 동화되지 않으려고 한다.

프랑스의 입장: 다문화사회의 틀을 마련,198110월 법으로 외국인들의 결사가 허용,이슬람의 공적기도허용

 

* 다문화사회의 통합과제

: 외모와 직업과 소득이 다르고, 아마도 장래의 물질적 가능성이 제약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자신의 문화와 가치관을 인식하고 서로 인정하며 사는가

매일매일 누구나 참여하고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일상 속에서 민주화를 기하는 것

약자와 강자 사이에 민주적 태도를 구축하는 것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근대인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불평등과 불관용을 버리지 못하고 협소한 자기 이익에만 집착하는 것은 진정한 근대인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성숙한 근대인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독일의 역사]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로마제국의 멸망

 

중앙 아시아의 유목 민족인 훈족의 게르만족의 한 분파인 동고트족에 대한 공격으로 게르만족의 본격적인 이동이 시작(375 AD)

 

476년 서로마는 아프리카로부터 내습한 반달족의 약탈을 받아 국위가 크게 쇠약해진 상태에서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 434493)의 침입에 의해 멸망

 

여러 게르만 왕국들은 숫적.문화적 열세, 종교적 갈등으로 대개 단명하고, 프랑크 왕국만이 혼란을 수습, 새로운 유럽세계 형성의 중심으로 부각

 

B. 프랑크 왕국의 흥망

 

메로빙거(Merovinger) 왕조(481751)

- 메로빙거 왕조 창시자인 클로비스(재위 481511)는 프랑크부족을 병합하고 갈리아 지방을 통합하였으나, 사후 왕조 분열이 계속되어 왕권은 유명무실

- 이에따라 정치의 실권은 귀족 대표인 궁재(Mojor Domus)의 수중에 들어감(대표적인 궁재는 투르푸와티에 전투(732)에서 이슬람군의 침입을 격퇴한 카롤루스 마르텔)

 

카롤링거(Caroinger) 왕조(751843)

- 카롤루스 마르텔의 아들 피핀 (재위 751768)이 메로빙 왕가 마지막 왕인 킬데리히 2(재위 742752)를 폐위시키고 즉위

- 피핀의 손자인 카롤루스 대제(재위 768814)가 서로마 황제로 등극(800)

 

프랑크(Frank) 왕국의 분열

- 프랑크족 고유의 분할 상속에 따라 카롤루스 대제 사후 골육상쟁이 전개되었으며, 왕권이 급격히 약화

- 베르덩 조약(843) : 카롤루스 대제의 장남 로타르가 황제 칭호와 함께 중프랑크를, 차남 카롤루스 2세가 서프랑크를, 삼남 루드비히 2세가 동프랑크를 차지

- 메르센 조약(870) : 동 조약으로 오늘날의 독일(동프랑크), 프랑스(서프랑크), 이탈리아의 기틀이 마련

 

C. 신성로마제국의 성립과 해체

 

신성 로마제국(1제국 : 962-1806)의 성립

- 동프랑크의 콘라드1세 사후 Heinrich 1(919-936)의 아들 Otto 1(936-973)가 집권

- 오토 1세는 962년 교황 요하네스 12세로부터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의 관을 수여받음.

 

신성로마제국의 해체

- 신성로마제국 역대 황제들이 국내문제보다 이탈리아 문제에 깊이 간여, 제후들의 독립 경향 촉발

- 1438년이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가 황제권을 세습하여 오다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 라인동맹으로 대체

- 라인동맹은 1815년 비엔나회의 결과로 독일 연방으로 변경

 

D. 프로이센의 등장과 독일 통일

 

프로이센의 등장

- 프로이센은 원래 13세기경에 독일 기사단이 개척한 곳으로 30년전쟁(1618-1648) 이후부터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

- 대선제후 Friedrich Wilhelm(1640-1688)은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아들 Friedrich I(1688-1713)는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에서의 공로로 프로이센 왕의 칭호를 얻음.

 

프로이센의 발전

- 18세기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재위 17131740)때 절대 왕정의 기초를 확립

- 프리드리히 2("프리드리히 대제", 재위 17401786)때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승리, 유럽의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기틀 마련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통일

- 1862년 프로이센의 수상이 된 비스마르크(18151898)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소독일주의)을 주장하고, ·, ·불 전쟁에서 승리, 독일 통일을 이룩

·프로이센은 1867년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의 4개국을 제외한 21개국을 결속하여 북부 독일연방을 결성하고 맹주로 등장

·비스마르크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문제를 이용, 프랑스에 전쟁을 도발, 나폴레옹 3세의 항복을 받고 파리를 정복(1871)

 

독일 제2 제국의 성립(1871)

- 파리 교외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프로이센왕인 빌헬름 1(재위 18711888)가 황제로, 비스마르크가 재상으로 취임하여 통일된 독일제국 수립(25개로 구성된 연방국가)

- 상원인 연방의회(Bundesrat)와 하원인 제국의회(Reichstag)가 구성, 입법부 구실을 하였으나, 실질적 권한은 황제와 제상이 보유

 

실제로 오늘날의 독일에 가까운 것은 바로 위, 위에 언급 돼있는 신성 로마제국이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2세 황제 시대가 되어서 입니다, 워낙 독일의 영토가 서부 유럽의 한가운데 있는 까닭에 종교전쟁을 비롯해

오랜 동안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죠.

 

E. 독일제국과 제1차 세계대전

 

독일제국의 팽창주의적 대외정책 추진

- 1890년 비스마르크 은퇴후 젊고 모험적인 새로운 황제 빌헬름 2(재위 18881918)는 범 게르만주의를 표방하고 "신행로 정책"이라 불리우는 적극적인 세계정책을 추진, 국제적 긴장 조장

- 시효가 다 된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 갱신을 거부하고, 1898년에는 영국의 해군력에 도전, 치열한 건함 경쟁 촉발

 

1차 세계대전 勃發(1914)

- 세르비아인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드공 암살사건(1914.6.28)으로 폭발,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연결

- 동맹군측 :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투르크, 불가리아

- 연합군측 : 영국, 불란서,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1차 세계대전 패배

- 1918.111차 세계대전 패배후 독일제국은 붕괴되고 바이마르 공화국(Die Weimar Republik) 성립

 

F.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립과 시련(19191933)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 1918년 혁명이 일어나 호엔촐레른 왕가의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에 망명하고, 독일은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전환

- 19192월 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하여 18개 공화국으로 구성되는 연방 공화국임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사회 민주당의 Friedrich Ebert(18711925)를 선출

 

바이마르 공화국 시련

- 바이마르 공화국은 좌익과 우익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등 공화국 출범 초기부터 시련에 봉착

· 좌익 스파르타쿠스단이 소비에트를 조직, 1918년말부터 1919년초까지 혁명기도

· 히틀러의 나찌당은 1923년 뮌헨에서 공화국 타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

-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시련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통화개혁(슈트레제만 개혁) 등 일련의 적극적인 戰後 복구책 실시로 독일재건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외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로카르노 조약으로 국제연맹에 가입(1926), 不戰 조약에도 서명(1929) 하는 등 상당한 성과 거양

 

G. 나찌즘의 등장과 제2차 세계대전(1933-1945)

 

나찌즘의 등장

- 농민을 포함한 중소 시민층과 국수주의자, 대자본가의 지지를 받는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이끄는 나찌당(Nazis ;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이 전후 독일의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대두

- 1933년 히틀러는 재상 겸 총통이 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을 해체, 3제국 수립

 

2차 세계대전 勃發

- 독일의 인근 영토확장에 따라 국제적 긴장 조장

· 19383월 오스트리아 병합

· 19389월 뮌헨회담을 통해 주데텐란트 합병

· 19393월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점령 및 단치히(Danzig) 자치시 병합

· 19398월 독.소 불가침조약을 비밀리에 체결한후 91일 폴란드 침공

- 영국·프랑스는 기존의 유화정책을 포기하고 193993일 독일에 선전포고, 2차 세계대전 발발

 

2차 세계대전 패전

- 독일의 승세는 1941년 가을부터 다음해 봄에 이르는 시기까지 절정에 달하였으나, 1942년 여름부터 연합군의 총 반격이 시작됨에 따라 수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1945.5 마침내 항복

- 패전후 독일은 미...4대전승국에 의해 분할점령

 

H. 2차대전 이후 정세 및 독일 재통일(1945-1990)

 

戰後 정세

- 전후 통일독일 정부수립을 위한 동.서간 교섭이 실패하고 냉전이 구체화되자 1949년 서방 점령지역은 통화개혁을 단행, 경제통합을 실시

- 1949.5월 잠정 헌법인 "기본법(Grundgesetz)"을 제정하고 1949.9.21 독일연방공화국(BRD, 서독) 수립

- 이에대해 소련 점령지역도 1949.10.7 독일민주공화국(DDR, 동독) 수립을 선포함으로써 독일은 동·서독 양독으로 분단

- 1954년 체결된 파리협정이 1955년 발효됨에따라 서독은 주권을 회복

·서독은 1958.5NATO 및 서구연합(WEU) 가입, 동독은 1950.9COMECON, 1955.9WARSAW 조약기구에 가입.

- 서독정부는 60년대초 미국의 경제원조와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를 통한 경제재건정책의 성공으로 획기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였고 대외적으로는 "할슈타인" 원칙에 따라 동독 불승인 정책을 고수

 

·서독간 교류협력 및 독일 통일

- 1969.10월 사회민주당(SPD)의 빌리 브란트 수상 등장과 함께 서독정부는 "동방정책"(Ostpolitik)으로 쏘련, 동구권과의 관계개선과 동독과의 교류를 과감히 추진, 1972.12월 동.서독간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유엔에도 동시 가입(73.9)함으로써 양독간의 공존 관계를 이룩

- 東方政策에 바탕을 둔 서독정부의 부단한 대동독 교류 및 협력강화와 특히 고르바쵸프 집권이후의 동구의 개혁무드 및 89.11월 베를린 장벽 붕괴로 양독간 통일무드는 급속히 고조

- 이에따라 90.5.18 양독간 화폐.경제.사회 통합조약 서명, 90.8.31 양독간 통일조약 서명 및 90.9.12 전승 4개국에 대한 독일통일을 양해하는 조약

 

I. 통일독일시대(1990.10- )

 

Helmut Kohl 총리(기민당) 후반기(90.10-98.10)

독일의 통일과 동구권 국가들의 몰락으로 형성된 새로운 국제질서하에 독일과 우방국가들은 완전히 새로운 도전에 직면

- 신연방주의 재건과 독일의 내적 통일 완성

- 유럽연합의 심화·확대 발전

- 지구적 차원이 평화 및 안보체제 수립

 

독일은 주변국가들의 통일독일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유럽속의 독일을 강력히 추진

- 유럽경제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독일 경제의 상징인 마르크(DM)를 포기, 유럽경제·화폐 통합(EMU)을 적극 추진

- 국제평화유지 활동에 적극 참여

 

·서독간의 경제적 통합은 유럽통합의 틀안에서 그리고 탈냉전 이후 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정치·경제적 구조하에서 추진

- ·서독간의 사회적, 심리적 장벽 극복이 과제

 

Gerhard Schroder 총리(사민당) 시대(98.10-05.11)

 

98.9.27 총선에서 사민당이 승리, 녹색당과 연립정권 출범

- 2차 대전후 선거를 통한 최초의 여·야 정권 교체

 

슈뢰더 총리는 신중도(Neue Mitte) 이념으로 각종 개혁 정책을 추진중이나, 사민당내 이념 갈등과 사회복지 축소에 대한 국민의 반발 등 정권 출범 초기 어려움에 직면

- 98.10 정권출범후 실시된 주의회 선거에서 계속 패배

 

베를린 시대의 개막

- 99.5.23 선거에서 Johannes Rau 대통령(사민당) 선출

- 연방정부와 의회는 99.9.1을 기해 베를린에서 공식업무 개시

 

1999년은 독일정부 수립 50주년, 베를린 장벽붕괴 10주년의 해로서 독일의 새로운 위상 정립과 역할 강화 모색 - "독일 개혁 : 고용, 성장 및 사회안정을 위한 미래 프로그램" 발표(99.6.23)

 

2001년 이후 경제성장률이 급락하고 실업이 크게 증가하자 슈뢰더 총리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 사회보장제도 개혁, 규제철폐 등 구조개혁을 통해 고용창출 및 경제활성화를 달성하려는 개혁정책 'Agenda 2010'2003년부터 추진

 

6장 독일의 정치적 근대화

 

1. 독일의 근대화

* 19세기 유럽에서 산업화가 본격화되었을 때 독일은 선진 대열에 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 통합된 유럽에서 독일은 정치경제적으로 최강국의 지위에 올라 있다.

 

2. 19세기 독일의 자유이념

 

* 소극적 자유

19세기 초 전제적 국가가 저지르는 정치적신체적 억압을 벗아나기 위한 해방 투쟁

자유방임적 시장 경제의 위험성: 경제. 사회적 하류층의 비율이 지속적으로 확대된 것

 

* 적극적 자유

19세기 후반 양극화 사회의 절대 다수 가난한 사람들의 적대감을 잠재우기위해 등장

국가의 개입으로 최소한의 복지와 인간다운 삶 보장, 자아 실현의 힘 부여.

 

* 독일의 독자적 자유주의 개발

선진 영국 따라잡기를 국가 목표로 자신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경제 원리를 만듬.

이기적 자유를 포기한, 윤리적 존재만이 보편적 이익을 위하여 활동할 수 있다라고 주장, 국가만이 인간윤리의 최고 존재라고 주장.

독일식 자유 이념은 세계 최초의 사회보장제도 실시:1880년대 비스마르크는 노동자, 노령, 질병, 및 재해 그리고 실업보험을 포함한 사회보장제도를 시행.

 

3. 19세기 독일의 정치 근대화 과정

 

1) 3월 전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 봉건적 질서의 지속을 원하면서 프랑스의 대혁명이 내세웠던 자유,평등 등 반봉건적 이념의 확산을 막기 위한 간접 전쟁.

나폴레옹 프랑스군대가 승리>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은 독일에서 지방분권적 전통이 강력하여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라인 연방 국가들과 프로이센에서도 개혁이 시작

: 봉건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운 시민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개혁. 농노제도 폐지,영업의 자유, 도시의 자치 행정 그리고 법 앞의 평등과 징병제도 도입 등.

>개혁 실패

나폴레옹 몰락 후 빈 회의에서 반동복고, 즉 구체제의 회복을 기도했다.

독일의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이 물거품됨.

개별 주권을 가진 많은 영방국가들이 모여 독일연방을 수립. 행정기구인 연방의회는 게르만민족의 통일과 자유를 목표로 삼는 모든 노력들을 억압했고, 언론과 출판을 엄격하게 검열하였다. 자유로운 정치 활동은 불가능했다.

반동적 정치 행태가 자행되었음에도 근대적 경제 발전은 지속되었다.

: 1834년 관세 동맹이 맺어져 통일된 경제 시장이 독일에서 열렸다.

1835년 독일 최초 철도 개설.

산업화에 따라 나은 삶을 기대하였지만 인구가 크게 증가하여 잉여 노동력이 넘치게 되었다. 비참함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직공들이 노동 조건의 개선을 위해 봉기를 일으켰지만 프로이센 군대에 진압된다. 이런 초기 노동운동이 이 시기에 싹을 틔웠다.

 

2) 1848년 혁명

18482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18483월 독일 전역에서 혁명이 발생.>군주 굴복

5월 프랑크푸르트 바울 교회에서 국민회의가 소집

국민회의 내에서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로 나뉨

대독일주의: 많은 이민족들도 독일이 포용하고 함께 가지는 입장

소독일주의: 순수 독일인들로만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자는 입장

>소독일주의가 다수의 지지를 얻었고 의회 책임제를 규정한 헌법 제정.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4세가 세습 독일 국왕으로 옹립되었으나 1848년 혁명의 결실인 입헌군주제 왕위 거부>혁명 실패를 의미

개별 주권국가들이 반동 보수 노선의 헌법을 제정>1850년 독일 연방이 부활

 

3) 프로이센의 대두와 비스마르크 제국

프로이센은 산업화를 주도하며 독일 전역의 경제를 압도적으로 장악.:자유주의 성향의 중간 계급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자신감을 키워 나갔다.

1861년 진보당은 프로이센의회를 장악: 군대를 반동적 구조로 개편하려던 군대예산 삭제

1862년 프로이센 재상으로 비스마르크 취임: 헌법에 규정된 의회의 예산 동의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군대예산 편성, 집행

1864년 덴마크와 충돌: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와 힘을 모아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공화국 합병.

1866년 오스트리아 전쟁: 두 공국의 영토를 독식하려는 의도>오스트리아 항복

오스트리아를 몰아낸 뒤 독일연방을 없애고 북독일 연방을 조직

프랑스와의 전쟁: 독일 민족국가의 수립을 위하여 비스마르크는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구실로 전쟁함>프랑스 패전: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기고 거액의 배상금 지급.

프로이센의 파괴력을 알게 된 소규모 영방국가들도 북독일 연방과 함께 독일 제국의 수립에 동참.

1871118일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사람들을 모독하는 의미로 베르사유궁전을 독일 제국의 수립 경축행사장으로 결정. 초대 독일 제국의 황제로 프로이센의 국왕인 빌헬름1세가 즉위, 초대 대장으로 비스마르크가 임명.

*독일통일은 아래로부터, 국민의 합의된 것이 아닌 위로부터 완성되었다.

* 제국의회는 보통. 평등선거권에 의하여 구성되었으나 독일제국에 속해있는 개별국가들의 의회는 제한 선거권으로 구성되었다.

* 독일의 중간 시민계층들은 산업혁명의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나갔지만 19세기후반 독일사회를 좌지우지한 사람들은 군부를 장악한 귀족신분이었다.

* 비스마르크는 19년 동안 제국 재상직을 지냈고, 외교부문에서는 뛰어났으나 내정부문에서는 변화하는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1890년 비스마르크가 제출한 사회주의자 법의 효력 연장 법안이 제국의회에서 부결되자 갓 즉위한 젊은 황제 빌헬름2세는 재상을 쫓아내었다.

 

4) 빌헬름 제국과 제1차 세계대전

행동보다는 말이 앞섰던 빌헬름2세는 노동자들을 보듬어 안겠다는 사회황제임을 자처하였으나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즉각 반동적황제로 변시하였다.

독일 유권자의 표를 얻은 사회민주당의 정국 운영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이렇듯 상당한 비율의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며 제국을 통치한 빌헬름은 사회 불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19146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독일은 마른전추에서 패배하고 서부 전선은 참호전으로 돌입하여 전쟁물자를 퍼붓게 만드는 소모적 장기전에 놓이자 군부의 권력과 영향력이 커졌다.

 

4. 불완전한 공화국을 향하여

1917년 미국이 유럽전쟁에 참전화고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발생하자 지루한 전쟁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독일의 루덴도르프 장군은 휴전을 통하여 독일군의 입지를 유지하였다.>빌헬름2세는 1918년 제위 포기

독일제국은 붕괴되고 바이마르공화국 수립

 

7장 독일의 산업화

 

1. 19세기 후반 독일의 경제 상황

 

1) 제국수립 이전의 경제 상황

1833년 통일된 경제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체결된 관세동맹은 독일 경제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미국캘리포니아 황금 열기의 자극으로 독일에도 최초의 근대적 신용 은행 등장.

1857년 철도와 중공업 설비들을 건설, 많은 은행이 문을 열었다.

 

2) 독일 제국 수립 이후의 경제

1871년 금본위제에 입각한 단일 통화제 시행>중앙 집중적 경제 정책 추진

1875년 프로이센 은행은 제국 은행으로 재조직>국가 주도적 경제 개발의 든든한 금융기반확립

1879년 영국에서 개발된 철강 제련법이 독일에 전해진 후 알자스로렌의 철광 및 칼륨 광산이 집중 개발되어 독일 강철 및 기계 공업 발전을 이끌었다.

패전국 프랑스가 지불한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도 독일 경제 발전에 기여.

이를 바탕으로 독일은 중화학, 금속기계, 전기부문을 중심으로 산업화를 추진하여 18세기 말 영국이 주도한 경공업 중심의 산업혁명에 비견될 만한 제2차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2. 농업 생산과 인구의 급증

독일 산업화의 기초는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농업 생산성의 비약적 발전에서 비롯.

 

3. 독일 은행

독일 은행들은 산업화와 경제발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예금과 대출금리의 차액을 주된 수입으로 삼는 앵글로색슨의 은행과 달리 독일의 은행은 중앙은행의 강력한 후원으로 상업 기능과 투자 기능, 투자 신탁의 종합기능 수행

독일 은행은 대외 무역과 해외 자본 투자에서도 중요한 역할 담당.

: 1873년 런던에 지점, 이탈리아의 상업은행은 독일의 주도와 영향아래 수립, 오스트리아 메르쿠르은행이 독일은행의 통제를 받았고, 뉴욕과 함부르크의 은행도 국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음, 터키. 이집트. 모로코 등 독일동양은행, 인도. 일본. 중국 독일아시아은행, 남아케리카지역 독일해외은행 등 다양하게 투자함.

거대은행의 거대자본은 해외무역과 해외투자를 촉진시키며 독일의 경제적 영향력을 전 세계로 확대시켰다>독일자본이 투자된 해당국들과 직간접적으로 정치적 관계를 맺음.

식민지는 아닐지라도 독일제국은 자본이 투자된 국가들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

 

4. 제국주의 경쟁

 

1) 독일 제국의 제국주의 정책

독일의 급진전된 산업화와 주요 항구 도시들이 제국에 편입되면서 독일 제국은 식민지 획득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버리고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렸다.

: 아프리카와 중국의 일부, 남태평양의 캐롤라인과 사모아제도를 식민지로 편입>식민지들을 경제적으로 평가하자면, 지속적 생산에 필요한 원료의 공급지나 완제품의 판매 시장으로서 효용가치가 거의 없었다.

독일 식민지정책은 19세기 말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국가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의도였다.>독일의 식민지 시장진입은 다른 국가들에게 시비를 건 셈이다.

독일의 중공업 기업군은 제품의 재고 과잉에서 비롯된 경영악화를 돌파할 기회로 독일정부에게 제국주의 정책을 요구

젊은 황제의 과시욕구충족이 적극적으로 전쟁을 고려하게 만든 요인이다.

 

2) 1차 세계대전 발발

독일제국수립 이후 20년간 독일을 통치해 온 비스마르크가 물러나고 빌헬름2세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독일제국은 격랑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과시용에 휩싸인 젊은 황제와 눈앞의 이익만을 검토하고 있던 중공업 기업가집단과 또 다른 거대 세력인 군부 그리고 들뜬 분위기에 휩싸여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독일인의 우월함만을 맹신하던 독일 국민들이 다함께 모여 당차 독일을 재기불능의 파멸로 이끌 위험천만한 사업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5. 3국을 향햐여

승전국과 패전국을 불문하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잘 나가던 서유럽 국가들은 지는해가 되었고 미국은 뜨는 해가 되었다.

사회민주당이 주도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립은 독일인의 환호속에서 수립되지는 못했다>많은 사람들은 제국의 붕괴와 공화정의 수립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빠른 안정된 삶을 갈구했다.

준비가 안 된 채 망가진 정권을 책임 맡게 된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과거 청산보다 사회 안정에 전력 기울였다.

그러나 승전국 프랑스의 전쟁 배상금 문제로 산업의 용충지를 강점하고 독일 경제를 마비시켰다.

끊임없는 내우외환에 신생 공화국은 정신을 차릴 수없었다>아수라장을 단번에 정리할 구세주 초인의 등장을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갈구하게 된다.

 

8장 미국의 근대화: 산업화와 혁신주의시대

 

1.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사회

남북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충격과 피해가 큰 만큼 전후 연방을 재건하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국민의 관심사가 재건이 아닌 산업화로 방향이 바뀌었다.

철도의 건설을 통해 남북의 지역적 대결보다는 토착인과 이민자들의 갈등에, 정치인들의 당파적 대결보다는 대기업들의 경쟁에 관심을 가졌다.

자유방임주의에 따른 기업들의 경쟁은 거대 독점 기업을 탄생시켰고 가진자??가지지 못한자?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9세기 말은 미국사회의 분기점이 된 시기이다. 전통적농업에 기반을 둔 경제체제는 상공업에 기반을 둔 산업자본주의체제로 변환되었다.

 

2. 산업화와 산업화의 그늘

 

1) 산업화

미국의 산업화는 남북전쟁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건국 초부터 상공업에 힘을 쏟음.

1803년 루이지애나 영토가 미국에 편입되면서 미국의 서부 팽창은 전환점을 맞이함>자급자족에서 시장경제로 바뀜.

산업화의 토대인 철도 확장으로 인한 발전들

- 황소제국, 소목축업: 남부의 경제 뿐 아니라 중서부의 경제도 활성화되었고, 남부는 중서부와 동부와 연결되었다

- 철강산업: 베서머법(강철을 대량생산하기 위한방법)을 통해 무연탄과 역청탄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펜실베이니아주의 피츠버그는 미국 철강 산업의 메카로 등장.

- 산업영역에서 대규모 기업과 기업가를 창출

기업가: 철강회사(카네기),석유산업(록펠러),정육업체(스위프트),철도(밴더빌트),금융(모건)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기업: 미국담배회사, 비스킷회사,싱어회사,코닥,아이보리,캠벨,퀘이커 오츠등

 

2) 사회진화론

애덤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자유 경쟁은 서구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이론적 지침

다윈의 적자생존론: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사회진화론으로 응용, 예일대학교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는 미국의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론적 도구로 사용>자본주의 무한 경쟁사회에서도 가장 능력 있는 기업과 기업인이 경제를 주도해야한다는 생각이 미국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카네기의 부의 복음: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자본가의 사회적 책임이며 의무라고 설파

레스터 워드의 동태적 사회학: 인간 사회는 공물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자연적 선택에 의한 적자생존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할 수 없다. 인간세계는 약자를 보호하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사회 경제 활동에 개입하여 사회 개혁을 주대해 나가야한다고 역설

헨리조지의 진보와 빈곤: 미국사회의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조장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치솟는 부동산의 가치라고 지적. 부동산세금은 토지를 생산자에게 환원시킴으로써 불로 소득층을 소멸시키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을 주장.

에드워드 벨레미의 과거를 돌아보며: 19세기 후반의 미국 사회가 경쟁, 독점, 사회 불평등, 정부의 무기력 등을 정부가 중심이 되어서 사회주의적 개혁을 통하여 사회 경제 체제의 부조리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 벨러비의 소설은 영향력이 커서 미국 전역에 벨러미 클럽 등의 사회주의 클럽이 등장하여 서정쇄신개혁, 사회복지법안, 그리고 철도와 기타 공익사업의 국영화를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3) 노동운동

* 대자본가에 의한 기업의 대형화와 독점화는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었다. 생산 단가를 낮추는 데 혈안이 된 기업가들은 고임금 숙련공보다는 저임금 비숙련공을 선호하였고,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고용하였으며,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은 악화되었다.

 

1877년 철도 총파업: 최초 노동자들의 집단 파업. 처음에는 일반 국민들도 파업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점차 노동자들의 투쟁이 과격해지자 국민들은 노동자들에게 등을 돌림.

1886년 시카고의 헤이마켓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발생>미국 중간계층의 노동운동에 대한 불안은 미국 노동조합 운동에 불리하게 작용.

노동기사단: 가장 범국가적인 노동조합. 노동기사단은 노동자들이 함께 투쟁하여,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존중을 받는 평등한 사회 구현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파업이나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고용주를 설득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헤이마켓 소요의 발생으로 노동 기사단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에도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은 급격히 세력의 약화를 초래.

미국 노동 연맹 창단: 초대 조합장인 새뮤얼곰퍼스는 노동기사단과는 달리 이상적인 목표보다 현실적인 목표를 지향했다. 노동자들의 당면한 문제, 즉 높은 임금, 짧은 노동시간, 노동환경의 개선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미국의 산업화에 기여한 노동자들이 그에 대한 정단한 대우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보수성 때문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19세기 말 보수주의적 산업화 시대에 살아남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미국 노동운동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4) 농민운동

* 산업화에 따른 시대적 변화에 발맞춰 농민들도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공제조합: 1860년대 후반과 1870년대 전반에 걸쳐 일어났으며, 농민들 간의 친교 성격이 강했으며 일종의 협동조합의 기능에 치중했다. 그러나 1870년대 후반 경기가 회복되면서 조합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

농민동맹: 1875년 초 남부농민들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연합체가 구성되었다. 협동조합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농민의 생산 및 복지를 위해서 정부가 나서 줄 것을 요구하며 정치력을 신장시켰다.

인민당: 1892년 창립. 정부가 교통수단을 직적 운영할 것과 불법 토지 소유를 금지하고, 통화제도의 개혁, 누진 소득세 제도와 미국 상원 의원의 직접 선거,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였으나 1892년 공황이 닥치자 해체.

미국의 자유방임주의 기조는 탄탄했고, 인민주의자들과 기타 개혁 세력들이 주장하는 전통 자본주의에 대한 수정과 개혁은 아직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3. 혁신주의 시대

1) 혁신주의의 개념과 성격

* 19세기 후반 미국 산업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대자본가와 자유방임주의였다. 정부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시장 개입을 꺼렸다. 개혁의 목소리는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커지기 시작했고 일반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혁신주의: 1901년부터 1917년까지의 기간. 미국의 기존 질서와 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적 사회변혁을 추구하지 않는 범위에서 진보적 사상에 근거해서 전통적인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

산업화가 낳은 직접적인 폐해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개혁운동

법조계, 사회운동가, 종교가, 교사, 정치가등 다양한 전문직 종사자를 중심으로 한 중산층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개혁가들은 인간은 경쟁보다는 협력으로 더 나은 사회를 발전시켜야한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구성원은 그가 속한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사회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혁신주의 운동 성공에 가장 큰 요인은 혁신주의적 성향을 가진 정치가들의 역할이었다. 위로는 연방 의원에서부터 아래로는 지방 관료에 이르기까지 혁신주의 정치가들은 19세기 말부터 개혁가들이 요구하던 사안들을 추진하였다. 위스콘신 주지사 로버트 라폴레트와 오하이오 주 톨레도 시장 새뮤얼 존스가 대표적이었는데 이들은 철도운영규제, 평등한 과세제도, 직접예비 선거등의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경찰들의 곤봉 휴대금지, 근로자 최저 임금제, 근로자를 위한 야간 학교, 노숙자 합숙소, 시민들을 위한 공원과 놀이터 등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이와 유사한 혁신주의 운동이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2)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혁신주의 정책

독점하는 거대 철도 기업 연합인 북부 증권회를 해체시켰다. 이는 오랜 세월 미국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자유방임주의와 작은정부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정부 중심의 개혁을 시도하는 출발이었다.

북구 증권회사에 대한 도전의 시작으로 이후 44개의 반트러스트제소>국민들의 지지와 연방 대법원도 시대적 흐름에 동조해 소송에서 승리

1906년 정육검사법 통과

 

3) 우드로 윌슨의 혁신주의 정책

정부가 독점 기업을 규제하며 제재해서 국가적 통합을 이룩하려 했다.

1913년 관세율을 낮추는 언더우드 관세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남북전쟁 이후 최초로 시행된 관세 개혁으로서 그동안 국민들의 원성이 높았던 높은 관세를 개혁함으로써 정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국민의 복지를 위해 주도적인 역학을 해야 한다는 혁신주의의 가장 큰 정치적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관세 인하에 따른 세수의 결손을 보완하기 위해 누진 소득세법까지 통과

은행체계에 대한 개혁으로 금융가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정부 주도하의 금융체제를 만들기 위해 연방 지불 준비법 통과시켜 통화와 은행 신용을 더욱 신축성 있게 만들었으며 그 종안 뉴욕 및 북동부에 집중되어 있던 금융을 전국적으로 분산시켰다.

선거 공약이었던 반트러스트 개혁에 착수하여 아래의 법을 제정했다

- 연방 통상 위원회법: 정부는 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더욱 강력하게 조사,제재할수 있었고

- 클레이튼 트러스트 금지법: 노동조합은 강력한 단체 교섭권을 획득하게 되어 기업간의 자유 경쟁을 보장받았다.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한층 일반 국민들의 복지를 위한 형태로 법제화제도화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정부가 자유방임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개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9장 미국의 근대화:개혁의 완성

 

1. 1차 세계대전의 참전과 그 영향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혁신주의 운동의 기세는 꺽이고 말았다>혁신주의 시대에 보여 주던 개방과 다양성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는 사라졌고 폐쇄적인 분위기로 전향되었다.

언론과 자유를 억압, 방첩법, 태업법, 보안법이 제정되어 전쟁에 방해되는 행동을 허용하지 않음.

: 독일어교육 금지, 독일어 이름이 들어가는 도시나 마을, 음식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고, 독일 작곡가라는 명분아래 베토벤 음악의 공연을 금지등 독일계 미국인들과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평화주의자들은 감시와 불이익을 대상이었다.

 

2. 보수주의로의 회귀

전쟁 후에도 이러한 비민주적인 광풍은 계속되었고 극심한 경기침체로 파업이 일어나자 국민들은 불안해했고, 과격한 노동운동의 뒤에는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보았다.

적색 공포의 광풍은 1920년대 후반 팽배해진 반 이민정서로 이어졌다>1921년 쿼터법 제정 인민자수를 제한하였다. 1924년 국적 기원법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전쟁 중의 ‘100퍼센트 미국주의는 전후 반 이민정서와 맞물려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인종 편견이 조직화되었고 집단화되었다.

미국 사회의 급속한 보수주의로의 선회는 정치에도 반영되었다.

윌슨:

-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전후처리 문제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함.

- 베르사유조약은 윌슨의 뜻대로 마무리되지 못했고 유럽제국주의세력들 간의 갈등을 근절하지 못함.

- 전후 경기침체와 사회의 혼란은 윌슨의 민주당에 치명적이었다.

1920년대 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하딩

- 미국정치의 정상이란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의 생활에 간섭하고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대의 흐름에 맡겨두는 것이고, 복원이란 혁신주의의 개혁보다는 이전의 자유방임주의의 원칙을 회복하는 것이다.

- 그러나 대통령과 정부의 역할에 대해 수동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하딩은 행정부조차도 장악하지 못했다.

쿨리지

- 하딩에 비해 더욱 철저히 자유방임주의를 신봉함.

- “미국의 사업이란 바로 사업 그 자체다로 유명

- 정부의 역할은 국민의 생활에 가능한 한 간섭하지 않는 것이며, 보호해야 할 대상을 대자본가와같은 부유한 계층이라고 했다

- 후버:대통령의 신임 속에서 주요한 경제정책을 수행했다.

자유방임주의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정부와 기업의 협조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정부는 동일한 성격의 기업들이 상호 협조하도록 설득하고 유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혁신주의 시대와 비교해서 1920년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지만, 1차 세계대전 직후의 경기침체와 사회적 혼란은 이내 사라졌고 미국의 경제는 부흥하였으며, 미국인들은 자본주의 문화에 흠뻑 젖어들었다.

1920년대는 모순이 교차된 시기이다. 화려한 세속 문화를 만끽하는 미국인들과 그것에 대항하는 미국인들, 부유한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미국 자본주의의 화려함 속에서도 늘어가는 가난하고 소외된 미국인들, 성공 신화를 다루는 언론과 저술 속에서도 그것의 어두움과 인간 소외를 부각시키는 저술들--다가오는 미국 자본주의의 최대위기를 눈치 채지 못한 채 시대의 조류에 떠밀려가고 있었다.

 

3. 대공황과 뉴딜

 

1) 대공항

19291024검은 목요일의 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은 미국 자본주의의 최대의 위기하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공황은 유럽을 비롯한 세계적인 공황과 맞물려 있어서 쉽게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무엇보다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공화당 행정부는 중소 기업보다는 대기업에, 일반 서민보다는 부유층에, 소비자보다는 생산자에, 농민보다는 도시 거주자에게 유리한 정책을 팼다. 결국 부의 재분배에 실패한 셈이다.

2)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뉴딜

공항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국민들은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했다.

대공황의 본질과 국민 정서를 간파한 루스벨트는 행동하는 행정부를 약속하고 뉴딜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경기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 긴급 은행법: 최악의 금융 위기를 넘겼다.

- 농업 조정법(AAA): 농경지를 줄이고 그에 따른 손해를 정부가 배상함으로써 농산물 가격을 높이고자 했다.

- 전국 산업 부흥법(NIRA): 정부 주도하에 도로,공공 건물,공원,학교 등과 같은 공공 시설을 건설함으로써 고용을 늘이려고 하였다.

- 주택 소유자 대부법: 중산층도 정부 보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TVA): 뉴딜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정부 정책으로, 테네시와 그 주위 7개 주에 걸쳐 있는 강에 댐을 건설하여 질산 비료와 값싼 전력을 공급하고, 기타 관련 산업을 활성화시키며, 지역 기업들의 성장을 촉진시킬 뿐아니라 막대한 고용 창출을 가져와서 실업률을 낮추어 경제활성화를 도모했다.

루스벨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 우익 보스주의자들: 정부의 권한을 필요 이상으로 증대시킴으로써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전통을 심각하게 훼손하였다고 비판

- 좌익 세력들: 뉴딜 정책이 기업가와 부유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하층의 대중들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

뉴딜의 위기

- 1935년 연방 대법원이 AAANIRA에 위헌 판정을 하면서 뉴딜은 위기를 맞게되었다.

회복을 보이는 듯했던 경기가 다시 악화되고 다가오는 선거를 의식해 루스벨트는 일반 대중을 위한 보다 파격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

- 전국 노사 관계법: 노동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노동조합을 통하여 고용주와 교섭할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으며 고용주의 노동조합에 대한 간섭으로 해방될 수 있었다.

- 정부 세입법: 고소득자와 지주들의 세율을 높인 것으로 평화기에 만들어진 세율로는 가장 파격적인 것이었다.

- 사회보장법: 실업자 보상과 노약자 연금 등 저소득층을 위한 혁신적인 복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정부가 최초로 연금 제도 등의 사회 보장에 관한 책임을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4. 자유방임주의 체제의 종결

루스벨트의 정책을 통해 대공황의 늪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완전히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루스벨트와 그의 뉴딜은 미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대통령과 연방 정부의 역할이 극대화되었으며, 그런 점에서 대공황은 미국이 1세기 반 동안 지켜 왔던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체제의 종결임과 동시에 정부주도형 사회복지국가로 나아가는 새로운 시작의 갈림길이었다.

 

10장 러시아의 근대화와 제국주의:제정러시아시대

 

1. 제정 러시아 시대의 근대화

: 러시아의 역사에서 근대화의 물결은 19세기 후반이지만 18세기 초 표트르1세 때부터 서구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게 되어왔다.

 

2. 19세기 중반 이전 러시아의 근대화 노력

1) 표트르 대제의 강제적 서구화

군대경제행정교육종교 등 러시아 사회의 전 분야 개혁>유럽 열강들,북유럽의 강국 스웨덴 맞설 강건한 군대를 만드는데 주력함. 징병제도입.

중앙과 지방의 행정 기구도 대폭 정비>중앙에서는 원로원이 만들어지고 12개의 참의회가 신설되면서 군사사법재정상업공업 등 국정 전반을 책임졌다. 또 현군으로 나누고 지방 관리들은 봉급을 받았고, 보건이나 교육, 경제 등의 문제에서 자치권도 부여 받았다.

종무원을 설치 교회를 국가에 종속>근대화 비용 마련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 새로운 국영 공장과 사영공장이 설립되는 등 공업이 크게 발전>대외 수출을 늘리고 국내 공업을 보호하기 위해

교육과 문화분야 혁신>항해포술의술광산 학교 등을 건립하여 기술과 과학 전문가 양성에도 크게 노력, 국립 도서관을 설립하여 과학 아카데미의 창설도 준비하였다.

 

2) 데카브리스트들의 반란과 차다예프의 철학 서한

* 표트르 대제의 노력은 18세기 후반의 예카테리나 여제시기에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이 흐름은 알렉산드르 1세 집권 초기의 자유주의적 개혁 노력과 그의 중반기에 벌어졌던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그의 사망직후 발생한 데카브리스트들의 발란으로 더욱 거세졌다.

데카브리스트들 반란: 나폴레옹전쟁과 외국원정에 참가한 귀족출신의 젊은 장교들로 자유의 공기로 충만한 유럽의 나라들의 충격적인 인상으로 극심한 반동 정치로 돌아선 알레산드르1세에 대항하기 위함이었으나 반란은 한 시간여 만에 패배로 끝났다>혁명의 뿌리를 보여 주는 것으로 우리(러시아사회)와 그들(러시아정부) 간의 틈새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치다예프 철학: 자유주의 물결을 막으려는 정부에 맞서 철학 서한논문에 러시아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고 선언>서한 이후 두 갈래로 나뉘었다

- 보트킨, 벨린스키, 게르첸등 서구주의자: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유럽의 선진적인 문명을 받아들여 서구화하여야한다고 주장. 표트르 대제를 긍정적 평가

- 호먀코프, 키레예프스키 형제, 악사코프 형제등 슬라브주의자: ‘초개인적인 정신적 집합체인 소보르노스치가 그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서유럽문명보다 우수하다 주장. 러시아의 당면한 문제를 표트르대제가 근원이라 평가

>>상이한 견해를 보였으나 농노제 폐지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여 1860년대 초의 농노해방 무렵에는 동일한 자유주의 진영을 형성.

 

3.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과 러시아 제국의 팽창

 

1) 크림전쟁

크림전쟁: 유럽 열강의 패권 다툼으로서 1853년에 발발했다. 러시아의 패배로 끝남.

이 패배는 러시아 제국의 위상이 떨어졌고, 자국의 후진성 문제가 거론 농노제와 비효율적인 전제 정치에 문제를 드러냈으며, 사회 전 분야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2) 알레산드2세의 대개혁

1861년 사유 농노를 대상으로 농노해방령을 선포. 1866년 국유 농노의 해방.

젬스트보 지방 자치기관 설립: 도로건설, 보건 및 교육 같은 공공 업무 담당>교사,의사,기술자 등의 전문가들을 채용, 초등교육이나 의료, 농촌 주민들의 복지향상에 기여.

교육 활성화: 대학자치의 확대

사법제도: 공개재판, 변호사제도 및 배심원제도가 도입

군제 개혁: 국민 개병제가 도입되고 군대 내 체벌이 금지

 

3) 대투르크 전쟁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

유럽에서 제국주의적 팽창이 본격화되자 러시아도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영토 팽창에 힘을 쏟기 시작함.

투르크와의 전쟁: 러시아는 승리했으나 곧이어 개최된 한 국제회의에서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반발로 전리품의 상당 부분을 포기함.

카프카스와 자카프카지예:1820년대 러시아에 편입, 니콜라이 1세의 저항이 있었으나 1860년대 겨우 진압되었음.

중앙아시아: 18세기 초에 시작하여 1847년까지 카자흐스탄 지역을 병합하는데 성공, 1850년부터는 투르케스탄으로 진출. 러시아는 1867년 부하라, 1873년 히바, 1876년 호칸드 한국을 병합하고 1885년 투르크멘 지역들을 완전 점령. >중앙 아시아를 문명화하고 기독교화하는 임무를 갖고있다고 생각했고, 새로운 시장과 원료 공급지의 역할도 기대함.

극동 지역: 중국의 아루르 강 지역 점령, 우수리 강 지역도 1860년대 할양받아 블라디보스트크를 건설함.

1867년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1875년 일본과의 조약으로 쿠릴열도를 이양하고 대신 사할린섬 전체를 영유하게 됨.

 

4. 근대화의 마지막 시도들: 비테의 공업화와 스톨리핀의 개혁

 

1) 뒤늦은 산업혁명: 비테의 공업화

철도부설과 공업발전을 지원하고 수출을 장려하며 외국인 투자를 적극유치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관세를 올림

세제개혁을 단행하였고 금본위제를 도입

아시아 쪽으로 철도를 부설하는 등 공업 발전 모델이 성립

* 성과

- 1891~190010년 동안 공업 생산은 2배 이상 증가

- 중공업이 뚜렷하게 진전하였고, 경공업 역시 급속히 발전함.

* 부작용

- 농업은 무시되어 농민들에게 무거운 간접세가 부과

- 해외자본이 러시아 공업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면서 러시아 중간계층의 발전이 느리게 진행

- 공업화가 대기업 중심으로 진행된 결과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밀집되었고, 비참한 생활조건은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혁명 사상의 수용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2) 스톨리핀의 농업 개혁

의회 도입: 절대주의가 종식되고 입헌군주제의 가능성이 열림>수상으로 스톨리핀이 임명

혁명 운동을 잔혹하게 탄압>근대화를 좀더 수월하게 진행

농업문제 해결

- 공동체 내의 흩어져 있는 자신의 땅을 사유화하고 이 땅들을 모아서 통합된 단일 토지로 정리하여 공동체에서 이탈할 수 있게 되었다.

- 농민은행을 세워 농민들이 많은 토지를 획득할 수 있도록 자금도 대부해 줌

- 토지 상환금 폐지

>>농민들의 반응은 부유 농민과 극빈 농민의 양극화 되어 근대화의 평화적인 성공은 이들의 분노를 어떻게 달래느냐에 얼마간 달려있었다.

초등 보통교육실시, 상해보험 프로그램 실시

 

5. 1차 세계대전과 전제정의 몰락

*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세르비아를 위해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전쟁의 부담은 표트르 대제 이래 2세기 동안 근대화를 시도하던 러시아의 노력도 중단시켰다.

 

11장 러시아의 근대화와 제국주의: 소련시대

1. 소련 시대의 근대화와 제국주의

* 191710월 사회주의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의 당면과제

- 제정 러시아가 차지했던 영토를 가능한 유지하면서 소비에트 권력을 확고히 하는일

- 전쟁과 혁명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함으로써 중단되 근대화를 완수하는일

 

2. 신경제정책과 스탈린 혁명

 

1) 신경제정책(NEP)

곡물 할당 징발제를 식량 현물세로 대체>농민들은 세금을 납부한 뒤 나머지 생산물을 자유롭게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되었다.

농민들이 땅을 임대하고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게 되었다

소규모 기업의 국유화가 해제되었고, 20인 이하의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사기업들의 설립이 허용되었다.

국가는 궁극적으로 공업의 관제고지들’,즉 은행,운송,통신,해외 무역 및 중간 이상 규모의 기업만 통제하였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자유로이 경쟁적 노동 시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외국투자가들에게도 경제를 개방하여 벌목과 광업 등의 분야에서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자 여러 특혜들도 부여하였다.

* 평가

외국 자본가들의 의심으로 해외 투자의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빠른 속도로 경제를 회복시켜 주었다. NET시기는 정치적으로 소비에트 권력이 확고히 정착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2) 강제적 공업화와 그 결과들

스탈린은 NET를 폐지하고, 농업 집단화를 동반한 공업화 전략을 세워 새로운 근대화의 초석을 마련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1,2차에 걸친 5개년 계획을 통해 공업화에 박차를 가했지만 비현실적인 목표와 과도한 자원 및 노동력 동원으로 오히려 사회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남겼다.

 

3. 2차 세계대전과 소련 제국의 형성

 

1) 독소 불가침 협정

새로운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공업화 노선을 채택한 소비에트 지도부는 당시 소련 체제를 위협하던 독일과 불가침 협정을 체결

이 비밀 협약에 의해 소련 정부는 혁명 과정에서 떨어져 나갔던 폴란드의 1/3과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및 핀란드에 대한 영향력 행사, 그리고 루마니아에 편입되었던 베사라비아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받음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으로 잃어버린 영토 수복에 대한 의지를 명백히 표현했다.

이를 통해 소련은 폴란드 동부, 발트 3국 등을 손에 넣었다.

 

2)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의 위성국가화

1941년 히틀러가 소련 침공하였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를 기점으로 상황은 반전되었고,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하고 히틀러를 몰락시키는데 성공

스탈린은 패전국 독일의 동부 지역을 점령하였고, 동프로이센의 일부를 소련 영토로 병합,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소련에 편입되어 있던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땅 일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는 카르파티아-우크라이나를 양도 받았고, 루마니아로부터는 베사라비아와 부코니아 북부에 대한 병합의 정당성을 확인하였다.

동유럽 지역 전체를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로도 이용하고자 하였다

미국이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마셜 플랜: 미국이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유럽의 경제재건 프로그램

소련이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 코민포름: 마셜 플랜에 대항하고 미국이 유럽에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한 국제적 상설 정보기관

-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소련이 중심이 되는 경제상호원조회의

- 바르샤바 조약 기구: 서방의 NATO에 대항하는 기구

 

4. 동유럽의 반란과 소련 제국의 위기

 

1) 흐루시초프 시대의 폴란드 개혁 운동과 헝가리 봉기

19533월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를 중심으로 새로운 지도부가 등장>소련 정부 자체는 물론 동유럽 위성국가들에서 일대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다.

 

폴란드

- 노동자 처우 개선 요구 시위 발생 폭동으로 발전

- 고무우카를 중심으로 개혁 정부를 구성>소련군 개입>바르샤바 조약에 충실하겠다는 약속으로 스탈린주의적 사회 경제 구조를 이완시키는 일련의 개혁을 단행

 

헝가리

- 부다페스트에서 반정부 폭동 발생>소련군 개입>시민과 정부 경찰 및 소련군 사이에 대규모 충돌 발생>잠시 소강>임레 너지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정부 수립,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선언>소련군 개입으로 마무리

 

2) 브레주네프 시대의 체코슬로바키아 반란

* 흐루시초프가 1964년 실각하고 1966년 브레주네프가 제1서기가 되면서 사태는 일변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

- 1960년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비판 운동 전개되기 시작

- 1968년 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자 둡체크가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의 정치적 참여를 확대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사법부의 독립과 의회 제도의 확립 및 선거 제도의 민주화도 모색하였고 지식인들 개혁을 요구하는 ‘2천어 선언을 발표하고 공산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새로운 정치 조직인 국민 전선을 꾸리는 등 개혁 운동을 일반 민중에게로 확대하는 데 성공하였다>소련군의 개입으로 둡체크 정권은 붕괴

 

폴란드

- 12년뒤 경제정책의 실패로 노동자들의 파업초래, 레흐 바웬사를 중심으로 연대 노조라는 독립 노조를 건설하면서 임금 인상을 비롯한 사회적 민주화를 요구

- 야루젤스키는 198112월 계엄령을 선포하여 이들을 진압

 

5. ‘소련 제국의 몰락

1985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신사고정책은 동유럽에서의 대변혁을 야기했으며 결국 사회주의 블록의 해체로 이어졌다.

- 동독 정부가 무너지면서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었다

-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벨벳혁명이 완수되었다

- 헝가리는 다당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불가리아에서도 개혁적 정부가 출범하였다

-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가 끝까지 권력을 고수하다 대중봉기로 무너지면서 처형되었다

 

사회주의 블록의 해체를 가져온 동유럽에서의 대변혁은 소연방 자체의 해체와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특히 1990년 이후 발트 3국의 독립은 소연방의 해체에 결정적이었다. 이어 러시아 공화국을 비롯하여 15개 연방 공화국 전체가 주권을 선언하였고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개혁파의 옐친은 소연방을 해체하면서 구 소연방 구성 공화국 중 발트3국과 그루지야를 제외한 나머지 11개국으로 느슨한 형태의 독립국가연합을 출범시켰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형성된 소련 제국은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해체되기 시작하여 옐친의 의해 죽음을 맞이하였다

 

12장 스웨덴의 산업화

 

1. 산업화와 스웨덴

유럽의 북동쪽 변방의 빈곤한 농업국이었던 스웨덴은 1850년 이후 산업화의 국면에 접어들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14년 무렵이면 산업사회로 변모한다. 또한 근대적인 사회 조직과 정치의 민주화도 진행되었다.

 

2. 농업의 구조적 변화

* 스웨덴의 산업화의 토대는 농업에 있었다. 산업화 이전 스웨덴사회는 큰 변화가 있었다.

인구증가: 1720년에 140, 1815년에는 240, 1860년에는 380만 명이 되었다. 인구의 증가는 곡가가 상승했고 다시 식량증산의 유인이 되었다

 

경작지의 확대와 토지의 사유화

- 1749,1757년에 경지통합법이 공포됨으로써 모든 농민은 자신의 보유지 통합을 요구할 권리를 지녔다.

- 1827년의 법은 경작지를 분할하는 것이 용이해졌고, 영농 방식의 개선으로 휴경지 면적이 크게 감소하여 종전 방식에 비해 더 많은 수확을 얻었다.

 

농촌 사회의 분화

- 830년대 이후에는 스웨덴에서도 도시민이 증가하지만 1860년대에 들어서도 도시 인구는 전 주민의 10퍼센트에 불과 했다. 공업화가 진척되기 이전에 늘어나는 인구를 흡수한 영역은 농업이었다.

- 18세기 농업 종사자가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했다. 그중 국왕의 토지대장에 등재된 농장을 보유하거나 경작하는 자들 이 자영농이었는데, 자영농의 보유토지규모가 확대되어 상층신분과의 지위의 격차를 줄이게 되었다. 반면 토지를 보유 하지 못한 하층 농민, 즉 소작농과 오두막살이 농, 머슴 사이의 사회경제적 격차는 늘어났다.

- 특화된 상품생산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 목재 일상용품이 수공으로 제작, 구리제품 생산

- 경제의 자유주의적 성격도 강화: 1800년대 매뉴팩처에 대한 규제가 철폐, 1864년부터 영업자유법으로 스웨덴 사람은 누구나 어디서나 상업이나 수공업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865년 재무상 그리펜스테트가 추진하여 스웨덴도 자유무역의 대역에 합류했다.

 

특화 상품 생산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

- 목재 일상용품이 수공으로 제작, 구리 제품이 생산되어 널리 판매

 

경제의 자유주의적 성격도 강화

- 1800년대 중반 매뉴팩처에 대한 규제가 철폐

- 1864년부터 영업자유법으로 스웨덴 사람은 누구나 어디서나 상업이나 수공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 1865년 재무상 그리펜스테트가 추진 스웨덴도 자유무역에 대열에 합류하였다

 

요컨대 스웨덴 산업화의 전제조건들은 개선되고 점점 더 상업적인 성격을 띠며 팽창했던 농업에 이었다. 농업의 성장 이 시장과 노동력, 원료를 공급했던 것이다.

또한 교육수준은 1850년 대부분이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고, 중앙정부는 개혁과 거대사업을 추진할 만큼 강력했다. 1820년대와 1830년대의 토지정리법령들과 예타운하의 건설, 1842년의 초등학교법은 국가가 산업화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3. 산업화의 진전,1850~1914

* 초기산업화는 1850~1870년대 시기를 말한다.

* 산업화는 제철업과 제재업에서 먼저 촉발되었다. 영국으로부터 봉강과 제재목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였기 때문이다.

 

제재목

- 1850년대 스웨덴 제재목에 대한 해외 수요가 크게 증가한다.

- 수출의 목적으로 새로이 등장한 제재소는 종전의 농민 제재소보다 훨씬 컸고 공업화의 영향으로 새로운 톱날과 시설, 증기동력의 이용으로 처리용량도 크게 늘어났다.

- 제재목의 수출은 1850~1860년대 4배로 증가했으며, 전체 수출액의 1/3이상을 차지하였다

 

제철업

- 숲과 순도 높은 광석, 풍부한 수량 등 봉강 생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영국인들이 코크스를 사용하여 선철을 주조하자 철수출의 타격을 입은 스웨덴은 생산방식을 개선하여 미국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도 했다.

>>1870년대 목재업과 제철업은 전체 산업 생산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직물산업

- 내수시장을 겨냥한 직물산업

- 1830년대부터 영국에서 들여온 방적기로 값싼 무명실을 생산, 1850년대 방적공장들이 설립, 모직물의 제조도 기계화되 었다.

 

식량의 생산과 제분, 양조, 도축, 낙농에서도 공업적생산방식이 많이 적용되었으며 그 생산량도 증가했다.

* 스웨덴의 수출품에 대한 해외의 수요가 많았고 그 가격조건도 유리했기 때문에 스웨덴은 큰 이익을 얻었고, 이는 다른 산업부문에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수출산업은 경제성장의 추동력이었던 것이다.

 

2) 국가의 역할

* 산업화의 두 번째 시기는 1870~1890년대 호황기까지로 볼 수 있으며 이시기는 국가의 역할이 증대된 시기이다.

 

* 1870년대 말부터 1890년대 중반까지 스웨덴수출품은 타국의 경쟁에 직면했고 그 가격도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농업과 공업을 보호하기 위한 관세장벽도 높임으로서 보호무역대열에 동참했다. 또한 이시기는 경제발전에 대한 국가책임이 증대된다.

 

철도부설

- 스웨덴을 공업국가로 변모시킨다는 목표로 강력히 추진된 사업이다.

- 1850년대부터 국가 교통망의 근간으로서 운하를 대체했고, 인구밀도가 높거나 낮거나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철도가 부설되었고, 화물수송에 필요한 사철도 건설되었다.

 

금융

- 1800년대 중반 국가는 원활한 신용의 공급을 위해 왕국은행이 사유 상업은행에 저금리로 신용을 제공했으며, 정부가 사유은행에 지폐를 발행하여 신용을 공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 금융시장의 자유화도 병행> 은행은 자체적으로 이자율을 결정했고, 1864부터는 원칙적으로 누구든지 주식회사 형태의 은행을 설립할 수 있었다.

- 1880년대 들어 상업은행이 해외무역의 금융도 담당했고, 채권과 주식의 발행을 통해 산업자본의 공급에도 착수했다.

 

주식회사

- 1870년대 주식회사가 본격적으로 설립되고 1914년 즈음에는 산업 노동자의 3/4이 주식회사에서 일했다

-이러한 발전은 가족과 인적 관계가 중심이 된 옛 경제구조가 익명성의 대규모 경제 체제로 전환되었음을 보여 준다.

 

3) 산업화의 완성

산업화의 세 번째 단계는 1880년부터 1914년까지 시기로 산업화가 완성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시기 공업은 급성장 했다. 생산은 고정화폐가치로 5배가 증가했고 산업노동종사자는 총인구의 30퍼센트에 달했다. 상대적으로 농업은 생산 가치와 고용의 측면에서 더디게 성장했다. 1890년부터는 농업의 절대인구가 감소했다.

 

* 이시기의 특징

- 내수 시장이 수출 시장보다 더 팽창하여 산업이 내수 시장을 더 지향했다 : 제철업: 건설업기계공업의수요 증가에 따라 내수 산업으로 전화했다

- 전통적인 수출산업이 국내원료를 한층 더 많이 사용 목재업: 제재목의 수출은 감소하고 펄프수출이 세계최대가 되었다

 

기술의 혁신으로 성공을 거둔 기업들의 경쟁력이 우세해졌으며 수출의 토대를 마련했다

- 1883년 설립된 세파라토르의 우유 분리기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 스웨덴 전기 주식회사는 발전소 건설과 전동기계 등 산업발전에 필요한 제품을 공급하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출도 급성히 증가하여 20세기에 들어서면 수입을 넘어선다.1910년대에 기계류의 수출액은 전체의 1/10에 달했다.

 

소비재 산업의 팽창

- 제화업도 기계의 도입으로 수공업 단계를 넘어섰고, 담배제조, 양조, 제분도 기계화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에 소비가 크게 증가했다.

 

4. 산업화의 결과

생활수준의 향상이었다.

- 1800년대 중반부터 국민총생산(GNP)은 인구보다 빠르게 증가했다. 세기말 인구가 증가했음에도 생활수준이 개선된데 에는 산업화로 인한 생산성 향상이 큰 역학을 했다

 

반면 어두운 측면도 있었다.

산업노동자는 어둡고 열악한 환경에서 오랜 시간 기계리듬에 따라 작업하며 엄한 감시를 받았고, 초기의 기계는 위험했 고 사고가 빈번했다.

- 인구가 밀집한 공업지대가 형성되었는데 위생문제와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 전염병사망률이 높았다

 

노동 계급의 등장

- 노동조합의 목표는 일자리에 대한 경쟁의 제한과 임금조건의 통제였다

- 1890년대 본격적으로 노조가 조직되기 시작하여 1898년에는 노동조합의 중앙 조직인 노총이 설립되었고 노동조합의 성장과 중앙 기구의 설립은 고용주들에게 압력이 되었고 그들의 중앙 기구인 스웨덴 고용주 연합이 1902년에 탄생했다.

 

정치 부문의 노동운동

-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개혁주의 정당으로 창당되었다

- 당은 기술의 발전과 공업의 발달을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생산의 성과를 다른 방식으로 분배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노동 계급을 결집시켜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 이는 보통 선거권과 의회주의의 쟁취라는 목표로 삼아 전력을 다하였다

 

5. 스웨덴 혁명

스웨덴 혁명은 의회주의와 성인 남녀의 보통 선거제로 대표되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립이다.

 

혁명의 시작은 제1차 세계대전 독일의 원료공급으로 스웨덴 경제에 유리하게 작용하였으나 연합국은 독일과 교역하는 것에 불만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후 식량의 배급이 시작되고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은 파업과 폭동으로 이어졌다.

 

자유당과 사회민주당은 함께 연립 정부를 구해하여 스웨덴에서 처음으로 의회주의가 성립하게 되었고 헌법 개정 됨에 따라 지방선거에도 보통 평등 선거가 도입되었고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다. 이로서 스웨덴의 민주주의가 도입되었다.

 

13장 복지국가 스웨덴

 

1. 스웨덴 모델

* 스웨덴은 19세기 말까지 북유럽의 가난한 농업국가에 불과했지만 산업화로 사회전반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1950~1970년대에는 복지국가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스웨덴국가의 발전을 흔히스웨덴 모델이라는 개념으로 지칭되었다

노동시장 당사자 간의 구체적인 협상관계를 지칭한다

- 스웨덴 노총(LO)과 스웨덴 고용주연합(SAF)사이의 중앙 교섭, 양자 간의 협약인 살트시에바드 협약, 연댕 임금 정책, 노동시장에서 분규를 회피하려는 노력 등이다.

 

1930년대부터 발전한 복지국자를 가리킨다.

- 복지국가는 1933위기협약이후 44년간 정권을 담당했던 사회민주당이 주도적으로 건설했다

 

넓은 의미의 스웨덴 모델은 타협과 합의의 정신을 뜻 한다

- 20세기 스웨덴정치와 경제의 특징은 다양한 이익집단들 간의 타협이다. 이는 깊은 역사적 뿌리를 지닌 것으로 평화로운 노동시 장과 복지국가 건설의 전제가 되었다.

 

2. 사회 문제와 초기 사회 정책

산업화 문제를 사회문제로 인식, 가장 주목받은 것이 아동문제, 여성문제였다.

- 아동문제: 아동 노동에 관한 규정은 1881년 법으로 확정되어 열두 살 이상으로 아동 노동을 제한하던 관습이 법률조항으로 구체 화되었으며 다양한 연령 집단의 1일 최대 노동 시간이 정해졌다

- 여성문제: 출산과 관련하여 여성의 지하 노동이 금지되었다

 

1880년대 사회정책의 선구자들은 도시 출신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아돌프 헤딘은 사회 입법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 1889직업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요구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 1891년 질병 기금법을 통과시켜 질병 기금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보장했다

- 초기 자유주의자들에게 사회 개혁이란 자조와 개인의 책임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 1903년 창설된 사회사업중앙연맹은 자유주의적 원칙을 바탕으로 초기 사회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 기본적인 사상은 자발성, 예방적 자조, 개인의 책임이었다.

- 1913년 도입된 국민연금의 이론적 근거도 자조에 대한 지원이라는 자유주의적 원리였다. 이 제도의 도입은 적은 보험금 때문에 실효성은 없었지만 복지국가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1920년대가 되면 사회정책의 주도권이 자유주의자들에게서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간다.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의 회에도 진출함에 따라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도 한층 더 증대되었으며 사회 정책도 사회민주당이 주도하게 되었다.

- 사회민주당에게 가장 시급했던 과제는 실업보험이었다. 1차대전후 산업생산이 위축되어 실업률이 크게 증가했다. 경기침체와 구 조조정의 결과로 형성된 실업자들을 지원해야 했는데, 실업데 대한 당의 대책은 실업보험이었다.

 

실업자 구제 정책은 국가실업위원회에서 현금지원과 취로사업의 방법으로 지원하였다. 이는 실업보험이 도입되기 전까지 임시방 편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당들의 반대로 실어보험은 도입되지 못했다

 

취로사업은 노조에 큰 문제를 야기 시켰다. 낮은 임금과 지방 정부가 점차로 경쟁 시장의 조건으로 시행해야 할 사업들을 취로 사업으로 선정함으로 노조의 노동자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노사분규와 관련하여 실업자 지원을 크게 제한했다.

 

3. 인민의 집, 위기협약, 살트시에바드 협약

* 사회민주당의

인민의 집

- 1928년 선거의 패배를 계기로 사회민주당은 당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심도 깊게 논의를 진행했다. 당수 페르 알빈 한손은 사회민주당이 오래전부터 국민 정당이었음을 강조하면서 당의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인민의 집으로 표현했다.

- 사회는 국민에게 집과 같은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민주당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공략하려 했던 대상은 농업노동자였다. 그러나 인민의 집이데올로기에는 계급의 간격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연대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이 표현되어 있다.

 

위기협약

- 1932년 경제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사회민주당은 위기 타개를 위해 실업자지원사업을 폐지하고 공공사업을 시행하여 고용을 촉진하고 구매력을 증대시키려 했고, 실업자에 대한 현금 지원의 확대와 농업에 대한 지원의 강화를 요구했다.

- 특히 1932년 선거전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의 상호 구매력에 의존한다고 강조함으로써 농민에 대한 선전을 강화했다. 스웨덴 노동 자들의 구매력이 커지면 농민은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사회민주당의 이러한 의지는 1932년 선거의 승리를 가져왔으나 1928년 이전 수준을 회복하는 데에 그쳤고, 정부를 수립했으나 실업정책은 실패의 위기에 처했다.

- 이때 농민당과 사회민주당의 접촉을 통해 양 정당이 실업정책과 마가린에 대한 소비세 도입과 축산물 가격보장 등 농업지원책을 상호 수용함으로써 소위 위기협약이 체결되었다.

 

살트시에바덴

- 협력의 움직임은 노동시장에서도 감지되었다.

- 국가는 1928년 산업평화협의회에 양측을 초청하여 상호이해의 증진을 목표로 하는 산업평화위원단을 설립했다.

그렇지만 1930년대 초 경기 침체로 대립이 다시 심화되었고, 노사 분규도 증가했다. 이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1932년 선거 에도 영향을 미쳐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데 기여했다. 이후 노동 시장은 평온해졌고 노사 분규는 감소했다.

- 1936년 노총과 고용주 연합은 국가의 간섭을 배제한 채 노동 시장에서 분쟁을 피할 방식을 찾자는 데 합의하였다.

- 1938에 살트시에바덴에서 두 조직은 협약에 서명하였다. 그 목적은 노동 시장의 대립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새로운 협력의 토 대를 만드는 것이다. 주 협약은 노사 분규가 발생했을 때 따라야 할 명확한 협상의 절차를 규정하고 있어 파업과 직장 폐쇄를 실 행하기가 더 어렵게 되었다. 주 협약에 뒤이어 일련의 후속 협약이 체결되어 분쟁을 둘러싼 교섭 절차가 마련되었다. 이 협약은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했고 이는 전후 급속한 경제적사회적 발전의 중요한 토대를 이루었다.

 

4. 복지국가의 건설

위기협약 이후 사회민주당은 의회민주주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44년간의 장기 집권을 통해 복지국가를 건설했다. 사회민주당은 높은 생활수준을 균등하게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효율과 성장도 동시에 추구했다.

 

사회민주당은 1944전후 강령을 통해 국가주도로 산업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을 입안했다. 사회민주당은 평등과 효율을 동시에 추구했던 것입니다. 또한 살트시에바드 협약이 상징하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역사적 타협도 성장의 동력이었다.

 

전후 강령의 세 가지 주요 목표

- 완전 고용

- 공정한 분배와 높은 생활수준

- 산업의 효율성 증대와 산업 내 민주주의 확대

 

사회민주당 정권이 추진한 복지 정책의 목표는 누진세를 통한 모든 시민의 보편적이고 평등한 복지와 생산성을 촉진하는 예방적 사회정책으로 요약된다. 모든 측면에서 시민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지만 각종의 지원에 앞서 고용을 창출하는 것 또한 복지국가의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위기협약으로 1934년 실업보험이 도입되었다. 그 외에 다자녀 가구에 대한 주택 지원, 모성수당, 임산부의 진료비와 출산비용지원, 2주 유급 휴가 등이 시행되었다. 1946년 모든 정당이 국민연금의 인상을 지지했고, 1948년에는 아동수당이 도입되었다. 1951년에는 법정 유급 휴가가 2주에서 3주로 늘어났는데 후에 5주까지 확대된다. 노동시간은 주당 40시간까지 감소했고, 토요일 휴무제가 도입되었다. 1950년 종합학교가 설치되었고, 1962년에는 9년제 종합 학교 의무교육이 결정되었다. 1955년에는 질병보험이 강제보험으로 도입되었고, 1957년에는 구빈법을 대체하여 사회지원법이 발효되었다.

 

연대 임금 정책

- 1950년대 사회민주당 경제 정책의 핵심으로 예방적 사회 정책의 성격을 띠었다.

- -메이드네르 모델로 부르는 이 정책은 1951년 노총 대회에서 채택되었는데, 노총과 고용주연합에 협력과 중앙화, 즉 산업 평 화와 1955년부터 시작된 임금의 중앙협상이었다.

- 이는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이라는 목표를 지닌 연대 임금 정책은 팽창하는 산업과 기업에서는 이윤을 축척하게 해 주었고 이 는 투자와 고용 증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 반면 연대 임금을 지급할 수 없는 기업은 문을 닫게 된다. 그 노동자들은 재교육을 받고 이직을 해야 했다. 사회가 노동 시장의 유동성을 적극 촉진시킨다는 것이 렌-메이드네르 모델의 중요한 요소였다.

- 이러한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은 높은 성장과 낮은 실업률에 기여함으로써 스웨덴 모델의 초석이 되었다.

 

스웨덴 복지국가는 생산의 촉진과 예방적 사회 정책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 실업자 지원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사용되지만, 고용과 재교육, 직업교육, 노동 시장의 유연성 확보, 질병과 재해의 예방, 가족 지원에는 훨씬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

- 생산을 촉진하는 사회 정책에는 많은 비용이 들지만, 비생산적 사회 비용의 지출이 그에 상응하여 감소했다.

- 이로써 얻은 성과가 완전 고용과 계급 간 격착 해소, 복지국가 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 였다.

 

스웨덴은 타협과 협력의 정신으로 국가가 국민의 복지를 책임지는 인민의 집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5. 타협과 협력의 정신이 이룩한 근대 국가의 모범

* 스웨덴은 파시즘의 광풍이 풀던 1930년대부터 평화로운 사회발전을 이뤘다. 그 발전은 여러 요인들이 결합하여 나타난 결과이다.

* 근대 스웨덴의 발전에 기여한 요인

- 강력한 국가

- 민주주의적 전통: 합의와 타협의 성향을 강화시켰다

- 사회민주당은 협력과 상생의 정치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타협과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14장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닐 때

 

1. 근대사의 시작

중국 근대의 기점으로 아편전쟁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편전쟁으로 중국은 개항을 하게 되는데 이는 중국과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쳤다.

-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대외무역은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 아편전쟁 이후 청은 난징조약으로, 일본은 가나가와 조약과 안세이5조약으로 조선은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하였다.

 

아편전쟁에서 청의 패배는 중국과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 전통적인 동아시아국제질서였던 중화주의적 조공체제는 대등한 주권국가 사이의 근대적 조약체계, 불평등조약체제(반 식민지), 제국주의 체제(식민지)로 재편되었다.

- 베트남은 1884년 청불전쟁을 계기로 조공질서에서 떨어져 나왔고, 조선이 1894년 청일전쟁으로 독립국이 되었다.

 

중국은 난징조약을 시작으로 각종 불평등조약을 강제당하며 점차 반 식민지적 상황으로 빠져 들었다.

- 영사 재판권, 협정 관세율, 편무적 최혜국 조관을 서구 각국에 양보해야 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내정에도 지각 변동이 발생했다

-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황제지배체제가 붕괴하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1889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2.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중국

개항 당시에도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였다.

 

노동집약농법을 바탕으로 중국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제국경제를 영위해 왔다

 

유목민 만주족이 명을 대신, 중원의 패자가 된 후, 18세기에는 상업혁명이라고도 할수 있는 경제적 호황기를 맞았다.

 

17세기 중반부터 중국인구는 100년만에 2배로 늘어 18세기 초반에 이미 3억에 육박했다.

 

신대륙작물인 옥수수, 감자, 고구마 등이 유입되면서 건조하고 경사진 땅에서도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남자 는 농사를 짓고 여자는 길쌈을 하는성별 노동 분업이 농촌 내에 정착하면서 양쯔강 중하류를 중심으로 농촌수공업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17세기 이전에 양쯔강 삼각주지역에는 비식용작물인 비단과 면의 생산특화가 발생했고 양쯔강 중부분지지역은 양쯔강 삼각주를 겨냥한 식량수출지역으로 특화했다. 이러한 특화와 함께 전국적인 미곡시장이 형성되었다.

 

장거리무역이 발전함에 따라 결제 활폐시스템이 발전했다. 동전은 지역 내의 소규모거래와 구매에 사용되었고 장거리 결제와 세금의 지불에는 은이 사용되었다.

 

1720년대 초와 1760년대 사이에 무역량은 5배가 증가했고 18세기 말까지는 8배가 증가했다. 18세기는 전반적으로 농업과 원공업화의 팽창시기였다.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그 칠 줄 모르는 인구증가추세에 밀려 생산성은 하락하기 시작했고 이는 환경이 고갈되고생태계가 파괴되었으며 19세기에 들어서자 폭발적으로 증가한 아편수입으로 갑작스럽게 은이 유출되면서 외국에서 유입 되는 은의 양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들어와 심화되는 위기는 중국에서 불경기와 내란으로 나타났다. 유동인구의 증가에 따른 이주민과 정착민 사이 의 사회적 갈등이 재해로 인한 극한 상황에서 쉽게 반란으로 이어졌고 신장과 쓰촨의 반란과 백련교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수년치의 세입이 투입되어 재정상태는 악화되었다.

 

3. 아편전쟁과 난징조약

1830년대에 들어서 아편이 본격적으로 문제시되었다. 19세기 이후 아편밀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그 결제수단인 은 이 막대하게 유출되었다.

 

이는 통화 공급축소, 물가하락, 농민의 세금부담가중 등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만주족정규군인 팔기군병사와 관리들에게 퍼지면서 사회통제체제가 이완되었고 각종반란을 효과적인 진압능력이 현저 히 떨어졌다.

 

푸젠도어사 장원의 상주 이후 아편밀수가 은 유출을 일으킨다는 인식이 일반화되기 시작하고 사회경제의 붕괴주범으로 서 아편문제가 재인식되었다.

 

그 가운데 아편흡연자 사형론을 지지했던 임칙서가 1839년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어 아편무역의 온상지인 광저우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아편매매를 엄금시키고 영국을 비롯한 각구거 상관에서 아편2만여 상자를 몰수하여 공개적으로 소각하였다. 이 강경 조치는 아편전쟁을 초래했다.

 

청의 패전으로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 후먼조약 등 부속조약에 의해 관세자주권의 상실, 영사재판권, 최혜국 대우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불평등조약체제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청조의 권위는 크게 실추했다.

 

대내적인 부분

- 18세기 말 이래 현저화한 사회질서의 붕괴와 재편이 가속화 되었다

- 기독교의 유입, 해운의 흥성 등의 영향으로 태평천국운동이 중국 내에서 발생하여 14년간이나 끌면서 중국을 초토화 시켰다.

- 정치적의미를 떠나서 태평천국운동은 개항으로 인한 달라진 국제환경과 국내문제해결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중국 의 역량을 심각하게 훼손시켰고, 중국의 가장 부유한 중부 양쯔강유역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대외적인 부분

- 중화질서에 기반한 조공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 1879년 류큐 왕국은 일본의 오키나와 현으로 편입되었고 1884년에는 베트남이, 1894년에는 조선이 조공질서에서 이 탈하였다.

 

청일전쟁의 패배로부터 중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로부터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15장 근대의 동아시아적 유통과 중국

 

1. 청말 정치의 새로운 공간

무능한 청의 정규군인 팔기군을 대신하여 태평천국운동의 위기에서 구해 것으로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 한족관료는 자강부강을 표방하며 강력한 군사력과 각종 근대산업을 육성하려는 것이 양무운동이다

 

1861년 신유정변부터 1894년 청일전쟁에 이르는 33년간 지속되면서 외교관의 설립, 신식군대의 창설, 해군의 건설, 근대적군수공업의 육성, 기선회사의 설립, 광공업의 개발, 근대적면직장의 설립, 신선과 철도의 부설 등 새로운 서구적인 문물이 중국에 처음 도입되었다.

 

양무파는 대부분 지방의 최고 행정장관으로서 지역색이 농후했고 근대적공장도 관독상판, 즉 정부가 감독하고 매판상 인에게 경영을 맡겼는데, 지나친 정치적 간섭으로 자율적경영이 어려웠고 재투자를 하지 않아, 경영에 성공한 사례가 드 물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물질적 근대화의 무력함을 반성하면서 중국정치를 이끌 새로운 양대 세력, 즉 변법파와 혁명 파가 나타나게 된다.

 

강유위의 변법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중국도 입헌군주제 국가로 거듭나고 정치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 고, 손문의 혁명파를 서구적모델에 따른 개혁안을 제시하며 양대 정치세력으로 새롭게 등장했다. 변법파는 무술변법을 실시했지만 103일 만에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청조의 탄압 속에서도 입헌운동 등 개량적 방법을 제시한 변법파와 체제전복을 주장한 혁명파가 중국지식인을 양분하며 새로운 정치 공간을 형성해 갔다.

 

2. 개량이냐 혁명이냐

변법파(개량파)와 혁명파의 논전이 펼쳐진 곳은 베이징이 아닌 도쿄였다.

 

20세기 들어서 많은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유학이 흥성하게 된 요인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모델로 인식되었고 과거제가 폐지되어 새로운 입신수단으로서 해외유학이 부각되었고 일본어를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어학적 이점과 경비가 구미보다 저렴하며 풍속이 비슷한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

 

도쿄에 모여든 중국지식인들은 중국의 진로에 고민하여 조직을 결성하고 잡지를 창간하였다. 이들 사이에서 논쟁의 초 점이 되고, 가야할 길을 제시했던 것이 변법파,즉 개량파와 혁명파였다.

 

개량파인 강유위와 양계초의 보황회신민총보와 혁명파인 손문의 중국혁명동맹회민보도 입헌군주제를 선전하면 서 광서제 복위와 개명전제를 주장하였다.

 

혁명파의 기관지인민보와 개량파의 간행물은신민총보는 중국을 구할 방법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렸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그들이 귀국한 이후 이러한 네트워크는 1911년 신해혁명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3. 공화국의 탄생

국내의 혁명정세역시 고양되어갔다. 청조는 의화단운동 실패 후 내외의 정치개혁요구에 수동적이나마 부응해야만 했다.

 

청조는 신정을 통해 헌법제정과 의회개설을 약속했다. 한족 신사층 내에서도 헌정과 의회개설요구가 높았다. 1909년에 각성에서 선거를 통해 지방의회격인 자의국이 개설되어 각 지역의 입헌파신사층들의 조직화와 활력이 크게 증진되었다.

 

하지만 청조가 19115월에 황족내각을 발족시킴으로써 한족 신사층의 합법적인 정치참여의 꿈을 좌절시켰다. 게다가 지방 신사층이 주도했던 철도이권회수운동에 찬물을 끼얹는철도 국유화조치를 결정함으로써 개량적인 입헌파인 지방 신사층도 청조타도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결국 1911년 우창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를 계기로 각 성이 독립적으로 성 정부를 구성하고 독립을 선포하면서 개항후 70년간 버티던 청조는 무너졌다. 그리고 중화민국이 개국하면서 2000여 년간의 황제지배체제가 끝이 나고 공화국이라 는 새로운 시대가 중국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4. 근대적 지식의 동아시아적 유통

중국이 서구근대를 수용하는 데에는 개항장을 통한 직접적인 수입도 있지만 교육과 출판의 확대 유학으로 서구를 체험 한 새로운 엘리트들의 등장 역시 커다란 작용을 했다. 출판과 잡지의 확대는 근대적 지식을 퍼뜨리는 대중교육의 장이 되었다.

 

청말 우편제도의 실시로 베이징, 상하이 등지 대도시의 신문과 잡지는 자방으로도 유통되었다. 특히 청말 각종 정치 이 슈의 등장과 여론의 활성화는 이러한 정보의 대중적 유통과 상호상승작용을 하였음에 틀림없다.

 

번역 역시 근대적지식의 소개자였다. 청조 최초의 유럽 파견유학생으로 선발된 엄복은 영국의 진화론자 토머스 헉슬리 의잔화와 윤리를 번역한 천연론의 출판은 중국 지성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898년에 70여 종에서 5년 후 250여 종으로 크게 증가했다.

 

일본의 번역어를 참조하여 서구서적을 대량으로 번역했는데 번역어를 공유함으로써 근대적지식이 동아시아에서 유통되 었던 것이다.

 

5. 사회진화론의 사례

번역어의 유전처럼 단순히 유통루트에 따라 종속적으로 그대로 수입되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근대는 분명히 서구 에서 발원한 것이지만, 수입하는 주체의 상황과 인식에 따라 그 수용방식과 효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회진화론이다. 사회진화론 중에서도 영국의 스펜서가 주창한 사회유기체설은 경쟁에 의한 사회 발전을 강조하였는데 중국과 일본에서도 크게 환영받았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 조선의 사회진화론 수용은 달랐다

 

일본에서는 사회유기체론이 가토 히로유키에 의해 천황주의적 국가론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충군애국의 도덕을 경쟁 시키고 진화시킴으로써 전체로써 일본의 국체를 유지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일병합과 대동아공영권구상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사회 진화론적 의미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선전으로 끝까지 살아남았다.

 

조선의 진화론은 약자의 입장에서 엄혹한 국제환경을 제대로 직시하고 생존을 모색하는 자강과 혁명사상으로 기능 했었다. 그러나 일본에 의한 망국이 점차 현실화되었을 때, 사회진화론은 한말 지식인들에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을적자생존의 불가역의 법칙으로 인정하는 식민지의 패배 의식으로 작용했다.

 

중국은 사회진화론을 가장 역동적이고 자의식을 가지고 소화하고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혁명파의 장병린은 사회유기체설에서 국가가 개인을 흡수하려는 것을 부정하고, 진화의 주체를 민족과 인민으로 의식하 여 개인의 주체성에 기반 한 진보를 주장하며, 진화론을 거부하는 진화론을 내세웠다. 하지만 가장 강력하고도 철저하게 사회진화론을 비판하고 중국 지성계를 사로잡았던 것은 무정부주의였다. 무정부주의는 진화의 동력을 약육강식과 적자생 존의 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로 보았다. 서구자본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가올 새로운 문명은 노동과 호조에 기반하여 모든 강권이 사라진 유토피아적 세계가 될 것이며, 이를 선도하는 것이 중국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16장 근대적 산업화의 길

 

1. 개항과 경제적 근대화

중국을 개항시킨 영국의 가장 큰 목적은 산업혁명 이후 공급 과잉상태에 있었던 면포의 수출시장개척이었다. 그러나 개항 후 일시적으로 무역이 증가했지만 그 후 영국의 대 중국수출은 침체를 걸었다

 

중국국내의 수직면포는 기계제면포와의 경쟁에서 놀랄 정도로 경쟁력을 발휘했다. 중국농민들의 노동복과 일상복으 로 쓰기에는 얇고 가벼운 영국제기계면포보다는 두껍고 질기고 따뜻할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수입한 기계면사를 이용하 면서 그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해서 외국의 기계식 면포와 경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단과 생사생산은 미국의 기계식견직물과 일본생사 때문에 점차 쇠퇴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수공업경제의 재편과 더불어 근대적 경제부문이 서구자본에 의해 소개되었다. 서구물질문명을 수입하여 중국의 자강을 꾀하려 한 것은 양무파 관료들이었다. 우선 양무파의 부국강병정책과 관련하여 기선과 철도 및 군수공업 이 도입되었다.

 

근대적 기선회사가 설립되고 철도가 부설되었으나 전통적인 정크선이 내륙수운을 담당하며 수상운송의 큰 비중을 차지 했고 철도부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높았고 철도의 석탄 등 원자재운송량도 많지 않았다. 군수사업도 정치적 영향을 받아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모노세키조약 이후 외국인이 개항장에서 공장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을 보면서 중국의 토착자본이 근대적 산업에 투여되고 1895년 이후 개항장에는 외국 기업만이 아니라 중국의 민간 기업 역시 크게 늘어났다.

 

1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유럽 상품이 전쟁수요를 대는데 바빠 수출을 할 여력이 없자 중국 내에서 경쟁력이 약화되고 중국의 근대적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 산업 발전과 사회주의

1차 세계대전 시기의 산업 붐으로 개항장을 중심으로 근대적 산업이 크게 발전하자 이 산업을 지탱할 산업노동자의 수 역시 도시에서 크게 증가하였다. 민족자본의 역량강화는 돌아올 외국자본에 대항하는 심리를 강화시켜 민족주의의 고조를 가져오게 된다.

 

민족자본의 성장과 근대적 산업발전을 배경으로 54운동이 일어났다. 54운동은 중국근현대사상 최초로 성공한 대중운 동인데 그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했다.

 

초기의 노동자계급을 조직하는 힘은 공단주의, 부정부주의, 노동조합주의였지만 점차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커졌다. 1 차 세계대전 때 중국의 참전선언으로 노동자들이 프랑스와 러시아의 철도사업에 고용되었는데 그때 유럽의 선진적사회 주의 노동운동과 러시아혁명을 목도하였다.

 

1925530운동을 계기로 정치투쟁의 성격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투쟁으로서 전국적으로 반제 운동을 확산시켰다. 이를 계기로 결국 1928년 장개석의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하였다.

 

난징 국민정부의 주요한 산업정책은 관세자주권의 회복과 이에 기반한 수입대체산업화의 추진이었다. 19311933 1934년에 관세개정을 단행하여 소비적인 수입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크게 인상하여 국내산업을 보호하고 수출세와 원자재 및 생산재의 관세는 인하하였다. 또 국가은행을 정비하고 자산력을 키웠으며 1935년에는 법폐개혁을 하여 복잡 한 화폐상황의 통일 등 근대화를 위한 환경의 대정비로 중국경제의 성장을 도모하였다.

 

1936년 국가자원위원회는 산업진흥3개년 개획을 입안하여 중공업건설을 계획하였으나 중일전쟁 발발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3. 중국 경제와 일본

일본은 중국경제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강력한 성장정책을 추진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의 전시 호호아을 누리면서 공업국형 산업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1927년 공황이 본격화됨에 따라 일본은 중국시장 확보를 위해 무력을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이 관세자주권을 회복하면서 일본이 중국시장에서 이권을 잃은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 만주와 화북지역을 장악하고 조직적인 밀수로 난징 국민정부의 관세정책을 무력화시켰으며 밀수 된 일본상품이 시장에 넘쳐나면서 중국의 근대적 산업발전의 발목을 잡았다.

 

그렇지만 일본은 자본진출이든 침략이든 중국에 최대로 자본을 투자한 국가였다. 재화방에 면방직 공장을 텐진, 상하이 에 설립하여 그 선진적인 기술, 설비, 노사관리는 중국자본기업의 모델이 되었다. 일본은 만주의 전쟁에 대비할 목적으 로 최신식의 중공업건설, 철도투자, 광산개발 등 경제개발정책을 펼쳐 다수의 중공업공장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근대화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4. 1949년 이전의 중국 경제

근대 이후 중국이 경제적 근대화를 추진했음에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까지 인구 대부분이 농경에 종사 하였고 산업 가운데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하지만 근대화 부분에서는 높은 성장률을 보였으나 근대화 산업의 시작 시기가 너무 느렸다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 사회주의체제하에서 추진되고 있는 중국경제의 근대화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실험의 연속선상에 있다.

 

17장 근대 일본 정치의 전개와 특색

1.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통일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은 바쿠후와 270여개의 한(영주국가)으로 나뉘어 있었다.19세기 서양선박이 빈번하게 출현하고 아편전쟁에서 청이 영국에게 패한 것을 본 지배세력인 사무라이들은 군인이라는 직업성으로 이런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메이지유신(1868): 바쿠후가 외세의 위협에 유화적으로 대응하자 몇몇 한들은 바쿠후에 도전하기 시작했고 사쓰마와 조슈를 중심으로 한 반바쿠후 세력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천황의 이름으로 바쿠후를 해체시킨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선 분열되어 있는 일본을 통일해야 했다. 메이지유신주역들은 궁정쿠데타 직후부터 한의 철폐를 결정하고 치밀하게 준비하여 1871년 한을 철폐하고 중앙정부가 직할하는 현을 설치했다.

 

중앙정부가 징세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다이묘들을 전원 도쿄로 이주하게 하였다. 이로써 270여 개의 한들은 72개의 현으로 정리되었다.

 

2. 헌법 제정을 둘러싼 각축

메이지정부가 국민국가를 모델로 한 이상, 제한적으로라도 국민의 일부를 대표하는 정치세력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 했다. 메이지유신의 시작도공의여론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사회적으로 공의의 제도화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

 

조속히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개설하라는 자유민권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을 우려해 정부의 핵심 세력이 주도하는 것이 필요했다.

 

민간 쪽의 상황전개를 살피면서 헌법 제정을 향한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 정부의 실세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는 천황제 정부 조직을 모델로 했던 태정관제도를 폐지하고 서구풍의 내각제도로 개편했다. 내각의 책임자는 총리대신이고 그 휘하에 각 국무대신이 있었으며, 초대 총리는 이토 스스로가 취임했다.

 

1888년 추밀원을 설치했고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헌법을 심의하기 시작했다. 이 심의에는 원로원의 의관과 궁중의 요인 들도 참석했지만, 거의 전적으로 이토와 그 참모들의 뜻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3. 메이지 헌법의 특징

1889211대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되었고 1890년 제1회 총선거가 실시되어 의회가 구성되었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천황에게 있었고 천황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천황은 일본을통치하지 않고관망또는조정하는데 그쳤다. 흑 결정이 실패한다면 천황의 신성성이 훼손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권력기관은 내각, 추밀원, 군부, 의회 등이 거의 대등한 위상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각 기관은 천황에 대해서만 책임질 뿐 상호 통제 기능은 약했다.

 

이 권력기관들의 마찰과 갈등통합은 메이지유신의 공신그룹인 원로들이었다. 원로그룹은 헌법상, 법률상 존재하지 않는 법적으로는유령단체였으나, 그들이 메이지유신과정에서 쌓아 올린 권위와 강력한 리더십 때문에 자연스레 정치의 실권 자로 군림했다.

 

4. 근대 일본 정당 정치의 전개와 특색

천황의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 약속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정당이 출현했다.

 

대표적인 정당이 자유당과 입헌개진당인데 자유당은 농촌의 지주를 주요기반으로 하고 있고, 입헌개진당은 도시의 상공 인, 지식인, 퇴직관료들을 주축으로 했다>1880년대 민권운동의 고조로 내부 분열과 급진화로 해산되었다.

 

1890년대 처음으로 의회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보통선거는 아닌 재산세 3엔 이상 납부하는 남자만이 투표권 을 가졌다. 선거 결과 자유당계가 130, 입헌개진당계가 50석을 차지했다. 이들은 모두 정부와는 관계없는 야당이었다.

 

정부는 의회와 무관한 강대한 정부를 만들고, 의회를 적절하게 통제하면서 국가를 운영하려 했으나 의회와 정당의 세력 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 정부의 통제를 벗어났다.

 

조약개정이라는 외교 문제와 지조경감이라는 감세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와 의회는 자주 충돌하자 이토히로부미는 의회 내의 친정부 정당을 만들자고 주장하여 1900년 입헌정우회라는 정당을 탄생시키고, 스스로 총재에 올랐다.

 

이후 대략 10년 동안 내각구성과 총리선출에서 정우회는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이 1913년 제1차 호헌운동이다. 원로와 관료, 군부세력이 아직도 내각을 무너뜨리 거나 새로 만들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정당인, 지식인, 저널리스트, 그리고 도시 대중이 이에 반발하여 대중적인 정치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일본에 실질적인 정당 내각을 가져온 것은 1918쌀 소동이다. 도시 하층민들은 당시 쌀값의 급상승과 매점매석으로 쌀을 구하기 힘들게 되자 소요를 일으키는데, 원로 그룹은 이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후회 총재인 하라 다카시에게 정권을 주었다. 원로의 지명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정당 내각이 탄생한 것이다.

 

1921년 하라가 암살당한 후 일본의 총리는 또 다시 원로 그룹과 천황 측근들에 의해서 정해졌다.

1925년 정당내각을 구성하라는 대중운동, 2차 호헌운동이 일어나고 선거에서 제1당이 된 헌정당의 당수 가토 다카아 키가 내각총리가 되어 내각을 구성하고 이후 7년간 의 원내각제가 순조롭게 실시되었다.

 

1927년 전 성인남자에게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제도 실시와 정당내각제에 이론적기초를 제공한 요시노 사쿠조의 만본 주의가 시대를 풍미했고, 천황도 헌법에 제약되는 국가기관의 하나라고 주장한 미노베 다쓰키치의 헌법기관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이 시대를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과 군부의 대두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맥없이 무녀져 버린다.

 

5. 일본 근대정치의 출발을 어떻게 볼 것인가 : 공의의 제도화 과정

근대초기 일본에서 메이지정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정치세력은 의회설립을 요구하였다. 이는 19세기 중반부터 확대되기 시작한 공의에 대한 공감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의회설립은 공의의 제도화의 최종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18국민의 창출

 

1. ‘국민의 창출

근대에는국민이 창출되었다. 국민이란 전근대국가의 백성과는 달리 국가에 일체감을 갖고 정치에 참여하려는 지향을 갖는 존재이자 타 국민과는 강한 구별의식을 갖는 존재이다.

 

일본은 사무라이가 지배층이었고 그 인구는 전체 인구의 7퍼센트 내외에 달했다. 사무라이계층 내부에도 많은 차이가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일본국민이라는 의식이 형성되기는 어려웠다.

 

2. 신분제 폐지

1869년 메이지정부는 사무라이계층을 사와 졸로 나누고, 나머지 종전의 피지배계층은 모두 평민으로 했다. 1872년에는 하층 사무라이인 졸도 평민으로 편입시켜 모든 사람은 사족과 평민으로 나뉘었다.

 

사족은 국가로부터 봉록을 받는 등 여전히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를 부담으로 느낀 메이지정부는 1876년 강제 로 봉록을 폐지하고 정부채권을 주었다. 이로 인해 경제적 특권은 사라졌고, 정부의 재정부담은 크게 줄었다.

 

메이지정부는 신분에 따른 여행, 복장, 헤어스타일, 직업의 규제를 철폐하여 시각적으로 신분을 구별 짓는 제도들은 거의 없어져 갔다.

 

3. 징병제와 의무교육 실시

메이지유신지도자들은 징병제를 부강과 국민의 형성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인식하고 징병제는 1873년 성립되었다.

 

처음에는 기득권층인 사무라이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반발했다. 하지만 1877년 서남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징병군대의 위상은 높아졌고 군대는 각 계층의 젊은이를 국민으로 만드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했다.

 

의무교육도 국민을 창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민상호간에 일체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정치의식, 역사의식이 공유될 필요가 있었다.

 

18724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국민으로 일체화 시킬 수 있는 이념을 주입하였다. 처음에는 농민으로부터 반발도 있었으나 1890년대에 취학률이 90퍼센트를 넘을 정도여서 학교를 통해 재빨리 국민을 양성했다.

 

4.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침투

12세기말 사무라이정권이 들어선 이래 천황에게 정치적 실권이 없었고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1869년 교토에서 도쿄로 천도한 후 천황은 전국을 순행하며 자신의 존재를 일반인에게 알리면서 일본의 상징으로서 자신을 부각시켰다. 백성은 천황의 모습에 환호하며 일본국민으로 변해 갔다.

 

메이지정부는 교육칙어의 반포나 어진영 게시를 통해 천황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헌법반포식을 통해서도 천황은 근대 화와 문명개화의 선도자라는 인식을 국민에게 각인시켰고, 황실관련행사, 황실은혼식, 황태자결혼식, 메이지천황장례식, 메이지 신궁건설 등을 통해 국민과 천황의 일체감을 높이고 유지했다.

 

5. 정보 네트워크의 변화

18세기 말 이후에는 정보에 대한 수요와 유통, 공급이라는 측면에서 큰 변화를 보이는 시기이다. 정치 변혁의 조짐이 보여 바쿠후, 한의 지배자뿐만 아니라 일반 무사나 호농호상 등 각 정치사회 세력은 열성적으로 정보를 수집하였다.

 

바쿠후에서는 정보기관인 메쓰케를, 한에서는 루스이야쿠를 통해 권력기관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았다. 그리고 유곽과 숙박업소를 통해서 사회동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일반무사, 호농호상 등은 풍설서를 통해 정치정보를 얻 을 수 있었다.

 

이처럼 활발한 정치정보의 유통은 이후 네트워크의 형성, 미다어의 발달 및 공론정치의 형성에 그 기반이 되었다.

 

19장 근대 일본 경제의 성장과 사회적 변화

 

1.경제 성장의 과정과 성격

메이지유신이후 일본경제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 메이지유신 후 얼마 되지 않아 경제 성장이 시작되었다는 점이 다. 둘째는 경제성장률이 매우 높아다는 점이다.

 

이것은 정부가 경제성장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메이지정부는 산업계획에서부터 기술도입, 자금조달, 산업배분, 사업자선 정, 상품의 해외판매와 은행설립을 주도했으며, 제철, 군수, 조선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국영공장을 설립하여 장기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한 경제 활동에 적극 개입하며 실시한 전매제였다.

 

미쓰이나 미쓰비시처럼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정상이 적극적으로 사업을 하고 정부가 전화철도 등 사회기반시설 을 단기간 내에 정비한 것은 근대적인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인구가 과잉인 농촌은 도시에 식량을 싼 가격에 공급하고 농민의 자식 가운데 차남이하의 아들과 딸은 도시로 진출하여 저임금의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경제성장 에 공헌했다. 그리고 여성은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으로 특히 직물공업의 발전을 이룩했다.

 

2. 근대 일본 재정의 특징

메이지정부의 재정은 급팽창했다. 그 재정 수입은 처음에는 지조에 의존하였으나 산업이 발달하면서 관세, 특별소비세, 주세, 부가가치세의 비중도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공채발행이 재정확보의 주요 수단이었다. 재정지출 면에서는 군사비 지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식산흥업비 처럼 자본축적을 촉진하는 세출도 많았다.

 

3. 이에와 무라의 변모

도쿠가와 시대의 가족형태인 이에 제도에서 재산을 받지 못한 차남이하의 자식들은 근대화과정에서 도시노동자로 쉽게 전환되었다. 도시로 나온 사람들은 핵가족을 형성하고 그 비중이 점차 높아지면서 일본사회의 가족형태는 근대적 모습을 띠었다.

 

근대 일본의 가족제도는 1896년의 메이지민법에 따라 호주제가 확립되어 1947년 미군정하에서 민법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것은 호주의 여타 가족구성원에 대한 권한을 매우 강조한 것이었다.

 

도쿠가와시대 이후 공통체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던 무라는 메이지유신 직전에 7만개 정도였으나 188912,000개 정도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농민의 생활은 여전히 원래 있던 무라 단위로 이루어졌다.

 

일본의 농촌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미군정하에서였다. 미군정의 농지개혁방침에 따라 대량의 자작농이 탄생하고, 농 업의 기계화와 화학비료, 농약보급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무라의 폐쇄성과 공동체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예를 들어 관 개를 위해 여러 무라가 개방적으로 협의해야 했고 기계화가 진전되어 여유시간이 생기자 농민들도 무라 밖에서 겸업을 하거나 여가활동을 하는 경향이 늘어났던 것이다.

 

주요 용어

근대화, 근대국가, 산업화, 자본주의, 부르주아지, 관료, 계급, 젠더, 식민화, 제국주의, 문명 충돌론, 문화적 제국주의, 탈근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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