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체제하에서의 러시아의 경제정책
러시아는 신생 러시아로 출범한 직후인 1992년 1월 2일부터 자유화, 사유화, 안정화를 기조로 하는 시장경제로의 경제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왔으며, 이 과정에서 IMF는 세계은행, 파리클럽 및 런던클럽 등과 더불어 러시아의 경제개혁을 지원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여 왔음.
IMF는 중앙통제경제의 몰락을 의미하는 공산당 정권의 몰락을 계기로 자유시장경제의 확산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고, 러시아를 비롯한 체제전환기 과정에 있는 국가들에 대한 차관공여 조건(conditionality)을 제시, 이를 실천토록 강요 및 감독하였음. 또한 IMF는 러시아가 국제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고려하여 특별한 관심과 재정적 배려를 하였고, 그 결과 러시아에 대해 어느 체제전환기 국가들보다 많은 차관을 제공하였음.
사실 개혁 초기, 러시아내 친서방주의적 개혁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은 자국의 경제체제전환에 서방세계가 주요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하였음. 그러나 신생 러시아 출범후 수년동안 이루어진 서방세계의 대러 경제지원, 특히 IMF와 세계은행 등을 통한 경제지원이 경제적 동인보다는 정치적 동인에 의하여 이루어짐으로 해서, 기대 이상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음.
그동안 IMF는 러시아가 IMF에 가입한 1992년 6월부터 러시아의 시장경제로의 개혁과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책을 지원하기 위하여 긴축정책 등의 추진 등을 조건으로 수차례에 걸쳐 대기성 차관을 지원하여 왔음. 또 IMF는 러시아 경제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막대한 재정적자의 누적 및 부진한 징세행정 등과 같은 예산정책이라고 지적하고, 이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불요불급의 정부사업 축소를 통한 긴축재정의 실행, 세수증대를 위한 조세법의 개정과 징세행정의 강화, 외국인 투자자의 보호 등 투자환경의 개선, 금융기관의 재정비, 기업 및 정부기구의 투명성 및 책임성의 강화 등을 적극 추진하라고 권고하였음. 이에 따라 옐친정부는 키리옌코 개혁내각 하에서 대폭적인 대외부채의 축소, 세수증대를 통한 제정건실화, 높은 경제성장의 달성 등과 같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성취시키기 위한 경제운용계획을 발표하였음.
그러나 러시아 금융시장은 키리옌코 내각의 '위기타개 프로그램'에 대한 국가두마의 부분적 통과에 기인한 대외적 신인도 하락 및 국내외적 금융불안 요인의 조기 개선전망 불투명, 그리고 국제적 금융시장 불안이 지속되면서 더욱 악화되었으며, 1998년 5월 들어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한 러시아의 외환․금융 위기는 8월 17일 옐친정부로 하여금 루블화 평가절하 및 국내외 채권에 대한 부분적인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수밖에 없게 하였음.
이로 인해 러시아에는 과거 어느 내각보다도 친 IMF형 개혁정책을 추진해오던 키리옌코 내각이 퇴진하고, 탈 IMF형 경제정책을 선호하는 중도좌파형 프리마코프 내각이 출범하였음. 프리마코프 총리는 과거 내각에서 추진해온 개혁정책이 지속될 것임을 밝히면서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통화주의 정책기조의 포기와 사회복지 및 산업성장을 중시하면서 경제정책에 대한 국가개입을 확대시켜 나가겠다고 밝혔음. 또한 경제장관 및 재무장관을 감독할 마슬류코프 제 1 부총리도 새 내각의 우선 경제과제는 체임, 체연금을 하루빨리 해소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통화발행을 통하여 해결할 것임을 암시하였음. 그러나 통화주의자들은 이러한 정책이 초인플레이션을 초래하면서 러시아 경제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우려하고 있음. 또 IMF 역시 프리마코프 신임 내각이 제시한 경제위기 극복 프로그램이 구체성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에 기초한 개혁안이라고 볼 수 없다는 부정적 평가를 내림으로써, IMF 차관공여와 이에 부합된 경제정책을 둘러싼 러시아 정부와 IMF간 갈등이 격화되고, 러시아에 대한 IMF의 경제개혁 처방이 적실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가시화되고 있음.
차관공여 재개를 둘러싼 IMF와 러시아 정부간의 줄다리기는 프리마코프 내각의 거시경제정책에 변화가 없는 한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이며, 이 상황에서 러시아는 IMF외 다른 국제금융기관이나 서방 선진국들에게 차관지원을 요청할 것으로 보임. 하지만 세계은행이 IMF와 차관공여에 있어서 공동보조를 맞춰온 관례를 고려해 볼 때, IMF의 대러 차관공여가 재개되지 않는 한 세계은행의 대러 차관공여도 재개되지 않을 전망임.
IMF의 대러정책의 성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있으며, IMF가 옐친정부에 줄곧 요구한 정부의 긴축통화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함. 일부 IMF 인사들은 IMF가 러시아 개혁과정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강조하면서도 현 경제위기에 대한 러시아측과 IMF측의 책임을 시인하고 있음. 따라서 현재 러시아가 당면한 금융위기에 따른 심각한 경제위기는 일차적으로는 러시아에 그 책임이 있지만 그동안 차관을 제공하면서 러시아 경제개혁과정에 깊숙히 관여해온 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책임도 크다고 하겠음.
향후 프리마코프 내각의 경제정책은 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통화주의보다는 산업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이며, 경제영역에 대한 국가개입을 확대시켜 나갈 것으로 보임. 그러나 무엇보다 프리마코프 내각은 대외적으로 외채상환일정의 재조정 및 탕감성사, 그리고 IMF 등 국제금융기구와 미국, 일본 등 서방국가들로부터의 신속하고 많은 재정지원을 통해 국내 경제상황을 호전시켜야 하며, 대내적으로는 위기극복 프로그램에 나타난 정책들을 충실히 이행하여 하루라도 빨리 경제안정화 및 구조개혁을 심화시켜야 할 것임.
Ⅰ. 머리말
러시아는 신생 러시아로 출범한 직후인 1992년 1월 2일부터 소연방 붕괴전부터 준비해오던 자유화(liberalization, 가격, 경제활동, 무역부문), 사유화(privatization, 국가 또는 시 소유의 기업 및 부동산), 안정화(stabilization, 신뢰할 수 있는 화폐도입과 가치유지 및 이를 통한 적절한 국가재정 및 통화 관리)를 기조로 하는 시장경제로의 경제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왔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1992년 6월 1일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공식 회원국이 되었고, IMF는 세계은행, 파리클럽 및 런던클럽 등과 더불어 러시아의 경제개혁을 지원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IMF는 중앙통제경제의 몰락을 의미하는 공산당 정권의 몰락을 계기로 자유시장경제의 확산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고, 이들 체제전환기 과정에 있는 국가들에 대한 차관공여 조건(conditionality)을 제시, 이를 실천토록 강요 및 감독하였다. 물론 차관 공여조건은 이들 체제전환 과정에 있는 국가마다 달랐으며, 공여조건의 실행내용(즉 경제정책) 및 속도 또한 각국의 정치․경제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났다. IMF는 러시아가 국제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고려하여 특별한 관심과 재정적 배려를 하였고, 그 결과 제 2 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러시아에 어느 체제전환기 국가들보다 많은 차관을 제공하였다.
물론 러시아 국내정세, 특히 정치정세 때문에 IMF와 러시아정부가 합의한 경제정책들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결과 IMF가 러시아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차관들이 일부분만 집행되는 사태가 빈번히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추진되어온 러시아의 경제개혁정책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즉 시장경제로의 개혁 원년인 1992년 년 2,000%에 달하던 인플레이션이 1997년에는 20%이하로 급감하였고, 1998년에는 한자리수로 감소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소연방 붕괴이전부터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해오던 GDP도 1997년에 비록 1%도 못되었지만 성장세를 기록하였고, 이에 따라 1998년부터는 러시아경제가 본격적인 성장세로 돌입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1997년 10월말 발생한 외환․금융 시장불안은 해를 넘기면서 안정을 되찾는 듯 했으나, 1998년 5월 들어 더욱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IMF는 당면한 러시아의 경제위기 극복을 지원하기 위하여 세계은행 및 일본정부와 공동으로 러시아에 향후 2년간 226억달러를 지원하기로 러시아와 합의하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등 동아시아지역에서의 외환위기의 심화, 러시아의 국내외 사정에 따른 지속적인 루블화 가치폭락과 금융시장불안 지속 등은 옐친정부로 하여금 그동안 강력히 부정해오던 루블화 평가절하 및 국내외 채권에 대한 부분적인 모라토리엄을 8월 17일 선언할 수밖에 없게 하였다.
엘친정부의 루블화 평가절하 및 모라토리엄 선언은 국내외에 막대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즉 국내적으로는 과거 어느 내각보다도 친 IMF형 개혁정책을 추진해오던 키리옌코 내각의 퇴진과 탈 IMF형 경제정책을 선호하는 중도좌파형 프리마코프 내각의 출범을 가져왔으며, 그 결과 IMF 차관공여와 이에 부합된 경제정책을 둘러싸고 양측간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다. 또한 경제위기가 심화됨에 따라서 극도의 생활고와 경제생활의 불편에 당면하고 있는 러시아 국민들은 IMF는 물론 서방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반면에 국외적으로는 체제전환기 국가들, 특히 러시아에 대한 IMF의 경제개혁 처방의 적실성에 대한 논쟁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한국은 1997년 12월초부터 IMF의 관리체제하에 있으며, 외환․금융 위기에 따른 경제위기 조기 극복을 통한 IMF 관리체제의 조기탈출이 전국민의 관심사이자 희망사항이다. 다행히 한국 국민들은 IMF 관리체제에 들어선 직후인 12월 18일 50여년만에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달성함과 동시에 외교․경제 문제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김대중후보를 신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한국은 대통령의 국정운영부재와 정국 혼미상황이 지속되면서 경제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러시아와는 달리 김대중 대통령의 탁월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IMF와의 합의사항을 성실히,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경제위기를 서서히 극복하고 있다. IMF는 IMF가 재정지원을 하고 있는 체제전환기 국가는 물론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위기 극복처방에 대한 호된 비판에 직면하여, 한국을 IMF의 차관공여조건을 성실히 이행하여 경제위기를 극복한 사례로 지칭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이 얼마나 빠른 시일안에 당면한 IMF 관리체제를 벗어나면서 온갖 공적, 사적 부문의 체질개선을 통한 선진경제로의 약진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지난 1년간 추진된 개혁의 내용 및 그 성과는 1년전에 예상했던 것보다는 빠른 시일안에 IMF 관리체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전망을 가능케 해주고 있다.
본 연구는 한국이 현재 IMF 관리체제하에 있음을 감안하여 첫째, 러시아가 어떻게 IMF 관리체제하에 들어갔으며; 둘째, 러시아가 IMF와 그동안 어떠한 차관공여조건을 합의, 이에 근거한 어떤 경제정책들을 추진하여 왔으며; 셋째, 러시아가 왜 최근들어 모라토리엄 선언 등과 같은 심각한 외환․금융 위기에 당면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IMF의 대응은 무엇인지; 넷째, 당면한 경제위기하에서 프리마코프 내각의 경제정책 방향은 무엇이고 이에 대한 IMF의 대응은 어떠할지 등과 같은 문제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한국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아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Ⅱ. 이행기 경제에 있어서 IMF의 역할
1. 이행기 경제의 탄생과 IMF의 지원
1985년 3월 고르바초프의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임명을 계기로 점차 가시화되기 시작한 동유럽 및 구소련 지역에서의 탈공산화 움직임은 수년내에 이들 지역에서 공산당통치를 종식시키면서 지난 45여년간 지속되어온 냉전을 종식시키는 국제적 대사건으로 발전되었다. 하지만 '철의 장막'을 없애는 역사적인 계기가 된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한편으로는 유럽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기인한 정치적 분단을 종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분단을 재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달리 말해, 서유럽은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시장경제가 뿌리를 내리면서 상대적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반면, 동유럽은 지난 수십년간 유지되어온 중앙통제적 계획경제의 실패에 따른 사회․경제적 낙후와 낮은 생활수준, 경제체제의 저효율성 및 저생산성 등에 직면해 있었다. 따라서 이들 국가들은 한편으로는 중앙통제경제로부터의 시장경제로의 체제개혁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IMF, 세계은행 등 국제 경제체제로의 편입을 적극 추진하였다.
러시아를 비롯한 소연방 구성국들도 동유럽과 유사하거나 심지어 더욱 열악한 경제환경에 처해 있었다. 실제 소련 사회주의는 탄생후 효과적인 경제정책을 수립, 이를 실행할 수 없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근대적 경제발전의 기본 법칙을 부정한 것에 기인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소비에트체제는 산업사회로까지 발전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중앙통제적 계획경제체제가 갖고 있는 획일성, 노동 및 기술혁신에 대한 인센티브 부재, 기술혁신 및 자본의 부재, 비효율성, 정치체제의 역동성 부재 등에 기인하여 후기 산업사회로의 발전을 위한 도전에 적절히 대응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고르바초프하에서 소련은 이러한 중앙통제적 계획경제체제가 갖고 있는 결함들을 제거하면서 생산성을 제고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근본적인 체제개혁을 시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1년 8월 19일 발생한 당, 군, 정부내 보수강경세력에 의한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소연방의 붕괴는 물론 경제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이 시작되었다.
냉전종식과 중앙통제경제의 붕괴가 현실화되면서 당시 소련․동유럽 국가들의 상호경제지원기구인 CMEA(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는 해체되기 전까지 기존의 중앙통제적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시키는 정책수행을 지원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CMEA 회원국들이 당면한 경제곤란 및 급격한 체제전환에 따른 국내정치의 혼란지속, 그리고 이에 따른 정책조정 부재 등으로 제역할을 수행하지 못함에 따라서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IMF, World Bank 등이 이들 이행기 과정에 있는 국가들의 경제체제전환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제체제이행은 선례가 없었던 관계로 이들 국제적 경제지원기구가 당면한 도전은 아주 특이한 것이었다. 이들 국제적 경제지원기구는 우선 이들 이행기과정에 있는 국가들이 당면한 극도로 상이한 국내외 경제환경, 즉 중앙통제적 자국경제와 시장경제적 타국 경제 또는 국제적 경제여건하에서 자국경제체제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우선 인식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이들 국제지원기구가 당면한 어려움은 CMEA 회원국간 무역체제의 붕괴에 따른 문제의 해소, 생산감소 등을 해결하면서 안정화, 자유화 등과 같은 시장경제적 요소들을 어떻게 적절히 배합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이행기 국가에 바람직한 경제정책으로 권고하느냐에 관한 문제였다. 다행히 서방국가 및 이들 국제적 경제지원기구는 1980년대 초부터 개도국의 경제발전 프로그램과 외채문제를 해결시키기 위한 재정 및 정책지원을 한 경험이 있었고, 이는 이들 이행기 과정에 있는 국가들에 대한 구조조정 및 기구개혁의 모델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들 개도국 및 이행기 국가가 추진한 개혁정책의 내용과 속도, 그리고 범위 등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다.
국제적 경제기구 및 다국적 경제기구가 이행기 국가를 지원하기 위한 전반적인 계획을 수립한 것은 폴란드에서 공산당이 몰락한 1989년이었는데, 이는 이들 기구간에 긴밀한 협력을 통하여 이행기 국가들의 체제이행을 보다 효과적으로 그리고 신속히 마무리 짓도록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IMF와 세계은행은 이행기 국가들이 필요한 재정 및 정책들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즉 이들 양 기구는 "가격자유화 및 거시경제의 안정화를 위한 재정지원 및 정책자문을 준비하고; 국가독점의 해체와 새로운 인센티브제도의 도입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며; 징세행정 및 은행제도를 개혁하고; 사적 영역의 발전을 위한 법과 기구의 발전을 지원"주1) Bartlomiej Kaminski and Zhen Kun Wang, "External Finance, Policy Conditionalities, and Transition from Central Planning" in Karen Dawisha, ed., The International Dimension of Post-Communist Transitions in Russia and the New States of Eurasia (Armonk, NY: M. E. Sharpe, 1997), pp. 277-78. 하는 등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요구되었다.
원래 IMF는 1944년 7월 미국 뉴우햄프셔주의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에 44개국이 참가하여 체결한 협정에 의거, 1946년 5월 워싱턴에서 37개국이 가입한 가운데 그 업무를 시작하였고, 1998년 9월 현재 182개국이 참가하고 있다. IMF는 회원국이 일정 비율에 따라서 출자한 기금을 가지고 운영되고 있다. IMF는 출범 초기에는 세계 무역의 안정된 확대를 통한 가맹국의 고용증대, 소득증가, 생산자원 개발확대 등을 그 설립목적으로 하였으나 1970년대 이후 개발도상국의 외채문제의 해결 등 경제위기를 극복시켜 주기 위한 자금지원을 시작하면서 그 성격이 점차 변화되었다.주2) David D. Driscoll, "What is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in http://www.imf.org/search97cgi/s97is.dll. IMF는 당시 남미 국가들의 외채위기에 따른 단기 유동성의 위기를 극복시켜 주기 위기 위하여 차관을 제공하였으며, 제공과정에서 IMF는 채무국에게 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뿌리내리도록 하는 경제개혁정책을 강요하였다. 즉 IMF는 통화주의적 시장경제이론에 입각하여 차관공여를 조건으로 채무국에게 거시경제의 안정화를 최우선 목표로 하면서 자유화와 민영화, 그리고 규제완화 및 철폐를 통하여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러한 통화주의적 시장경제이론에 입각한 IMF의 재정지원 정책은 1980년대 말부터 소련․동유럽 지역에서 이행기 경제가 대두되고, 이 과정에서 이들 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재정 및 정책 지원을 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물론 서방국가 및 남미와는 달리 체제전환에 있는 국가들이 당면한 문제는 시장부재현상이었으며, 따라서 IMF는 이들 국가에서 자유주의적 시장경제환경을 창출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였다.
2. IMF의 차관종류와 프로그램의 내용
IMF가 제공해 오고 있는 차관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주3) Stanley Fischer, "Applied Economics in Action: IMF Programs," AEA Papers and Proceedings (May 1997), p. 23. 첫째는 IMF가 오랫동안 실행해 오고 있는 SBA(stand-by arrangement)로서, IMF는 차관제공을 필요로 하는 국가와 1년 또는 1년 반 동안 제공 가능한 차관액과 향후 거시경제 안정화를 위하여 시행할 경제정책(adequate safeguards)을 합의하도록 되어있다. 이후 IMF는 채무국이 약정한 정책을 추진하는지를 감독하면서 각 분기별로 정책집행의 정도를 심사, 후속자금을 제공하게 되어 있다. 차관상환은 8분기로 나누어 이루어지며, 각 공여자금이 인출된 후 5년후에 모두 상환되도록 상환일정을 정한다. 차관은 인출될 당시 각국의 단기자금 이자율의 평균과 약간의 수수료 등이 포함된 5개국 화폐로 구성된 특별인출권(SDR)의 형태로 지불된다.
둘째는 중기차관인 EFF(Extended Fund Facility)로서, 차관 수혜국의 거시경제의 안정화 및 구조조정 을 촉진시키기 위한 조건으로 제공되며, 공여자금은 일반적으로 분기별로 3년동안 지불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차관공여 세부조건은 일년 단위로 협의토록 되어 있으며, 차관상환은 각 공여자금 인출 후 4년반이 지난 시점부터 시작하여 10년이된 시점에 모두 상환토록 상환일정이 결정된다. 최근 들어, 이행기 국가에 대한 차관공여는 처음에는 수혜국의 거시경제 안정화를 위하여 SBA가 우선적으로 제공되다가 다음에 구조개혁이 강조되는 EFP로 차관형태가 변화되고 있다.
셋째는 장기차관의 형태인 ESAF(Enhanced Structural Adjustment Facility)로서 장기간 국가재정적자 문제를 겪고 있는 저소득 국가들에게 제공되는 특혜성 차관이다. 따라서 이자율도 0.5%이고, 상환기간도 1년단위로 상환되며, 총기간은 10년이다. 1997년초 현재 서부 사하라 아프리카지역 국가들과 이행기 국가들을 포함, 33개국이 이 형태의 수혜를 받고 있다.
이외에도 특정한 상황에 따라서 제공되는 수개의 특별차관들, 예를 들어 SBA보다는 공여조건이 훨씬 덜 까다로운 STF (Systematic Transformation Facility)는 불완전한 경제여건을 개선하면서 보다 효과적인 경제개혁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조성을 위하여 제공되고 있는 차관 등과 같이 이행기 국가들의 체제전환을 지원하기 위한 차관 등이 있다. 1990-94년 사이에 이행기 국가들에 제공된 차관중 SBA가 61%, STF가 38%, EFF가 1%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주4) Bartlomiej Kaminski and Zhen Kun Wang, op. cit., p. 290.
IMF는 자금을 제공하면서 수혜국의 경제정책을 변화시키고 거시경제의 안정 및 구조조정을 통한 시장경제로의 발전환경을 조성해 오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IMF 차원의 프로그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주5) Stanley Fischer, op. cit., pp. 23-25. 우선 IMF 프로그램은 경제성장의 필요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는 거시경제의 안정화를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조개혁조치를 강조하고 있는 중․장기차관인 EFF, ESAF가 보다 성장경제를 지향하는 공여 프로그램이다.
IMF의 거시경제 프로그램은 3가지 항등식(identities), 즉 중앙은행의 대차대조표상의 균형유지, 국제수지의 균형유지, 정부예산의 균형유지 등과 같은 원칙을 중심으로 작성된다. 여기서 핵심적인 요소는 국제수지와 중앙은행의 대차대조표인데 이는 국제수치에 대한 통화주의적 접근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IMF의 프로그램 자체는 전형적으로 공여자금의 집행과 IMF가 수혜국에게 제시, 상호 합의한 특정 정책의 시행 또는 목표달성 여부, 즉 순외환보유고 증가, 국가신용도 및 재정적자 등의 경제변수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거시경제 지표인 인플레율, 성장률 등은 공여조건(conditionality)으로 고려되지는 않지만 목표달성 지표로 지정된다. IMF 차관 공여조건은 IMF 직원과 수혜국간에 협의를 통하여 진행되며, 그 결과 아주 세밀한 정책사항들이 결정되지만 협의과정에서 특정 사항을 둘러싸고 이견과 갈등을 노정하기도 한다.
IMF 프로그램중, 특히 장기차관의 제공과 관련된 수혜국의 경제정책 프로그램은 구조조정과 관련된 정책, 즉 무역자유화, 가격자유화, 민영화, 간접적인 통화관리제 도입, 외환시장의 자유화, 은행구조개혁, 조세제도 개혁, 정부보조금 삭감, 정부지출구조의 변경 등과 관련된 정책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 정책의 많은 부분은 세계은행의 관리하에 있는 것과 중복되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 양금융기구관 정책조정과 협조가 필수적이다. 최근들어 IMF 프로그램은 점차 사회보장을 위한 지출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가예산 조정의 세밀한 부분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조정을 위한 조치들은 정책수행 지표라기보다는 달성해야할 목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일단 수혜국에 파견된 IMF 직원과 수혜국 당사자가 차관공여 조건에 합의하면, 이 합의서는 182개국을 대표하는 24명(1명이 8개국을 대표)으로 구성된 'IMF집행이사회'(Executive Board of IMF)에 제출되고, 이 이사회의 결정에 의하여 차관이 제공된다. 그러나 결정과정에서 투표권이 갖는 무게는 이미 결정되어 실행되어 오고 있는 IMF 기금납부액(25%는 금으로, 75%는 자국통화로 납부)에 따라 결정되는데, 예를 들어 IMF 기금총액의 18.25%를 납부하고 있는 미국은 그에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다.주6) David D. Driscoll, op. cit., p. 3. 이외 IMF 총기금중 독일은 5.67%, 일본은 5.67%, 프랑스는 5.10%, 영국은 5.10%의 할당액을 각각 납부하고 있다.
IMF가 공여하는 차관은 집행이사회의 동의로 1차분이 집행되고, 2차분부터는 분기별 공여조의 실행 만족도, 집행이사회의 평가, 파견직원들의 권고 등에 의존하여 예정대로 집행되거나 또는 지연된다. 만약 특별한 사정에 의하여 공여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에는 IMF 현지 파견직원의 권고에 의하여 정책실행 또는 목표달성이 일시적으로 면제되거나 정책실행에 대한 평가가 통과되면서 차관공여가 계속되기도 하는 등 상당한 유연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조치가 때때로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IMF 차관공여와 관련된 프로그램 수행의 비일관성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며, 따라서 IMF는 이러한 조치가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 결과 많은 IMF의 지원 프로그램들이 도중에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해 오고 있다.주7) Stanley Fischer, op. cit., p. 25.
3. 러시아의 IMF 가입과 IMF의 대러 경제지원
러시아내 친서방주의적 개혁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은 자국의 경제체제전환에 서방세계가 주요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러한 서방세계의 경제지원에 대한 기대감은 고르바초프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옐친정부의 지도부는 서방세계의 경제지원이 러시아 경제상황을 크게 호전시키고 충격요법에 의하여 파생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러한 러시아 지도자들의 사고는 소련시절 위성국들에 대한 경제지원이 경제적인 요인보다는 정치적인 요인들에 의하여 결정되어 왔기 때문에 러시아도 냉전체제의 해체와 구소련 및 동유럽 지역의 탈공산화에의 기여, 그리고 국제질서의 안정을 위한 러시아의 정치․경제적 안정의 중요성 등과 같은 정치․안보적 이유에 의하여 서방세계가 러시아에 대대적인 경제지원을 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인하였다. 물론 서방세계의 대러 경제지원은 어느 정도는 옐친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실행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러시아 지도자들이 서방세계로부터 대규모 경제지원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은 사실상 환상인데, 이는 서방세계가 러시아에 엄격한 '금융상의 책임'(financial accountability)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생 러시아 출범후 수년동안 이루어진 서방세계의 대러 경제지원, 특히 IMF와 세계은행 등을 통한 경제지원은 경제적 동인보다는 정치적 동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즉 대규모 대러 경제지원은 러시아내 개혁세력에 대한 서방세계의 지지와 이를 바탕으로 시장경제로의 개혁을 추진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서방세계의 경제지원은 러시아 국내정치에서 개혁세력이 정치․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발표되었으며, 옐친 대통령에게 공공연히 개혁파 각료를 등용하거나 해임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서방세계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경제지원의 효과가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제상황이 더욱 악화되면서 일반 국민들은 물론 공산당 등 좌파세력과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반서방주의가 확산됨에 따라서 서방세계의 대러 경제지원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논쟁의 와중에서 초기의 맹목적인 대러 경제지원 열기는 점차 사라지고, 러시아 경제지원에 대한 보다 경제적인 접근이 강조되면서 대러 경제지원의 요건도 까다로워지고 그 액수도 축소되었다.
러시아는 신생 러시아의 출범과 더불어 추진한 시장경제로의 급진 경제개혁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서방세계로부터의 재정 및 기술지원이 급선무임을 인식하고, 한편으로는 IMF, World Bank 등 국제기구에의 가입 등 국제경제 체제로의 편입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개혁 추진에 호의적인 대외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친서방주의적 외교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옐친정부는 8.19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소연방의 붕괴가 가시화되자 독자적인 경제개혁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즉 옐친 대통령은 1991년 10월 28일 개최된 인민대의원 대회에 경제개혁안을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첫째, 엄격한 통화정책 및 신용정책을 토대로 한 경제안정화와 루블화 가치강화; 둘째, 가격 자유화; 셋째, 사유화 및 사적영역의 확대를 통한 혼합경제의 도입과 토지개혁을 가속화; 넷째, 금융제도의 재조직, 예산지출의 엄격한 관리, 조세제도 및 은행제도의 개혁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소유제와 러시아 경제관리를 급진적으로 개혁하는 프로그램의 개요는 폴란드의 충격요법식 경제개혁 내용을 상당부분 도입하고 있다.
이어 11월 1일 인민대의원대회는 상기 경제개혁을 효과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하여 옐친 대통령에게 1992년 12월 1일까지 유효한 비상대권을 부여하였다. 옐친 대통령에게 부여된 비상대권은 옐친 대통령이 은행, 소유, 토지개혁, 세금, 화폐 등에 대한 대통령령을 발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하며, 그 과정은 특정 대통령령을 인민대의원대회에 송부하고, 그것이 거부되지 않을 경우 7일내에 발효되며, 이의가 있을 경우 인민대의원대회는 법안을 10일내에 심의하도록 규정되었다. 옐친 대통령은 이러한 국내환경속에서 개혁정책을 추진시키기 위한 개혁내각을 출범시키면서 11월 7일에는 겐나디 부르불리스를 제 1 부총리, 이고르 가이다르를 경제담당 부총리, 알렉산더 쇼힌을 보건, 노동 및 고용, 교육, 문화, 사회보호, 과학․기술 등을 담당하는 부총리로 임명하는 등 24명의 각료를 임명하였다.주8) Richard Sakwa, Russian Politics and Society (New York: Routledge, 1996), p. 235.
가이다르를 비롯한 경제각료들은 새 내각이 구성되자마자 IMF와 협력을 시작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IMF의 부회원국(associate member)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었으며, 이 지위는 소련과 그 구성국들이 1991년 10월 IMF로부터 부여받았다. 이 때부터 러시아는 정회원국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마치 정회원국처럼 IMF와 경제개혁정책에 관한 협의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양측간의 협의결과로 나온 것이 경제부총리 가이다르와 중앙은행 총재 게오르기 마츄힌이 공동서명, 1992년 2월 27일 발표된 "러시아연방의 경제정책 메모랜덤"이다. 러시아는 이 메모랜덤을 IMF측에 제출하였다. 이에 앞서 1992년 1월 3일 러시아는 IMF에 정식으로 회원가입을 신청하였고, IMF 집행이사회는 동년 4월 24일 러시아의 IMF 가입에 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러시아 최고회의는 동년 5월 22일 'IMF의 협정문'(Articles of Agreement of the Fund)을 비준하였고, 동년 6월 1일 러시아정부 대표에 의하여 협정문이 서명됨으로써 러시아가 IMF의 정회원국이 되었다. 주9) Alexei V. Mozhin, "Russia's Negotiations With the IMF" in Anders Asulund and Richard Layard, ed., Changing the Economic System in Russia (London: Pinter Publishers, 1993), p. 65.
IMF는 러시아에 재정지원을 하기 위한 노력을 미국과 독일의 주도로 러시아가 IMF 정회원국이 되기 전인 1992년 4월부터 이미 시작하였다. 차관공여조건에 대해서는 제 3 장에서 논의함으로 생략하나, IMF의 대러 차관공여는 1992년 SBA 형태의 10억달러, 1993년과 1994년 1, 2 차에 걸쳐서 STF 형태의 총 30억달러(각 15억달러), 1995년 SBA 형태의 64억달러, 1996-98년 사이에는 EFF 형태의 102억달러를 제공하였고, 1998년 7월에는 향후 2년간 대러차관 총226억달러중 151억달러를 IMF(나머지 60억달러는 세계은행, 15억달러는 일본이 제공)가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막대한 IMF의 대러 경제지원은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 및 경제번영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자체적인 외교․안보․경제이익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데 기인한다. 사실 러시아는 비록 소연방시보다는 영토가 축소되었으나(아직도 육지면적의 1/8을 차지) 막대한 핵무기를 보유한 군사강국이라는 점, 영토적으로도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있는 유라시안 국가로서 역내안정의 핵심요인이라는 점, 그리고 국내에서 경제개혁 실패시 반서방주의적인 공산당 또는 민족주의 세력이 집권할 가능성이 많고 이 경우 더 많은 정치․경제․외교적 비용을 서방세계가 치루어야 한다는 점,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라는 점 등이 고려되어서 어떤 이행기 국가보다도 많은 액수의 차관이 제공되고 있다. 특히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대외정책전략으로 적극 추진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세계적 확산(enlargement)과 이를 위한 적극적인 개입(engagement) 전략은 서방세계의 대러 경제지원의 중요성을 더욱 증대시켜 주었다. 그 결과 상기한 바와 같이 IMF의 대러 경제지원의 경우 경제적인 고려보다는 정치적인 고려가 차관공여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Ⅲ. 러시아의 경제개혁 추진과 IMF의 역할
1. 가이다르 내각시기(1992)
주10) 신생 러시아 출범초기 급진 경제개혁을 주도한 가이다르의 정치적 지위는 매우 취약하였다. 그는 1991년 11월 7일 경제담당 부총리로 임명된이래 1992년 3월 2일에는 제 1 부총리, 그리고 동년 6월 15일에는 총리대행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급진 경제개혁의 부작용에 따른 최고회의내 보수파들의 인준반대로 동년 12월 14일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여기서는 신생러시아 출범후 1년동안 러시아 경제개혁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감안, 1992년을 편의상 '가이다르 내각시기'로 명명하고 있다.
1992년 1월 2일부터 시행된 러시아의 급진 경제개혁은 상기한 바와 같은 가격자유화, 사유화, 안정화 등을 주요 기조로 하고 있다.주11) 구체적인 내용 및 폴란드의 충격요법과의 비교는 다음 문헌 참조. Michael Ellman, "Shock Therapy in Russia: Failure or Partial Success?," RFE/RL Research Report, Vol. 1, No. 34 (August 28, 1992), pp. 48-59. 러시아 정부는 1월 2일부터 생필품과 공공 서비스 요금을 제외한 모든 생산품 가격을 자유화하는 대규모 가격자유화 조치를 취하였다. 이 조치로 도매가격의 약 80%와 소매가격의 약 90%가 자유화되었다. 가격 자유화 정책은 소연방 시절 경제운용 메커니즘의 핵심이었던 중앙계획에 기초한 통제 및 지시체제를 개별 경제주체들이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통하여 결정되도록 하는 조치였다.
초기에는 에너지원, 기초 생필품, 주류, 의약품의 가격 및 교통 요금 등이 제외되었으나 잇따른 후속조치들에 의하여 대부분 자유화되었다. 개별기업들은 자신들의 상품가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고, 1월 29일에는 상품종류, 거래장소 및 가격의 통보를 불문하고 모든 상거래 활동을 자유화한다는 포고령이 발표되었다. 기업들은 시장을 통한 가격경쟁에 직면하여 원가절감 등을 통한 생산과 효율성 제고에 노력하여야 했다.
가격자유화 조치는 엄청난 물가상승을 촉발하여 1992년 한해동안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무려 2,600%에 달하였다. 또한 대외 경제부문에선 자유화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수입규제가 제거되고 모든 기업이 외환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조치가 취해졌으나, 수출분야에는 오히려 제한조치가 강화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수출허가제를 둘러싼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주12) 이창재, "러시아의 개혁경제," 정한구, 문수언 공편, 『러시아정치의 이해』 (서울: 나남출판, 1995), p. 7.
급진 경제개혁의 두번째 핵심은 국유 및 시영 기업의 사유화였다. 고르바초프 정권하에서 협동조합이나 주식회사로의 전환을 통한 국유기업의 사유화가 시도되기는 하였으나 극소수 소규모 기업에 적용되었다. 또한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일부 대규모 국유기업들도 형식상의 전환일 뿐 경영권은 여전히 연방이나 지방정부가 장악하였다. 이렇듯 사유제도의 부재는 개별 경영주체들의 이윤추구 동기를 박탈하였고 나아가 생산수단의 정확한 가치평가를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왜곡시켰다.
러시아에서 사유화정책은 소규모 사유화와 대규모 사유화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가격자유화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데 주안점을 둔 소규모 사유화는 국가재정의 보충을 위한 것이었다. 1992년 사유화 추진개혁 방향은 1991년 12월 29일 발표된 '국영 및 시영 기업의 사유화 프로그램'에 기초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1992년 2월에 도매유통업 및 요식업 분야 기업의 50%, 소매업의 60%, 그리고 경공업 분야의 70%를 사유화하고 1993년말까지 모든 소규모 기업을 사유화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992년 동안 소규모 사유화 대상기업의 약 40%인 25만개 소규모 기업중 단지 47,000개 기업만이 사유화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것은 최초 목표에 10% 이상 못미치는 결과였다.주13) 알렉산드르 피사레프, "러시아 연방의 사유화 추진현황과 문제점," 『북방경제』 (1992년 12월), p. 60; Stephen Fortescue, "Privatization of Russian Industry," Australi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1994), pp. 135-53. 가이다르 내각하에서의 러시아 사유화정책의 획기적인 전기는 1992년 10월 1일에 실시된 사유화증서(voucher)의 배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즉 1억5천명의 러시아 국민들에게 액면가 1만루블의 사유화증서가 무상 배포됨으로서 일반 대중이 사유화에 참여하는 '대중 사유화'(mass privatization)의 재원이 마련되었다.
1992년도 러시아 경제개혁 정책중 또 하나의 중요한 정책은 안정화 정책이었다. 경제 안정화정책은 가격자유화 및 사유화 과정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거시경제적 불균형을 해소하여 체제전환기에 나타나는 경제 불안정의 폭과 기간을 최소화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특히 이 시기의 경제안정화 정책은 통화안정을 강조하였다. 구소련의 중앙통제적 계획경제에서는 화폐게획이 부차적인 것으로 강조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화폐의 초과 공급 상태가 상존하였으나, 중앙계획에 따라서 상품가격이 고정됨으로서 인플레이션이 억압된 상태로 계속 존재하였다. 그러나 가격자유화가 이루어지고, 기업에 대한 정부 보조금이 폐지됨에 따라서 추가적인 화폐수요가 유발되어 급격한 물가상승 요인이 발생이 예상되었다.주14) 정여천, "구소련 및 러시아에서의 경제개혁과 시사점," 『통일경제』 (1998. 3), pp. 90-91.
따라서 러시아정부는 거시경제의 안정화정책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체제전환기 국가들이 당면한 정책목표인, 첫째, 가격자유화 및 사유화 등 자유화 정책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둘째, 체제전환기의 사회안정화를 위한 안정적 국가재정의 공급원을 확보하며; 셋째, 조세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기업으로 하여금 시장경제체제에 맞게 자율적 재정운용의 환경을 마련해 준다는 복합적인 정책목표를 가진 것이었다.주15) Michael Ellman, Economic Transition in Eastern Europe (Columbia, Mass.: Blackwell, 1993), pp. 18-19.
금융개혁의 성공을 위한 조건들은 가격정책과 경쟁의 도입을 들 수 있다. 즉 실물시장에서의 균형을 위해 단순히 가격의 재조절만으로 달성키 어려움으로 가격의 자유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효과적인 경쟁이 없이는 가격자유화는 바람직한 분배효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더욱이 소련의 산업구조가 지닌 특성은 독점형태였다. 따라서 이런 독점구조의 제거가 금융개혁 성공의 조건이었다.주16) 윤영득, "화폐금융부문의 개혁과 시장경제," 허만 외 공저, 『동유럽의 개혁과 시장경제의 도입』(서울: 집문당, 1993), pp. 173-75.
이런 이유로 러시아정부는 초기부터 강력한 금융․재정 긴축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위해 러시아 중앙은행은 기업에 대한 상업은행의 대출축소를 지시하였다. 이러한 방침의 일환으로 러시아 중앙은행은 상업은행 등에 대한 재할인 금리를 1991년말의 12%에서 1992년 1월에는 20%, 4월에는 50%, 그리고 5월에는 80%까지 인상했다. 상업은행의 지불분 비율도 1991년 말의 2%에서 1992년 2월에는 10%로 인상한 후 4월에는 20%까지 상향조정했다. 또한 재정부문에 있어서도 국방비 및 국영기업에 대한 보조금 삭감을 중심으로 긴축제정을 실시하였으며, 조세중 부차적 부과의 성격이 짙었던 천연자원 사용세의 비중을 줄이고, 서구형 부가가치세와 기업소득세의 비중을 늘리는 한편, 개인소득세의 누진율도 조정하였다.
그러나 가이다르 내각의 긴축기조는 1992년 중반기부터 크게 약화되었다. 특히 보수파의 영향하에 있는 러시아 중앙은행은 기존 국유기업의 대규모 도산 및 실업발생의 명분으로 1992년도 중반부터 국유기업에 대한 은행대부를 확대하기 시작하여 1-5월 동안 매월 5,000-9,000억 루블에 달했던 은행대부가 급격히 증가하여 11월에는 4조5,000억 루블에 달하게 되었다.주17) 鄭余泉, "러시아 經濟改革 推進現況과 向後 展望," 『지역경제』(1992년 12월), p. 74.
가이다르 내각이 1992년 1월 추진한 급진 경제개혁은 상기한 바와 같이 1991년 10월중에 성안이 되어 최고회의에 보고된 것이 관련법의 제정 등을 거쳐 전격적으로 실시된 것이다. 시행되자마자 물가폭등 등 많은 부작용을 가져온 급진 경제개혁은 1990년 1월 폴란드에서 시행되어 비교적 성공을 거둔 충격요법식 경제개혁에 호의적인 평가를 하면서 시행되었다. 또한 1월 2일 시행된 개혁정책은 IMF의 권고안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경제 개혁정책의 도입에 있어서 보수적인 접근보다는 급진적인 접근을 하고 있고, 그리고 가격자유화와 긴축정책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11월 18-21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던 G7과 외채연기 협상과정에서 G7이 IMF가 요구하는 정책을 수용하라는 건의를 받아들인 결과였다.주18) Michael Ellman, "Shock Therapy in Russia", op. cit., p. 48.
그러나 러시아가 IMF의 차관공여 및 회원가입 허용에 대한 전제조건을 수용하여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양측이 협의, 작성한 것은 1992년 2월 27일 발표된 "러시아 경제정책에 대한 비망록"주19) E. Gaidar and G. Matiukhin, "Memorandum on the Economic Policy of the Russian Federation," Russian Social Science Review (1993, 1-2), pp. 3-21. 이 처음이다. 이 비망록은 1992년 4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추진할 정책들을 IMF의 요구를 수용하여 작성하였는데, 이는 첫째, 이 비망록은 러시아 정부로 하여금 IMF측과 SBA 형태의 차관을 공여받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기에 앞서 아주 중요한 협상경험을 제공해주며; 둘째, 러시아의 경제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게 해주고; 셋째, 국제적 지지를 바탕으로 경제개혁 정책에 대한 국내지지를 얻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주20) Alexei V. Mozhin, op. cit., p. 65.
IMF의 차관공여는 대체로 특정 정책에 대한 양자협상(negotiation)을 통하여 정책합의(commitments)가 비망록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후 수혜국은 합의한 정책들을 실행(implimentation)하고, IMF는 합의한 정책의 실행여부를 감독, 평가하여 이를 바탕으로 대기성 차관의 계속 집행여부를 결정한다. 러시아는 IMF와 다음과 같은 정책들을 1992년중에 실행하기로 약속하였다. 물론 이들 정책들이 국내외 사정에 의하여 전부 이행된 것은 아니다.
우선 가격정책 및 인플레이션과 관련하여, 러시아는 IMF와 첫째, 집임대료, 공공 유틸리티료, 공공 교통요금 등을 제외한 아직 자유화하지 않은 모든 소비재 가격을 1992년 3월까지 자유화하고; 둘째, 1992년 4월 20일까지 에너지 가격의 자유화 및 에너지 상품에 대한 새로운 수출세를 도입하기로 합의하였다.
사회보장과 관련하여, 러시아는 IMF와 첫째, 집임대료, 공공 유틸리티요금, 공공 교통요금을 상승하는 비용에 맞추어 인상하기로 합의하였으며; 둘째, 연금과 사회보장혜택은 연금기금과 사회보장기금의 재원을 이용해서만 지불해야 하고; 셋째, 새로운 실업수당제도를 1992년 6월 1일까지 도입하기로 약속하였다.
예산정책과 관련하여, 러시아는 IMF와 첫째, 현금기준 1992년 1분기 재정적자를 GDP의 1% 이내로 유지하며; 둘째, 2분기 예산중 모든 상품에 28%의 부가세(VAT)를 재부과하고; 셋째, 수많은 면세제도를 축소하며; 넷째, 1992년 4월 20일까지 에너지 가격의 자유화 및 에너지 생산 및 소비에 세금을 추가 부가하고; 다섯째, 1992년 7월 1일을 기하여 수입품에도 부가세를 부과하기로 합의하였다.
통화정책과 관련하여, 러시아는 IMF와 첫째, 중앙은행은 가능한한 빠른 시일안에 퍼지티브 실세금리(positive real interest rates)를 도입하며; 둘째, 정부는 1992년 4월 1l일까지 국채에 대한 보다 현실적인 이자율을 도입하고; 셋째, 중앙은행의 1992년 1분기중 상업은행에 대한 대부한도를 15%로 유지하며; 넷째, 정부에 대한 중앙은행의 대부는 GDP의 2%를 넘지않도록 유지해야 한다고 합의하였다.
소득정책과 관련하여, 러시아는 IMF와 국영기업에 근무하는 자의 월급이 과도하게 증가할 시 누진세를 도입하기로 약속하였다. 즉 기준 임금 1%를 초과할 시는 100%, 2% 초과할 시는 200%, 그 이상 초과할 시는 400%의 세금을 부과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가격자유화 및 사유화에 따른 소득증대 문제에 직면하여 누진세의 도입을 적극 권장하였으나 러시아는 이를 끝내 실행하지 않았다.
대외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러시아는 IMF와 첫째, 1992년 4월 20일까지 다수의 환율제도를 폐지하고, 단일 환율제도를 도입하며; 둘째, 1992년 4월 1일까지 외환시장을 발전시킬수 있는 외환규정 및 관리에 대한 새로운 법의 제정; 셋째, 에너지 제품을 제외한 모든 수출할당제를 1992년 7월 1일까지 폐지한다고 합의하였다.
경제정책에 대한 비망록을 작성하기 위한 러시아의 IMF와의 협상는 향후 IMF 차관도입을 위한 IMF 등 국제금융기구와의 협상에 대한 좋은 경험을 러시아에게 제공해 주었다. 러시아는 IMF 및 세계은행의 차관을 공여받기 위해서는 이들 기구의 회원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이를 추진 1992년 4월 27일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이후 러시아와 IMF측은 차관공여 조건을 협의하였고, 상기한 경제개혁 정책들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약속하에 IMF는 1992년 7월 5일 24억달러의 SBA 형태 차관중 제 1 차 공여분 10억달러의 대러지원을 결정, 8월에 양도하였다.
원래 IMF의 사무총장인 캉드쉬(Michel Camdessus)는 러시아 정부가 약속한 에너지가격의 자유화를 거부하고, 6월들어 최고회의 통제하에 있던 중앙은행이 산업 및 농업 분야의 지원을 위한 대규모 보조금을 집행함과 동시에, 기업들이 안고 있던 부채 3조루블을 탕감해주자 차관공여를 못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차관미 공여가 가져올 러시아의 국내외 파장을 고려해 제 1 차분이라도 집행하도록 협조를 요청하였고, 그 결과 10억달러가 제공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루블화 안정을 위하여 제공될 예정이었던 60억달러는 러시아가 상기한 '경제정책에 대한 비망록'에 적시된 통화정책을 수행하지 않음에 따라서 제공하지 않았다.주21) Leszek Buszynski, Russian Foreign Policy after the Cold War (Londdon: Praeger, 1996), p. 61. 물론 그외 정책도 집행되지 않음에 따라서 24억달러중 10억달러를 제외한 대기성 차관은 집행되지 않았다.
러시아가 IMF와 합의한 정책들을 시행할 수 없었던 것은 합의한 정책들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국내적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즉 1992년 6월에는 임금체불에 항의하는 파업과 노동자들의 데모가 심화되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임금지불을 하자 통화령이 증대되었으며, 기업들 또한 긴축정책으로 자금난은 물론 투자부진(전년에 비해 37%)으로 생산감소를 경험하고 있었다. 새로 임명된 게라시첸코 중앙은행 총재는 가이다르 내각과 정치적 타협을 통하여 통화량을 증가시키는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통화량증가는 기업들간의 상호지불 연체액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나 동시에 물가상승을 유발시켜 1992년중 물가상승률이 2,500%를 상회하였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실질소득은 크게 감소하고, 빈부격차는 심화되었으며, 부정부패와 조직범죄가 만연되어 갔다. 결국 가이다르는 총리인준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6개월간 총리대행을 하면서 비교적 급진개혁을 추진하다가 1992년 12월에 개최된 제 7 차 인민대의원 대회에서 총리인준을 받지 못하고 중도 퇴진하였다. 2. 체르노미르딘 내각시기(1993-1997)
체르노미르딘 내각하에서의 러시아와 IMF간의 관계는 IMF의 대러 차관공여 결정 및 집행 시기에 따라서 대체로 3시기, 즉 1993-94년, 1995년, 1996-97년 등으로 구분하여 살펴 볼 수 있다.
가. 1993-94년도
1992년 12월 옐친 대통령과 최고회의간의 타협의 산물인 체르노미르딘 내각의 출범은 가이다르 내각하에서 추진된 급진 경제개혁의 실패뿐만 아니라 보․혁간의 첨예한 대립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실제 체르노미르딘 내각하의 경제정책은 일관성을 갖지 못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정부는 긴축정책을 추진한 반면, 최고회의의 감독하에 있었던 중앙은행은 보조금을 통한 국영기업의 지원을 목표로 하는 산업정책을 중시하였다.
또한 각료들간 경제정책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은 경제정책을 일관되고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없게 하였다. 예를 들어, 재정 및 사유화를 책임지고 있는 대부분의 개혁성향 각료들은 재정적자를 줄이는 것을 주요 목표로 설정한 반면, 에너지, 농업 및 산업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대체로 보수성향의 각료들은 이들 분야에 대한 재정보조금의 확대를 위한 로비에 몰두하였다.
이상의 두 정책중 체르노미르딘은 대체로 보수성향의 각료들이 주장하는 정책을 선호하였다. 실제로 총리 취임초기인 1992년 말과 1993년 초에는 에너지 산업 및 농업 분야에 대한 정부 보조금의 증액, 최저 연금 및 임금인상 등과 같은 긴축정책에 반하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특히 1993년 4월 25일 국민투표를 앞두고 이에 따른 불안감과 불확실성 때문에 사실상 경제개혁조치는 유보되었다 할 수 있으며, 3월중 경제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 최저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옐친 대통령은 국민투표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소기업에 대한 지원책 발표, 예산으로 지급되는 급여인상, 각종 사회복지 수당 인상 등을 실시하였으며, 예정되었던 석유가격의 인상도 5월까지 보류하였다.주22) 高在南, "'93년 러시아 政治-經濟의 回顧와 向後 展望," 『지역경제』 (1994년 1월), p. 51.
국민투표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옐친정부는 경제정책에서 항상 대립되어 왔던 중앙은행과 인플레 억제와 경제의 안정화 추진정책에 합의하였다. 그 결과 1993년 6월에는 인플레 억제와 경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중앙은행은 재할인율을 인상하고 외환시장에의 개입을 중단하였다. 정부는 세수증대를 위하여 수출쿼터를 늘리고 세출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수입보조금을 삭감하였으며, 국민투표중 옐친 대통령이 약속한 임금 인상 및 사회복지수당의 인상 약속을 철회하였다. 또한 재정적자를 메꾸는 수단으로 통화를 남발하는 대신에 3개월 만기의 국채를 발행하였다.주23) 이창재, "러시아의 개혁경제", p. 444.
그러나 옐친정부의 중앙은행과의 불화는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7월 24일 당시 통용되고 있던 화폐중에서 93년 이전에 발행된 루블화의 통용을 중지하고 시민 1인당 최고 35,000루블까지 교환해 주고, 그 이상의 금액은 국영은행에 강제 예치한다고 발표하였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통화 개혁조치에 대한 타당성을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첫째, 합법적으로 거래되지 않은 대규모의 현금 보유액을 축출하고; 둘째,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며; 셋째, 위조화폐 제조를 곤란하게 하고; 넷째, 구소련과 현재 러시아연방 화폐사이의 애매함을 종식시킴과 동시에 루블권내에 있는 모든 국가들이 러시아 중앙은행의 통제를 받게된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통화개혁은 그 동안 추진해온 경제개혁과 신헌법의 제정을 둘러싼 보․혁간의 대립의 산물이었다.주24) 구영종, "러시아의 통화개혁," 『월간 해외경제』(1993. 8), p. 88.
국민투표가 첨예한 옐친 대통령과 최고회의간의 대립속에서 이들 양 권력기관에 대한 국민들의 신임 투표의 성격이 짙었던 관계로 당시 서방세계, 특히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옐친정부에 대한 지원도 강화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4월 3-4일 뱅쿠우버에서 개최된 미․러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에 15억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4월 15일에는 18억달러를 추가로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은 또한 동년 7월 8-9일 동경에서 개최된 G7회담은 미국의 주도로 기존의 지원프로그램과 새로운 지원프로그램을 합쳐 총 434억달러를 러시아에 지원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지원 프로그램중 15억달러는 러시아의 외채상환을 위해서, 그리고 러시아와 이들 국가간 양자차원의 공여차관을 포함한 284억불은 안정화 및 필수품의 수입을 지원하기 위하여 사용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때 G7 정상들은 또한 러시아가 IMF 차관공여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관공여를 할 수 있도록 결정하고 STF 형태의 30억달러를 러시아가 개혁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보장하에 지원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자금은 재무장관 표도로프(Boris Fyodorov)와 중앙은행 총재간 산업 및 농업분야에 대한 보조금을 제한하기로 합의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사실 당시 년 인플레이션은 2,000%에 달하였고, 재정적자도 GDP의 20%에 달하였던 관계로 IMF의 차관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경제여건이었다. 주25) Leszek Buszynski, op. cit., p. 63.
이러한 미국을 비롯한 G7 국가들의 대러 경제지원이 가시화되자 옐친정부도 이에 부응한 경제정책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즉 체르노미르딘 총리는 1993년 8월 6일 확대각료회의에서 정부의 경제정책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러시아정부는 긴축정책과 가격자유화 정책을 계속할 것이며 사유화 정책을 더욱 가속화한다는 것이다. 이 정책안은 결국 1992년 러시아 정부의 경제개혁 구체화 방안과 같은 노선의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최고회의는 옐친 대통령의 거부권과 재정적자를 절반으로 축소시키라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가 GDP의 20%를 차지하는 예산을 통과시키고, 옐친 대통령의 사유화 정책에 제동을 거는 등 또 다시 경제개혁 추진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체르노미르딘 총리가 발표한 경제정책안은 3단계로 추진될 정책을 담고 있었다. 즉 제 1 단계는 위기상황으로 생산하락이 멈추는 1994년 상반기까지이며, 1단계가 끝날 무렵에는 통제가격의 비중은 GDP의 3-5%로, 국가의 구매는 GDP의 20%로 각각 감소하고, 재정적자는 GDP의 8-10%, 인플레는 월 5-7%의 수준에 각각 머물 것으로 전망하였다. 제 2 단계는 안정기로 1994년 하반기부터 1995년까지를 포함하는데, 이 기간동안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대규모의 사유화가 진행되며, 효율적인 금융제도가 확립된다. 이후 제 3 단계인 1996년부터는 러시아가 경제가 본격적인 성장경제로 돌입한다는 전망을 하고 있다.주26) 이창재, "러시아의 경제개혁", p. 445.
그러나 그동안 신헌법 제정 및 경제개혁을 둘러싸고 계속되던 행정부와 최고회의간의 갈등은 급기야 동년 9월 21일 의회해산과 대통령중심제 신헌법의 채택과 양원제 도입이라는 정치적 혁명을 초래하였다. 옐친 대통령은 1993년 12월 12일 실시된 국가두마 선거에서 공산당, 민족주의 정당 등이 승리하자 가이다르 부총리, 표도로프 재무장관 등 개혁파 각료들을 내각에서 퇴진시키고, 1994년 1월 20일 소스코베츠, 자베루하, 야로프 등 중도보수파 인사들을 대거 영입해 체르노미르딘 총리의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파의 퇴진은 1993년 후 1994년 중반까지 비교적 지속적으로 이어지던 러시아에서의 긴축정책을 다시 완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4년 중반부터 군수산업과 석탄산업분야에 대한 정부보조금 및 은행대출이 대폭 확대되었고, 이는 통화팽창을 가져와 1994년 10월 11일 루블화 가치가 27.4%나 하락하는 등 '검은 화요일'을 겪었다. 이 루블화 폭락사태는 정부의 개입으로 곧 진정되었으나, 그 여파는 국민들로 하여금 루블화보다는 경화를 선호하는 심리를 조장하고 연말 물가상승도 월 12-16%로 급증시키는 등 상당기간 동안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러시아는 IMF와 약속한대로 1994년 6월말까지 바우처에 의한 사유화를 종료하고, 동년 7월부터는 현금에 의한 사유화가 진행하는 등, 이 기간동안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은 사유화의 진전이었다. 실제로 1994년 말까지 약 11만개의 기업들이 사유화되었으며, 이로써 중소기업은 약 70%, 대기업은 약 55%가 사유화되었다.주27) M. Boyko, et al., Privatizing Russia (Cambridge: MIT Press, 1995); 鄭余泉, 『러시아에서의 企業環境이 變化』(서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지역정보 센터, 1994), pp. 79-81. 즉 이기간 동안 천연가스 생산기업인 Gazprom, 러시아 최대의 석유생산기업인 Lukoil, 기계제작 분야의 거대기업인 Uralmash, 자동차 분야의 Zil, Avtovaz 등이 사유화되었다.
체르노미르딘 내각의 경제계획에도 불구하고 1993-94년 동안 러시아는 경제안정의 달성에 실패하기는 하였으나, 정치권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경제상태가 이전보다 많이 호전되었다. 또한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법규, 제도 및 기구개편 등 제반준비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일반 국민들이 시장경제의 원리와 경제행위에 대한 지식을 서서히 터득함으로 해서 본격적인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기반을 조성한 기간이었다.
이 기간동안 러시아는 IMF로부터 1993년 7월과 1994년 4월에 STF 형태의 차관 15억불을 두차례나 공여 받았다.주28) The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April 22, 1994). IMF는 당시 전환기 국가들의 체제전환을 지원하기 위한 STF 차관을 신설하였는데, 그 공여조건이 너무 까다로와 공여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전환기 국가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공여조건을 완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그 결과 IMF의 대러 공여조건에 대한 완화가 이루어져 안정화에 큰 역할을 못했으나 30억달러의 차관이 공여되었다.
1993년 7월 제공된 15억달러는 외환보유고의 확충보다는 통화발행을 통한 방법이 아닌 지원된 차관을 이용한 재정적자 보전용으로 지정되었다. 이 차관은 재정적자를 점차 줄여나가고 국가의 부채축소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하여 제공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따라서 옐친정부는 1993년말까지 재정적자폭을 2분기 GDP의 11%에서 4분기에 8.5%로 감축시켜야만 했다. 또한 인플레이션도 2분기 월 17%에서 4분기에는 월 8%로 감소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정부의 긴축정책에 대한 정치적 저항과 이익단체 또는 관련 정부기관들의 사보타지로 차관공여 조건들이 충족되지 못한 상태로 1993년이 마무리되었다. 주29) Ernesto Hernandez-Cata, "Russia an the IMF: The Political Economy of Macro-Stabilization," Problems of Post-Communism (May/June 1995), pp. 23-24.
1994년 4월에 제공된 STF 형태의 15억달러도 첫째, 가격, 외환시장의 자유화, 사유화의 확대 등의 분야에서 안전장치를 강화하고; 들째, 대외무역의 자유화를 촉진, 확대시키며; 셋째, 1994년 말까지 월 인플레이션을 7%로 감소시키는 것 등의 목표를 달성하는 조건으로 제공되었다. 차관공여 조건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는 재정적자를 GDP의 2.5%로 낮추기 위하여 긴축정책을 시행해야 했다. 중앙은행은 화폐 및 신용대부를 점차 줄이면서 중앙은행의 지불준비금을 증가시켜나가야 했다. 러시아는 IMF의 차관공여 조건들을 여름까지는 잘 이행하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즉 1994년 1월 인플레이션이 18%이던 것이 6월에 6%(STF 프로그램은 10% 정도로 요구)로 하락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주30) Ibid., p. 25. 그러나 상기한 바와 같이 1994년 말에는 인플레이션이 월 20%로 증가하였고, 외환보유고가 크게 감소하였으며,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악화되어 1993년에 달성한 안정화가 물거품이 되었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IMF의 러시아정부에 대한 차관공여 조건설정과 이의 실행에 대한 감독을 완화시킨 것이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차관공여 조건의 불이행은 예정된 추가 SBA 형태의 차관지원을 연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 1995년도
1994년말 러시아의 정치․경제 정세는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통화팽창정책이 가져온 결과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IMF 또한 1994년도 실행된 차관공여와 그 조건이행 등의 경험을 통하여 경제안정하 프로그램에 대한 러시아 정부와 보다 긴밀하게 협력할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또한 1994년 12월 4일 러시아군의 직접 개입으로까지 비화된 체첸전쟁은 정치․경제적 상황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러시아정부는 1995년초 거시경제의 안정화와 투자촉진을 통한 산업생산 회복을 중심으로 하는 3개년간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확정하였다. IMF는 1995년 4월 11일 러시아에 12월간 지급되는 SBA 차관 68억달러를 러시아의 경제안정화와 개혁 프로그램을 위하여 공여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IMF는 1994년도 STF 프로그램에 의한 경제정책의 성과가 실망스럽다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과거보다 철저한 안정화 및 구조개혁을 단행, 중기적으로 생산성을 회복하고 국민 생활수준을 향상시킨다는 목표를 세웠다. IMF와 합의한 1995년도 프로그램의 주요 목적은 첫째, 1995년도 하반기에는 월 평균 인플레이션이 1%로 감소되도록 긴축통화정책을 엄격히 추진하고 동시에 재정적자의 상당한 양의 축소를 위한 정책을 실행하며; 둘째, 광범위한 구조개혁, 특히 무역 및 석유 부문의 자유화를 위한 조치를 통하여 시장경제로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주31) IMF, "IMF Approves Stand-by Credit for Russia," in http://www.imf.org/ external/np/sec/pr/1995/PR9521.HTM.
이 프로그램이 제시한 또 다른 경제정책 운용기조는 투자촉진을 통한 생산기반의 구축인 바, 특히 재정수입의 제약으로 인한 공공투자의 부족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민간 투자촉진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러시아 정부는 높은 인플레와 같은 거시경제적 불안정으로 국내 투자재원이 투기자금화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산업 투자자금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정부 발주 공공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 민간의 공동투자와 더불어 투자 주식기업의 정부에 대한 매입, 기업의 투자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의 투자보장을 통하여 정부가 민간의 투자 부담을 경감시키는 방법 등이 제시되었다. 또한 기업의 조세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기업 조세제도의 일부 개정과 세밀한 조세제도의 준비 등과 같은 정책이 제시되었다.
옐친정부는 재정적자 축소와 중앙은행의 재정적자 보전을 통한 통화량의 증가를 최대한 억제시키기 위하여 중앙은행을 정부와 국가두마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옐친정부는 6월 6일 전통적인 통화정책에서 약간 벗어난 'Ruble Corridor'를 도입하여 환율의 안정을 위해 소극적인 개입을 시작하였고 가격통제의 일환으로 초과 임금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 결과 1995년도 말에 와서 인플레이션은 년초 월 17%이던 것이 4%로 크게 감소하였고, 그 결과 1년 물가상승율도 전년에 비하여 크게 감소된 131%였다. 그러나 정부 재정적자를 메꾸기 위하여 발행된 단기국채인 GKO가 GDP의 4.5%로 증가하였다.주32) 이상준, "러시아에서 IMF 구조조정프로그램이 미친 영향: 금융 및 산업부문의 구조조정에 관하여," 『國際地域問題硏究』, 제 16 권 제 2 호 (1988), p. 167. 또한 러시아정부는 IMF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1995년 4월 석유산업의 수출 쿼터를 폐지하고, 수출관세는 30% 정도로 하향 조정하였다.
옐친정부는 1994년 7월초부터 현금에 의한 2단계 사유화를 추진하였는데, 정부는 사유화과정에 참여하는 투자가들에게 구체적인 투자계획을 제출하도록 하여 실질적인 투자가를 유치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초기에는 큰 성과가 없었고, 정부가 10월 들어 정부의 은행에 대한 부채와 사유화된 기업의 지분을 맞교환하는 'shares-for-loan program'에 금융자본가들이 참여함으로써 금융․산업 그룹에 형성에 기여하였다. 한편 이는 정경유착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옐친정부는 이를 통하여 무엇보다 실물경제의 자금난을 해소하고 투자를 늘리려 하였다.
1995년도는 12월에 국가두마 선거가 실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시경제지표가 안정을 회복한 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즉 물가상승율이 월 한자리 수로 감소하였으며, 루블화도 미화 1달러당 4,500루블 정도를 유지하였고, 생필품 공급 부족현상도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기간동안 재정적자가 감소하고 사유화가 주요 기업으로 확대되었으며, 교역량이 크게 증가하면서 240억달러의 흑자를 시현하였다. 그러나 긴축정책에 따른 재정지출의 축소로 연금생활자 및 실업자들이 극심한 생활곤란을 겪는 등 빈부격차가 심화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과 지방간, 도농간 경제격차가 심해지면서 민심이 이반, 12월 17일에 실시된 국가두마선거에서 공산당 및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자유민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다. 1996-97년도
IMF는 1996년 3월 1996-68년 사이의 중기 경제안정화 및 구조개혁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하여 EFF 형태의 차관을 공여하였다. 러시아 정부와 IMF가 합의 작성한 1996년 프로그램은 경제성장 추세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첫째, 년 평균 인플레를 한자리 숫자로 낮추고; 둘째, 중기적으로 재정균형을 달성할 수 있는 구조개혁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실질 GDP 성장률이 1996년 2-3%, 그리고 1998년에는 5%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또한 그 이후에는 적어도 6%를 유지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96년 프로그램은 또한 소비자 물가상승율이 1995년 190%에서 1996년 51.2%, 그리고 1998년에는 6.9%로 낮춘다는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1996년도 프로그램은 재정적자를 1995년 GDP의 5%에서 1996년에는 4%, 그리고 1998년에는 2%로 낮춘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주33) IMF, "IMF Approves Three-Year EFF Credit for the Russian Federation" (March 26, 1996) in http://www.imf.org/external/np/sec/pr/1996/PR9613-HTM
1996년도 프로그램은 또한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마무리 짓기 위한 수개의 구조개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프로그램은 러시아 정부가 수출레짐의 자유화를 완료하고 수입세를 감소시키는 조치를 취하여 무역자유화를 마무리 짓는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또 러시아 정부는 WTO의 가입을 추진한다는 정책을 밝히고 있으며, 프로그램은 은행제도의 강화와 보다 공정하고 투명한 사유화를 더욱 더 급속히 추진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중기 프로그램은 또한 농업개혁, 도시의 부동산 매매관련법의 제정, 증권시장의 활성화를 위한 법 등을 기한내에 마무리 짓겠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프로그램은 체제전환 과정에서 양산되고 있는 극빈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보장제도의 확충을 위한 정책방향을 명시하고 있다.
러시아가 IMF와 상기한 프로그램들을 향후 3년간 이행하겠다고 약속함에 따라서 파리클럽은 1996년 4월 소연방으로부터 승계한 러시아의 외채를 6년 거치 25년 분할 상환하는 것으로 재조정하였다. 동년 11월 런던클럽도 유사한 조건으로 러시아의 외채를 장기외채로 전화시켜 주었다. 이에 따라 옐친정부는 1996년 4월 석유를 제외한 모든 수출품의 수출세를 폐지하였고, 7월에는 석유수출세마저 폐지하였다. 그리고 동년 6-7월에 있었던 대선에서 옐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함에 따라서 상반기중 주춤하였던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물가상승도 25%로 안정세를 유지하였다.
러시아는 1997년에 재정부문의 안정화로 개혁정책 추진후 처음으로 GDP가 0.4% 성장하였다. 물가도 당초 목표치인 11.8% 보다 낮은 11%를 기록하였다. 이는 금융위기로 1998년도 물가상승율이 70%이상으로 다시 상승하였음을 고려해 볼 때, 옐친정부하에서 제일 낮은 물가상승률을 시현한 셈이다. 그러나 1997년말 정부의 단기부채는 GDP 대비 6%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 상호지불 연체액은 다시 증가하여 GDP 대비 26%(95년 18%)에 이르렀다. 특히 하반기들어 동아시아지역에서의 금융불안이 심화, 확산되면서 신흥 금융시장인 러시아에서도 외국인의 투자자금이 유출(4분기중 약 50억달러)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10월 28일부터 11월 10일 사이 주가지수도 30% 이상 하락하여 금융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에 러시아 중앙은행은 재할인율을 21%에서 28%로 상향 조절하였으며, 채권시장의 이자율도 25% 이상으로 올렸다. 또한 외환시장의 'Ruble Corridor'도 보다 탄력적으로 운영하였으며, 무역수지 흑자(1997년도에 198억달러)에 힘입어 1997년말의 외환위기를 최소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재정적자,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무역흑자, 금융시장내 외국인의 많은 투기성 자본 등을 고려해 볼 때 러시아에서 언제라도 금융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었다.주34) 이상준, 전게논문, p. ?.
IMF는 1996년 3월 약속한 차관을 집행함에 있어서 러시아가 프로그램에 명시된 정책들을 실행하고 있는지를 처음에는 매월 평가하다가 1997년초부터는 분기별로 평가하였다. 실행을 수량적으로 평가하도록 정해졌다. 차관공여도 197년초까지는 월별로 집행되고, 그 이후부터는 분기별로 집행되도록 계획되었다.주35) IMF(1996). IMF는 감독과정에서 세금 징수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 것을 계속 문제삼았다. 그 결과 IMF는 세금 징수율이 낮은 것을 이유로 1996년 7월, 10월, 1997년 2월에 각각 자금인출을 연기하였다. 최근에는 세제, 사회보장제도 등의 개혁을 바탕으로 재정적자를 줄이고, 경제운영 규칙들의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다.
Ⅳ. 러시아 금융위기와 IMF
1. 키리옌코 내각하의 금융위기와 IMF
가. 키리옌코내각의 출범과 금융위기의 발생
옐친 대통령은 1998년 3월 23일 1992년 12월이후 5년동안 총리직을 수행해 오던 체르노미르딘 총리를 해임하고, 30대중반의 키리엔코 에너지 및 연료부 장관을 신임 총리로 임명하였다. 옐친 대통령은 TV방송을 통해 "현재 국가에는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개혁성과를 이끌어낼 지도부가 필요하다"며 "내각해산은 경제개혁에 활력과 효율성 그리고 새로운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총리교체의 이유를 밝혔다.주36) Itar-Tass (March 23, 1998). 그러나 총리교체의 이면에는 당시 병약한 상태에서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던 옐친 대통령이 체르노미르딘 총리가 노골적으로 대권욕을 드러내면서 대권을 향한 행보를 점차 강화하자 이를 사전에 차단하면서 권력누수현상을 막고자 하는데 진정한 의도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전격적인 총리교체는 옐친 대통령과 국가두마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면서 정국혼란은 물론 국가 주요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두마와 행정부간 극심한 대립과 갈등은 공산당 등 좌파세력과 자유민주당 등 민족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여소야대의 의회를 출범시킨 1995년 12월 총선 이후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까지 국가두마의 수차례에 걸친 내각 불신임 기도, 옐친 대통령의 탄핵 기도, 옐친 정부가 지향하는 정책과 반대되는 정책 입법화 등 양측간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어 왔다.주37) 참고로 국가두마의 정당별 구성을 살펴보면, 450명이 정원인 국가두마 내 교섭단체(의원 35명 이상으로 구성)는 7개로서 그 구성원 수는 1997년 6월 현재 공산당이 149명, 우리집 러시아가 65명, 자유민주당이 51명, 야블로코가 45명, 러시아 지역그룹이 41명, 민중권력 그룹이 37명, 농민당이 35명, 그리고 무소속 27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두마와 행정부간의 대립은 지난 3월 23일 체르노미르딘 내각의 총사퇴후 신임총리로 지명된 키리엔코 총리의 임명동의를 둘러싸고 더욱 격화되었다. 키리옌코 총리는 경험 부족, 과도한 시장개혁 성향 등을 이유로 총리 임명을 반대하는 공산당, 야블로코 등의 적극적인 임명 반대로 1, 2 차 총리인준이 부결되었고, 4월 24일 마지막 기회인 3차 투표에서 찬성 251명, 반대 25명, 나머지는 기권으로 임명 동의를 받았다. 키리옌코 총리의 임명 동의 절차는 옐친 대통령과 국가두마의 힘겨루기에서 국가두마의 해산을 우려한 의원들중 일부(심지어 공산당 소속 의원)가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종결되었다. 옐친 대통령은 당시 키리옌코 총리의 임명동의안이 국가두마의 3차 투표에서 부결될 시 헌법에 의거 국가두마를 해산, 총선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정국혼란은 1997년 10월이후 간헐적으로 지속되어 오던 외환․금융위기를 하기하는 요인들과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즉 주가폭락, 금리인상, 환율상승, 외환보유고 급감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러시아의 금융시장 불안은 동남아시아의 금융위기 충격으로 작년 10월말에 가시화된 이후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어 왔으며, 1998년 5월중 발생한 금융시장 불안은 국내외적으로 '金融危機'라 평가될 정도 그 정도가 심각한 것이었다.
러시아 금융위기의 시발로 볼 수 있는 작년 10월말의 금융시장 불안은 10월 23일 약 600억달러 규모의 러시아 국채(이하 GKO) 시장에서 1/3을 점유하고 있던 외국자본중 일부가 갑자기 이탈(연말까지 미화 50억달러 이탈 추정)하면서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 GKO 수익률이 10월중 19.8%이던 것이 12월 36.6%로 급등하는 등 금융불안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주식시장에서도 외국자본이 급격히 퇴출하기 시작하여, 소위 '검은 화요일'로 기록되었던 10. 28에는 수익성이 높은 거대 기업들의 주가지수(이하 RTS)마저 대대적으로 하락(1주간 18% 하락)하였고, 그 결과 10월-11월중 주가지수가 약 38%가량이나 폭락하였다. 환율 또한 10월 28일 하루동안 54루블이나 상승하는 등 외환시장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외환보유고는 9월말 250억달러이던 것이 12월말에는 180억달러로 크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옐친정부의 적극적인 루블화 가치 방어정책에 힘입어 10월초에 미화 1달러당 5,859루블이던 것이 12월말에는 5,974루블로 상승하는데 그쳤으며, 작년도 인플레이션도 전년대비 11% 상승하는데 그쳤다. 또한 예상치보다는 적으나 급진경제개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GDP가 0.4% 성장률을 시현하였다.
러시아의 금융시장은 작년 12월들어 약간 안정세를 보였으나 금년들어 다시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어 왔다. 즉 RTS는 1월중 -28.8%, 3월-5월초에는 -13%를 기록하였으며, GKO 수익율은 1월중 33.4%, 2월중 29.6%, 3월중 24.4%, 4월중 27.9%을 기록하였다. 환율도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1월초 미화 1달러당 6.000루블(1998. 1. 1을 기해 루블화의 명목가치를 1000배 절상)하던 것이 2월중에는 6.064루블, 4월중에는 6.160루블로 인상되었다. 외환보유고도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2월말 180억달러이던 것이 2월말에는 160억달러, 3월말에는 150억달러, 4월말에는 160억달러로 감소하였다. 이러한 러시아 외환․금융 시장의 불안은 Moody's 사로 하여금 2월중 러시아의 외화표시 국채 신용등급을 Ba2에서 Ba3로 하향 조정케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불안한 상태를 보이던 러시아 금융시장은 5월 18일과 5월 27일 RTS가 각각 12.7%, 12% 폭락하는 등 패닉(panic) 현상의 발생과 금융시장이 주가폭락(5월중 -40%), GKO 수익율 상승(+90%), 외환보유고 감소(보유금 50억달러 포함 약 145억달러), 환율상승 압력 등을 경험하면서 심각한 위기국면에 처하였다. 이후 옐친 정부의 적극적인 금융시장 개입과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미국 등 서방세계는 물론 국제 금융기구의 호의적인 지원태도로, GKO 수익률이 5월 29일 70%에서 6월 4일 45%로, 중앙은행의 재활인율은 5월말의 150%에서 6월 5일 60%로 각각 하락하였고, RTS도 6월 1일-8일 사이에 25% 상승하는 등 러시아 외환․금융 시장의 여건이 조금씩 호전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나. 최근 러시아 금융위기의 원인
⑴ 축적된 정치․경제적 요인
축적된 정치․경제적 요인으로는 첫째, 정치적 불안정의 지속과 정경유착의 심화를 지적할 수 있다. 러시아 정치는 1993년 12월 강력한 대통령제 신헌법 채택이후 1993년 10월의 유혈사태와 같은 극단적인 보․혁간 또는 의회와 행정부간 갈등현상은 재발하지 않고 있으나, 수차례에 걸친 국가두마에 의한 대통령 탄핵기도, 내각 불신임 기도 등이 증명해 주는 바와 같이 국가두마와 행정부간 대립과 갈등은 지속되어 오고 있으며, 그 결과 국가두마에 의한 외교․안보 관련 법안 처리는 물론 사회․경제 관련 법안 처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지난 2-3년간 계속되고 있는 옐친 대통령의 취약한 건강상태는 국정공백, 여권내 권력암투, 야권의 대정부 공세강화 호재 제공, 효율적인 정책수립 및 집행의 마비 등 정국불안의 핵심요인으로 작용해 오면서 국내외에 러시아가 취약하고 불안정한 국가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왔다. 또한 러시아 정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정치․경제․언론 유착 및 부정부패 만연, 그리고 마피아의 번성은 소연방 붕괴후 국유재산의 사유화 과정중 온갖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한 특혜, 정보의 주고, 받기 과정속에서 심화되었으며, 그 결과 일종의 '과두제적 유착 자본주의'(oligarchic crony capitalism)가 뿌리를 내렸다. 이는 불건전한 경제관행 및 행위를 고착화시킴은 물론 부의 편재현상 심화, 빈부격차 확대 등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외국인의 대러시아 투자의욕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둘째, 만성적인 세수 부족과 재정적자 폭의 확대도 금융시장 불안을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러시아는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조세제도 미비(총인구 약 1억5,000만명중 납세자는 약 400만명) 및 경제상황의 악화에 따른 만성적인 세수 부족으로 재정수지 적자폭이 최근 몇 년간 계속 증가하여 왔다. 재정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이하 GDP) 대비 1995년에는 3.3%, 96년에는 4.2%, 1997년에는 4.4%를 각각 기록하였다. 이는 단기 국채의 이자 상환분을 포함하지 않은 것으로서, 이를 포함할 경우 재정적자의 규모는 GDP 대비 약 8%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러시아연방의 재정수지 적자폭은 금년에도 이자율을 25%로 상정했을 경우 약 8%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나(금년 1월중 재정수지 적자는 88억루블로서 GDP의 4.4%), 외환․금융 위기 극복을 위한 국채 및 유로본드의 발행에 따른 채무상환 부담의 증가는 재정적자 폭을 확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러시아는 이러한 재정적자를 조세 제도 및 징세 행정의 개혁, 금융 시스템의 개혁을 통한 기업들의 자금 사정 완화와 이를 통한 세수 증대 등을 통하여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GKO 발행, Eurobond 발행, IMF 차관 도입 등의 방식을 이용하였고, 이는 국가 예산의 이들에 대한 이자 부담을 가중시키면서 예산지출을 왜곡시켰다. 실제로 1998년도 세출 예산, 4,375억루블중 외채(정부 부문 약 1400억달러) 및 국내 부채 상환 비용이 전체의 34.7%인 1,530억루블을 차지하고 있으며, 외환․금융 위기 극복을 위한 차관 도입 및 국채 발행은 세수 증대가 부진할 경우 전체 예산의 약 50%선에 이르렀다.
셋째로는 금융 기관의 취약성 및 대외 의존도 심화를 지적할 수 있다. 러시아의 금융시장은 여타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소연방 붕괴후 시장경제로의 체제 전환 속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관계로, 일반적으로 부실은행의 난립(약 40%), 높은 은행업무의 비효율성, 금융감독의 부실 및 비리 등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은행과 증권업계는 주로 단기국채와 외환거래로부터 이득을 추구하여 왔는데, 특히 증권시장의 성장 추세는 러시아 산업발전 및 실질적인 생산증대와 관련된 것이 아닌, 국채 매입 업무와 투기적인 거래 행위, 그리고 지나치게 높은 차입금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외국인 투자의 주요 비중은 장기적인 성격을 갖는 직접 투자가 아니라, 비교적 쉽게 회수하여 다른 국가들의 시장으로 이동할 수 있는 GKO 등 유가증권과 신용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외국자본의 국내외로의 입출을 용이하게 만들고 금융시장 불안시 투매 현상, 경화로의 환전에 따른 루블화의 가치하락과 외환보유고의 감소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러시아 금융시장의 불안정은 금융시장의 자본 대다수가 단기 고수익을 노리는 투기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핫 머니'의 움직임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이는 채권시장에 약 200억달러, 주식, 어음시장에 약 100억달러 등 300억달러로 추정되었다. 이들 자금이 대규모로 이탈할 시 현 외환 보유고로는 환율 방어가 불가능하고 심지어 국가 Default도 가능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외국의 시장 상황에 대해 의존성이 높은 편이었다. 또한 일반 국민들의 금융시장에 대한 불신에 따른 달러 현금보관 선호 및 소수 독점 금융재벌들에 의한 부의 집중과 이들의 환, 주식 등에 대한 투기행위도 러시아 금융시장의 불안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⑵ 5월 금융위기의 촉발요인
첫째, 상기한 바와 같은 신임 총리 임명을 둘러싼 의회와 행정부간의 대립 심화를 지적할 수 있다. 또한 경험부족의 신임 총리를 비롯한 새 내각의 출범은 외국인 및 내국인 투자자들의 러시아 경제의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대시키면서 일시적으로나마 외환․금융 시장의 불안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둘째, 탄광 파업 등 경제․사회 불안의 심화도 5월 금융위기를 촉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98년 5월 14일 시베리아 소재 케메로보 주의 안제로․수젠스크 시 광부 및 노동자 2,000여명이 6개월간의 체임 항의로 파업을 단행, 시베리아 철도 쿠즈바스 구간을 점거함으로써 철도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인접 쿠즈네츠크 탄전 주민들이 지지시위에 나섰고, 5월 18일 이후에는 시베리아 북부 인타 시, 로스토프, 첼랴빈스크, 사할린, 캄차트카 등의 광부들이 동조, 철도를 점거하는 등 광부 및 근로자들의 체임항의 데모 및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케메로보 인근 프로코프예스크 광부들은 5월 20일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점거, 400여편의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으며, 그 결과 식량, 연료, 원자재 등의 수송이 지연되어 주요 생산 기업의 조업 중단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광부 및 근로자들의 체임․저임 항의에 동조하여 그 동안 수개월 동안 체임상태에 있던 화이트 칼라 계층도 5월 20일을 전후하여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그,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대정부 항의시위에 동참하였으며, 이는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던 금융시장의 분위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로는 국제 유가의 하락에 따른 경상수지의 악화를 지적할 수 있다. 러시아는 최근 5년간 경상수지의 흑자를 경험하여 왔으며, 이는 원유,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은 물론 철강 등 원자재의 수출이 호조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러시아의 경상수지(무역수지는 이보다 더 많음)는 1992년 -1.3억달러, 1993년에는 11.1억달러, 1994년에는 5.5억달러, 1995년에는 9.5억달러, 1996년에는 9.3억달러, 1997년에는 8.5억달러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98년들어 경상수지가 적자로 반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증대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 경제가 성장세를 시현하면서 자본재를 중심으로 수입이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 예상된 반면,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인 원유 및 원자재의 가격이 하락하면서 수출 증가세가 둔화되었기 때문이다. 1997년 원유 및 천연가스가 전체 수출의 45%인 412억 달러를 차지하였었다. 실제 국제유가는 1996년 10월 배럴당 21.67달러를 기록한 이후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여 1998년 3월 둘째주에는 배럴당 10.56 달러까지 하락하였는데, 금년 1년동안 국제유가가 다소 상승하여 배럴당 15달러를 유지하더라도 러시아의 금년도 재정수입은 예년에 비해 10억달러(총수입의 약 2%)가 삭감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넷째로는 외환 보유고의 급감에 따른 외환 유동성의 취약화를 들 수 있다. 상기와 같은 국제유가 등 원자재 가격의 하락은 재정수입의 감소는 물론 외환보유고를 감소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 1997년 말부터 급감하고 있는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는 최근에도 계속 감소하면서 러시아 경제의 외국자본 유출입에 대한 취약성을 심화시켰다. 옐친정부는 1997년 10월에 발생한 외환․금융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70억달러 이상을 환율 방어를 위하여 소비하였으며, 1998년 들어서도 계속 감소되어 1997년 7월 최고 245억달러를 기록한 이래 1998년 5월초에는 거의 100억달러가 감소된 150억달러(보유금 50억달러 포함)로 감소하면서 외환유동성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켰다. 실제로 이러한 외환보유고는 보유금을 제외하면 작년 기준으로 3개월간 수입대금인 약 160억달러보다 적으며, 러시아 국채시장에 투자된 외국자본 약 200억달러에도 크게 못미쳤다. 또한 1년안에 만기가 도래하는 단기 외채의 규모도 약 300억달러로 추산되었으며, 외국 투자자는 물론, 러시아 국민들의 옐친 정부의 통화 가치 방어 능력 또는 루블화 평가 절하에 대한 우려를 자아내었다.
다섯째로는 인도네시아 외환․금융 위기에 따른 국제 투자가들의 투자 심리 위축을 지적할 수 있다.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 폭락 이후 시작된 인도네시아 외환․금융 위기가 1998년들어 더욱 심화되는 과정에서 수하르토 대통령의 퇴진을 위한 학생 및 국민들의 데모가 5월초에 발생하였다. 그 결과 정국 혼란과 외환․금융 위기가 가중되면서 러시아의 금융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었고 그 결과 외국 투자가들의 투자 의욕이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의 외환․금융 위기는 국제금리를 상승시켜, 러시아의 대외 채무에 대한 이자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외에도 국가두마가 에너지 산업 계통의 대기업에 대해 외국인 취득 제한 조치(총자본금의 25% 초과 못함)를 취한 데 따른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만과 1998년 5월 26일 국영 석유 회사 Rosneft의 경매 유찰, 지지부진한 경제개혁과 기업 및 금융기관의 구조조정, 루블화 평가절하 가능성에 대한 우려 증대(이는 특히 150억달러 가량의 단기외채를 안고 있는 러시아 은행들의 우려를 자아냄)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다. 옐친정부의 금융위기 타개책
옐친정부는 1997년 10월부터 불어닥친 금융시장의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그동안 주로 금리인상, 즉 중앙은행 재할인율의 인상, 국채수익율의 인상, 롬바르트 금리인상과 환율 변동폭 확대 및 주가 등락폭의 제한 등의 방식을 이용하여 왔다. 그러나 1998년 5월에 발생한 금융시장 불안은 그 정도가 전반적인 경제위기 상황으로까지 발전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할 뿐만 아니라, 키리옌코 내각의 출범과 때맞추어 IMF의 대러 대기성 차관지원 분위기 조성 및 외국인의 투자확대를 위한 대대적인 개혁조치가 필요해짐에 따라서 다각적이고 보다 적극적인 국내외 대책을 추진하였다.
⑴ 국내적 대책
첫째로 키리옌코 내각은 금리인상과 보유 외환을 방출하였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5월초부터 불안한 장세를 보이던 주가가 5월 18일 당일에만 12.7%가 폭락하면서 1997년 1월 이래 최저치인 166.8 포인트를 기록하고 국채시장의 이자율이 50%선으로 상승함에 따라서, 루블화 가치방어와 국채시장내 외국인 투자자금의 국외 이탈을 막기 위하여 중앙은행의 재할인율을 20% 올린 50%로 인상하였다. 그러나 금융시장 내에서 루블화 평가 절하에 대한 우려가 증폭, 주가가 계속 하락하면서 5월 27일 12%나 폭락하고 국채수익율도 90%를 육박함에 따라, 루블화 방어를 위해 중앙은행의 재할인율을 종전의 50%에서 150%로 대폭 인상하였다. 뒤이어 6월들어 금융시장의 상태가 약간 호전됨에 따라서 재할인율을 6. 5 60%로 인하하였다. 또한 중앙은행은 루블화의 안정을 위하여 5월 18일 이래 15억달러를 방출하였으며, 5월 28일 금융시장 상황의 호전으로 5억달러를 매입, 외환보유고를 145억달러로 유지시켰다.
둘째, 금융시장 안정화 조치를 발표하였다. 키리옌코 총리는 5월 18일 금융시장의 안정화 대책으로 정부의 강력한 긴축 재정 정책 유지(연방 정부의 지출 삭감 및 세수 증액으로 재정적자를 금년도 GDP 5%수준에서 2000년에는 2.5%로 축소), 정부 부채 축소(장기 부채 위주로 전환하면서 부채 상환 비용을 현재 GDP 6%에서 금년말까지 4%수준으로 축소), 징세 행정의 강화와 경제정책의 투명성 제고 등과 같은 정책을 제시하였다. 옐친 대통령은 신정부 각료 접견시 금융시장 불안을 반드시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키리옌코 총리는 1998년도 세출예산의 약 9% 삭감(400억루블, 약 66억달러), 국내 소비세(주세) 및 수입관세 5% 인상, 유로본드 추가 발행 등 금융 안정화 조치를 추진하겠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5월 21일 개최된 각료회의는 상기 안정화 조치를 포함한 '잠정 위기 대책'을 승인하였는데, 주요 내용으로는 징세율의 제고, 부실기업의 파산 개시, 수입관세 인상 등 재정 수입 증대 및 세출 삭감, 43개 해외 무역대표부 폐쇄, 재정 지출 통제 강화 등으로서 재정적자 축소를 통한 부채 증가 억제에 금융 안정화 정책의 목표를 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5월 26일에는 1998년도 세출 예산의 8%인 400억루블 삭감 및 140억루블 세수 증대를 위한 구체적인 시책 50개를 확정하고, 5월 28일에는 옐친 대통령, 키리옌코 총리, 자도르노프 재무장관, 두비닌 중앙은행 총재 등이 참석한 긴급 대책 회의가 개최되어 징세 강화와 금융시장 안정화 대책의 강력한 추진 등이 천명되었으며, 동시에 루블화 평가 절하 가능성을 강력히 부정하였다. 옐친 대통령은 5월 29일 금년도 상반기 징세 실적의 부진함을 이유로 국세청장을 해임시키고, 금융 안정화 대책 및 재정 조치를 발표함. 주요 내용으로는 조세징수비상위원회 설치, 원유․가스 산업 부문에 대한 징세 조치 강화, 금년말까지 10대 국영기업의 완전 민영화, 정부기구 30% 인원 감축 및 공공분야 유휴 인력 정비, 지방정부에 대한 연방 보조금을 1997년도 수준으로 동결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옐친 대통령은 동년 6월 2일 금융계 및 산업계 인사 10명을 크레믈린 궁으로 초치,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협조를 당부하였으며, 6월 5일에는 20개 지방 공화국 대표들과 회동, 금융위기 해소 방안을 협의하고 긴축재정에 따른 지방정부의 협조를 부탁하였다.
⑵ 대외적 대책
첫째, 러시아는 미국, 독일, 프랑스 정상들과의 접촉 통한 협조 당부하였다. 옐친 대통령은 5월 28일 클린턴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갖고 최근 러시아가 취하고 있는 금융시장 동향 및 금융 안정화 조치, 경제개혁 정책에 대해 설명하면서 1998년도 1차분 IMF 재정차관 6.7억달러가 조기에 집행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하였다. 클린턴 대통령도 러시아 정부의 개혁정책 추진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IMF 차관 조기지원을 위한 협조를 약속하였다. 옐친 대통령은 또한 5월 29일 서독 콜총리, 프랑스 시락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갖고 러시아가 당면한 금융시장의 위기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 위기 극복을 위한 협조를 부탁하였다. 이에 클린턴 대통령과 콜 총리는 5월 31일 시락 대통령은 6월 4일 각각 기자회견을 통하여 러시아 금융위기 해소를 지원하기 위해 IMF 등 다자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지원 입장을 표명하였다.
키리옌코 총리도 5월 28일 러시아 금융시장 안정화 방안을 논의하고 1998년도 1/4분기 경제 실적 평가를 위한 IMF 대표단의 방러에 맞추어 고어 미국 부통령과 전화 접촉을 갖고 IMF 재정 확대 차관의 조기 집행을 위한 지원을 당부하였다. 캉드쉬 IMF 총재는 5월 28일 대규모 긴급 지원 자금의 필요성을 배제하면서도 금년도 대러 1차분 재정 확대 차관 6.7억달러를 6월중 공여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였다.
러시아는 동년 6월 10일 파리에서 개최되는 G7 재무장관 회담을 기회로 IMF는 물론 국제 사회의 대러 경제 지원에 대한 호의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G7 국가들은 러시아 금융시장이 안정을 회복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IMF 재정 확대 차관 6.7억달러 외 추가 지원이 현 단계에서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정리하였다. 이는 Standard&Poors 사의 러시아의 국채 신용 등급 하향 조정(B+에서 BB-로)과 더불어 투자자들의 불안 심리를 가중시키면서 다소 안정을 되찾던 주가를 6. 10 11%(6월 8일 대비)나 하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둘째로는 Eurobond 발행 등 외자 도입 적극 추진하였다. 옐친정부는 금융시장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외환 보유고의 증액 등이 필요하다고 보고, Eurobond를 조기 발행키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6월 3일 Eurobond를 발행하였는데, 국제 금융시장 내 호응도가 높아 당초 발행 규모 10억달러보다 많은 5년 만기 연 11.75%의 Eurobond 12.5억달러를 성공적으로 발행하였다. 러시아는 1996년 11월 최초로 Eurobond를 발행한 이래 1996년 1회 10억달러, 1997년 2회 32억달러, 1998년 3회 23.6억달러 지금까지 총 65.6억달러의 Eurobond를 발행하였다. 금년의 경우 외환․금융 시장의 안정이 시급함을 감안, 차관도입보다는 Eurobond를 하반기 중 두 차례 추가 발행(금년도 총액 60억달러)하기로 하였다.
옐친정부는 또한 IMF의 재정 확대 차관(EFF) 98억달러 중 1998년도 1차분 6.7억달러의 조기 도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으며, 5월 26일 유찰된 국영 석유 회사 Rosneft의 재입찰시 최저 입찰가를 21억달러에서 16억달러로 낮추어 조기에 추진키로 결정, 6월초에 입찰자 공모에 들어갔다.
라. 5월 금융위기에 대한 IMF의 대응 주38) Michael Candessus, "Russia and the IMF: Meeting the Challenges of an Emerging Market and Transition Economy," http://www.imf.org/external/ np/speeches/1998/040198. HTM.
IMF는 러시아가 IMF에 가입한 1992년 6월부터 러시아의 시장경제로의 개혁과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책을 지원하기 위하여 긴축정책 등의 추진 등을 조건으로 수차례에 걸쳐서 대기성 차관을 지원하여 왔다. 그 결과 초인플레이션이 진정되면서 1997년에는 11%, 그리고 1998년에는 10% 미만으로 감소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으며, GDP 성장률도 수년동안의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 1997년에는 0.5%의 성장을, 그리고 1998년에는 2-3%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어 왔다.
그러나 IMF는 러시아 경제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막대한 재정적자의 누적 및 부진한 징세행정 등과 같은 예산정책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세수부족 및 과도한 정부 재정지출에 따른 재정적자는 체임, 체연금의 원인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환율인상, 금리인상에 대한 압박요인으로 작용하면서 금융시장의 불안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IMF는 또한 러시아에서도 동아시아에서와 같은 '유착 자본주의'(crony capitalism)가 형성되고 있는 데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고, 국내외 기업 및 개인들의 제반 경제활동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라도 효율적이고도 투명성 및 책임성이 강화된 은행들의 설립 또는 기존 은행들의 구조조정 등 정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옐친정부는 작년에 200개 은행의 폐쇄와 300개 은행의 영업허가 취소를 단행하였으며, 파산법을 제정, 지난 3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그러나 정․관․언론의 유착과 이에 따른 대기업 집단의 탄생, 기업구조의 왜곡심화, 이들 기업에 의한 탈세행위의 만연 등은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의 러시아 경제상황에 대한 불안감을 심화시켜 왔다.
따라서 IMF는 5월 금융위기가 일어나기 전부터 이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불요불급의 정부사업 축소를 통한 긴축재정의 실행, 세수증대를 위한 조세법의 개정과 징세행정의 강화, 외국인 투자자의 보호 등 투자환경의 개선, 금융기관의 재정비, 기업 및 정부기구의 투명성 및 책임성의 강화 등을 적극 추진하라고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옐친정부는 4월 29일 향후 3년(1999-2001)동안 대폭적인 대외부채의 축소, 세수증대를 통한 제정건실화, 높은 경제성장의 달성 등과 같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성취시키기 위한 경제운용계획을 발표하였다. 키리옌코 개혁내각의 출범과 5월의 금융위기는 상기한 바와 같은 '금융안정화 및 재정조치' 등을 결정, 실행케 하는 등 러시아의 경제운용계획을 더욱 구체화시키면서 강력하게 추진할 수밖에 없는 동인을 제공하였다.
IMF는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옐친정부의 제반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확대재정차관 EFP 6.7억 달러의 조기집행을 결정하면서 이번 금융위기를 러시아의 자유경쟁, 투명성, 책임성 등이 신장된 시장경제로의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금융시장은 키리옌코 내각의 '위기타개 프로그램'에 대한 국가두마의 부분적 통과에 기인한 대외적 신인도 하락 및 하기한 바와 같은 국내외적 금융불안 요인의 조기 개선전망 불투명, 그리고 최근들어 엔저 지속, 홍콩 주식폭락 및 위안화 절하 가능성 대두 등 국제적 금융시장 불안이 지속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따라서 러시아도 IMF의 구제금융을 받게될 것이라는 전망이 강력히 대두되었고, 실제 IMF, 세계은행, 일본은 7월 13일 루블화의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러시아에 1999년까지 226억불(금년중 148억불)의 긴급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중 48억불이 1주일내에 지급되었다. IMF는 이 구제금융중 151억달러, 세계은행은 60억달러, 일본은 15억달러를 러시아에 지원하는데, IMF는 1998년중 112억달러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 112억불은 1998년도 경제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한 SBA 형태의 83억달러와 수출수입의 부족분을 메꾸기 위한 CCFF(Compensatory and Contingency Financing Facility) 형태의 29억달러로 구성되었다. 이외 1997년 승인된 SRF 형태의 차관 53억달러가 러시아가 공여조건을 이행하느냐에 따라서 제공될 수 있었다.주39) IMF, "IMF Approves Augmentation of Russia Extended Arrangement and Credit under CCFF: Activates GAB," http://www.imf.org/external/np/sec/pr/1998/ PR9831.HTM.
IMF와 러시아는 차관공여 조건으로 재정적자를 1998년 GDP의 5.6%에서 1999년 2.8%로 낮추기로 합의하였는데, 이는 국가세입을 1998년에 GDP의 10.7%로부터 1999년에 13%로 강화함으로써 달성하여야 한다. 러시아는 특히 세입확대를 위하여 조세행정을 강화하여야 한다. 또한 세계은행에서 지지하고 있는 구조개혁을 적극 추진해 나가야 한다. 주40)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문헌 참조. "Memorandum of the Government of the Russian Federation and the Central Bank of the Russian Federation on Economic and Fianancial Stabilization Policies," in http://www.org./external/np/ loi/071698.HTM.
2. 모라토리엄 선언과 프리마코프 내각의 경제정책
IMF의 구제금융지원 결정은 일시적으로 환율, 주가 및 채권수익율을 회복시켜 주었으나 7월말부터 루블화의 환율이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8월초 들어 외국투자가들이 루블화의 평가절하에 대한 우려 및 재정적자의 축소가능성에 대한 의혹증폭으로 주식의 투매현상이 일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정부의 대대적인 개입에도 불구하고 환율은 8월 14일 미화 1불당 6.31루블로, RTS는 101로 하락하였다. 특히 국제적 투자가인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의 러시아정부에 대한 루블화의 평가절하와 루블화의 미화 또는 유로화에 환율을 연동시키는 페그제 도입에 대한 권고 등이 알려지면서 러시아 금융시장의 불안이 더욱 증폭되었다.주41) Financial Times (August 13, 1998).
옐친 대통령은 이러한 금융시장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하여 8월 14일 "루블화 평가절하는 절대 하지않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키리옌코 총리가 '8.17 조치', 즉 루블화의 사실상 평가절하와 국채 및 외채에 대한 부분적인 모라토리엄을 발표함으로써 거짓말임이 증명되었다. 옐친정부의 '8.17 조치'는 국제 금융시장 불안은 물론 내각교체 등 국내외 정치․경제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가. '8.17 조치'의 주요 내용과 의미
⑴ 8.17 조치의 주요 내용
'8.17 조치'는 키리옌코 총리와 두비닌 중앙은행 총재의 명의로 발표되었으며, 러시아 경제위기의 요인 및 루블화 평가절하와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전문'과 구체적인 조치 7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42) Itar-Tass (August 17, 1998)
7개항에 포함된 조치를 요약하면 첫째, 루블화의 환율 변동 허용폭을 기존의 미화 1불당 6.2루블±15%에서 6.0~9.5루블로 대폭 확대함과 동시에 환율변동에 대한 일일관리 포기; 둘째, 1999년말까지 상환이 도래하는 루블화 표시 국채를 다른 형태의 금융자산으로 전환함과 동시에 모든 연방채권의 거래중지 및 만기 1년이하의 루블화 표시 금융상품에 대한 외국인 투자 금지; 셋째, 만기 180일 이상인 상업차관의 원금, 채권담보부 대출금, 외환선물계약으로 발생한 채무 등에 대해 8월 17일부터 90일동안 모라토리엄 선언한다. 단 연방정부, 중앙은행, 대외경제은행, 지방정부의 공공채무 및 EBRD 차관은 모라토리엄 대상에서 제외된다. 또한 개인의 대외부채 및 러시아내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이자 및 배당금의 지불도 제외된다; 넷째, 금융시장의 혼란을 방지시키기 위하여 예금자 보호선언, 은행체제 및 은행간 결제시스템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12개 대형은행간 지급풀 구성, 그리고 외환유출 통제강화 등이다.
옐친정부는 '8.17 조치'의 후속조치로 단기국채를 장기채로 전환하는 방안을 8월 25일 발표하였다. 발표내용에 따르면 전환대상은 1998년 8월 17일부터 1999년 12월 31일까지 만기도래하는 약 400억불(외국인 보유액은 110억불로 추정)에 상당하는 단기국채이다. 전환방식은 루블화 표시 채권을 희망하는 경우 기존 채권의 명목가격에 연리 20-30%의 3~5년물 장기체로 교환하며 보유채권 명목가격의 5%를 현금으로 요청시 지급한다. 하지만 달러화 표시채권 희망시에는 연리 5%의 8년짜리(만기 2006년) 장기채권으로 전환하며, 단 보유채권 명목가격의 20%만 인정하고 적용환율은 8월 17일-26일간의 평균 공식환율이다.
러시아정부의 이러한 추가조치에 대하여 국제금융시장은 국내외 투자자를 동등하게 대우하고는 있으나 보유 채권가액의 손해를 강요하는 지극히 불리한 조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달러표시 채권에 시장가격의 20%라는 교환비율과 연 5%의 금리적용은 투자자에게 매우 가혹한 조건으로 평가되었고, 이에 따라 러시아 시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크게 손상되면서 8월 26일부터 달러사재기 열풍이 불었다. 실제 루블화는 8월 26일 미화 1불당 8.26루블까지 폭락(-4.8%) 외환시장 거래가 무효화되었고, 27일에는 아예 외환거래가 중단되었다. 외환시장 거래중지는 암시장에서의 환율폭등을 초래, 미화 1불당 10루불 내지 15루블까지 환전되었다. 이번 추가조치로 금융시장의 불안이 극도로 심화되면서 RTS가 8월 26일 76.26, 8월 27일에는 63.2로 각각 폭락, 8월 14일에 비해 37%나 하락하였고, 이러한 금융시장 불안정은 이 논문이 작성되고 있는 시점에도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정부는 8월 29일 현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긴급조치를 제안토록 표도로프 부총리겸 국세청장, 두비닌 중앙은행 총재, 자도르노프 재무장관, 코스틴 대외경제은행 총재, 수발로프 연방자산기금 총재 등이 참여하는 '위기관리실무반'을 구성하여, 체르노미르딘 총리에게 금융상황을 보고하고 위기관리 조치를 건의하는 역할을 담당토록 하였다. 또한 체르노미르딘 총리서리는 금융기관이 상품․용역 대금 결제 및 송금서비스 업무를 신속히 처리하도록 지방정부가 중앙은행과 협조하에 관할지역내 금융기관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총리령에 서명하였다.
⑵ 8.17 조치의 의미 및 경제적 파급효과
러시아정부의 '8.17 조치'는 금융시장의 불안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금융체제 붕괴 등 최악의 사태를 막기위한 특단의 조치로서 그동안 정부 고위인사들이 거듭 부정해온 루블화 평가절하 조치를 사실상 현실화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러시아정부는 작년 10월 금융위기가 시작된 이래 루블화가치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여 왔으며, 그 과정에서 막대한 외환이 소모되고 외환위기가 초래되었다. 따라서 이번 조치는 그동안 유지해온 루블화 안정화 정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이번 조치로 루블화의 대달러당 환율변동폭의 상한선이 50%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루블화 가치방어를 위하여 도입된 일일 관리제도가 포기되었다.
또한 '8.17 조치'는 루블화 표시 국채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언함으로써 러시아의 정부의 대내 부채에 대한 지불불능 상태를 사실상 인정함과 동시에 대외적인 신인도를 크게 떨어뜨렸다. 러시아는 그동안 재정적자를 메꾸기 위하여 세수증대를 위한 노력보다는 국채발행을 통한 재정수입의 확충정책을 실행해 왔다. 그러나 하기한 바와 같이 최근들어 재정적자폭이 크게 확대되고 있는데도 악화된 국내외 경제여건 따른 세수부족으로 국채원리금, 특히 400억불(이중 약 30%를 외국인이 투자)로 추정되는 단기국채의 원리금 상환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 것이다.
러시아의 외채일부에 대한 모라토리엄 선언은 또한 러시아 금융시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대규모 상업은행들로 하여금 대외적 지불유예에 빠져서 은행권이 붕괴되는 것을 예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동안 러시아 상업은행들은 서구은행으로부터 도입한 저리의 신용을 국내에서 단기 금융상품 및 주식에 투자하거나 국채를 담보로 신용을 받아왔고 또한 서방은행들과의 외환선물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은 실정이기 때문에, 이번 국채의 구조조정과 루블화의 평가절하로 연쇄도산의 우려가 증가되어 왔다.주43) 정여천, "러시아의 금융위기의 원인과 파급효과", 대외경제전문가 러시아연구회 회의자료(비발간) (1998. 8. 28), p. 3.
'8.17 조치'는 국제금융시장, 특히 개도국 금융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러시아의 GDP가 네델란드의 그것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금융시장이 개방되지 않아 국제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또한 서방의 대러수출이 서방 전체 GDP중 0.5%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계적 경제위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비교적 낙관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금융위기 사태가 원만히 수습되지 않는다면 개도국은 물론 세계 금융시장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임에 틀림없다. Financial Times도 러시아 경제위기가 전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러시아의 경제규모에 비례하지 않으며, 최악의 경우 세계적 공황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주44) "A World in Turmoil," Financial Times (August 29, 1998). 실제 러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로 유럽과 미국의 주가가 폭락과 급등을 거듭하는 등 불안한 장세를 보였다. 또한 러시아 금융체제의 마비는 러시아에 투자해온 Credit Suisse 및 도이취 방크 등의 은행과 르노 등의 기업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주고 있다. 물론 이미 위축된 아시아 시장에는 상대적으로 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금융위기는 신흥시장에의 투자를 지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투자된 것에 대한 조기회수 압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주45) "Anxiety Grips Financial Markets Around Globe,"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August 28, 1998). 또한 그동안 실물경제에 있어서 러시아와 역내 교역규모가 아직도 큰 과거 소련위성국들인 중동부 유럽국가나 독립국가연합의 경제에는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은 우리 경제에도 직,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선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국내 금융기관이 고금리를 노리고 러시아 금융상품에 투자한 약 10.2억불(은행 1.2억불, 종금사 2.4억불, 투신사 5.8억불, 증권사 66백만불; 은행, 중금사는 외화표시 유로본드에 증권투신사는 루블화 표시 단기 국채에 각각 투자)의 상환이 당분간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다. 무역부문에서도 대러 수출의존도가 높은 가전제품 식품류 등을 중심으로 한 수출감소가 예상되며, 연간 5억불로 추정되는 러시아 보따리 장수들의 대한국 상품구매를 위한 방문도 줄어들 전망이다. 참고로 1997년중 한국의 대러시아 수출은 17.7억불에 달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은 17.7억불에 달하는 대러 경협차관이 모라토리엄에도 제외되는 공공차관의 상환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상환의 악화에 따른 상환여력의 약화로 차관상환을 지연시킬 것임에 틀림없다.
나. 프리마코프 내각의 탄생과 경제정책
⑴ 프리마코프 내각의 탄생배경과 의미
프리마코프 내각 정치적 파국을 우려한 대통령과 국가두마간의 타협의 산물이다. 즉 총리 임명을 둘러싼 대통령과 국가두마간의 첨예한 대립은 옐친 대통령이 8월 23일 키리옌코 내각을 전격적으로 총 사퇴시키고 체르노미르딘 전임 총리를 신임 총리로 지명하면서 시작되었다. 옐친 대통령이 지난 3월 퇴진한 체르노미르딘 총리를 신임 총리로 재지명한 것은 첫째, '8. 17 조치', 즉 루블화의 평가 절하 및 모라토리엄 선언과 같은 경제 위기에 대한 책임 전가, 둘째, 자신은 물론 그의 가족, 그리고 일단의 산업․금융 재벌들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코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반면에 국가두마는 헌법상 보장된 총리 임명 동의권을 이용하여 경제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온 체르노미르딘의 총리 재임명 저지, 대통령의 권한 축소 및 정부와 의회의 권한 확대를 위한 헌법 개정, 현 사회․경제 정책의 변경 등과 같은 정치․경제적 목적을 달성코자 하였다.
이와 같은 양측간의 상이한 이해 관계는 옐친 대통령의 체르노미르딘 2회 연속 총리 재지명과 국가두마의 2회 연속 임명 동의안 부결이라는 극단적인 대립 상태로 발전되었다. 총리 임명을 둘러싼 이와 같은 첨예한 대치 상태에서 옐친 대통령은 대안을 물색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야블로코 당 대표인 야블린스키(Grigory Yavlinsky)가 2차 투표 후 공개적으로 추천한 프리마코프(Yevgeny Primakov)를 신임 총리로 지명하였다. 프리마코프 총리 임명 동의안은 9월 11일 자유민주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파가 찬성, 압도적인 다수 지지표로 통과되었으며, 그 결과 프리마코프 내각이 들어섰다.
이외에도 프리마코프 내각이 등장한 배경으로 첫째; 경제 위기의 지속과 이에 따른 문책성 또는 대통령의 책임 회피성 개각 단행에 따른 총리 교체; 둘째, 옐친 대통령의 리더십 및 국민들의 지지 기반의 약화; 셋째, 프리마코프의 개인적인 요소, 즉 탁월한 대외적 협상 능력, 대권에 대한 무관심, 무당파성, 산업․금융 재벌들과의 무연고, 국제 사회에서의 높은 인지도, 정치적 스캔들의 무연루 등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프리마코프의 대권에 대한 무관심은 국가두마 내 각 정파 지도자들로 하여금 차기 대권 경쟁에서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될 수 있는 체르노미르딘보다는 어느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고, 대권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적이 없는 프리마코프를 선호하게 하였다.
프리마코프 내각의 출범이 갖는 정치․경제적 의미는 우선 정국안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리마코프 내각 출범은 지난 3주간, 더 나아가 소연방 붕괴 후 수년동안 지속되어 온 옐친 대통령과 국가두마간 대립과 갈등을 약화시키면서 정국 안정에 순기능적으로 작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두 번째 의미는 소연방 붕괴 후 내각, 특히 경제 정책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 오던 개혁 세력의 쇠퇴와 공산당 등 좌파 세력의 상대적 세력 강화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이념적으로 중도․좌파적 성향이 강한 연립 내각이 탄생하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프리마코프 총리, 경제 정책을 담당하는 마슬류코프(Yury Maslyukov, 62세) 제1 부총리, 중앙 은행 총재로 임명된 게라시첸코(Viktor Gerashchenko, 60세) 등은 고르바초프 하에서 중책을 담당했던 중도․좌파 성향의 인사들로서, 특히 이들은 공산당이 프리마코프의 총리 임명 동의를 조건으로 천거한 인물들이다.
세 번째 의미는 프리마코프 내각의 출범으로 그 동안 옐친 정부가 추진해 온 시장 경제로의 개혁이 후퇴하면서 국가 자본주의 형 경제 정책이 확대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지난 6년 반 동안 추진해 온 시장 경제로의 개혁 과정, 특히 국영 기업 및 시영 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심화된 정경유착과 이에 따른 금융․산업 자본가 그룹의 형성, 그리고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와 같은 부정적인 현상들이 과거 내각과는 달리 상당히 약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⑵ 프리마코프 내각의 경제정책
프리마코프 내각이 당면한 경제정책의 과제는 혼란에 빠진 금융체제의 정비, 대외체무 불이행 상태의 조기 해소, 환율안정, 재정적자 해소, 금융기관 및 기업의 구조조정, 임금 및 연금의 체불해소(9월초 현재 약 40억달러) 등과 같은 총체적 경제위기를 극복하면서 정부에 대한 대내외 신인도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프리마코프 총리는 총리임명 직후 과거 내각에서 추진해온 개혁정책이 지속될 것임을 밝히면서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통화주의 정책기조의 포기와 사회복지 및 산업성장을 중시하면서 경제정책에 대한 국가개입을 확대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또한 경제장관 및 재무장관을 감독할 마슬류코프 제 1 부총리도 새 내각의 우선 경제과제는 체임, 체연금을 하루빨리 해소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통화발행을 통하여 해결할 것임을 암시하였다. 그러나 통화주의자들은 이러한 정책은 초인플레이션을 초래하면서 러시아 경제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실제 프리마코프 내각출범후 정치권은 물론 각료들 사이에 금융위기에 기인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바람직한 경제정책 방향을 둘러싸고 심각한 이견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보다 명확하고 현실성 있는 '경제위기극복 프로그램'(anti-crisis program)의 채택을 더디게 하였다. 경제정책의 주요 결정자인 마슬류코프 제 1 부총리와 자도르노프 재무장관은 주요 경제이슈에 대해서 거의 같은 의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들간에 예산정책은 정책투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데, 자도르노프는 1998년 4분기에 초긴축정책을 펴자고 주장한 반면, 마슬류코프는 그와 정반대되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4분기의 예산정책은 향후 IMF와의 관계설정을 위한 투쟁과 관련되어 있었다. 즉 자도르노프는 IMF가 원하는 긴축정책을 폄으로서 IMF가 지연시켜 오고 있는 차관공여를 받고, 이를 통하여 경제위기를 완화시키자는 생각인 반면, 마슬류코프는 더 이상 IMF에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경제정책을 둘러싼 이들 양인간의 대립은 마슬류코프 제 1 부총리의 승리로 끝났는데, 이는 병약한 옐친 대통령의 지도력이 전혀 크게 약화되어 국가두마는 물론 행정부내에도 먹혀들고 있지 않은 반면, 공산당 등 좌파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국가두마 및 중도좌파형 내각이 통화주의보다는 경제활동에 국가개입이 확대되는 산업주의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리마코프 내각은 출범후 1달반 이상이 지난 10월 28일에야 '국가의 사회․경제 상황의 안정화에 관한 러시아연방 정부와 중앙은행의 조치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경제위기극복 프로그램을 작성, IMF에 제출하였다.주46) 이에 대한 분석은 다음 문헌 참조. 이재영, "쁘리마꼬프 내각의 사회-경제 안정화 프로그램의 내용과 평가" 『月刊 아태지역 동향』(1998년 12월호), pp. 43-56. 이 프로그램은 11월 15일 공식으로 발표되었고, 국가두마에 제출된 정책들을 소개하면 <표 1>과 같다. 주47) 崔秉熙, 金秉熙, "러시아 프리마코프 新內閣의 경제정책과 러시아 경제전망," 『KIEP세계경제』(1998년 11월호), pp. 1226-27.
<표 1>
주요 방향 은행시스템 회복, 실물경제 활성화, 세수확대,경화확보, 자본이탈 방지 외환 - 변동환율제 유지 - 환율불안정시 상업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한 경화매입준비금 80%까지 상향 조정
- 수출업자들의 의무외환매각비율 75%로 상향 조정, 이중 25%는 중앙은행에 의무적으로 매각
- 수출대금의 본국송금 기간을 단축 (예: 석유 및 가스수출 대금의 경우 30일로 제한)
금융 - 상업은행권 경화거래에 대한 정부통제 강화 - 중앙은행은 경화나 주식을 담보로 은행 지원
- 2001년 1월 1일부터 은행의 경우는 자본금이 100만ecu 미만, 그외 신용기관은 10만 ecu 미만일경우 영업 허가 취소
- 국내 및 해외에서의 역외금융 금지
정부채무 - 현재 지금동결되고 있는 단기국채는 재구조조정하며, 이후 조정된 단기국채에 대해서는 2차거래를 허용 - 99년 12월 21일전 상환도래하는 단기국채는 만기일이 환율을 고려, 2013년-2018년 만기 신규발행 외화표시 및 루블화표시 장기채권으로 전환하며, 연 5%의 이자율을 지급
조세 - 세수가 목표치를 상회할 경우 이중 60%는지방정부가 소유 - 외국기업이 국내 수출업자에게 수입대금을 선지급할 경우 부가가치세 면제
- 이윤세 30%로 하향조정, 이중 10%는 지방정부가 소유
- 필요시 수입관세를 100%까지 인상
- 이윤을 국내산업에 재투자할 경우 이윤세 면제
- 시장가치에 따른 자산재평가 이후 재산세를 0.5%-1.0%로 상향 조정
- 세금체납 및 탈세에 대해서는 엄중 처벌
체불임금 및 연금 - 98년 10월부터 정부는 체불 임금 및 연금에대해 완전 지급을 보장 물가 - 일반적인 가격통제를 시행하며, 에너지 등 자연독점상품에 대해서는 99년 1월 1일까지가격을 동결하며, 필요시 이 기간을 4월 1일까지연장 - 생필품 부족과 이에 따른 가격폭등을 막기위해 정부는 생필품을 수입하거나 국내에서생산할 경우 적극 지원함
- 생필품, 의약품, 이동용품 등 7개 상품의 경우는 일정기간 동안수입관세를 축소조정하며, 철도이용세도 부분적으로 50% 할인해 줌
- 인플레는 10월 이후 금년말까지 월평균 3-4% 상승에 그치도록 노력하며, 99년에는 연 20-30% 수준으로 유지
예금자 보호 - 경화예금의 경우 예금자들이 국책은행인 스베르방크에 루블화예금으로 이전할 경우 정부는 60개월분의 월최저생계비에 한해서 해당일 공식환율에 따라 지급을 보장하며, 나머지 부분은 중앙은행이 지정하는 환율로 지급을 보장 - 시중은행에 경화예금을 예치할 경우 정부는 해당일 공식환율에 따라 루블화로 60개월분의 월최저생계비에 한해 지급을 보장하지만 잔여분은 보잘할 수 없음.
- 스베르방크내 루블화예금인 경우는 전액지급을 보장하지만 그외 은행에 예치된 경우는 100개월분의 월최저생계비에 한해서만 지급을 보장
통화발행 - 최대 400-600억 루블(24억-36억 달러)까지 통화발행 산업 - 경화획득이 가능한 산업부문에 대한 국가지원 강화 - 수출확대를 도모키 위해 향후수출과 관련한 모든 문제를 총리에 직접 조언할 수 있는 '수출위원회'를 설립
- 실물경제 부문내 각종 단․장기 프로젝트에 대한 상업은행들의원할한 자금지원을 가능케하기 위해 재원확보를 전담하는 국가개발은행 설립
- 실물부문내 여신 및 투자의 안정화를 도모할 수 있는 국가보험공사설립
- 기계장치 수입시 부가가치세 및 관세납부 연기 가능
기타 - WTO 가입을 위해 적극 노력함
상기한 경제위기극복 프로그램은 이미 추진하고 있거나 추진하려는 정책들을 담고 있는데, 주요 조치들은 크게 국민생활조건의 정상화, 경제의 안정적인 기능조건의 창설, 실물경제부문의 회복과 발전, 경제효율성의 증대자원으로써 러시아 국가체제 및 행정부의 통일된 시스템 강화 등 4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국민 생활조건의 정상화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로는 생명의 안전확보 분야, 국민의 소득유지, 국민에 대한 금융위기 파급효과의 완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경제의 안정적인 기능 조건의 창설을 위한 조치로는 통화제도와 환율의 안정화, 은행제도의 재조정, 국가부채의 재조정, 예산과정의 개선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실물부문의 회복과 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로는 조세제도의 개선, 기업과 시장의 정상적인 기능의 보장, 대외 경제정책의 조치들,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사유화 및 국가재산관리 과정의 효율성 향상 등 5개부문 등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들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경제의 효율성 증대자원으로서 국가체제 및 행정부의 통일된 시스템의 강화를 위한 조건들이 명시되어 있다.주48) '러시아연방 정부와 중앙은행의 국가의 사회-경제상황 안정화 조치에 관하여' 원문은 『中蘇硏究』22권 3호 (1998년 가을)에 번역문(번역 이재영 박사)이 실려 있음. 원문출처는 http://www.nns.ru/chronicle/article/981115gov-program.htlm.
⑶ IMF의 대응
IMF는 러시아정부의 상기한 경제위기 극복 프로그램이 구체성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에 기초한 개혁안이라고 볼 수 없다는 평가를 하였다. 즉 IMF는 동 프로그램의 내용들이 실행될 경우 러시아가 그동안 추진해온 시장경제로의 개혁으로부터 크게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IMF는 러시아정부에 보낸 비공개 메모랜덤에서 러시아정부는 1999년도에 아주 낮은 수준의 재정적자를 기록해야 하고, 년 인플레율을 25%선으로, 그리고 환율도 미화 1달러당 20루블대룰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IMF는 러시아정부가 도입코자하는 화폐관리기구의 출현과 프로그램이 추구하고 있는 지출증가 및 세금감면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또한 IMF는 외환집중제를 위해 수출대금 75%를 의무매각토록 하는 조치는 암시장의 형성을 초래하여 복수환율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VAT와 이윤세 인하는 시기적으로 빠를 뿐만 아니라 세입감소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였다. 또한 프리마코프 내각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는 무리한 상업은행 회생조치 및 부도기업 지원은 중앙은행을 부실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경고하고, 정부부처 및 공공 부문을 구조조정하여 조직을 축소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주49) Kommersant-Daily (November 3, 1998).
이러한 프리마코프 내각의 경제정책에 대한 IMF의 부정적인 시각은 당초 9월 중순에 집향하기로 했던 7월 13일 약속한 2차분 차관 43억달러의 제공을 연기하였다. 이후 러시아는 IMF와 잔여차관을 조기에 집행시키기 위한 협상을 계속해 오고 있으나, 1999년 1월초 현재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태이다. 양측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IMF의 경제위기극복타개 프로그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외에도 IMF가 요구하고 있는 긴축재정정책 유지, 예를 들어 1999년도 예산수지를 외채상환지출을 제외하고 GDP 대비 3%의 흑자를 시현하는 초긴축정책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러시아정부가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양측간 감정싸움으로까지 비화되어 프리마코프 총리는 1998년 11월초 "IMF가 러시아에 금융지원을 해주지 않을지라도 러시아는 결코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다" 주50) Nezavisimaya Gazeta (November 3, 1998). 라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IMF는 1999년 1월중 IMF 대표단을 러시아에 파견, 러시아의 1999년도 예산계획과 경제정책 프로그램을 평가한후 차관공여의 재개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IMF는 이미 러시아의 새입에 영향을 미치게될 세금 삭감계획에 대하여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러시아 정부가 재정지출 억제와 구조개혁을 명확히 보여주는 예산 수립을 기대하고 있다. 이에 러시아도 IMF 차관지원을 통하여 재정적자를 축소하고 GKO, OFZ 등 국채 및 연방채 상환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IMF는 러시아가 세입을 늘리고 정부지출을 삭감하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데 러시아의 현행 예산안은 그러한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IMF는 금융부문에서의 심각한 문제점들을 해소해야 하고, 채권자들과의 관계를 증진시키고, 그리고 구조개혁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차관공여 재개를 둘러싼 IMF와 러시아 정부간의 줄다리기는 프리마코프 내각의 거시경제정책에 변화가 없는 한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이며, 이 상황에서 러시아는 IMF외 다른 국제금융기관(예: 세계은행)이나 서방 선진국들에게 차관지원을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계은행은 IMF와 차관공여에 있어서 공동보조를 맞춰온 관례를 고려해 볼 때, IMF의 대러 차관공여가 재개되지 않는 한 세계은행의 대러 차관공여도 재개되지 않을 전망이다.
V. 결론: 평가 및 전망
러시아는 1992년초부터 지난 7년동안 중앙통제적 계획경제의 잔재를 청산함과 동시에 자유화, 안정화, 사유화 등을 경제개혁의 기조로 삼으면서 시장경제로의 개혁을 위한 수 많은 개혁조치들을 취해왔다. 그동안 약 20여개에 달하는 거시경제 프로그램들이 정부로부터 제안되고 실행에 옮겨졌으나 정치적 불안정과 각 개혁프로그램이 초래하는 부정적인 결과 때문에 끝까지 실행되지 못하거나 도중에 중단 또는 수정되었다.
실제로 경제개혁은 단기적으로 발생하는 정치․경제적 위기와 필요성에 의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국내외의 비상과 관심과 서장세계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추진된 시장경제로의 충격요법식 급진 경제개혁은 엄밀히 말해 1992년초 몇개월간 간신히 실행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격자유화에 따른 물가폭등 등 시장혼란은 당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던 최고회의내 반시장적 성향을 갖고 있던 보수세력은 물론 물가폭등에 따른 생활고에 지친 대다수 국민들의 저항을 강화시켜 주었다. 결국 옐친정부는 통화공급을 늘렸는데, 이는 1994-95년 긴축정책이 시작되어 물가를 어느 정도 안정화시킬 때까지 경제안정화와 국민 생활수준을 악화시켰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대한 경험이 부재하고 또한 지난 70여년간 철저한 중앙통제적 계획경제가 뿌리를 내린 러시아에서 시장경제체제가 불과 수년사이에 정착되리라고 기대한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제정치 및 경제에서 차지하는 러시아의 비중은 옐친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개혁이 러시아의 것만이 아닌 국제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미국 등 서방세계 및 국제금융기구들은 경제개혁 시점부터 재정 및 기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가 당면하고 있는 금융위기에 따른 심각한 경제위기는 지난 7년간 추진된 경제개혁의 내용과 성과에 대한 재평가를 활발히 진행시키고 있다.
물론 그동안 옐친정부가 추진해온 경제개혁에 대한 수많은 긍정, 부정적 다양한 평가가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엘만은 충격요법은 자유화 정책분야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안정화 정책은 실패하였다고 평가하였다.주51) Michael Ellman, "Shock Theraphy in Russia: Failure or Partial Success?," RFE/RL Research Report, Vol. 1, No. 34 (August 28, 1992), p. 58. 골드만도 자유화, 사유화가 초래한 부정적 현상들을 지적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에 에슬룬트는 러시아 경제개혁이 지난 수년간 매우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주52) 예를 들어, 가장 대조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문헌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음. Marshall Goldman, Lost Opportunity: Why Economic Reforms in Russia Have Not Worked(London: Norton, 1995); Anders Aslund, How Russia Became a Market Economy (Washington, D.C.: The Brookings Institute, 1994).
최근들어 러시아가 당면한 극심한 금융위기로 옐친정부가 지난 수년동안 추진된 개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인 것은 사실이나 러시아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시정경제로의 체제전환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사실상 모든 가격이 자유화되었고, 비록 유착자본주의(crony capitalism), 악덕자본가 자본주의(robber-baron capitalism), 과두제적 자본주의(oligarchic capitialism) 등 온갖 부정적인 수사가 붙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사유화가 이루어졌다. 또한 옐친 대통령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러시아 국민들은 지난 수년동안의 경험을 통하여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의 경제행위 및 사고에 점차 익숙해져 왔다. 실제로 러시아 국민들은 비록 현 경제상황의 악화로 인한 지극히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경제정책의 수정은 바라지만 소련식 중앙통제 경제체제로의 완전한 회귀는 바라지 않고 있다. 이는 1993년 4월 실시된 국민투표 1996년 대통령선거가 증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 개혁과정에 깊숙히 관여한 IMF의 역할은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가? 동아시아의 경제위기에 대한 IMF의 처방에 대한 찬반 양론이 존재하듯이 IMF의 대러정책의 성과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있다. 즉 IMF가 옐친정부에 줄곧 요구한 정부의 긴축통화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견해이다. 예를 들어, 포포프(G. Popov)는 과거 IMF의 긴축통화정책을 적용, 성공한 국가들이 비교적 경제규모가 작은 국가들인 반면 러시아는 거대한 방위산업 등 그동안 정부보조에 익숙해 있는 산업구조 및 기업인들의 심리를 고려해 볼 때, IMF의 긴축통화정책은 시작부터 한계성을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아발킨(L. Abalkin)도 지나친 긴축재정 및 통화 정책은 산업기업들의 운영을 힘들게 하였고 투자부진의 주요 요인이 되어 성장을 저해하였다고 비난하였다. 미국 경제학자인 삭스도 통화에 바탕을 둔 경제제안 정책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환율에 바탕을 둔 경제제안정책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IMF가 급진개혁을 추진할 1992년초에 집중적인 재정지원으로 개혁파를 지원하면서 이들이 추진한 개혁정책을 가속화시켰어야 했다고 주장하였다. 주53) "Sachs Blames Lack of IMF Support for Reformers' Defeat," The Moscow Times (January 25, 1994).
이에 반하여, IMF측 인사들은 IMF가 러시아 개혁과정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강조하면서도 현 경제위기에 대한 러시아측과 IMF측의 책임을 시인하고 있다. 예를 들어, IMF 러시아담당 과장인 오딩-스미에(Oding-Smee)는 8월 이전(루블화 평가절하 및 모라토리엄 선언이전) 러시아에 공여한 막대한 양의 국제금융 지원은 '유감스럽게도' 모스크바당국으로 하여금 철저한 구조개혁이 없이도 러시아경제가 성장할 것이라는 인식을 강화시켜주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국제금융기구의 대러 금융지원이 기본적인 개혁을 추진시키는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나, 경제개혁과 성장에 있어서 핵심과제인 재정적자의 해소 등 거시경제의 안정화를 위한 모스크바 당국의 강력한 조치를 연장시켜주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고 시인하였다. 그는 향후 IMF는 차관을 공여할 때 반드시 차관공여 조건이 충족되고 있는지를 엄격히 평가하면서 차관을 제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주54) Robert Lyle, "Russia: Bank Chairman Does Not Expect Miracles," http:// www.rferl.org/nca/1998/12/F.RU.98120235127.html.
사실 지금 러시아가 당면한 금융위기에 따른 심각한 경제위기는 일차적으로는 러시아에 그 책임이 있지만 그동안 차관을 제공하면서 러시아 경제개혁과정에 깊숙히 관여해온 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책임도 크다. IMF는 1992년 8월이래 지금까지 200억달러 이상을 러시아에 제공하였다. IMF는 이 과정에서 비록 차관공여 조건으로 경제안정화 및 구조개혁을 요구, 이의 실행을 감독하기는 하였으나 차관공여를 경제적이기보다는 대부분 정치적 동기에 의하여 실행하였다.(예: 1996년 6월 대선을 앞두고 옐친 대통령의 재선을 측면 지원하기 위하여 향후 3년간 102억달러의 EFF 차관지원 결정) 또한 러시아가 차관 공여조건을 이행하지 않아도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차관공여 조건의 이행을 완화시켜 주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스크바당국도 차관공여 조건충족을 위한 경제정책의 실질적인 이행보다는 조건충족을 위한 피상적인 정책실행이나 개혁후퇴에 대한 IMF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내각내 개혁파 잡아두기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IMF는 프리마코프 내각출범후 키리엔코 내각하에서 추진되어온 개혁정책들이 상당 부문 포기되면서 개혁후퇴 조짐이 나타나자 1998년 7월 금융위기의 극복과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하여 제공키로 합의, 9월 중순경에 제공키로 된 2차분 43억달러의 공여를 중단한체 경제정책협의를 지속시켜 오고 있다. 이미 국내외 부채에 대한 지불상태로까지 빠지는 등 전반적인 경제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99년 12월 총선이 다가오고 있는 러시아의 국내상황을 고려해 볼 때, IMF 등 서방세계로부터의 금융지원은 꼭 필요하며, IMF 또한 러시아 경제상황 악화를 계속 방치할 수만은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프리마코프 내각의 경제정책이 IMF의 차관공여 조건을 완전히 충족시켜 주지는 못할지라도 양측이 일정선에서 타협, IMF의 대러차관 공여가 재개될 가능성이 많다.
프리마코프 내각의 경제정책은 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통화주의보다는 산업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이며, 경제영역에 대한 국가개입을 확대시켜 나갈 것으로 보인다. IMF는 러시아경제가 1998년에 이어 1999년에도 GDP가 -6%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물론 러시아 경제전문가들은 최악의 경우 -10%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물가도 1998년도 하반기 들어 급격히 상승, 85-100%를 기록하였는데, 러시아정부의 30%대의 감소전망에도 불구하고 50-70% 또는 최악의 경우 200-300%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재 심각한 세수부족, 금융권의 극심한 자금난, 디폴트수준의 외환보유고(1999년 1월초 현재 금보유 포함 120억달러, 그러나 1999년도 상환외채는 174억달러), 국민소득감소에 따른 소비위축, 투자위축, 외국인 투자부진 등을 고려해 볼 때, 러시아경제는 향후 1-2년간은 플러스 성장을 기록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이르기까지는 최소 3-4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주55) EIU, Country Report: Russia (4th Quarter, 1998); 崔秉熙, 金秉熙, 전게논문, p. 129.
하지만 러시아가 얼마나 빠른 시일안에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면서 성장경제로 진입하느냐의 여부는 프리마코프 내각이 당면한 국내외적 경제과제를 얼마나 신속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해결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프리마코프 내각은 대외적으로 외채상환일정의 재조정 및 탕감성사, 그리고 IMF 등 국제금융기구와 미국, 일본 등 서방국가들로부터의 신속하고 많은 재정지원을 통해 국내 경제상황을 호전시켜야 하며, 대내적으로는 위기극복 프로그램에 나타난 정책들을 충실히 이행하여 하루라도 빨리 경제안정화 및 구조개혁을 심화시켜야 한다.
|
'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세상 쳐다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통령의 사저 (0) | 2012.11.13 |
---|---|
러시아의 모라토리움 선언과 IMF경제정책 (0) | 2012.11.13 |
한국경제의 위기극복 과정과 교훈 (0) | 2012.11.13 |
2012년 수시논술과 정시논술 일정표 (0) | 2012.11.10 |
필독 2014년 서울대학교 신입학 전형 정리 (0) | 2012.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