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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 뚝섬나루 광진구 廣津區

草霧 2013. 11. 21. 13:43

 

 

 

 

광나루, 뚝섬나루

 

광진구 廣津區

    

 

 

 

Gwangjin-gu (Guangjin)

 

 

 

서울특별시의 동부에 있는 구.

동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강동구, 남쪽으로도 한강을 경계로 강남구와 송파구, 서쪽으로는 동대문구와 성동구, 북쪽으로는 중랑구와 이웃하고 있다.

 

"광진"이라는 이름은 "강폭이 넓은 나루"라는 뜻의 "광나루"에서 온 것이지만 경기도 광주시와 연관된 명칭이라는 설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한강은 광주(鑛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다음에 광나루(廣津)가 됐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한강은 광주(鑛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다음에 광나루(廣津)가 됐다'

백제가 아차산성을 축조한 286(책계왕 원년)에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하였다. 이후 고대의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로서 396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아차산성을 함락시킨 이후 신라가 한강하류를 장악한 553(진흥왕 14)까지 삼국이 국운을 걸고 싸웠던 고대사의 현장이다. 고려 태조 때부터 정종때까지는 양주로,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 충선왕 이후 고려말까지는 한양부라고 불렸다. 당시 각 지방은 호족세력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양주지방에서는 뚜렷한 호족세력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고려 태조 왕건의 공격에 의해 이 지역이 점령된 후 고려왕조의 직할지가 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 광진구 지역은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하였는데 이곳은 국가의 군사용 말을 기르고 훈련하는 마장이 넓게 자리잡고 있어 임금이 수시로 나와 군사훈련을 참관하기도 하였다.

 

 

서울에서의 첫 일출 아차산

아차산과 한강을 접한 훌륭한 지리적 특성으로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로 유명한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지고한 사랑을 간직한 아차산을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뺏고 뺏기는 각축장이었다. 광나루와 뚝섬나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오가던 교통의 요충지로 각 지방의 산물과 문화가 집산되어 번성하던 곳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넓은 구릉과 벌판에 펼쳐져 있는 말 목장이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조화를 이루는 멋진 풍경으로 낙천정과 화양정이 세워져 많은 귀족과 묵객들에게 인기 있는 지역이었다.

    

 

한강의 복합문화 공간 뚝섬유원지

구청 소재지는 자양동이다. 본래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의 인창방(仁昌坊)과 남부의 두모방(豆毛坊)에 속했던 곳으로, 원래 경성부에 속했던 지역으로 1936년 동부 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43년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뉘었다. 이후 고양군의 뚝도면과 광주군의 4개 면지역이 성동구에 편입되었으며, 1975년 한강이남지역이 강남구로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행정구역개편으로 자양동·화양동·모진동·군자동·능동·중곡동·구의동·광장동 등이 광진구로 분리·신설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성부를 축소시키면서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纛島面) 편입

1949년 서울특별시의 확장에 따라 성동구에 편입

1995년 성동구에서 분구

 

남쪽에 한강이 흐르고, 동쪽에 아차산(해발고도 287m)과 용마봉(해발고도 348m)이 솟아 있다. 동쪽과 남쪽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동구·송파구·강남구와 접하고, 서쪽은 성동구·동대문구, 북쪽은 중랑구·경기도 구리시와 닿아 있다.

 

 

삶의 이야기와 향기가 배어 있는 자양·중곡·노룬산 전통시장

자연녹지 지역은 31.4%를 차지하고 있는데 용마봉(348m)을 정점으로 하는 아차산 산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100m 이하의 저지대를 이룬다. 서부 경계의 중랑천과 청계천이 흘러와 합류해 다시 한강 본류에 유입하면서 이룩한 범람원에 해당되는 저지이다. 해발 50m 이상의 지역이 겨우 20%밖에 안 되는 평탄한 충적평지이므로, 시가지 발달과 교통발달에 유리한 지형조건을 가지고 있다. 구의 북동부에 용마봉(348m)·아차산(316m) 등이 솟아 있으며, 이곳에서 남동부지역으로 가면서 지세가 낮고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 광나루와 뚝섬나루가 있던 곳으로 중앙선 개통과 청평댐 건설 전까지는 서울 동부지역의 주요하항으로 이용되었다.

 

 

벚꽃과 단풍이 철마다 펼쳐지는 워커힐길

한강의 범람지역이던 성수동·자양동 일대의 뚝섬은 제방이 축조되면서 근교농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1970년대초부터 신흥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현재는 주택과 상업시설, 공장들이 혼재되어 있다. 중곡동·광장동·능동에는 비교적 규모가 크고 쾌적한 고급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옛 광나루와 연결된 다리 광나루 리버뷰8번가

광진구의 한강변에는 영동대교·청담대교·잠실대교·잠실철교·올림픽대교·천호대교·광진교 등이 놓여져 있어 강남지역과 강북지역을 연결하는 도심의 관문이 되고 있다. 천호대로·동일로·강변대로·용마산길·아차산길 등의 대로가 나 있어 강남과 강북간의 교통소통이 원활해 새로운 교통의 요지로 각광받고 있다. 건국대학교·세종대학교가 있는 화양동 일대에는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했다. 아차산성·광진나루·어린이대공원·뚝섬유원지 등이 있다.

 

 

호수와 젊음의 열기로 가득한 건대앞 문화의 거리

오늘날에도 서울의 한강 상류에 접한 청정지역으로 아차산 생태공원과 서울어린이대공원, 세종대학교, 건국대학교, 뚝섬한강시민공원으로 이어지는 풍부한 녹지대를 형성하고 있어 쾌적한 환경을 자랑하며, 워커힐, 테크노마트, 리틀엔젤스예술회관 등 문화 관광자원이 풍부하게 산재하고 있다.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사랑이 얽힌 아차산 !!

한강과 함께 오랜 숨결로 광진의 대지에 숨을 불어 넣어주고 광진과 함께 살아온 산이 바로 아차산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치열한 다툼이 있던 장소로서, 아차산성이 있었고, 고려때에는 강호의 이상향으로서 멋진 강변의 풍경을 가져 여기에 쌍수정(雙樹亭)을 세워 광나루 강촌을 오르내리며 농로·어옹들과 인사를 나누고 시심(詩心)을 돋울 수 있어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던 곳이다.

 

또한 불도를 닦기 위한 도량(道場)으로 은석사(銀石寺범굴사(梵窟寺영화사(永華寺)가 있었으며 강나루 쪽으로는 백중사(伯仲寺)가 있었다. 아차산 자락인 용당산에는 양진사(楊津祠)가 있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 뱃길과 어촌의 안녕을 빌기도 하였다.

 

지금은 많은 이들이 산책과 운동을 겸해 찾는 시민공원으로서 이용되고 있다. 특히 조선 중기까지도 이 일대는 목장으로만 개발되었을 뿐 인가가 드물고 수풀이 무성 하였다. 이 시절에는 아차산, 용마산 일대에 호랑이, 늑대 같은 많은 야생동물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사냥을 할 때 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 아차산 앞쪽으로 자리잡고 있던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아차산을 바라보던 광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아서 많은 이들이 그 광경을 시로 읊기도 하였 다. 그러던 것이 근현대 이후에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이곳까지 그 영향이 확대되자 아차산 기슭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대까지도 한강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로 존재하였던 아차산 자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아차산이 갖고 있는 매력과 워커힐 호텔이 지어지면서 점차 이 일대에는 고급주택가가 형성되어 주거환경이 각 시기마다 나름대로 변해왔던 것이다.

 

한달음에 아차산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양주(양주)일대의 광경과 망우동을 중심으로 하 는 지역, 강남의 너른 벌판, 성남과 광주에 걸쳐있는 남한산이 시야에 잡히며, 가까이로는 도도히 흐르는 한강이 길게 누운 용처럼 희미한 안개 속에서 있다. 이렇게 정상의 시원함과, 막힘이 없이 탁 트여 보이는 사방의 정경을 그리 힘들 지 않게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공원으로서의 아차산의 매력이 있는 것이다. 아차산 일대의 수목은 또한 지금은 주택개발로 인해 많이 없어 졌지만 광진구의 녹지로서 또는 도시의 일상생활에 지친 이들이 찾는 쉼터를 만들어주고 있다. 더구나 곳곳에서 나오는 약수는 숨 가쁘게 오르던 이들에게 달콤함을 선사해 주기도 한다.

 

남한에 있는 보기드문 고구려 유적지인 아차산 보루성과 고구려와 대치하던 한성 백제의 풍납 토성, 몽촌토성을 연계하는 역사 문화형 탐방로로서 연계노선을 통하여 몽촌토성과 남한산성을 연결하는 토성산성어울길 노선과도 연계된다.

 

아차산 문화생태 탐방로 (아차산 고구려 역사길, 아차산, 광나루 일대 )

아차산성 (阿且山城) 사적 제234

아차산 일대 보루군 사적 제455

홍련봉 제1·2보루 사적 제455

용마산 제2보루 사적 제455

아차산 제4보루 사적 제455

아차산 고분군

아차산 목장성

아차산고구려 역사문화홍보관

    

 

동제로 마을의 안녕을 빌다

이러한 치성당과 관련된 기이하고도 신묘한 이야기가 있는데 최근의 일들이라서 더욱 신기함을 느끼게 한다. 먼저 약 100년 전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지내는 제사인 춘제와 추제에 비용이 많이든다는 마을 사람들의 의논이 있어 한 때 봄 제사인 춘제를 폐지했더니 제관인 영자(靈者)의 꿈 속에 노인이 나타나 제사 폐지에 대해 준엄한 호령을 하고 마을의 재앙을 예시하였다 한다. 이에 불안을 느낀 영자가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꿈 속에서 나타난 노인이 한 얘기를 들려주자 다시 봄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마을은 곧 평안해졌다고 전해 온다.

 

치성당에 얽힌 또 하나의 이야기는 약 20여년 전의 이야기인데 원래 치성당이 있던 곳은 마을 공유지로 약 500평 정도가 되었었다. 1977년 마을 사람들이 그 일부인 100평을 서울시에 희사하여 그 이듬해 이곳에 동청사가 건립되었는데 치성당의 남쪽으로 난 문이 동청사의 건립과 함께 폐쇄되자 동네에 재난이 잇따랐다. 이에 다시 동으로 문을 내고 치성을 드렸더니 재난이 그쳤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한폭의 산수화속에 나타난 광나루

 

 

 

 

 

광진의 용재(산수화)

삼국사기(三國史記)잡지 제사조를 보면 명산대천에 제사를 올리는 중사(中祀)가 있는데 이 중 양진사와 관련되는 것이 사독(四瀆)이다. 원래 사독은 중국에서는 네 개의 큰 강을 가르키는데 양자강(揚子江), 황하(黃河), 회수(淮水), 제수(濟水)가 그것이다. 신라에서도 사독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있는 큰 하천을 가리킨다. 동쪽으로는 토지하(吐只河)가 있는데 지금의 영일군 흥해면이고, 남쪽은 황산하(黃山河)로 지금의 양산지역에 있으며 서로는 웅천하(熊川河)가 있는데 지금의 공주이다.

 

또한 북으로는 한산하(漢山河)가 있는데 지금의 한강이 이에 해당된다. 따라서 양진사는 신라 때에 용에게 제사지내는 제룡단(祭龍壇)이 있던 곳으로서 원래 독단(瀆壇)터가 있었다. 이를 볼 때 신라가 한강유역을 정복하고 북독에 제룡단을 설치하여 한강에 용신제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이 곳은 광장동 용당산(龍堂山) 위에 있으며 양진, 곧 광나루의 위가 되므로 용왕제를 지내 광나루를 통해 오가는 뱃길의 안전함과 용왕의 진노를 사지 않도록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바쳤던 것이다. 그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음력 2월과 음력 8월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축문을 읽을 때 왕의 성과 이름을 일컫는다.

 

여기에 연주되는 음악은 없으며, 폐백과 지방의 토산물로 흑색이 나는 것을 쓴다. 그리고 끝이 나면 축문과 폐백을 물에 가라앉힌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양진사에서의 용신제는 광진교가 들어서고 이어 천호대교, 올림픽대교가 들어서면서 뱃나루의 중요성이 약화되면서 이제는 흔적만 남게 되었다.

 

 

광나루터에 내려놓은 왕좌

광나루, 즉 광진은 예전에는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은 나루라하여 양진(楊津)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강원도 일대에서 벌목하여 뗏목을 만들어 한강으로 내려보내는데 최종 도착지가 광나루였다. 또한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로 가는데 가장 빠른 나루이기도 하다.

 

잠실대교, 올림픽대교와 지금은 해체된 광진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한 척 나룻배에 의지해 건널 수 밖에 없는 넓은 강폭을 가진 곳이었다. 또한 아차산 기슭과 강안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다워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흥을 돋구던 곳이기도 하였다.

 

광나루는 한편으로는 세종대왕의 형으로서 세자의 지위를 벗어 던진 양녕대군이 그의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내침을 받아 광주로 가던 별리의 아픔이 쌓여진 장소이다. 태종과 장남인 양녕의 부자지정이 한강 푸른 물에 녹아져 흐른 것이다.

 

양녕대군은 태종 4(1404) 9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인 그는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라든가, 혹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하거나 풍류생활을 더 즐겼다.

 

이에 대해 태종이 여러차례 꾸지람을 하였지만 양녕대군은 마음을 고쳐 먹었다가도 잠시 후에 다시 향락에 빠져들었고, 당시의 엄격한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왕세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게 되었다. 그런데 아우 충녕대군의 인품과 독서, 그리고 학식과 군사에 대한 지식은 그를 뛰어 넘어 여러 신하들과 태종의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녕대군은 태종의 뜻을 거스리는 행동을 곧잘하여 그를 가르치던 사람들이 태종에게 문책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태종과 세자 양녕대군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자 태종 18(1418) 6, 황희(黃喜), 이직(李稷) 등이 반대하는 가운데 양녕대군은 폐위당하게 된다. 그리고 유정현(柳廷顯) 등 여러 신하들은 태종의 뜻대로 충녕을 새로이 세자로 정하는데 찬의를 표하였다.

 

 

 

 

태종은 이와 같은 결정이 이루어진 뒤에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모든 일은 미리 마련한대로 하나하나 절차를 밟아 이루어졌으나, 겉으로는 세상 사람의 비난이나 물의가 일지 않도록 극히 광명정대하게 또 정중하게 법도를 따랐다. 곧 원세자 양녕대군을 외방으로 내보내는 일이 추진되었다. 유정현 등과 같은 신하들은 춘천으로 추방하자고 하였다. 태종은 처음에 이를 응낙하였으나 곧 가까운 광주(廣州)로 바꾸어 나가게 하였다. 며칠 사이에 계속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 올라 강을 건널 수 없었으므로 강물이 줄어들 동안까지 사제(私第)에서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정현 등은 "서울에 머무는 일은 불가하옵니다." 하고 우겼다.

 

태종은 하는 수 없이 곧 광주로 길을 떠나게 하였다. 떠나는 양녕대군에게 비자(婢子) 열 세 사람과 노자(奴子) 몇 사람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또 그가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였던 여인도 데려가게 하였고, 그 외에 일상 쓰던 여러가지 가재(家材)도 다 가지고 가게 하였다. 다만 매와 활은 두고 가게 하였다. 태종은 모든 것을 양녕대군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도록 명령하였다. 양녕대군이 떠나는 날, 양녕대군은 동대문 밖까지 그를 수행하던 원윤(元胤)에게 "경은 무슨 일로 나를 따라 오는가?" 하고 물었다.

 

원 윤은, "호송하라는 분부이시옵니다." 하니, 양녕대군은 "앞으로는 이 땅을 두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고 광나루에서 배를 타며 눈물을 지었다. 작별할 때 원윤에게 말하길, "......죄가 큰데도 죽지 않은 것은 오직 나라님의 덕택이다.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런지...... 이처럼 불효하였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나랏님을 뵈옵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 하였다. 호송을 하던 원윤은 양녕대군의 일행 가운데 여자의 숫자가 나라에서 정해 준 인원보다도 많다고 하여 두 사람의 여자를 빼앗아 돌아왔다.

 

이 보고를 들은 태종은, " 그 두 여자도 다 양녕의 첩이다. 빼앗아 온 것은 경의 잘못이다." 하고, 곧 광나루로 되돌려 보내주도록 명하였다. 광주로 물러 나간 양녕대군에게 책이라고는 다만 논어(論語)와 대학(大學)만을 갖고서 읽게 하였다. 6월 그믐께, 태종은 양녕대군의 생활 형편과 그 행동거지를 살펴보도록 내관 최한(崔閑)을 광주로 보냈다. 광주에서 돌아온 최한은 양녕대군의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한적한 생활을 보고하였다.

 

태종이 처음 양녕대군을 떠나보낼 때, "너야 충녕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일생 편히 잘 지내게 될 것이다." 하며,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세종)에게 형제의 의를 저버리지 않도록 타일렀고, 그의 동생인 세종은 그를 극진히 위하여 다른 대신들의 비판과 간()하는 소리들을 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양녕대군의 눈물이 서려 있는 광나루는 지금은 흔적없고 다만 하나의 표석(標石)만이 이곳이 광나루였었다는 사실만을 증명해 주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도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쉐라톤 워커힐호텔 정문 쪽 아래 생도량이 만들어져 있는데 바로 이곳이 광나루 혹은 버드나무 나루이며, 강 건너로는 강동구의 암사동과 잠실이 보인다.

 

 

서거정 (1420(세종 21) ~ 1488(성종 19)의 은거와 풍류

날 저물게 광나루에 와서 말 세우고 배를 부른다./ 물은 푸른 벼랑 아래로 감돌고 흰 갈매기 앞을 지나누나/강가 갈밭에는 흰 눈이 날리고, 사당 앞 잣나무에 맑은 연기가 흔들린다./ 해질녘 배 위에 앉으니 시심(詩心)이 가볍게 떠오르누나...

 

절간이 어디인가 저 멀리 흰구름 속에 보인다./ 산 그림자 지는 곳에 객은 말을 타고 가고 가을소리 들려오는 곳에 중이 종을 두드린다./ 단풍숲은 붉기만 하고 강물은 푸르게도 흐른다./ 언덕 저 쪽에 촌가 조용하니 돌아갈 마음이 죽처럼 진하다.

 

광릉의 가을 물색이 장강에 잇달았는데 / 문에는 띠풀 가리우고 늙은 나무가 두 그루 서 있다. / 뱃사람 다투어가며 그물에 큰고기 들었다 자랑하고 / 마을 아이들 와서 항아리 가득 술 익었다고 알린다. / 강호만리(江湖萬里) 넓은 하늘에 아득히 새가 날아가고, / 울타리가 어스름에 개가 홀로 짖는다. / 흙 방바닥 등상(藤床)자리에 베개 기대고 누우니 / 한밤중 떠오르는 달이 창가로 비쳐 든다.

 

  

도참지리설을 반대한 문효공(文孝公) 어효첨일가의 무덤

 

 

 

 

권홍(權弘) 꿈에 나타난 자라(뚝섬의 비밀)

 

 

 

 

 

옛통신시설 (아차산봉수대자리)

 

 

 

 

 

동화세상의 메카 어린이대공원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유강원(裕康園, 순명효왕후 능) 터의 석물 일괄과 아차산성·아차산고구려보루군·낙천정지 등이 있으며, 화양동느티나무는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화양정(華陽亭)은 살곶이목장과 관련하여 세종 때 지어졌던 곳으로 많은 일화와 더불어 그 터가 보존되고 있다.

 

 

 

아차산성 - 사적 제234

상부암석불입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80

화양동느티나무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

아차산홍련봉보루유적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1

도정궁경원당 -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9

건국대학교 구 서북학회회관 - 등록문화재 제53

구의정수장 제1·2공장 - 등록문화재 제358

이병기시인의[아차산]

동국정운 (국보 제 142)

율곡선생남매분재기 (보물 제 477)

아차산성

아차산 일대 보루군

전고종익선관

전고종갓

전고종패옥

별전괴불 (중요민속문화재 제47)

동궁비원삼

전황후황원삼 (중요민속문화재 제49)

옥색명주장옷

청색수고사장옷

광화당원삼 (중요민속문화재 제52)

토황색명주저고리

황후적의

황후청석

수복칠보석류문 황갈단 당의

수복칠보석류보 상화문황갈단 당의

곤룡포부용문보

전왕비당의 (중요민속문화재 제103)

화양동 느티나무

순명비 유강원 석물

도정궁 경원당 (서울시 민속자료 제 9)

상부암 석불입상

구 서북학회 회관

구의정수장 제1,2공장

영화사

    

 

 

 

1코스

아차산생태공원-소나무숲-아차산길-낙타고개-친수계곡-아차산관리사무소-만남의광장

 

2코스

만남의 광장-소나무숲-낙타고개-고구려정-해맞이광장-아차산정상-대성암-낙타고개-친수계곡-만남의광장

 

3코스

만남의 광장-아차산관리사무소-신추계곡-고구려정-아차산 정산-용마산 정상-뻥튀기골입구

  

  

[1코스] 아차산 고구려 역사길(7.8km, 3시간 40)

광나루역아차산 입구(만남의 광장)홍련봉 1/2보루고구려정해맞이광장아차산1보루

아차산5보루아차산3보루아차산4보루아차산2보루대성암낙타고개아차산성

아차산생태공원,아차산고구려역사문화홍보관워커힐길워커힐 피자힐상부암석불입상

광나루터(광나루 낭만의 거리)광진교(리버뷰 8번가)한강자전거공원

 

[2코스] 토성산성 어울길 연계코스(5.5km, 3시간)

한강자전거공원풍납토성한강둔치길성내천입구몽촌토성(올림픽공원)

(토성산성 어울길과 연결남한산성)

 

 

 

 

 

 

 

 

법정동 9개동 기준, 행정동 기준은 16

자양(紫陽노유(老遊화양(華陽모진(毛陳군자(君子(중곡(中谷구의(九宜광장(廣壯)

   

광장동 · 구의제1동 · 구의제2동 · 구의제3동 · 군자동 · 능동 · 자양제1동 · 자양제2동 · 자양제3동 · 자양제4동 · 중곡제1동 · 중곡제2동 · 중곡제3동 · 중곡제4동 · 화양동

 

 

 

 

 

 

 

중곡동(中谷洞)

아차산 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동명의 유래는 위치가 능동과 면목동 중간에 있으므로, 간뎃말 또는 한자음으로 중곡리라 하였음.

 

능동(陵洞)

어린이 대공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비, 순명황후 민씨 유릉이 있었으므로 능말, 능리라 하였고, 마장의 안쪽에 있어 안말, 장안말, 또는 한자음으로 내리(內里), 장내리(場內里)라 하였음.

 

구의동(九宜洞)

아차산 기슭에서 한강변에 이르는 긴 지형으로 자연촌락 구정동(九井洞)자와 산의동(山宜洞)자를 따서 구의리라 하던 것이 구의동이 됨.

 

광장동(廣壯洞)

아차산 줄기 남쪽 한강변에 위치하며, 광나루는 강폭이 넓은 나루를 일컬으며 조선시대 자연촌락 광장리(일명 광나루)자와 장의동(壯義洞)자를 따서 광장동이 됨.

 

자양동(紫陽洞)

잠실대교 북쪽 좌우편 한강변에 위치하고 조선시대 국가에서 말 1,000 마리를 기르면 용마(龍馬)가 난다하여 자마(雌馬), 즉 암말을 길렀기 때문에 자마장이라 칭하였고 동명을 자마장리라 부르다가 자양동으로 전음(轉音).

 

노유동(老遊洞)

제방이 없을 때 잔디밭인 이 일대가 가을에 누렇게 변하여, 누런 잔디산이라 불리다가 누런산으로 다시 노룬산으로 전음됨. 풍류객이 늙어감을 서러워하지 않고 즐기는 곳이라 어느 때부터인가 노유산으로 전하여짐.

 

화양동(華陽洞)

조선시대 화양정이 세워져 있어서 유래. 일설에는 조선초 왕위를 빼앗긴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이곳에서 송씨 부인과 이별하면서 회행하기를 기원했다 하여 회행리라고 호칭했다는 설도 있으며 화양정을 회행정(回行亭)이라고도 했다.

 

모진동(毛陳洞)

건국대학교가 대부분을 점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전곳평의 양마장(養馬場)지역으로 가끔 방목된 말이 실족하여 건국대학교 정문근처 수렁에 빠져 죽으면 이곳 여인들이 말을 건져내어 그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하여 인근 주민들이 이 여인들을 모진여인이라 부르던 것이 모진동네로 바뀌었다는 유래로 모진동이라 부르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