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역사탐방 20탄
세기의 라이벌, 역사탐방 20탄을 들어가며,
세기의 맞수를 통하여 현재 대통령선거와 이념논쟁을 살펴볼까한다. 소시민의 시각으로 공정하게 서술하며, 모든 내용과 사진은 포털 다음 백과사전· 포털 네이버 · 위키백과에 인용하며, 블로거들의 이야기를 링크하고자 한다.
위 내용은 총 5편으로 구성되었으며, 서론으로 1편 “한국의 미국군정기편”으로 국내외 사상과 시대흐름을 정리하였다. 본론에는 2편 민족주의자 “김구”, 3편 친미주의자 “이승만”, 4편 세기의 충돌 “김구와 이승만 관계”으로 구성하여 각 인물들과 상징되는 장소를 알아보자 한다. 결론은 5편 “역사탐방” 로 일반인이 쉽게 유적지에 접근할 수 있도록 상세하게 위치와 관련 사적지를 기록하고자 한다. 또한, 부록으로 18대 대선후보의 대선출마 장소를 수록하였다. 이 따스한 가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보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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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주의자의 승리와 치욕 그리고 잊혀진 망령
이승만[李承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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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 리승만, 1875년 4월 18일 ~ 1965년 7월 19일, 황해도 평산 출생)은 조선·대한제국의 계몽 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교육가·언론인·종교인·정치인이며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의 국회의장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통령, 주석이었다.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 실패,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운영,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 수반,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 활동했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는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장, 대한민국의 초대·2·3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사사오입 개헌 이후 1960년 4대 정·부통령 선거에 연임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 원조의 유상 원조로의 전환과 액수 감소의 영향으로 경기 침체와 실업자 증가에 따라 사회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임기 중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일어난 4·19 혁명 직후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 하야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배재학당 재학 (1895 ~ 1897)
1895년 춘생문 사건
1896년 협성회
서재필과 유학권유
언론·계몽운동 (1897 ~ 1904)
1898년 협성회회보, 독립협회, 매일신문 · 제국신문 창간, 대한제국 고종황제 폐위 음모사건
저서 '독립정신' 1904년 저술
옥중 계몽운동과 석방
1900년 8월, 중국 서적 《중동전기본말》 한글로 번역
1904년 7월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 및 밀사로 도미
외교 활동 (1904 ~ 1905)
1905년 2월 조지워싱턴 대학교 입학
9월 민영환은 을사조약으로 자결와 가쓰라-태프트 밀약
밀사활동 실패 후 도미 유학 (1906 ~ 1910)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M.A) 학위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 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
1908년 애국동지회, 1908년 장인환· 전명운,의사의 더럼 스티븐슨 저격 암살사건
1908년 8월 미국 '애국동지대표자회의'에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沿海州)대표로 회의에 참석
귀국과 선교 활동 (1910 ~ 1913)
1910년 3월 국민회 가입
1910년 YMCA에서 교사
1912년 미국으로 도미
1913년 박용만과 함께 하와이에 정착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
미국 하와이 '한인기숙학교'의 교장 취임 →'한인기독학원'
한인기독학원(KIC)의 원장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
하와이 정착과 국민회 분열 (1914~1918)
1914년 박용만은 국민군단을 창설
이승만과 박용만은 독립운동 방법론과 국민회기금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결국 정적이 되고 말았다. 하와이 한인들은 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 이승만은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내역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고 국민회측과 대립, 테러, 폭동
1915년 6월, '한인중앙학원'을 독립
감리교단, 박용만과의 갈등
1917년 저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
10월 뉴욕개최 25개 약소 민족대표자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1918년 7월 '신립교회' 예배당 헌당에 참여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
9월 '한인여자성경학원' 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
12월 1일 정한경, 민찬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 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
1918년 박용만, 일본군 선박 출운호를 폭파 혐의와 국민군단 해체,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다.
1918년 1월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서재필이 참석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발표
1919년 무오 독립선언 선언문에 서명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겸 외무총장에 추대
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 선출
4월 14일 한인자유대회에서 연설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를 소집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도자 (1919 ~1925)
1919년 4월 고려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추대
4월 평안북도 신한민국임시정부 국방총리로 추대
4월 인천 조선민국임시정부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에 선임
1919년 4월 경성 한성임시정부가 집정관 총재로 추대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소에 한국의 독립선포 공문 발송
7월 '대통령 선언서' 발표
7월 워싱턴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 설치
8월 한국 위원회로 개칭
8월 하와이 대한독립혈젼기(大韓獨立血戰記)를 발간
8월 '프레지던트'(President) 칭호 사용 논란
임시 정부 각료들과의 갈등
상하이 임정 요구로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상하이 방문 1921년 5월 도미
대통령 명함을 사용함으로써 안창호와 대립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이동휘·여운형·한형권 등과 대립
임시 정부 대통령 탄핵(1925)
1921년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 면직, 한편, 조소앙은 반대 입장을 표명과 복권 시도
구미외교위원부 활동(1925~1930)
1919년 8월 김규식, 여운홍, 장택상 등의 도래와 임정 파리위원부를 구미위원부로 흡수, 구미위원부 산하 주불대표부로 활용,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 임정 홍보와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지지 호소하였고, 유럽의 정치정세 변동과 정보를 수시로 입수하였다. 1919년 5월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사무소와 서재필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 개편, 구체적인 외교상의 성과는 없었다. 게다가 출범 초부터 개인기관으로 활용, 애국금 전용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마침내 임시정부는 1925년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폐지령을 묵살하였다. 김현구는 1926년 이후 1929년까지 임정 구미위원부 총괄, 폐지령에 반발한 이승만은 임정으로 보내는 송금줄을 차단, 미국 교포들에게도 임정으로 송금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임정과의 갈등
"태평양주보"발간 그러나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1928년 박용만이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내의 언론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1930년대에서 40년대 초
외교 홍보 활동 (1930 ~ 1933)
이봉창·윤봉길 의거 이후 임정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후원금 송금
1932년 11월, 임시정부 국무회의 국제연맹에 전권대사로 임명
1933년 국제연맹에 대한 독립청원서를 제출
1933년 2월 제네바에서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임정 외교위원, 국무위원 선임 (1934 ~1939)
1933년 11월 이동녕 내각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보선
193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외무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위원, 조소앙·최동오·이승만·신익희 선임
1934년 9월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과 호주댁
1938년 4월 '한인기독교회' 낙성
이청천 장군의 독립운동을 알렸고 1939년 조선에 일시 입국
태평양 전쟁 전후 (1940 ~ 1942)
1940년 3월 김구가 주석 취임 후, 6월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승인
'일본을 벗기다'를 출간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을 전달
1942년 1월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무기원조를 요청과 거절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창설
임시정부 승인 운동 (1942 ~ 1944)
1942년 2월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 개최. 이승만이 이끄는 한미협의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 주최하였고, 임정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임시정부를 승인반대하여 양자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3월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냄
8월 23일 캐나다에서 열린 제1차 퀘벡 회의에 임정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
기독교인친안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지지
12월 대한인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
1944년 7월, 미국 체신청이 태극마크가 들어있는 우표를 공식 발행을 성사
11월 미국 체신청에서 태극우표를 발행과 한국의 독립을 미국이 지지한다는 증명으로 태극마크를 도안하여 우표를 발행을 발송
항일단파방송 선전활동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29일 처음 방송, 6월-7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 격려, 훗날 국내에서 이승만에 대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임시정부가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라고 한다. 이승만의 항일단파방송 육성원본은 오늘날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OSS 지원 요청
임정의 광복군과 미국 OSS의 합동훈련을 중개하게 된다.
12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1944년 8월 21일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임정를 승인 촉구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한 한국의 독립을 번복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한국의 신탁통치를 합의(얄타밀약설)
1945년 8월 소련군"한국의 망명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반동적이고 반소적인 인물"이라 보고
미국 국무부가 여권발급을 거부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임
귀국 전후 (1945 ~ 1946)
1945년 10월 이승만이 비교적 연합국 측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첫번째 대미교섭은 임시정부요인들의 환국문제였다. 속으로는 임시정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선 임시정부가 "정부" 자격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세우겠다는 뜻을 품은 이승만으로서는 임시정부가 대내외적으로 법통을 인정받는 형식으로 귀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10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주의를 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윤치호
1945년 10월 돈암장에 입주 → 이화장
1945년 이승만을 정점으로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 전개
10월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회담에서 논의된 선친일파 숙청을 주장하는 박헌영과 건국후 숙청을 주장하는 이승만 사이에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11월 이승만의 통일안에 대해 조선공산당이 반대성명발표, 11월 이승만도 <공산당에 관한 나의 관념>이란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당의 본질에 관해 설파했다.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제1진이 귀국
1945년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성명 발표
1945년 11월말 경제보국회 결성
1945년 12월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 추대
해방 정국 (1946 ~ 1948)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탁치반대)를 결의
1946년 1월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공산주의를 매국노로 규정하고 결별을 선언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 선언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
1946년 2월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 개최
이승만은, 김구, 김규식,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2월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통합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설립 총재로 추대
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과 28인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의장 선출과 민주의원이 개소
46년 2월 김구를 위원장, 김성수를 부위원장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고문 선출
1946년 3월 3.1절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주관
1946년 3월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는 미 군정이 다음날 개최될 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의장 대리에 김규식 선출과 이화장에 반(半) 연금상태
46년 3월 우파정당 통합에 나선 한독당은 국민당과 통합을 선언
미소공위 반대
1946년 3월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과 공동성명 5호가 발표
밀사 김욱과 조만식
장덕수는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
1946년 5월 미소공위에 불참할 것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과 김규식은 반박성명 발표
1946년 6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 정부 수립을 할 것을 주장했다.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설치과 선출
1946년 8월 여운홍의 사회민주당 결성식
서북청년단 지원
단독 정부 수립론
1946년 5월 20일, 전남 목포에서 이승만은 반공주의적인 발언을 하게 되는데 이는 향후 자신의 정치노선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러한 발언으로 그는 '늙은 파시스트'이라고 비난받기도 하였다.
46년 6월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대회에 참석
1946년 9월 독립정부 수립 문제를 유엔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 파견
이승만 권총저격 미수사건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
도미 외교
1947년 1월 이승만은 미국을 방문와 김구 투옥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와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 결의
1947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보선,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 추대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
1947년 4월 귀국성명을 발표으로 총선거 법안을 만들어 남한 과도정부, 즉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김구와 김규식은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모두 포기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투쟁 전개
5월 21일 예정된 제2차 미소공위 개최를 앞두고 단독정부 수립론을 이승만은 연금상태
1947년 6월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
한국독립당에서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
6.23 반탁데모,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와 미소공위가 결렬 후 1947년 7월 10일~7월 12일 제1회 한국민족대표자 회의를 개최
1947년 9월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 발표
이청천(李靑天)이 대동청년단의 총재 취임
김구와의 결별
장덕수. 한민당내 이승만의 지지자였던 그의 암살을 계기로, 김구와의 감정이 악화, 결별하게 된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
이승만는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
1947년 12월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 주장
단독 총선거 직전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도착, 북한 입국을 거부
1948년 3월 이승만을 암살 미수사건
3월에는 총선거 연기설이 확산
4월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에 반대
5.10 단독 총선거 직후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라며 조롱하였다.
1948년 5월 동대문구 갑에 당선
제헌 국회의장과 헌법 선포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제1대 제헌국회(制憲國會) 의장으로 선출, 윤보선을 국회의장 비서
한민당의 내각 반대하여 책임제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
6월 16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전달
1948년 7월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 안재홍, 서재필 등을 누르고 제헌 국회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7월 24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 8월 15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중앙청에서 정부수립 선포
8월 11일 파리 유엔총회에서 장면 한국대표단을 파견
집권 1기
친일파 청산 방해 의혹 반민족행위처벌법
대일외교 문제와 이승만 라인
1·4 후퇴와 휴전
취임 2기 (1952 ~ 1956)
불출마 선언과 번복
구황실재산법과 대한제국 황실 재산의 몰수
취임 3기(1956 ~ 1960)
3선에 성공
집권 후반
사퇴에 대한 북측의 대응
출국과 망명 (1960 ~ 1964)
죽음
대통령 박정희 추도사
장례 문제 가족장으로 결정
외교 관계
대미국 관계
이승만은 미국을 불신하면서도 강력한 동맹상대로 미국을 지목하였다.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
대일본 관계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은 시종일관 반일노선과 경계를 지향하였다.
6.25 전쟁 당시 일본군 참전을 취소시켰다.
55년 일본제품 특혜수입 금지령
인간적인 평가
자만심이 강하고 독선적인 인물이었다는 주장
도덕적인 인물이라는 주장
독립운동 시기의 평가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한 비판
재미 교포 사회 분열 관련
국민회 분열과 자금 유용 의혹
긍정론
토지개혁
비판론
친일 경찰의 활용
이승만 우상화
의혹과 논란
정치 깡패의 활용
정치보복 의혹
동상 건립
1940년대의 설문조사
개신교 보급
군 견제 정책
핵력 공학과 개발 추진
김구의 이승만 암살 미수
미국의 이승만 제거 시도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
화폐 속의 이승만
옛날에 사용하던 환화에 그려진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도 처음 발행된 1953년에는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으나, 1957년에 발행된 새 환화의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에 있던 한복은 양복으로 바뀌었다가 1962년에 들어서 돈에서 이승만의 초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http://www.rokps.or.kr/profile_result_ok.asp?num=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89199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74454
http://historia.tistory.com/1867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2g1996a
http://www.syngmanrhee.or.kr/gnu/bbs/board.php?bo_table=DB_data1&page=1&mode=&sca=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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