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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 협동조합 '그림책 작가 협동조합'

草霧 2013. 9. 30. 11:26

 

 

 

혼자 하면 `잔혹 동화`, 같이 하면 `희망 동화`

생산자 협동조합 '그림책 작가 협동조합'

 

| 2013.09.27

 

황세원(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홍보팀장)

 

그림책

 

그림책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서울톡톡] 아기가 가장 먼저 만나는 책, 유아기의 정서와 상상력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책이긴 하지만 그림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림책이 담고 있는 예쁘고 정감 있는 이야기들처럼 그림책이 만들어지는 환경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두운 숲길을 혼자 헤매는 고전 동화의 주인공들처럼 그림책 작가의 현실은 '잔혹 동화'에 가깝다.

 

예를 들어 한 그림 작가(일러스트레이터)가 있다고 하자. 글과 그림을 동시에 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에 먼저 좋은 글을 만나야 한다. 기성 작가의 경우 출판사에서 연결해 주는 경우가 많지만 경력이 적거나 신인이라면 직접 찾아 나서야 한다.

 

작가가 출판사 다니며 홍보해야 기회 얻어

운 좋게 좋은 글을 만나서, 혹은 글과 그림을 혼자서 담당해 '더미'(출판을 위해 제작하는 원본)을 완성하더라도, 출판의 기회를 얻기 위해 넘어야 할 고비가 가파르다. 더미를 직접 들고 출판사 또는 에이전시에 다니며 홍보를 해야 하는 것이다. 혼자 하는 일에 익숙한 작가들에게는 이 부분이 가장 큰 난관이다.

 

 

이렇게 해서 출판 기회를 얻기도 쉽지 않지만, 출판을 한다고 꽃길이 펼쳐지는 게 아니다. 그림책 1권을 단가 1만 원 안팎으로 2,000~3,000부 찍어내면 그에 대해 작가가 받는 인세는 10%인 200~300만 원 선이다. 에이전시를 통했다면 이 중 20%인 40~60만 원을 떼어 줘야 한다.

 

이 과정이 1년 걸렸다고 쳐도 작가의 수입은 월 20~30만 원에 불과한데, '잘 풀려야' 2~3년인 것이 국내 그림책 출판 시장의 현실이다.

 

3년 만에 첫 출간, 수입은 300만 원이 전부

지난 9월 12일, 서울 성수동 뚝도시장에서 열린 '2013 추석맞이 뚝도시장 가는 날' 행사장에 '그림책 작가 협동조합'(www.pwcoop.or.kr)의 부스가 차려졌다.

 

여기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종이 관절 인형 만들기 체험을 진행한 이윤민(37) 작가는 지난 7월 '꼭두와 꽃가마 타고'(한림출판사)라는 그림책을 펴낸 신인 작가다.

 

이윤민작가

 

"혼자 이런 저런 구상을 하다가 접곤 했던 기간까지 치면 10년 만에, 본격적으로 이 책 작업을 시작한 뒤로만 치면 3년 만에 책이 나왔어요. 수입은 3,000부의 인세 300만 원이 전부죠. 글과 그림을 같이 했고, 출판사가 배려를 해줘서 상황이 좋은 편이었다는 게 이 정도죠."

 

이런 상황이다 보니 부업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을 수 없는 것이 그림책 작가의 현실이다. 이 작가는 "저는 일러스트 학원 조교로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마트 직원처럼 전혀 다른 일로 생계를 꾸리는 작가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이윤민작가

 

그런데 다음 책 계획을 설명하면서 이 작가의 말투는 사뭇 활기차졌다. "같이 작업할 글 작가를 만나서 다음 작품 구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는 "보통은 출판사에서 적당히 연결시킬 뿐 그림 작가와 글 작가가 서로 만날 기회도 별로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금방 파트너를 찾았을까? 바로 '그림책 작가 협동조합'을 통해서다.

 

성수동 그림책 전문 카페 '일러스트'

이 작가가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 협동조합에 대한 설명을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뚝도시장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북카페 일러스트'로 자리를 옮겼다.

 

북카페이미지

 

이 카페는 바로 윗층의 '꼭두일러스트교육원' 대표 고광삼(48) 작가가 운영하는 곳으로, 협동조합의 임시 사무국이기도 하다.

 

이 곳에서 만난 고 작가와 권오철(43) 이사는 그림책 작가들의 협동조합을 처음 구상한 사람들이다. 영화 등 문화 콘텐츠 분야에서 일했던 권 이사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인 아내가 지난해 첫 그림책을 출간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림책 콘텐츠의 확장과 활용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작가 권오철

 

권 이사는 이를 위해 그림책의 국내외 온라인 출간 사업을 기획했고, 그림책 작가들의 네트워크를 알아보다가 고 작가를 만나게 됐다. 고 작가는 일러스트교육원을 운영하면서 많은 작가들을 배출했고, 선배 세대와 후배 세대를 잇는 중간 다리 역할도 하고 있다. 이 카페도 그림책의 콘텐츠를 확장하고 후배 작가들이 활동할 공간을 내줄 방법을 고민하던 중 지난해 4월 마련한 것이다.

 

"그림책 콘텐츠 활용·확장 절실하다"

두 사람의 고민이 만나고, 이것이 주위 작가들과 공유되고 논의가 이뤄진지 8개월여 만에 지난 7월 그림책 작가 협동조합은 서울시에 설립 신고를 마쳤다. 40여 명의 작가들이 조합원으로 합류했고, 곧 30여 명이 더 참여할 예정이다.

 

그 과정이 간단치는 않았다. 기성 작가들과 신인 작가, 지망생들의 주된 관심사나 우선순위가 다르기도 했고, 지금도 벌이가 적은데 돈만 더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어린 반응도 있었다.

 

고작가

 

고 작가는 "대부분 폐쇄적이고 개성이 강한 작가들이라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지만 권 이사가 제시한 방향이 설득력을 얻었다"고 전했다.

 

그 방향이란, "협동조합이 작가들의 그림책 출간 환경을 개선하되, 수익은 그 결과물에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의 활용 및 확장을 통해 도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있는 골목길 등 '그림책의 확장'

이 대목에서 권 이사는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그림책 활용 아이템들을 보여줬다. 골목 담벼락 사진에 일러스트를 얹어 편집한 이미지는 낙후 지역 골목길 조경 사업 제안서 작성을 위해 제작한 것이라고. 이 사업은 후원 기업이 나서면서 서울의 한 지역에서 다음 달부터 진행될 수 있게 됐다.

 

"그냥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벽의 한 구석에 QR코드를 넣어서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어느 그림책의 어떤 장면인지, 어느 작가의 것인지 정보가 보이도록 할 거예요. 그림이 단순한 조경 이미지가 아니라,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는 거죠."

 

벽화

 

스마트폰 속 이미지 중 하나를 클릭하자 여자 어린이 얼굴이 삽입된 그림이 넘어가면서 앳된 목소리로 동화 읽는 소리가 들렸다. "제 아내가 그리고 딸이 낭독한 동화"라면서 권 이사는 "그림책은 이야기가 있고 시각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에 활용 범위가 무궁무진하다"고 강조했다.

 

일러스트 원화를 활용한 전시, 공간 인테리어 등도 가능하다. 북카페 '일러스트'의 실내도 그림책 작가들이 힘을 모아 꾸몄고, 여기저기 걸린 작품들도 일러스트 원화들이다.

 

북카페

 

'나만의 그림책 만들기' 등 교육 분야 강점

그림책 콘텐츠의 또 다른 강점은, 교육 방면의 활용도가 높다는 것이다. 책과 그림을 활용한 독후 활동, 방과후 수업, 체험 프로그램 등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 조합원이 직접 수업에 나설 수 있는 그림책 작가 협동조합은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권 이사는 "좋은 그림책을 고르는 법, 그림책을 창의적인 체험 활동과 연결하는 법 등에 대해 학부모들의 관심이 높다"면서 이 방면의 사업 전망을 밝게 평가했다.

 

작가들

 

당장 오는 10월부터 이 카페에서 이윤민 작가, 그리고 글 작가인 유가은(29) 작가가 함께 '나만의 그림책 만들기' 등 주제로 어린이 체험 교육 과정을 운영한다(문의: 02-497-9809). 다른 협동조합 카페들과의 제휴를 통한 프로그램 확장 방법도 모색 중이다.

 

이렇게 해서 나오는 수익들은 사무국의 기본적인 운영비를 빼고는 최대한 참여한 작가들의 수입이 되도록 할 예정이다. 이 작가는 "작가들이 바빠지긴 하겠지만 어차피 부업을 안 하면 생계가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생뚱한 부업이 아니라 작가 본연의 일을 가지고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꿈같은 얘기"라고 기대를 표했다.

 

이처럼 콘텐츠 확장을 통한 수입 보전도 중요하지만, 협동조합의 우선순위는 무엇보다 그림책 출간을 원활하게 하는 데 있다.

 

고 작가는 "책을 기획하고, 글 작가와 그림 작가를 만나게 해 주고, 책을 출판하는 등 기존에 출판사, 에이전시 등이 하던 일을 협동조합이 직접 할 것"이라며 "상업적인 논리보다 작가의 개성과 작품성을 중시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더 창의적이고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0%로 일관된 인세도 상황에 따라 20~30%로 높여줄 계획이라는 것도 작가 협동조합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서로 의지해 떠나는 '미지의 여행'

물론, 그림책 작가 협동조합과 나눈 이야기는 아직 대부분 꿈과 기대에 해당되는 내용들이다. 실제로 수익을 내고, 작가들의 환경이 달라지고, 출판 시장이 바뀌어 가기까지는 멀고 험한 여정이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길이 '잔혹동화'였다면, 이제 이들이 갈 길은 '희망동화'라는 점이 다르다.

 

마침 이 작가가 이날 어린이들과 함께 체험 활동을 진행한 그림책 '꼭두와 꽃가마 타고'는 저승길을 혼자 가기 무서워하는 할머니를 위해 할아버지가 깎아 만들어 준 꼭두 인형이 길동무가 돼 준다는 내용이다. 서로 의지해 미지의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들의 상황과 꼭 들어맞는다.

 

꼭두와 꽃가마타고 이미지

 

이 작가는 "그림책은 어린이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어른도 함께 성장하도록 하는 책"이라면서, "개발한 사업을 독점하는 협동조합이 아니라 좋은 환경을 만들고 공유해 가는, 다 같이 성장해 가는 협동조합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글과 그림이 힘을 합쳐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그림책처럼, 이들이 협동을 잘 해나갈 수만 있다면 그 희망동화를 실제로 읽게 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출처 : 서울특별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http://www.sehub.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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