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역사탐방 22탄
민간인 학살 (1947년 ~ 1955년) - 1
http://www.ohmynews.com/NWS_Web/Tag/index.aspx?tag=%EB%AF%BC%EA%B0%84%EC%9D%B8%ED%95%99%EC%82%B4
http://www.youtube.com/watch?v=8XsxlEvQ-Uo
http://www.youtube.com/watch?v=EEpQSFdDw2s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http://blog.daum.net/jjoak07/325?srchid=BR1http://blog.daum.net/jjoak07/325 강정구 글 정리
1. ‘양민 학살이 아닌 민간인 학살’
민간인 학살은 “아무런 위협이 없는데도 그저 좌익, 우익, 부역이라는 집합체의 성원(가족을 포함하여)이라는 이유 또는 혐의만으로 무고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를 의미한다. 여기서 교전중의 살인 행위는 제외하며, 재판에 의한 처형행위는 학살에 포함시킨다. 즉, 민간인 학살 문제는 반인도 범죄이다.
1948년 12월, 유엔 협약의 ‘제노사이드(genocide) 협약’
집단 살해죄
미군의 ‘흰 옷을 입은 사람은 모두 죽여라.’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은 이러한 국가적 집단 폭력의 정점에 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남북한을 통틀어 최소 백만이 넘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전쟁 당시 학살의 사실이 축소되고 은폐되는 것으로 폭력의 정당화와 이에 따른 반문명적 행위는 계속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2. 한국 전쟁 이전 (작은 전쟁 기)
제주 4·3 항쟁이나 여순 항쟁과, 빨치산, 38선상의 남북 충돌로 특징지을 수 있다. 주로 남부지방인 제주도, 전남, 전북, 경남, 경북 지역이나 1949년부터 본격화된 유격대 소탕전 과정에서 구사된 견벽청야 작전 등에 의해 발생했다. 1949년~1950년, ‘작은전쟁’ 옹진 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강릉부근에서 전투 수행
1) 제주 지역의 민간인 학살
제주 4·3 사건(濟州 4·3 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당시 제주도민 전체 인구의 10%에 가까운 3만 명 이상이 무차별 학살이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진상조사결과에 의하면, 제주 4.3 사건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제주 4·3 사건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5천~3만 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만 14,000여명(진압군에 의한 희생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764명 및 기타)에 달한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주도민들은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밖에 재일 한국인들 출신구성을 보면 제주도출신자가 상당히 많은데, 이는 제주 4·3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보트피플'로 이동했다. (주로 오사카지역) '좌익도 우익도 자기 마음에 안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남로당과 미군정의 전투
협상 실패와 사태 악화
학살극
독립촉성회
남로당 김달삼
여명의 눈동자 1991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제주4.3 (1999년)
진상 규명 노력 (2003년 3월 29일 조사위원회에서 보고서를 확정,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4·3 특별법
폭동 논란
계엄령의 적법성 논란
http://blog.ohmynews.com/rufdml/81235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3321
http://ko.wikipedia.org/wiki/%EC%97%AD%EC%82%AC%EB%AC%B8%EC%A0%9C%EC%97%B0%EA%B5%AC%EC%86%8C
http://www.law.go.kr/LSW/lsSc.do?menuId=0&p1=&subMenu=1&searchName=LicLs%2C0&query=4.3#liBgcolor0《제주
http://www.jeju43.go.kr/sub/catalog.php?CatNo=26
http://www.kbs.co.kr/1tv/sisa/war/program/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313429&cloc=olink%7Carticle%7Cdefault
http://www.jeju43.go.kr/sub/catalog.php?CatNo=51&Sort=&OutLine=menu3outline
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57584
http://jeju.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0701581
http://blog.ohmynews.com/rufdml/13038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4&aid=000004805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4&aid=0000006656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38038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02839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15135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46651
http://www.vop.co.kr/A00000227793.html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11208850d&sid=0106&nid=006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69334
http://www.jeju43.go.kr/sub/catalog.php?CatNo=27
2) 전남 지역의 민간인 학살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여순 사건, 여순 14연대반란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간단히 여순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2년 전이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주동하고 2,000여 명의 사병이 전라남도 여수군(현재 여수시)에서 봉기함으로 인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좌·우익세력으로부터 전남동부지역의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부 진압군경이 여순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이 학살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하였다.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여순반란사건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반란의 주체라고 오인할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들여서 1995년부터 여수·순천 사건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1948년 국방경비대(대한민국 국군의 전신)는 모병제였고, 입대 시 신원조회를 다양한 방법으로 하는 현재의 한국군과는 달리 입대 시 신원조회가 허술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좌익계열이 신분상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건군 초기 미 군정은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제제를 가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남로당에서 군을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위장입대시킨 요원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군내에서 많은 동조자를 포섭했었다. 여기에다 당시 군과 경찰 사이에는 국가주도권을 놓고 가끔 무장충돌이 벌어질 정도로 매우 관계가 좋지 않았다.
14연대 반란과 진압
이범석과 김구의 공방전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은 배후를 김구로 지목했다. 또 "국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남로당의 지령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난 군인반란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남로당은 이 사건의 발발에 적잖이 당황하였으나 결국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함께 이승만의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군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대규모 숙청되는 이른바 숙군작업이 이루어졌고, 1949년에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여순반란 이후 서수 4는 대한민국 국군의 독립 부대명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연대는 없어졌다. 4연대는 20연대로 재편되었다.
김구는 여순 사건을 반란, 테러로 규정했다.
박정희는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로당의 군사총책임자를 하였던 간부였다. 체포된 후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군부내 남로당원 명단을 건내서 감형, 나중에는 특사로 풀려났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0210212115&code=99010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7042&PAGE_CD=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380385
전남 동부 지역에는 빨치산 토벌 시기에 학살
1948년 10월 19일부터 1950년
1949년 화순군 춘양면과 이양면 주민 학살
3) 전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
전주 형무소에서 정치범이 학살
http://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41600
http://mjbnews.com/sub_read.html?section=sc6§ion2=%C0%D3%BD%C7&uid=1763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453732
4) 경남 지역의 민간인 학살
1949년에서 1950년 9월까지 국군의 토벌
산청, 함양, 거창, 거제
5) 경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
1949년 12월 24일 : 문경 양민학살 사건.
문경 양민학살 사건(聞慶良民虐殺事件)은 1949년 12월 24일 공비를 토벌 중이던 국군 제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원 70여 명이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주민들을 살해한 민간인 대량학살 반인륜 범죄이다. 이 사건은 이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공비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으로 조작되었다. 하지만 참여정부 들어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과거사 청산에 의해 2008년 여름 사건 진상과 가해 부대 책임자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소송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79392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224709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376190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25/2009102500747.html?srchCol=news&srchUrl=news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70694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10927091838951&p=sisain
주월산과 주왕산 일대에 ‘빨치산’을 토벌
독도 부근에서 미군 학살
2편에서 계속
'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지식의 피라미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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