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속 고구려 왕국 齊 제
고구려의 마지막은 발해인가? 제나라인가?
지배선 지음 |
더불어책 |
255쪽 |
1만2000원
중국 역사책에는 있지만 우리 국사책에는 없는 제(齊)
<중국 속 고구려 왕국 제>는 이정기와 그의 후손이 세운 고구려 왕국 '제(齊)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중국 대륙에 제나라를 세워 4대 60년 동안 다스렸던 제왕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은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주몽의 정신을 이어받아 마지막까지 고구려인으로 살다간 인물들이다. 제나라는 고구려의 이름을 이어받아 청주를 중심으로 주변 15대 주를 차지하며 당과 맞서 싸웠다.
그들의 이름이 우리의 역사책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당의 제후국임을 자처했던 신라와 유교사상이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에서 고구려 국가 제나라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고구려 역사의 마침표로 발해가 아닌 이정기가 세운 제나라를 꼽는다. 제나라의 제왕 이정기에 대해 중화사관을 걷어내고 제대로 된 역사를 한국 역사 속으로 생생히 복원하고자 했다.
중국 역사에서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의 기록을 발견하고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정기가 중국 안에 세운 제나라가 당시의 신라보다도 더 넓은 영토를 지배하며 당에 맞서 60여 년 동안이나 중국 대륙을 호령했다는 기록 때문이었다. 비록 고구려가 지배층의 분열과 나당연합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는 했지만, 고구려인들의 그 끈질긴 생명력은 이정기의 제나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고구려는 신라를 비롯한 중국의 주변국가들과는 달리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중국과 패권을 다투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바로 이러한 고구려 역사의 마침표로 이정기가 세운 제나라를 꼽고 싶다. - 머리말 중에서
이정기와 그의 후손이 세운 고구려 왕국, ‘제(齊)나라’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국 대륙에 제나라를 세워 4대 60년 동안 다스렸던 제왕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은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주몽의 정신을 이어받아 마지막까지 고구려인으로 살다간 인물들이다. 그들은 청주를 중심으로 주변 15개 주, 신라보다 더 넓은 땅덩어리를 차지하며 당과 맞서 싸웠다. 강한 군사력과 깨끗한 통치, 그리고 막강한 경제력으로 당나라와 대항하며 당시 중국에서 활동한 어떤 민족, 어떤 세력보다도 우수한 면모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제나라 60여 년의 역사는 바로 고구려 역사의 연장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고구려인으로 살다!
668년 고구려 멸망 후 그 많던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구려의 정신을 잊지 않고 당나라 군사와 맞서 싸우기도 했고, 옛 고구려 땅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그 중에는 서역을 정복한 고선지 장군도 있었고, 당의 최전성기를 열었던 현종의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책사 왕모중도 있었으며, 당나라에 항복하고 신라와 손잡아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장본인 연남생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뿌리만 고구려일 뿐, 죽는 날까지 당나라에 충성하며 일생을 영화롭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 또한 이들처럼 당나라의 신하로 남을 수 있었다. ≪신?구당서≫ ≪자치통감≫ 등 중국 역사책에는 “당나라는 제나라를 회유하기 위해 수시로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에게 관직을 내렸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당나라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제나라 안에 고구려 왕국을 세우고,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제나라가 최후를 맞는 날(819)까지 당과 맞서 싸우고 또 싸웠다. 단 한시도 고구려인임을 잊지 않은 채….
‘해상왕’ 장보고, 제나라 땅에서 무역의 기반을 닦다!
이정기와 함께 나라를 이끌었던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은 제나라가 끝난 뒤에도 중국에 사는 한반도 출신 유민들에게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제나라 땅 안에 터전을 마련하고 살던 신라인들에게 서로 힘을 모았을 때 얼마나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는지, 깨닫게 한 것이다. 신라인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밀주와 신라관과 발해관이 있는 등주 땅은 제나라의 땅이었다. 해상왕 장보고의 동아시아 국제 무역은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만들어졌다.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이 세운 제나라는 고구려가 멸망하고도 그 이름을 수년 동안이나 잇게 한 마지막 고구려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고구려 역사의 마침표로 발해가 아닌 이정기가 세운 제나라’를 꼽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 역사책에는 있고, 우리 역사책에는 없는 제(齊)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은 우리의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는 이름들이다. 유일하게 육당 최남선의 ≪국민조선역사≫에 “중국 안 넓은 지역을 다스렸던 고구려 유민”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중국 역사책에도 있는 기록이 왜 우리 역사책에는 없는 걸까? 저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든다. “당의 제후국임을 자처했던 신라와 유교사상이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에서, 감히 당과 패권을 두고 다퉜던 고구려 국가 제나라에 관해 함부로 붓을 놀릴 수 없었다”고. 안타까운 마음은 둘째치고라도, 이대로 역사의 진실을 외면할 것인가? 이 책은 제나라와 제왕 이정기에 대해 중화사관을 걷어내고 제대로 된 역사를 한국 역사 속으로 생생히 복원한다.
더 이상의 역사왜곡은 ‘NO’, 역사는 지킬 때 우리 것이 된다!
중국이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20여 년이 넘고 있다. 고조선,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의 세밀하고도 지독한 이 작업은 한국이 통일된 뒤, 한반도에 대한 자신들의 종주권 주장의 역사적 정당성을 위함이다. 저자 지배선은 동북공정이 이슈가 되기 전부터 중국 대륙에 남아 있는 우리 역사의 다양한 흔적들을 찾는 데 노력해 왔다. 그리고 1998년부터 이정기 4대와 제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중국 역사책에서 정리하여, 동북공정의 허구를 밝히는 데 앞장서 왔다. 저자의 이러한 노력은 ‘역사의 진실을 찾아 복원하는 일’에 느슨한 생각을 품었던 우리에게 긴장감을 갖게 한다. 최근 고구려 역사가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외면되고 있던 역사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그 관심이 보다 활발한 연구로 이어져 제나라와 같이 왜곡되고 묻혀 있는 역사를 살려내는 성과로 나타났으면 싶다. 역사는 지킬 때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잠들지 않는 고구려의 혼(魂)
이 책의 저자인 연세대학교 지배선(池培善) 교수는 2003년 1월『고구려인 이정기의 아들 이납의 발자취』라는 논문을 통해, 고구려 유민인 이씨 일가는 서기 765년 제(齊)나라를 수립, 819년까지 55년간 산동(山東半島) 일대를 다스리며 당의 행정수도 낙양(洛陽)을 5회 이상 공략했다며 당 황제 덕종은 살아남기 위해, 783년 10월 봉천(奉天․지금의 서안 서북쪽 80㎞)으로 도망가기까지 했다고 했다. 또, 제나라의 3대 임금 이사도(李師道)는 낙양의 물자 보관소 하음을 공격하여 무려 150만 개에 달하는 창고를 불 지른 뒤, 사저(私邸)를 짓고 군부대를 상주시키고 제나라 정벌을 주장했던 재산 무원형(武元衡)을 살해한 뒤, 806년부터 809년까지 4년간 수시로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낙양을 장악했다고 했다. 이정기(李正己)의 후손인 이납(李納)과 이사고(李師古) ․ 이사도(李師道) 등으로 이어지는 4대에 걸친 고구려인의 활약상이 학술적 밝혀지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 책은 그의 연구 자료를 알기 쉽게 풀어서 일반인들이 보기 쉽도록 정리한 단행본이다. 다음은 그의 책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정리해 보았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난 후, 수많은 유민들이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다. 당이 고구려 유민들을 당으로 끌고 간 이유는 고구려의 재건을 막기 위해서였다. 끌려간 고구려인들은 당의 전리품으로 노예 신세가 되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오히려 당의 화근이 되고 말았다. 물론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세월이 지나고 고구려인들의 끈질긴 생존투쟁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당에게는 재앙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당의 변경 방어 정책에 따라 노예 신분이었던 고구려인들이 군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왕모중, 고선지, 왕사례 등 무수한 고구려인들이 당의 사서(史書)에 등장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정기(李正己)이다.
그는 안록산의 난을 통해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 평로-치정 절도사의 자리를 차지한 뒤, 뛰어난 군사적인 재능과 풍부한 재화를 바탕으로 15개 주(州)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통치하는 제(齊)나라 창건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49세의 나이로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나 천하제패의 위업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고구려인으로서의 위대한 면을 마음껏 펼쳤다.
이정기가 기틀을 세운 제나라는 뒤를 이어 아들 납(納)이 통솔했다. 972년, 납도 34세의 나이로 일찍 죽고 아들 사고(師古)가 제위를 이었으며, 806년에 사고가 죽었을 땐 상을 알리지 않고 은밀히 사도(師道)를 맞아 즉위시켰다. 발해는 이정기의 제(齊)나라가 망할 때가지 우호를 맺고 끊임없이 무역을 벌였다. 제(齊)나라는 이사도가 내부 반역으로 잡혀 죽은 817년까지 4대에 걸쳐 55년 동안 존속하면서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대립하면서 당 조정과 천하제패를 다투며, 세계제국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던 당왕조를 흔들었다.
제나라는 단순한 당(唐)나라의 일개 지방정부가 아니었다. 제나라의 바탕은 고구려인들이었고 신라보다도 독립성이 강한 나라였다. 신라는 당에 조공을 바쳤지만, 제나라는 모든 면에서 자주적인 국가였다. 고구려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은 이정기의 제나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또한 그 동안 제나라에는 당나라에서 떠돌던 옛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모여들어 힘을 합했으며, 곧바로 이후에 나타나는 청해진 대사 장보고(張保皐)도 이 시기를 이용하여 나타난 사람이었다.
우리 민족의 강인함이 때를 만나면 이렇게 세계 어디에서나 웅지를 틀 수 있음을 입증해주는 아주 귀한 자료이다. 중국의 동북공정도 잠시 한 시대의 정치 놀음일 수밖에 없을 것으로 자연스럽게 믿고 싶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의 숨은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중국과 한국 모두로부터 잊혀진 고구려 유민 존재 찾는건 우리 몫”
“이정기-이납-이사고-이사도 등 4대가 765~819년에 걸쳐 중국 산동반도 일대를 통치했어요. 그들 자신은 물론 당 조정에서도 ‘제’가 고구려인의 나라라는 의식이 뚜렷했습니다. ”
“당은 이정기, 이납에게 중서문하평장사라는 관직과 함께 살인에 대한 면책권인 ‘철권’까지 주었어요. 제의 사법권을 인정한다는 뜻이고 당과 제는 국가연합이란 성격을 띠게 된 거죠.”
제땅은 신라, 발해와 당 사이의 교역로. 이정기와 이납, 이사도에게 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라는 관직이 주어진 것은 제가 3국간의 무역을 관장했다는 증거로 본다. 거기에다 소금, 철, 구리의 산지로 막대한 재화를 쌓아 당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분석한다. 법령이 하나처럼 공평한데다 부세마저 균일하게 가벼워 백성들이 다투어 모여들었다고 구당서는 전한다. 고구려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668년 이후 금방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랫동안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사도는 궁궐, 능침, 종묘를 만들었어요. 당의 제후국이 아니라 독립국임을 대외적으로 선포한 거지요. 당은 작위에 합당할 정도로 자제하라고 부탁하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
주몽, 장보고, 그 사이에 이정기가 있다!
중국 안에 고구려 유민들의 나라를 세우고, 당나라와 맞섰던 제(齊)!
제나라는 고구려의 뜻과 혼을 이은 고구려 역사의 마침표다!
이사도는 수차례 낙양을 공격하고 제나라 정벌을 주장했던 재상 무원형을 암살했다. 하지만 낙양공략이 실패하고 이웃 절도사가 피살되면서 3개주를 떼어주고 전쟁을 피하자는 분위기가 일었다. “고구려 여인들은 병사가 수십만인데 왜 땅을 떼어주느냐면서 반대합니다. 싸우다 지면 그때 주어도 늦지 않다면서요.”
이씨 왕조는 당의 집중공략과 내부자 반란으로 무너진다. 전후 고구려인 2~3천명이 당에 의해 살해됐다고 지 교수는 말했다. 이는 중국쪽에서 고구려를 완전히 이민족으로 인식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본다.
“제나라를 중국에서는 흉려(凶麗), 일본인 학자는 괴뢰집단이라고 폄하하고 있어요. 우리 사서에서는 딱 한마디 언급할 뿐입니다. ”
고구려인이 세운 잊혀진 ‘왕국’
4대 55년간 궁궐·종묘 갖춘 독립국
중국 역사서 통해 흥망사 재구성
7월에 당 운주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헌종이 장차 토벌하고자 하여 조칙으로 양주절도사 조공을 보내와 우리 군사를 징발하였다. 왕이 칙지를 받들어 순천군장군 김웅원에게 명해 갑옷을 갖춘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삼국사기 본기 헌덕왕 11년)
742년 무렵의 평로절도에 속한 상비군은 3만 7천500명에 달했으며, 평로절도사는 안동도호부까지 관장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정기가 안동도호부를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은 휘하에 많은 고구려인들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의미다. 사실상 이때부터 이정기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완전히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_01 이정기 시대
나라이름을 제(齊)라 하며, 스스로 제왕(齊王)의 자리에 올랐다. 이납이 국호를 선포하고 왕위에 오른 것은, 이정기가 무려 15개 주에 걸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독립왕국으로서의 운영체제를 갖추었음에도 국호를 표방한 사실이 없었다는 점에 비교하면, 매우 의미가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황제가 명목상 내려주던 작위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_02 이납 시대
이사고는 전통적인 인질 제도를 도입하여 활용하였다. 이러한 인질 제도는 진시황에 의해 보편화되었던 제도로, 이사고 역시 유능한 망명자 뿐 아니라 당 조정에 반기를 들다가 쫓기는 인물들까지 등용하는 한편, 사신들이 당 조정과 내통하는 일을 막기 위해 그들의 처자를 인질로 삼아 경계하였던 것이다. _03 이사고 시대
이사도는 하음창을 불태우고 무원형을 살해한 이외에도 헌릉 침궁 영항을 불태웠으며 부하들을 황궁에까지 잠입시켜 미앙궁과 비룡초장에 불을 질렀다. 당 조정을 흔들고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시도한 행동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으니 당 조정이 긴장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_04 이사도 시대
이정기가 기틀을 세운 제나라는 4대에 걸쳐 55년 동안 존속하면서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대립하면서 당 조정과 천하 제패를 다투며, 세계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던 당조를 뒤흔들었다. 제나라는 단순한 당의 일개 번진이 아니었다. 제나라의 바탕은 고구려인들이었고 신라보다도 독립성이 강한 나라였다. 제나라는 모든 면에서 자주적인 국가였던 것이다. _05 제나라의 최후
< 저자 지배선 >
연세대학교 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86년 〈모용연의 중국화정책과 대외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성대학교 사학과 전임강사를 거쳐, 1992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연세대학교 문리대학 역사문화학과 교수로 있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동경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교수(1990~1991년)와 인디애나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객원교수(1999~2000년)를 지냈다. 저서로는 ≪중세 동북아사연구-모용왕국사≫ ≪중세 중국사 연구-모용연과 북연사≫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 ≪고구려?백제 유민 이야기≫가 있으며, 논문으로는 <고구려인 이정기의 발자취> <고구려인 고선지(1)-대 토번 정벌을 중심으로> <고구려인 고선지(2)-대 아랍전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 -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 제(齊)를 찾아서...
01 이정기 시대: 당(唐)에 독립 왕국을 세우다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이정기의 힘으로 절도사가 된 후희일
청년 이정기, 두각을 나타내다
병사들이 추대한 최초의 절도사
신라, 발해와의 독점무역권을 얻다
독립 왕국의 기초를 쌓다
영토 확장이 말해 주는 세 가지
천하를 얻고자 수도를 옮기다
때 이른 죽음, 스러진 야망
02 이납 시대: 제(齊)를 세우고 제왕(齊王)이 되다
치밀하게 준비된 후계자, 이납
지키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다
이납, 스스로 제나라의 왕이 되다
당과 화해하다
요절하다
03 이사고 시대: 막강한 경제력으로 황금 시대를 맞이하다
이사고, 이납의 뒤를 잇다
제나라의 질주에 제동을 건 주변 절도사들
제나라의 내부 통치
덕종이 죽은 뒤 군사를 일으키다
3대가 모두 같은 관직을 받다
이사고의 죽음
04 이사도 시대: 천하 패권을 놓고 당과 다투다
이사도, 서자의 신분으로 대를 잇다
세습을 인정받기 위한 이사도의 노력
당과 제, 그리고 신라
당과 제, 그리고 발해
폭풍전야의 평화
이사도의 낙양 함락 작전
천하 제패를 위한 계획
제와 당의 두 얼굴
05 제나라의 최후: 중원 정복의 꿈은 사라지고
당의 총공세
측근 유오의 반란
운주성 최후의 날
참혹했던 멸망의 순간
제나라의 멸망 이후
당 심리전에 휘말리다
셋으로 나뉜 제의 영토
당의 입장에서 지은 최군의 비문
사실을 무시한 지나친 역사가들의 악평들
제나라의 역사적 의미
장보고와 제나라의 관계
부록
중국의 역사왜곡 정책, '동북공정' - "손으로 가린다고 하늘이 없어지는가?"
제ㆍ당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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