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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황금자 할머니 생전 모습부터 마지막 가는 길까지

草霧 2014. 2. 4. 11:44

 

 

 

이제 하늘에서 편히 잠드소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황금자 할머니 생전 모습부터 마지막 가는 길까지

 

시민기자 박분 | 2014.01.29

 

[서울톡톡]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황금자 할머니가 향년 91세로 지난 26일 세상을 떠났다. 고(故) 황금자 할머니 영결식은 28일 오전 10시 서울 강서구청에서 강서구민장(葬)으로 엄수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황금자 할머니 영결식(사진 뉴시스)

강서구민에게 황금자 할머니는 특별한 분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따라 붙는 호칭이 오히려 생경스러울 정도. 강서구청 1층 현관에는 부조로 만든 할머니의 흉상이 있다. 일제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 채 빼앗기고 의지할 피붙이도 없이 평생 아껴 모은 생활안정지원금과 기초생활수급비를 불우한 학생들을 위해 전부 장학금으로 기탁했기 때문이다.

하얀 국화꽃 속에 둘러싸여 특유의 천진한 눈망울로 바라보고 계신 할머니를 뵈니, 6년 전 장학금을 기탁한 일로 할머니 댁에 찾아가 인터뷰한 날이 떠올랐다.

등촌동 임대아파트 기다란 복도 끝에서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셨다. "황금자 할머님?"하고 여쭙자 그 큰 눈망울로 반색하며 맞아 주셨다. 반닫이 위 개켜진 두 채의 이불이 단출한 살림임을 짐작케 했고 부엌 컵대에 포개진 사발과 칠이 벗겨진 양은냄비가 소박함을 넘어 가슴을 아리게 파고들었다.

할머니는 이웃사촌이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아플 때 말벗이 돼주는 이웃들과 따뜻한 점심 한 끼 지어주는 복지관의 아주머니들, 가끔 찾아와 어깨도 두드려주고 설거지도 돕는 손주 같은 학생들이 고맙다 했다.

할머니 영결식에는 강서구민들과 강서구청 직원들 그리고 서울시민들도 함께해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함경도 출생, 조실부모하고 13살에 일본 경찰에 붙잡혀 흥남 유리공장에서 강제 노역, 1940년 간도로 끌려가…"

연단 앞 할머니 영정을 물끄러미 다시 바라보았다. 할머니네 집 꽃이 절반을 차지한 베란다가 떠올랐다. 베란다는 꽃밭이었다. 세숫대야랑 비누곽, 천장의 빨랫줄만 빼고 화분에 자리를 내주었다. 겨울이었는데도 잎들이 파르라니 풍성했다. 한껏 피우지도 못한 청춘의 아픔을 할머닌 꽃에 물주며 삭혀냈을 터.

할머니는 늘 위안부 악몽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일본군에 붙잡혀 흥남유리공장과 일군위안소를 전전하며 겪었던 온갖 고초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할머니의 가슴을 짓눌렀나보다. 교복을 입을 학생들을 일본군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환청에도 시달렸다. 할머니의 가운데 손가락 끝마디는 옆으로 꺾어져 있는데, 일본군이 군화로 짓이겨버린 상처다. 한으로 맺힌 상처를 견디다 못해 쓴 소주로 속을 달래며 밤을 지센 적이 허다했다.

무참한 역사와 무심한 세월에 내던져진 13살 어린 소녀의 심경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할머니의 약력소개가 계속됐다.

"광복 후 식모살이, 1994년부터 강서구 등촌동에 정착하며 국민기초생활수급비와 일군위안부생활안정지원금을 지원받음…"

생전 황금자 할머니 모습, 할머니는 평생 모은 재산을 2006년부터 강서구청 장학회에 1억 원이 넘게 기부했다

할머니는 다달이 주는 정부보조금을 꼬박꼬박 저축했다. 홑바지로 겨울을 나는 가하면, 식비·난방비·난수도세 등 아낄 수 있는 것이면 뭐든 최대한으로 아껴 쓰고 급기야 그 자그마한 몸으로 폐지와 빈병수집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복지관의 무료급식 외에는 찬 없이 된장 한 숟갈 물에 풀어 국처럼 밥 말아 먹는 것으로 아침저녁을 대신했으니 할머니네 도마엔 먼지가 쌓여있었다.

마흔 살적엔 도마에 '다다닥' 소리 내며 음식을 만들어 먹던 적도 있었다. 돌볼 식구가 있었으니깐. 부모 잃어 갈 곳 없던 아이를 3년 간 키웠지만 그마저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할머니는 갑자기 생각난 듯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은색의 휴대폰이었다. 할머닌 대뜸 숫자 1을 꾹 누르시더니만 턱을 내민 채 자못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신다. 액정화면에 아래 '김정환 아들'이란 글자가 나타났다.

평생을 혼자 살며 그렇게 무작정 돈을 모은 할머니는 늘 가까이에서 자신을 돌보던 김정환 복지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홀가분히 세상을 뜨고 싶다고 고백했다. 마음 따뜻한 복지사는 할머니가 소중하게 모은 재산이 의미 있는 곳에 쓰일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김정환 복지사는 할머니의 양자가 됐다.

양자 김정환 강서구청 장애인복지팀장이 헌화 후 기도하고 있다.(사진 뉴시스)

상주인 김정환(49) 강서구청 장애인복지팀장이 유족대표로 첫 헌화와 분향을 했다. 가진 것 모두 세상에 내주셨듯이 부디 할머니의 온갖 슬픔과 고통 또한 모두 훌훌 털어내고 새털처럼 가벼운 걸음이 됐으면 한다.

고 황금자 할머니의 구민장 영결식이 강서구청에서 엄수됐다(사진 뉴시스)

추모객들의 헌화와 분향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운구차량이 영결식장으로 천천히 미끄러지듯이 들어서면서 곳곳에 눈물을 훔치는 모습들이 보였다. 영결식이 끝난 후 오전 11시, 운구차는 추모객들의 추도 속에 경기 파주시의 천주교 삼각지 성당 하늘묘원으로 향했다.

황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4명 중 생존자는 55명으로 줄었다. 고령으로 수요집회도 할머니들껜 사실상 무리다. 이제 위안부 문제는 후손인 우리가 해결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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