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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컬처 톡’ 11 올 여름 한국영화는 공포와 분노의 바다

草霧 2013. 9. 11. 11:27

 

 

올 여름 한국영화는 공포와 분노의 바다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컬처 톡’ 11

 

하재근(문화평론가) | 2013.09.10

 

 

[서울톡톡] 올 8월에 한국영화는 사상 최초로 월 2,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8월 중순경엔 한국영화 점유율이 무려 90퍼센트까지 치솟기도 했다. 흥행순위 1위부터 4위까지가 모두 한국영화였기 때문이다. 여름시즌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이렇게 맥을 못 추는 건 처음이다. 과거 <서편제>가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킬 당시 한국영화 연간 점유율은 10퍼센트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서편제>를 빼면 5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랬던 한국영화가 이젠 할리우드 영화를 압도하는 데에 이른 것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영화의 완성도가 과거보다 많이 향상됐다. 옛날엔 할리우드에 비해 우리 영화들이 현저히 조잡했기 때문에 거부감이 많았지만, 지금은 무난하게 볼 정도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졌다. 어느 정도 완성도의 기반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제 중요한 건 스토리다. 얼마나 관객의 마음에 공감을 일으키는 이야기를 하느냐가 영화 흥행의 핵심이 됐다. 이런 스토리의 차원에선 전 지구적 스토리를 담는 할리우드 영화보다 한국적 설정을 담는 한국영화가 유리하다. 적어도 한국시장에서만큼은 말이다.

 

올 여름에 이례적인 흥행 돌풍을 일으킨 영화는 <숨바꼭질>이다. 역대 스릴러 영화 흥행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우며 500만 관객까지 넘어섰다. 과거에 한국영화계에선 스릴러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랬던 스릴러 영화가 흥행돌풍을 일으키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

 

<숨바꼭질>은 우리 집에 괴한이 나타나, 나의 가족을 해치고 집을 차지한다는 설정을 다루고 있다. 요즘 한국사회에선 흉악범죄에 대한 공포심이 극에 달했다.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집, 특히 아파트에 대한 집착도 최고조에 달했다. 이 영화는 흉악범죄로 내 집을 잃는다는 설정을 통해, 한국인의 가장 내밀한 불안감을 건드렸다.

 

 

바로 이렇게 한국인의 정서를 정확히 표현한 것이 올 여름 한국영화 흥행돌풍의 이유라고 하겠다. <더 테러 라이브>는 테러로 인해 내 삶의 안전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공포를 그렸다. <감기>는 전염병에 대한 공포다. 2000년대 들어 사스, 조류독감, 광우병, 그리고 방사능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은 건강 관련 이슈에 아주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여왔다. 그 만큼 건강을 위협하는 외부 요소에 대한 공포심이 크다는 이야긴데, <감기>는 바로 그 지점을 포착했다.

 

이렇게 보면 올 여름에 흥행한 한국영화들의 대부분이 공포를 테마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8월에 진짜 공포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다. 귀신영화가 사라졌다는 말이다. 귀신 없는 공포의 전성시대. 이건 이제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도구로 사람을 해치는 괴한, 거대한 재해, 전염병 등이 귀신보다 훨씬 무섭다. 귀신이 초자연적인 힘으로 사람을 해치는 장면에서 관객석은 조용하지만, 사람이 도구로 사람을 해치는 장면에선 비명이 터진다. 특히 여성관객일 때 이런 경향이 강해진다. 그만큼 범죄에 대한 공포가 크다.

 

올 여름 한국영화엔 분노와 불신도 표현되어 있다. <설국열차>는 하위 99퍼센트가 1퍼센트를 향해 반란을 일으킨다는 내용이다. <숨바꼭질>은 집 없는 사람이 고급 아파트 가진 사람의 집을 뺏으려 한다는 내용이다. <더 테러 라이브>와 <감기>엔 시민의 안전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담겨있다.

 

종합하면 올 여름에 기록적인 수준으로 관객을 극장에 끌어 모은 한국영화들이 공포, 불안, 분노, 불신을 그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시대가 그만큼 불안한 시대라는 것을 말해준다. 언제 어떤 사건으로 내 삶의 안전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 누군가가 날 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아파트 한 채 사기 힘들다는 분노, 그리고 이런 세상에 대한 불신. 할리우드의 화려한 액션은 이런 한국인의 내밀한 마음을 담아내지 못한다. 한국영화는 시대를 포착했고, 그래서 올 여름에 성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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