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이 세상을 훔쳐본다./남겨둔 떡

[新]서울 대탐험 <기무사터를 중심으로>

草霧 2013. 1. 13. 00:00

 

 

[]서울 대탐험

 

< 기무사터를 중심으로 >

 

 

정독도서관 기무사 동십자각 광화문 청와대 경호원 숙소(효자로)

 

효자동 사랑방 칠궁 청와대 경복궁 후문 육조공원

 

세종로 지하주차장(문공부, 미대사관) 세종문화회관 비각

 

경희궁 관상대 정동 덕수궁

 

 

 

 

정독도서관

갑신정변의 무대에 세워진 근대 교육기관 - 경기고교 본관 -

 

출처 : 김정동 교수의 근대건축기행에서 발췌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중학교는 광무(光武) 3년인 189944일 칙령 제11호로 공포된 중학교 관제에 의해 그해 526일 설립되어, 이듬해인 1900103일 개천절 날 개교했다. 그러니 이제 1백년이 되어가는 셈이다. 이 학교는 17세에서 25세까지의 학생들에게 입학 자격을 주는 7년제 학교로, 개교된 곳은 현재의 종로구 화동 1번지 일대였다. 이곳의 원 지명은 붉은 흙의 고개라는 뜻의 홍현(紅峴)이었다.

 

이 터는 원래 조선조 명문 거족의 주택지로, 이웃하는 경복궁이 가까워 조정에 나가기 편리했기 때문에 정승들이 많이 살았다. 게다가 그때는 박제순, 김옥균, 서재필 등이 살고 있어 더욱 저명한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터를 청청대(靑靑臺)’ 혹은 연화부수(蓮花浮水)’의 땅이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김옥균 저택의 별칭으로 홍현댁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1884124일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의 쿠데타가 바로 이곳에서 모의되었다. 그러니 조선 왕실과 민씨 가문으로 볼 때는 적의 소굴이나 다름없었고, 특히 민씨들에게는 불구대천 원수의 땅이었다.

 

관립중학교가 이 화동 언덕의 김옥균, 서재필 집터에 들어서게 된 것은, 갑신정변에 연루된 그들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임자 없는 땅이 된 집터를 조선 정부가 압수했기 때문이다. 김옥균의 집터에 서재필의 집터가 추가되고 이어 박제순의 집터까지 추가된 것이다. 김옥균의 집터는 정문에서 학교로 오르면서 정면에 보이는 현 서울 교육사료관 자리이고, 서재필의 집터는 그 왼쪽 현 정독도서관 본관 앞, 즉 운동장 일대였다. 박제순의 집터는 옛 경기고교 본관 자리였다. 서재필이 살던 양관 주택이 세워진 연대는 불분명하나 1886년에 세워진 배재학당 벽돌조 건물과 규모가 유사한 점으로 보아 1890년대 전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건평은 170평 정도로 보여진다.

 

관립중학교는 통감부 시대에 들어서는 1906년에는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그후 1911111일 일제하가 되면서는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한 후 서울의 명칭을 한성에서 경성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이어 192141일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192541일에는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로 각각 개칭되었다가 해방 후 경기공립중학교, 경기중고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190691일 교명이 개칭되었을 당시, 이 학교는 한국 최초의 학교였을 뿐만 아니라 최고 학부였다. 이때 당시 공사비 8,200원을 투입하여 목조 단층 교사를 증축하고 시설을 확충했다. 그리고 1909년 여름 다시 22천여 원을 들여 2층의 목조 교사를 붉은 벽돌 교사와 나란히 세웠다. 지금의 운동장 쪽이었다. 운동장 북쪽 동산에는 목조 표본실을 세워 주로 우리나라 식물의 표본 등을 수집 정리해 두었다

 

교세가 확장되자 현재의 운동장과 본관 자리에 있던 참정대신 평제 박제순 소유 저택과 인접 뒷동산 성덕원(成德園)터 일부가 화동 교사에 편입되었다. 1927531일에는 관립중학교 시대의 벽돌조 단층 교사를 수평으로 증축하여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게 되었다. 이때 현관 캐노피 부분이 일본의 가옥풍 지붕으로 바뀌었는데, 이 교사가 현재 남아 있는 최고의 것이다.

 

현재는 1995년부터 서울 교육사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후 19343월말에는 운동장을 넓게 확장시켜 현재의 모습을 보이게 되고, 1938년에는 본관과 그 뒤쪽에 붙어 있는 2층의 별관이 동시에 준공되어 교사로서의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 교사는 철근 콘크리트조로 지상 3층에 옥탑이 붙어 있고 벽체는 벽돌 조적조이다. 본관 3층 건물은 당시 일제의 제국주의적 양식으로 수직선이 강조되고 중앙부를 높임으로서 흰 색조와 함께 상아(象牙)적인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다. 이 새 교사의 설계자나 시공자는 모두 미상이다. 그후 625 전쟁으로 교사는 파괴되고 본관은 미군 501통신부대에 징발당해 훼손되었는데, 5년이 지난 1956년 여름 반환되어 수리 복구되었다.

 

이 화동 터는 서울 4대문 안에서 유서 깊은 장소의 하나이다. 이곳은 개화파의 산실이기도 했고 관학 중등교육 발상지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 경기고교의 산실로 존속되어온 이 터는, 1974년 고교 평준화가 이루어져 경기고교의 옛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 교사와 터의 역사성도 단절된 것이다. 그러다 19751216일 경기고교가 강남 새 터전으로 이전하게 되자 1977년 정독도서관으로 용도 변경되면서, 서울시교육청 재산으로 되었다.

 

현재 본관을 중심으로 여러 동이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일부는 서울시 사료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정문 일부도 상징으로 존치되고 있다. 또한 구내에는 1981년 옮겨온 종친부(宗親府, 서울 지방 유형문화재 9) 건물이 있어 주위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현재 도서관으로 쓰이는 구본관은 관리 소홀로 위기를 맞고 있어 정부와 관계 당국의 관심이 절실하다.

 

관계당국은 우리 유산 보존과 함께 관광 차원에서라도 우선 실측 보고서를 만들어 수리, 복원의 기초자료로 남겨야 할 것이다. 또한 북촌 마을 살리기와 맥을 함께하여 이웃하는 한옥 주거군과 함께 벨트를 형성시키는 작업도 필요하다.

 

 

기무사

 

기무사터의 공간적 이해와 활용조건

 

출처 ; 조명래 선생님, 문화연대 공청회 자료집 글 (전략)

 

 

기무사의 공간적 역사와 쟁점

 

(1) 기무사의 공간 역사: 권력을 보위하는 기능공간

기무사는 경복궁 옆 사간동 초입 동십자각에서 삼청동 쪽으로 올라가는 사간동길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국군서울지구병원과 기무사가 들어서 있는 땅은 약 27천여 평에 이른다.

 

경복궁을 연한 이곳은 태조 때부터 본래 소격서가 있었다(이는 현재의 동명과 같음). 일종의 도교사원으로서 소격서에는 3단의 제단이 있었는 데, 상단에는 교조에 해당하는 노자, 중단에는 중생의 생사화복을 관장하는 북두칠성, 하단에는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염마를 각각 모시고 있었다. 그 후의 조선기 동안은 임금님께 간()하는 일을 맡아 하는 사간원(司諫院), 왕실의 종친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친부(宗親府: 현재 화동 정독도서관 부지에 건물 2동에 옮겨가 있음)가 있었으며, 정조시대에는 왕궁문서를 다루는 규장각도 있었다.

 

합방 후, 1913년에 일제는 이 곳을 헐고 총독과 고관 가족을 위한 병원인 경성의대 부속병원을 세웠다. 이 곳에 병원을 굳이 세웠던 조선총독부의 의도는 조선의 역사성을 훼손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 정부는 별 생각없이 이 곳을 그대로 인수하여 육군수도병원으로 사용했다. 70년대 초 등촌동에 국군수도통합병원이 세워지면서 문을 닫는가 싶었지만 육군수도병원은 이름을 달리하여 서울지구병원으로 지금껏 남아 있다. 1026사건의 악몽까지 치른 뒤, 지금은 대통령, 청와대 직원, 관 고위인사들의 진료를 주로 맡고 있다. 19718월에는 이 병원 부지 내에 기무사령부(당시 보안사)가 홍릉에서 이전해 둥지를 틀었다. 이는 지근에서 청와대의 권력을 보위하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기무사만 있는 부지는 약 8000여 평이 된다.

 

역사를 통해 기무사의 터는 권력의 중심 가끼이서 권자(權者)의 권력행사에 필요한 주변적인 활동을 지원하고 돕는 장소로 사용해 왔다. 그래도 식민화를 겪기 전까지 그 권력은 백성의 통치를 위한 것이었지만, 일제하에서는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훼손하고 왜곡시키는 것으로 작동함으로써 기무사의 터도 그만큼 왜곡된 공간성을 담고 있었다. 해방이 되었어도 이러한 공간역사의 의미는 거두어지지 않은 채, 오히려 왜곡된 국가권력의 작용을 돕는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 태어났다. 현재 이곳은 권자의 육체적 안녕과 물리적 권력(군사권력)의 보지를 돕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2) 현 위치의 공간구성: 권력과 문화의 동숙?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 사령부가 현재의 위치에 자리한 것은 청와대와의 지정학적 접근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 권력자는 권력의 물적 토대가 되는 군을 장악하기 위한 통제소를 지근 거리에 두고자하는 염원으로 기무사를 현재의 자리에 옮겨오게 했다. 청와대 주변은 통행자의 속도, 소리, , 움직임 모두를 극도로 통제하는(통제는 통행인에게 모멸감을 줄 정도로 강력하고 잔인함) 서울의 대표적인 감시와 억압의 공간에 속한다. 기무사가 자리한 사간동 일대는 이러한 감시와 억압의 공간의 한 모퉁이에 있다. 보안사가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군사정권 시절에는 일반인들이 더욱 가까이 하기 힘든 공간이었다. 지금도 그 일대는 건물신축이나 건물용도 변경은 물론 심지어 사소한 사진촬영 마저 금지돼 있다.

신기하게도, 그러한 억압과 감시의 공간 속으로 파고들어 간 것은 바로 문화시설이다. 1980년대 이후 기무사 주변에 대형 갤러리들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지금은 월전미술관, 국제화랑, 아트스페이스 서울, 아트선재센터, 금호미술관, 갤러리 현대, 학고재, 사간, 예맥, , 그로리치 등, 13개의 화랑, 출판문화회관, 불란서 문화관 등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화랑가 혹은 문화거리로 인지되고 있다.

 

권력이 있는 곳에 문화가 들어갈 수 있는 문화의 두 가지 속성 때문이다. , ‘무쇠와 같은 권력을 녹이는 힘때문이거나, 아니면, 권력에 거스르지 않는 순응성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후자가 더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한다. 다시 말해 사간동 일대의 화랑/미술문화는 권력자의 시각에서 권력의 비위에 거스르지 않는 조용함이나 순응성이 있었기에 그곳에 입지해도 괜찮다는 암묵적 허락이 떨어졌을 것이다. 권력의 입장에서 볼 때, 권력의 거침을 문화의 부드러움으로 포장하는 데 화랑문화 거리의 조성은 필요했을지 모른다. 한편 값비싼 도심의 터를 이용할 수 없는 화랑문화의 입장에서 본다면, 도심에 가까우면서도 정적인 장소문화가 있는 사간동 일대는 조용한 관람을 소비행위로 하는 화랑공간이 입지하기에 퍽 매력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경제 실정을 감안한다면, 청와대를 연접한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권력과 문화의 입지적 관계는 분명 권력이 독립변수고 문화가 종속변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그곳의 화랑 문화가가 다른 문화 집적지역과 유리된 채 권력작용이 극심한 공간의 골짜기에 갇혀있는 꼴이 된데서 쉽게 읽을 수 있다. 화랑거리의 이러한 공간적 구성은 서양도시에서는 쉽사리 발견할 수 없는 점을 감안하면 이에 대한 심정은 더욱 굳어질 수 있다. 어쨌든, 사간동이란 공간 속에서 형성된 권력과 문화의 동숙관계는 그 내면에 권력의 우월함과 문화의 열위함’, 즉 권력에 대한 문화의 속박이 강제되는 방식과 형상을 숨기고 있다.

 

(3) 이전계획과 갈등: ‘권력의 문화화문화의 권력화의 대립

1980년대 이후 갤러리들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사간동 일대가 얻게 된 문화의 거리란 이름은 그 자체로서 역으로 장소적 상징과 힘을 생산하는 효과를 갖게 되었다. 문화화된 장소의 힘이 상대적으로 솟아났던 것은 그 공간을 지배했던 절대 권력이 시민적 권력으로 대체되어가던 상황과 맞물러 있기도 했다. 그래서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기무사의 존재는 그곳을 터잡아 온 문화계와 시민들의 눈총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기무사 측은 교외로의 이전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993년 문민정부는 문민이라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그 동안 굳게 닫아 놓았던 청와대 앞길의 일부를 열어주었으며, 그와 더불어 국방부도 대도시 군용시설을 교외로 이전하겠다면서 기무사를 거기에 포함시키는 발표를 하였다. 이에 장단을 맞추어, 서울시는 북촌문화거리 조성에 걸림돌이 되었던 이 지역을 옛 정취에 맞게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이곳의 문화인들은 기무사 터를 문화와 관광명소로 만들자고 각계에 민원을 제기해 왔고, 나름대로 기무사가 떠난 빈 공간 위에 들어 설 내용에 대한 그림을 그려왔다.

 

이런 부푼 기대를 간직 해 온 7년 뒤인 20004, 기무사 측은 마땅한 이전부지를 발견하기 힘들고 또한 예산도 막대하다며 현재의 부지에 새 청사를 짓겠다는 안을 돌연 내놓았다. 물론 문화거리에서 거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 문화화된 모습을 가지고 시민들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무사 측은 문화거리의 특성에 부합하고 국민들에게 한 걸음 다가선다는 의미로 도로와 맞닿아 있는 현 사령부 자리에는 공원 등을 조성하고 뒤편에 사령부 건물을 신축할 계획2000417일에 발표하였던 것이다. 기무사의 안은 다름 아닌 권력의 문화화를 시도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방부가 대통령보고까지 마쳤다는 현 위치에서의 신축안이 발표되자 문화계 시민단체들은 즉각 반발하였다. 한국미술협회는 427일에 결정의 백지화를 요구하는 성명을 내었고, 이에 앞서 민예총은 24일 기무사의 외곽이전을 재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28일에는 민예총, 문화개혁시민연대, 도시연대,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등의 시민단체들이 대책위를 구성해 기무사 이전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을 선언했다. 이와 더불어 문화관광부 마저 직접 나서 반대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게 되자, 국방부는 51일 날짜로 전면 재검토를 약속 한 뒤, 512일에 기무사령부를 성남시 육군행정학교 부지로 이전하되, 기무사령부 옆에 있는 서울 지구병원으로 그대로 둔 채 서울사무소로 활용하는 입장을 최종 발표하였다.

 

국방부의 이런 결정을 두고 각종 언론은 시대흐름을 유연하게 읽은 용단이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국방부가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된 이면에는 문화계인사들이 사간동 문화거리추진위원회를 결성해 1996년부터 이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분관과 종합문화센터를 세우자는 목소리를 드높여 온 반작용이 있었다. 이는 다름 아닌 뒤 늦게 권력의 공간에 침입해왔던 문화의 힘이 문화의 거리에 군 시설물은 어울리지 않다면서 권력을 몰아낸 꼴이다. 문화 쪽 사람들의 뜻이 관철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문화의 권력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1) 대통령 재가까지 받은 신축안이 건축절차를 밟지 못했던 것은 문화관광부장관(박지원)의 반대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무사는 1999년에도 신청사 건설을 추진했지만 문화관광부의 제지로 좌절된 바 있었다.

 

2) 상호의 배타성으로 인해 문화공간 안에 권력기관(혹은 국가기관)이 이전했던 예는 파리의 르브르 박물관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르브르 박물관은 본래 감옥과 재무성 금고로 사용되던 건물을 개조한 것으로, 박물관이 된 뒤에도 자형 건물의 끝에 재무성이 있었지만, 파리시민의 여론에 밀려 센강 상류인 베르사유 지구로 옮겨졌다.

 

문화공간 조성방안의 비교

 

 

 

 

기무사 터의 올바른 활용을 위한 조건

 

 

(1) 장소의 역사적 정체성 복원을 최우선으로

기무사 터를 활용함에 있어서 최대 역점은 해당장소의 역사적 정체성을 복원구현하는 데 두어야 한다. 정체성의 복원은 과거를 단순히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주체성을 정립하는 의미로 접근되어야 한다. 600년 도읍으로서 서울의 4대문 안에 있는 모든 장소는 크고 작은 역사적 연고를 가지고 있지만 식민화전쟁천민적 근대화 등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파고되어 있어 이의 복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성안에 연고가 있는 빈터는 모두 현대와 접목시키는 방식으로 복원되어야 한다. 기무사 터의 활용도 이런 시각으로 접근되어야 할 것이다. 기무사 터는 경복궁에 연접한 장소로서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선은 경복궁 전체를 복원하는 틀 내에서 활용이 결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소격서, 종친부, 규장각과 관련된 역사적 의미를 현대적인 것으로 복원하는 활용방안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2) 청와대와 서울지구병원의 이전을 전제로 한 활용

조선총독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병원이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아무런 자의식 없이 국군병원과 기무사의 사령부로 사용되어온 장소의 현대사는 한국 현대사의 왜곡된 부분 그 자체인 셈이다. 따라서 기무사 터의 올바른 활용은 역사왜곡을 시정하는 시각에서도 접근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무사 터의 올바른 활용은 두 가지 중요한 전제를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는 서울지구병원이 이번 기회에 한꺼번에 이전되어야 한다. 청와대 직원과 군 인사를 위한 서울지구병원이 현재와 같은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 서울지구병원이 존치되는 한 기무사 터는 계속 불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청와대가 이전해야 한다(과천 종합청사 부지 내로 이전하는 게 가장 바람직함). 청와대 자리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거점으로 마련된 것이어서 우선 역사 바로 세우기 관점에서 옮겨야 한다. 아울러 좌청룡우백호 혈에 해당하는 현재의 자리는 살아 있는 권력자의 사무실이 아니라 민족과 역사의 항구적 중심성이 자리하는 곳으로 쓰여져야 한다. 또한 경복궁 복원을 가속화하기 위한 관점에도 청와대는 반드시 옮겨져야 한다. 현실적으로 볼 때, 통행과 활동을 극도로 통제하는 청와대를 지근에 두고 있는 한 기무사 터는 보통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결코 자유롭고 활용될 수 없다.

 

(3) 북촌의 역사생태성을 살려내는 거점으로 활용

기무사 터는 조정의 관리업무(, 종친관리)를 수행하는 기능과 활동이 입지한 곳이면서 동시에 이러한 업무에 종사하는 조정의 관리들이 거주했던 북촌이 펼쳐지는 초입이기도 하였다. 생태적으로 이 인근은 북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내를 이루어 청계천으로 집수(集水)되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성을 감안하여, 기무사 터는 서쪽으로 장차 복원될 경복궁이란 궁궐문화와 동쪽으로 북촌의 민속생활문화를 연결하면서, 동시에 북악산과 청계천이란 도심의 산과 물을 잇는 결절로서 그 용도가 설정되어야 한다. 북촌의 역사 생태성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서양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상업화된 현대문화 보다 공동체 삶의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복원하는 활동이 집적하는 장소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4) 세종로 광장화와 도심문화지구 조성과 연계하여

왜곡된 역사의 기간을 거치는 동안 권력과 문화가 혼합된 서울의 중심부는 국가정체성의 회복과 시민주권의 구현, 그리고 문화적 주체성의 설정이란 관점에서 전반적으로 재배열되어야 하며, 여기에 연계해 기무사 터의 씀씀이가 결정되어야 한다. 서울의 중심공간 재구조화의 핵심은 광화문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에 있는 세종로의 양 켠을 공공 광장화하는 것이다. 일제에 의해 허물어지고, 그 후 외세와 독재권력 등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이 장소는 국민(혹은 시민)주권이 국가의 최고권으로 구현되는 것을 상징하는 공공광장으로 쓰여져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도로를 개방형 광장으로 바꾸는 것을 시발로 청와대와 세종로 정부청사를 과천으로 옮긴 뒤, 현 세종로 청사는 시청과 시의회 건물로 바꾸어야 한다. 아울러 세종문화회관은 다 용도의 문화공연 콤플렉스(런던의 바비칸 센터와 같은 용도)로 재편하고, 건너편 미대사관은 건물형태를 다소 개조해 파리의 퐁피두 센터와 같은 한국의 첨단문화 콤플렉스로 하여 조성하여야 한다.

 

이 두 건물을 거점으로 수송동, 청진동 일대는 근대의 상업화된 문화활동을 집결시키는 근대문화지구로 조성하고(이럴 경우, 현재 사간동 일대에 있는 화랑이나 뮤지움들도 장기적으로 이곳에 집적시키는 것이 바람직함), 동쪽 건너편의 인사동은 상업화된 전통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곳으로 특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옮겨진 현재의 시청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박물관이나 국립미술관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고려해볼 만하다.

 

이렇게만 된다면 광화문으로부터 안국동을 거쳐 창덕궁을 가는 길을 경계로, 북쪽으로는 경복궁-사간동-가회동-비원-창덕궁으로 이어지는 전통의 복원문화지대가 조성되고, 남쪽으로는 시민주권의 거점인 광장-세종문화회관/미대사관를 개조한 문화센터-수송동의 근대문화지구-인사동의 민속문화 상업지구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의 시민문화지대로 조성되면서, 전체로서 과거와 현재, 권력과 문화, 공공과 사익, 첨단과 민속, 장년과 청년 등이 혼합되는 서울의 중심부가 설정된다. 기무사는 이런 공간의 배열 속에 하나의 단위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5) 전통을 주제로 한 복합문화전당(혹은 민속예술센터)으로 조성

전반적으로 볼 때, 기무사 터(병원이 떠난 자리를 포함한다면 약 27천 평에 달하는 면적)는 전통을 주제로 하는 복합문화 전당으로 조성하는 게 바람직하다. 기본적으로 들어가야 할 시설로는 소격서를 되살린 도교박물관(혹은 민속신앙박물관), 현재 다른 데로 옮겨져 있는 규장각과 종친부가 기본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이를 중심으로 하여 다목적인 전통민속예술의 공연 및 전시장, 전통민속문화를 경험하는 첨단정보자료실, 각종 이벤트 및 민속문화 강좌, 전통의상실 및 음식점, 민속정원 등이 전통경관을 만들어 함께 입지하도록 해야 한다. 요컨대, 기무사 터는 북촌의 전통문화를 일구는 텃밭으로서 복합민속문화전당으로 꾸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주장이다. (후략)

 

국군서울지구병원 건물 문화시설로

식민지시대인 19339월 서울 경복궁 동쪽의 소격동 길가에 지상 2, 대지 면적 6000여 평의 근사한 병원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하여 경성 의학 전문학교 부속의원.

 

조선총독부 관방회계과가 설계해 4년만에 완성한 이 고급병원은 조선왕실 사무관청이던 종친부 터 위에 자리 잡았다. 외관장식을 없애고 자로 잰 듯한 기능미를 강조한 꽤 혁신적인 벽돌 건물이었는데, 르네상스바로끄풍이던 당시 건축유행에서 벗어나 모더니즘양식을 본격 사용한 선구적 시도였다. 역설적으로 설계주무를 맡은 이는 근대건축의 개척자로 꼽히는 박길룡(18981943). 건물 일부분이 원호꼴로 툭 튀어나온 개성적인 모양새는 37년 그가 설계한 간송미술관에서도 재현된다.

 

하지만 박길룡의 건축정신과 달리 용도는 철저히 악용된다. 30년대 말 일제는 병원을 군용인 경성육군위수병원으로 바꿔 증축했고, 남아있던 종친부 대문과 행랑채, 담장 등은 헐어버렸다. 군사시설로 전용된 악연은 해방 뒤 권부와의 음험한 인연으로 이어져 국군 서울 지구병원과 군정보기관인 보안사, 기무사의 청사로 겸용된다. 1026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을 맞고 처음 후송된 곳도 여기였다. 반면 후원의 7칸 종친부 건물(서울시 유형문화재 9)81년 해체돼 부근 정독도서관에 더부살이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지난 1월 기무사 이전 발표로 터 활용 문제를 놓고 설왕설래가 한창인 가운데 이런 내력을 지니 국군서울지구병원을 건축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문화시설화 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섣불리 새 건물 짓지말고 장기개발방안을 모색하되 건축사적 의미를 지니 병원건물을 우선 지혜롭게 활용하자는 뜻이다. 강찬석 문화개혁시민연대 문화유산의원장은 새 건물 짓기는 시급하지 않다. 이전계획에 빠진 병원을 당장 옮기고 건물의 역사성을 되살리는 노력이 본격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1216일 한겨레신문,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경복궁

동십자각

종로구 사간동 126

광화문에서 연결되어 오는 경복궁 외궁성이 건춘문을 향하여 꺽이는 부분에 세운 망루인데, 삼청동 들어가는 길을 넓힌다고 궁의 동쪽 담을 안쪽으로 밀어넣으면서 현재처럼 고립되었다. 동십자각의 반대편 서쪽 모퉁이에도 이와 똑같이 생긴 서십자각이 있었으나, 이것도 도로확장의 미명하에 철거되어 지금은 자취조차 찾을 수 없다. 석단은 국초의 구조물로 추측되나 누각은 대원군 때 건립되었다.

 

동십자각은 망루이기 때문에 그 날의 당직이 오르내릴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 십자각 서쪽 면에 화강석으로 된 아취형의 작은 문이 보이는데, 당시의 당직자들이 이 문을 통해 드나들었던 것이다. 원래는 이문과 지상을 연결하는 계단이 담장에 의지하여 있었고, 다른 쪽에는 화강석 장대석을 약간 높이 쌓은 난간이 있었다. 그러나 경복궁 담장이 헐리면서 지금은 계단도 난간도 보이지 않는 축대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축대에는 625때의 총탄자국이 남아있어 전쟁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광화문

현재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재건되기 이전의 광화문은 석축기단에 3(三闕)의 홍예(虹朗)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두공은 다포식(多包式)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내삼출목, 외부는 제공(諸工)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雲工)을 만들었으며, 첨차(墅遮)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波蓮草刻)을 하였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闕門)으로 평가되었다.

 

당초 1395(태조4)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으나 1425(세종7)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년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고종1) 흥선대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합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고, 그 후 6 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92월 철근큰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경복궁

경복궁은 태조4년에 창건된 조선의 정궁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훼손되었다가 그후 왕궁으로 불길하다는 이유로 273년간이나 중건되지 못하였다가 고종 때 중건되었다. 태조가 창건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는 소박한 것이었으나 이후 증축이 계속되었으되, 고종 때의 경복궁은 이와 다른 것이었다. 옛제도에 따라 중건하긴 하였으되, 단순히 옛궁궐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대원군의 이상형 구현의지에 따라 증감, 변형을 감행한 것이다.

 

1918년 일본인들은 창덕궁 대내를 중건한다는 명목으로 200여 동에 달하던 많은 전각들을 이건했으며,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와 공진회, 박물관 등을 짓기 위해 주요 전각들을 헐어냄으로써 경복궁의 경관은 완전히 훼손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광복이 될 때까지 궁내에 남아있는 건물은 오늘날 볼 수 있는 전각정도뿐이었다. 1960년대 들어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장으로 대규모의 건물을 궁 안의 동편에 지었으며, 그후 도로 확장 등으로 궁성이 여러번 퇴축되었다.

 

효자동 사랑방

금지되었던 땅, 청와대 주변이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드러난 청와대 주변의 안가들과 서울시가 사들인 건물들의 일부는 헐리고, 일부는 옛날 모습 그대로, 일부는 변형된 채 오직 안전지대(?)의 확보라는 명목으로 지난 시대 정권이 남긴 도시의 한 조직이 다소 황량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꾸역꾸역 몰려들어 자신들이 선출한 대통령이 일하고 사는 근처에 와서 그곳이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TV에서 연설하는 얼굴만 보여주던 대통령이 실재하는 장소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국민들은 심정적으로 그들의 대통령과 가까워진다는, 아니 그러고 싶다는 염원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말이면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청와대 주변은 몇 달 사이에 관광명소(?)로 부상한 것이다. 그에 따른 부대시설의 필요성으로 대통령비서실장이 살던 집을 조그만 전시실로 꾸미고 공중변소 등 기타 편익시설을 갖추게 된 것이다.

 

다행히 첫 번째 제안이 그대로 수용되었다. 원래는 자그만 집 한 채와 전원 귀퉁이에 화장실을 계획하는 정도였으나 그것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판단아래 분수광장과 직접 연결할 수 있도록 하고, 그에 따른 편익시설을 충분히 확보하도록 제안한 것이었다. 따라서, 분수광장 남측의 육중한 돌담을 30m 허물고, 대지도 반듯하게 구획하였으며 전시동과 부속건물은 파고라 형식으로 연결하였다. 또한, 경복궁을 마주하는 도로변 담도 허물어 낮은 정원 겸 벤치를 마련하였다.

 

오랫동안 음산했던 지역에 새로운 바람을 끌어들이고 주변의 북악산과 인왕산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시민들에게 해방된 공간이면서도 자연환경을 재인식하는 그런 공간이길 바란 것이다. 내부전시실에는 서울 600년 사를 압축한 미니 전시실이 있다. 서울의 한 조그만 공간에 이제 처음으로 서울을 뿌리로부터 다시 생각하게 하는 효자동 사랑방이라는 씨알이 떨어진 것이다. 아직도 되찾아야할 수많은 시민의 공간들을 생각하면서 효자동 사랑방은 건축과 권력, 도시와 정치 및 시민과 함수관계를 조망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라는 생각도 든다

 

칠궁

종로구 궁정동 1-1

이곳은 조선 숙종 당씨 영조를 낳은 최씨를 비롯한 6명의 후궁 위패를 봉사한 곳으로 숙종이 장희빈을 피해 궁녀였던 최씨를 머물게 했던 곳으로 영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육상궁이란 '기를 육()','복 상()'의 뜻이다. 육상궁은 조선 역대 임금 중 정궁출신이 아닌 군주의 사친을 모신 사당으로, 1725년 영조가 그의 모친 최숙빈을 육상묘에 모신데서 유래하였고, 다른 6개의 궁묘를 이곳에 합아여 속칭 칠궁(七宮)’이라고 하였다.

 

청와대

청와대는 행정구역상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속하며, 지리적으로는 서울시의 주산인 북악산과 북한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시청, 종로, 을지로 등의 상업업무지역의 북쪽에 위치합니다. 현재 청와대 경내 대지는 세종로 1번지, 삼청동 157-94번지 외 9필지, 영빈관, 101, 구연무관 위치인 세종로 1-91번지 외 17필지, 궁정동 1-2번지 외 43필지 등 총 면적이 3개동 73필지 76,685평에 달합니다.

 

고려조 숙종 9년부터 궁궐터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고려조의 당시 수도이던 개경의 離宮터로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 4(1395) 정궁인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이곳을 궁궐의 후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고종 5(1868)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 밖(현 청와대지역)에 중일각, 오운각, 융문당, 융무당, 경무대, 춘안당 등의 건물이 지어졌고 과거장이나 관농장, 연무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일제가 1910년부터 경복궁을 조선총독부 청사부지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곳에 있던 융문당, 융무당을 철거하여 공원화하였고, 조선총독의 관사부지로 구본관 자리를 선정하여 1939년에 건평 약 586평의 건물을 완성하였으며, 해방후 1945년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약 23개월 동안 군정장관(하지장관)의 관저로 사용되었습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대통령 관저로 경무대란 명칭이 붙었으며, 19604.19혁명후 대통령에 취임한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개칭하였습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발췌

 

세종로

 

도시의 이야기를 찾아서 - 경복궁에서 비각까지

(전략)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시작되는 가로는 서울에 있어서 가장 넓고, 상징적이다. 적어도 이 가로만큼 자연적 인상이 뚜렷한 곳도 많지 않다. 모든 서울토박이들에게는 이곳이 고향의 가장 가운데 토막 같이 남아있다. 그것은 광화문 너머의 북악산, 서쪽의 인왕산, 동측의 동십자각 옆을 흐르던, 지금은 복개된 개천 위에 놓여있던 다리 등과 더불어 고향의 흔적이다. 그렇게 보면 이 경복궁에서 비각까지의 가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국가라는 살아있는 실체에 대한 하나의 프레임이다. 이 지역은 구조선총독부가 철거된 후 경복궁의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의 시각적 종점은 광화문으로서 광화문에서 비각까지의 거리는 750m이다. 도보로 약 15분 내외의 거리이며, 세종로의 폭은 100m이다. 서울의 어느 도로보다 넓은 이 도로의 폭은 이미 600년 전에 설정된 것이다. 세종로의 북쪽 시작은 광화문인데, 광화문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동측에는 정부종합청사, 세종문화회관, 서측에는 문화관광부청사와 주한 미국대사관, 한국통신, 교육보험빌딩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다. 60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의 중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지형적으로도 가장 이상적인 대지를 가진 경복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 가로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견지하고 싶은 통시적 공통성은 국가적 상징성이라는 개념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세종로는 사실상 무형적인 상징성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오랫동안 경복궁이 창덕궁에게 정궁의 위치를 빼앗긴 조선시대 중후기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정치적 중심을 상실하였으되, 항상 사람들에게 상징적인 중심성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있다. 대원군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왕권의 실질적인 회복을 표출하는 의미로 경복궁의 중건을 우선과제로 선정한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이지역은 현재에도 소위 중심 관청가라고 하겠다. 이점은 아직도 이곳이 그 역사라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는 것을 추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곳곳에 산재한 옛 행정기관들의 흔적은 구태여 어떠한 시각적인 매스가 없어도 공간적 범위만 가지고도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후략)

건축과 환경9811에서 발췌. /이범재

 

세종문화회관

1972년 서울 시민회관이 불타 없어진 뒤 1974년에 착공하여 1978년에 준공, 개관하였다. 지하 3, 지상 6층으로 건축 연면적 16122, 부지 5611. 건축양식은 한국의 옛 건축양식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하여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준다. 객석 3895석에 500여 평의 무대를 갖춘 대강당과 객석 522석에 200여 평의 무대를 갖춘 270석의 회의장, 기타 소회의장, 500평 규모의 전시장, 1064석의 연회장 등으로 되어 있다.

 

이범재 : 위 인용글에서

세종문화회관은 당시 설계경기를 통해 선정된 당선안을 실현한 것으로 신고전주의 경향이 물씬 풍기는 여러 가지 징후를 가지고 있다. 이는 복고적 요구조건을 건축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민족적인 자긍심을 건축물에서 찾으려는 경향은 20세기 중반에 새로이 나라를 형성하거나, 복구한 아시아지역에서 흔히 나타나는 경향으로서 이의 연결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소위 자신들의 뿌리를 찾기 위한 회고적인 경향이 풍미하며, 그것은 대부분 형태적인 건축요소의 모방이나, 건축적 이미지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이러한 방법은 일반 대중에게는 의외로 이해되기 쉬운 것으로서 별 거부감을 가지지 않게 되는 간편한 도구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통시적으로 보아 그 형태와 건축적 의사고전 디테일이 현시에도 생명력을 갖게 하는 노력이 좀더 병행되었어야 한다고 본다.(후략)

 

고종즉위사십년칭경기념비 高宗卽位四十年稱慶紀念碑

[지정번호] 사적 제171[소재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크기] 면적 672조선시대 고종 즉위 40주년과 나이 51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일을 기념하여 세운 비.

 

기로소는 정2품 이상의 벼슬아치 중에서 70세가 넘은 사람을 우대하기 위하여 태조 때 설치한 곳인데, 고종은 51세로 그 의식을 올렸다.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썼으므로, 비의 전액(篆額)은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글씨로 ?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頌?이라고 썼다. ()와 송()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황제 칭호를 쓰고 광무(光武)라고 연호를 세운 일, 재위 40년이 된 일과 영수각(靈壽閣)에서 기로소에 들어간 의절(儀節)을 베푼 사실, 그리고 민병석이창구(李昌九) 등의 발의로 비를 세웠다는 내용 등을 서술하였다. 이 비가 있는 자리가 한국의 중심지점이어서 이정원표(里程元標)가 서 있다. 이 비각의 철격자문(鐵格子門)은 만세(萬歲)라는 글자 모양으로 구성된 쇠문인데,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이 떼어가서 대문으로 사용하던 것을 8 15광복 후에 찾아와 복원하였다.

 

경희궁

 

경희궁지

 

 

조선 인조의 생부 원종의 잠저가 있던 곳으로서 광해군 8(1616) 건축 당시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영조 36경희궁으로 개칭하였다. 경희궁에는 회상전, 강복전, 집경당, 흥정당, 승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의 부속건물이 있었다. 금세기 초기만 하여도 강복전과 집경당을 제외한 부속건물들이 있었으나, 승정전은 1926년 동국대학 내로 이전되어 보존하고 있다. 그외 흥정당은 광운사로, 황학정은 사직단 뒤로, 그리고 흥화문은 당시 박문사로 옮겨졌으나 터(광화문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만 남아있다. 경희궁터는 신물로 새문안길을 이은 성벽을 따라 사직동, 내수동을 포함, 구세군회관 빌딩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경내였다. 일제시대 경희궁을 헐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세우면서 사라졌다.

 

관상대

 

정동

정동일대는 외국 대사관과 영사관, 그리고 선교사들에게 할당된 구역으로 교회나 학교들이 들어있어 거의 한국적인 외양을 볼 수 없는곳이 되었다. 또한 프랑스는 러시아 공사관과 맞먹는 높이의 공사관을 하나 세웠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 선교회는 규모가 큰 빨간 벽돌집을 지어서 이를 교회로 사용하고 있다. 이 교회는 마치 로마 교황청처럼 커서 서울의 어디에서나 이건물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1886년에 지어진 배재학당 건물이나 1900년에 지어진 이화학당의 2층 건물은 이후 학교 건물의 건축에 벽돌건물이 세워지는 모본이 되었다. 배재나 이화를 비롯한 학교들은 신학문을 전파시키는 첨단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서구양식의 건물 안에서 느끼는 그들의 공간 체험은 서구적 생활방식을 신학문이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속속 들어서는 프랑스 공사관, 영국공사관, 러시아 공사관 등과 예배당들은 일상을 지배하는 정치권력과 의식을 지배하는 종교권력이 이제 새로운 권위로 무장하고 위협하며 이전 가치관의 전복과 의식의 해체를 강요하게 되었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김진송) p.250 발췌

    

 

정동을 역사와 주체의 공간으로

현재 서울의 정동은 세계 열강들간에 긴박한 첩보전이 전개되고 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구한 말 국력이 다했을 때 조정을 압박해 강제로 빼앗다시피 한 서울 정동의 땅에, 열강들이 또 다시 그들의 권력과 탈법적 소유권을 앞세우어 고층빌딩을 지으려는 일들을 경쟁적으로 벌리면서 서로 서로를 염탐하고 있다.

 

그 출발점은 러시아 대사관의 건립이다. 올해로 우리와 외교를 재개한 지 10년째인 러시아는 덕수궁 뒤에 있는 그들의 땅에 대한 권리를 회복한 뒤 대토받은 땅에 대사관 건물을 짓고 있다. 20018월 준공예정인 러시아 대사관은 연면적 6000평에 지하 2층 지상 10층 규모로 크렘린궁 형태의 모스크 양식으로 지어지고 있다. 이 부지는 97년 정부와 러시아가 체결한 대사관 부지 교환협정에 따라 토지교환형식으로 2년 전에 임대해주었다. 9912월 대사관을 신축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다가 옛 배재고와 이화여고 터 경계 부근 땅 속에서 50m 가량의 옛 성곽 유적이 발견되었지만, 고증이 어렵다는 이유로 발견된 원형 그대로만 보전키로 하고 공사는 계속되어 왔다.

 

인접한 곳(구 경기여고 자리-정동 1-1)으로 대사관을 이전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미국은 근방의 미국계 은행 건물의 방 3개를 잡아 놓고 대사관 직원으로 하여금 러시아 대사관 공사현장을 매일 매일 염탐하고 있다. 세종로에 있는 미대사관은 62년에 우리 정부로부터 공여 받아 무료로 사용하고 있지만, 국민정서 등을 고려해 정부와 미대사관은 84년에 종로구 송현동 미대사관 직원숙소 일부 및 을지로 전 미문화원을 경기여고 부지(45백여 평)와 맞바꾸기로 계약을 체결한 후 907월에 부지를 실제 교환했다.

 

이렇게 획득한 부지 위에 미국은 대사관과 직원숙소 등 15층 규모의 복합건물을 신축키로 하고 이전계획을 추진해 왔지만 경기여고 부지가 문화재 보호지역 내에 있어 많은 난항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 러시아 대사관이 건립되자 미국은 현 경기여고 부지가 협소하다는 핑계로 덕수궁에 인접한 현 대사관저 내(78백여 평)에 대사관 숙소건물을 지으려는 의도를 여러 요로에 흘리면서 서울시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이와 관련된 건축설계가 미국에서 실제 준비되고 하고 있다고 한다. 미대사관 직원 숙소로 쓰고 있는 1만여 평의 종로구 송현동 땅은 지난해 삼성생명에 14백 억에 팔렸다.

 

서울시를 본격 압박하고 있는 나라는 캐나다다. 덕수궁 길에 접해 있으며 사적 253호인 구러시아 공사관이 북측에 있는 정동 16-1번지 423.8평을 1994년에 사들인 캐나다는 그 곳에 9층 규모의 대사관을 신축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지난해 7월에 개정된 서울시 도시계획조례에 의해 주거지역의 경우 용적률이 400%에서 300%로 줄어들게 되자, 대사관 신축은 근본적인 차질을 빗게 되었다. 이에 따라 캐나다 대사관 측은 지난 해 7월 외교통상부를 통해 서울시에 이곳의 용적률 허용범위를 400%로 완화해주든지, 아니면 400%가 가능한 준주거지로 용도 변경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외교통상부는 우리나라가 93년 주 캐나다 한국대사관 신축부지를 매입해 건물을 지을 때 캐나다 정부와 오타와시(캐나다 수도)로부터 많은 편의를 제공받았다는 점을 들어 캐나다 대사관의 협조 요청에 서울시가 응해 줄 것으로 종용하였다. 실제 지난 7월 말에는 캐나다 대사가 서울시를 직접 방문해 상호주의에 입각해 지원을 요청했으며, 8월에는 외교통상부가 비엔나 협약 및 상호주의 원칙에 의거 용적률 환화를 위한 용도지역 변경을 다시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런 압박이 가해오자 서울시는 지난 해 11월에 도시계획위원회를 열어 정동 빌딩 앞 캐나다 대사관 터를 일반주거지역에서 준주거지역으로 변경해 줄 것을 안건으로 상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위원회에서는 문화재로 지정된 덕수궁 옆에 고층 건물을 짓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나와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그 후 캐나다 측에서 대사가 직접 나서 그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백방의 압력을 가해 왔다.

 

캐나다 대사관 터가 용도 변경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은 캐나다뿐만 아니다. 대사관저 내에 고층빌딩을 지으려는 미국도 캐나다 대사관 터에 고층이 들어서기만 하면 그들의 계획을 야물차게 몰아붙일 참이다. 정동 미대사관부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사장이 거처했던 집을 포함한 중요한 근대문화재가 있거나 또한 그러한 류의 문화재가 가까이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강력한 문화재보호 규정이 작동하는 공간이건만 미국은 아랑곳없이 그곳에 고층빌딩을 지으려는 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곳은 우리 정부의 땅이지만 미국은 한푼의 돈도 내지 않고 지금껏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열강들이 정동에 그들의 대사관 건물을 경쟁적으로, 그것도 그들의 힘을 빌어 우리의 국내법을 어기기 위해 갖은 압력을 행사하면서, 짓고 있는 상황은 구한 말에 정동이 겪었던 수치가 1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반복되는 듯하다. 정동 일대는 우리 역사만큼이나 비운의 역사를 머금은 공간이다. 그곳이 지금과 같이 열강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은 멀리 임진왜란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왜적의 침입을 피해 한양을 떠났다가 돌아왔지만, 궁궐이 불타 거처할 곳이 없었던 왕은 지금의 정동에 있는 어느 고관의 집에 머물렀다. 궁궐이 복원되어 떠났지만, 왕이 거처했다는 이유로 그곳은 후에도 계속 왕실의 부속 시설로 남겨두었다가, 구한말 열강들이 그들이 머물 곳을 요구하자 정동의 땅을 우선적으로 넘겨주었다고 한다. 당시 정동 땅이 실제 어떻게 열강들에게 넘어갔는지는 소상히 알 수 없지만, 정황으로 봐 대등한 계약을 맺어 이전되었을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곳은 우리가 언제간 반드시 되찾아 할 곳 일거다.

 

정동의 비운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지금의 미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 부근 덕수궁 돌담길 한복판은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즉위식을 가진 덕수궁 돈덕전이 있었던 곳이다. 고종 승하 후 3년 뒤인 1921년 일제에 의해 덕수궁 돌담길로 뚫렸다. 한편 정동극장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오래된 서구식 건물인 중명전이 있다. 덕수궁 건물이었던 그곳에는 치욕적인 을사조약(1905)이 체결된 장소이면서 동시에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고종이 이준, 이상설 등 헤이그 밀사를 친견하고 친서를 전달한 곳이기도 하지만, 현재는 일반에게 매각되어 있다.

 

비운의 역사공간, 정동이 또 다시 열강들의 부정의로운 공간(space of injustice)로 바뀌어지는 것을 좌시한다면 우리는 역사에 다시 죄를 짓게 된다. 문제는 현재 국가권력이나 제도가 이를 주체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미국이나 캐나다가 정동에 건물을 지으려고 온만 수단을 동원한다면 서울시 정부, 나아가 우리 정부로서는 이를 막을 도리가 없다. 특히 비엔나 협정 등을 내세워 우리 정부를 압박하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구한말과 같이 우리의 국가나 정부가 정동을 또 다시 지킬 수 없게구나 하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서울의 4대문 안은 장기적으로 그 역사의 흔적을 복원해야 한다는 게 뜻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특히 경복궁 일대의 복원은 서울의 주체적 역사를 회복하는 첫 단추이면서 우리의 역사 바로 세우기의 골간이라 본다면, 정동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역사 공간복원 속에 함께 해야 한다. 특히 아픈 역사를 잉태한 정동은 역사와 주체의 공간으로 회복하는 국민적 운동이 기다려지는 곳이다.

 

출처 : 조명래선생님 - 문화연대 신문

 

구 대법원

일제시대인 1928년 서울 중구 서소문동 37번지 대지 23,958(7,247)에 연건평 10,329(3,124.5)의 건물이 신축되어 경성복심법원 및 경성지방법원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48년 이후부터 대한민국 대법원청사로 사용되어 왔다.

 

계속되는 대법원의 기구확대 및 직원수의 증가 등에 따라 이 건물만으로는 수용이 어려워 1957년 그 옆에 연면적 1,433(433)의 제1별관을, 1968년 연면적 3,216(972.8)의 제2별관을 각 신축하여 199510월까지 대법원과 법원행정처, 법원도서관이 함께 사용하여 왔다.

 

 

 

 

 

 

덕수궁

덕수궁은 본래 세조(世祖)의 큰아들인 큰손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개인 저택이었다. 세조의 아들인 도원군은 세자(世子)로 책봉되었으나 18세에 죽었기 때문에 세자빈 한씨가 출궁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이 왕(成宗)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월산대군이 사망한 후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93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림군(桂林君:)의 집을 행궁에 포함시키고 궁궐 내에 있어야 할 각 관청을 처음에는 궐문 밖에 인접하여 두었다가 점차 목책을 넓혀 세우고 문을 달아 임시 궁성을 형성하여 여러 관청과 위사 등을 모두 궁궐 내에 들게 하였다.

 

또 그 옆에 있는 심의겸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영상 심연원의 집을 종묘로 하였다. 97년에는 담을 둘러 쌓았고, 16074월에는 북쪽에 별전을 세웠다. 광해군은 즉위 초 이 행궁을 넓혀 지금의 정동 1번지 일대를 대부분 궁궐의 경내로 만들고 종묘를 중건하였다. 1611년에는 경운궁(慶運宮)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1615년 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하게 되면서 창덕궁 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1620년에는 건축되었던 궐내아문 등을 허물고 그 재목과 기와를 내사로 옮기니 이 궁은 더욱 퇴락하게 되었다. 인조는 30년간이나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 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 줌으로써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1895년 아관파천 후 다시 규모를 확장하여 사용하였는데, 이때 서쪽으로는 미국공관과 러시아 공관으로, 북쪽으로는 영국공관으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다. 덕수궁이란 이름은 순종이 즉위한 후 붙여졌다.

 

경운궁일때는 경역이 넓었고 건물들이 많아서 미국과 영국대사관도 이 경역 내에 있었는데, 현재는 많은 건물이 철거되고 도시계획으로 경역도 좁아졌다.

 

 

2001년, 문화개혁시민연대 글 갈췌 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