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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草霧 2013. 9. 6. 17:08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국제법이나, 조약, 헌법, 국내법등은 지키라고 있는것임.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 따라 한국 영토에서 일본의 주권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일본 강점기에 설립된 일본잔재들(서울대나, 전남대.경북대.부산대 해당부분, 서울시립대)은 한국 영토에서 축출하고 그 추종자들(일본 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 친일파 김성수의 고려대)도 이에 상당하는 조치를 해야만이 을사조약무효, 일본항복에 따른 해방(독립)한국의 정신이 제대로 구현되는 것입니다. 

 

 

* 제목: 일본 강점기인 1905년에서 1945년 8.15 전까지 한국영토에 세워진 일본의 국립대나, 일본 관립전문학교들(서울대 전신인 경성제대등).

 

 

1]. 일본 강점기인 1905년에서 1945년 8.15 전까지 한국영토에 세워진 일본의 국립대나, 일본 관립전문학교들. 또는 다른 형태의 교육기관. 

 

1. 서울대

 

 1924년 일본 정부가 서울(당시 京城府)에 설립한 관립 종합대학.

 

1920년 6월 1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재단법인 조선교육회를 발기하고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여 종합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자, 이에 일제(日帝)가 한국인의 고등교육기관을 봉쇄할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이 학교에는 조선사람의 독립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정치·경제·이공 등의 학부는 설치되지 않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문학부·의학부만 설치하였으며 1941년에 이공학부를 설치하였다.

또한 교수와 학생의 구성에서도 차별을 받아 1926년 개교 당시 조선인 교수는 전체 57명 중 5명, 학생은 150명 중 47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1941년에는 교수 140명 중 1명, 학생 611명 중 216명만이 조선사람이었다.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관제가 공포된 후 예과(豫科)가 먼저 개설되고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설립되면서 초대총장으로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가 취임하였다.

1926년 2월에 법문학부 교사가 준공되어 학부가 개강하였으며, 같은 해 5월 청량리에 예과교사, 1927년에 의학부 교사가 준공되었다. 1928년에는 법문학부 본관을 준공하고 조선총독부 병원을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이관하였다.

1929년 4월 처음으로 법문학부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34년에는 학부의 수업연한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였으며, 1938년 이공학부를 증설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경성대학으로 바뀌었다가,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이 공포되어 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경제전문학교·경성치과전문학교·경성이학전문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경성사범학교·경성여자사범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수원농림전문학교 등 9개 전문학교와 통합되어 지금의 국립 서울대학교로 바뀌었다.

 

출처:두산백과 

 

2. 전남대. 전남대 홈페이지 설명. 일본강점기에 세워진 관립학교 후신들이 일본강점기 부분을 백과사전등에서 언급하지 않는것 같아, 이 부분은 영구보존함.

 

190906.10광주농업학교 설립
192006목포상업학교 설립
194403.31광주의학전문학교 설립
194709.26문교부 중등교원양성소 부설
195005.05대학원(의학과)인가
05.27도립 광주초급농과대학, 도립 목포초급상과대학 설립인가
195108대성의숙(사립대성대학) 설립인가
09.16국립 전남대학교 건립 기성회 결성
국립 전남대학교 건립 기성회장에 전라남도지사 박철수씨 피선
도민에게 본교 건설비로 634,760,000원을 할당
10.06본교 설립 인가
11.04귀속재산인 전남도 제사주식회사의 26,637주 및 공장일체를 634,760,000원에 매수
12.01본교 임시사무소를 광주 의과대학에 설치하고 책임자로 이병위 교수 취임
195201.01국립 전남대학교(5개 대학을 종합)로 발족

- 공과대학(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섬유공학과,전기공학과)을 신설

- 도립 광주농과대학을 농과대학(농학과, 임학과,축산학과)으로 개편 이관

- 사립 대성대학을 문리과대학(문학부: 국문학과, 영문학과, 철학과, 사학과,

- 정치학과, 법학과, 이학부: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으로 개편 이관

- 도립 목포상과대학을 상과대학(상학과, 경제학과,무역학과)으로 개편 이관

* 필자의견 1). 광주 농업학교나 목포 상업학교는 관립전문학교 수준은 아님. 전남대는 광주의학 전문학교 부분이 일본 강점기와 가장 강하게 관련되었으며, 나중에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인 서울대의 추종세력이 전남대.경북대.부산대등이 된것은 부정할 수 없음. 광주 초급 농과대학이나 목포 초급 상과대학으로 변경되어 전남대로 이어져서 전남대 홈페이지에 등재된 것 같음.

 

 

3. 경북대에 대한 두산 백과의 설명.

 

1946년 9월 대구사범대학(1926년 대구사범학교로 설립)·대구의과대학(1932년 대구의학전문학교로 설립)·대구농과대학(1944년 대구농업전문학교로 설립)이 국립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51년 10월 대구사범대학·대구의과대학·대구농과대학을 모체로 국립 경북대학교로 개편하였다. 이때 사범대학·의과대학·농과대학과 함께 문리과대학·법정대학을 신설하여 5개 단과대학에 24개 학과를 설치하였다. 2008년 상주대학교와 통합하였다

 

* 필자의견 2). 대구 사범학교는 그 당시의 전문학교는 아니고 현재의 고등학교 정도임. 중요한것은 일본 강점기에 대구의학전문학교나 대구 농업전문학교가 설립되어 이 부분이 나중에 경북대로 이어진것.    

 

 

4. 부산대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

 

1946년 5월 부산수산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인문학부와 수산학부를 둔 국립 부산대학으로 설립되었다. 교훈은 진리·자유·봉사이다. 1946년 9월 수산학부는 부산수산대학으로 분리되었고, 1953년 문리과·법과·상과·공과·의과·약학 등 6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 필자 의견 3). 부산수산전문학교는 두산백과에 의하면 일본 강점기인 1941년에 부산 고등수산학교로 설립되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1946년 수산학부를 둔 부산대학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부산수산대학교는 지금은 부경대학교로 변했습니다.   

 

다음은 두산백과 내용입니다.

 

부산수산대학교는 1941년 관립 부산고등수산학교로 설립되어 1944년 부산수산전문학교로 변경하였다. 1946년 국립 부산수산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1990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5. 서울시립대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

 

1918년 5월 1일 개교한 경성공립농업학교를 모체로 하여 1950년 6월 서울농업초급대학으로 설립하였다. 교훈은 진리·창조·봉사이다. 1956년 4년제 서울농업대학으로 승격하였고, 1973년 농업대학에서 산업대학으로 개편하여 서울산업대학으로 개칭하였다.

 

* 필자의견 4). 서울시립대도 일본 강점기에 설립되어, 1956년에 서울 농업대학으로 승격함.

 

6. 동국대.

 

역사에서 잘 아시다시피, 한국은 여자나 불교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을 두지 않았으며, 조선시대 불교 승려는 천민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 신도 밑의 민중신앙인 민중불교인들이 한국의 천민신분 승려들과 연계되어 일본 불교까지 보급시킨 것 같습니다.  

 

동국대의 전신은 1906년 설립된 명진학교라고 합니다. 그 명진학교는 을사조약 이후 일본 불교에 영향받은 불교연구회에서 설립한 불교학교입니다.

 

불교연구회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영향을 받아 정토사상을 종지(宗旨)로 1906년 2월 홍월초(洪月初)·이보담(李寶潭) 등이 창립하였다. 일본 정토종은 13세기 부처의 본원을 믿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기만 하면 즉시 정토에 왕생하여 불퇴전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사상으로, 초기 불교의 이념에서는 벗어나 있으나 15세기 일본 불교의 유력한 종파였다.

1904년(광무 8) 전국의 사찰과 승려들을 관리하던 궁내부의 管理署가 폐지되자, 불교 중흥과 교리 연구를 목적으로 서울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에 불교연구회 본부를 두고 지방의 각 사찰에 지부를 두었다. 불교연구와 함께 새로운 불교 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하고 전국 사찰의 젊은 승려들을 모아 학문과 불도를 가르쳤다

 

2]. 일본강점기인 1905~1945.8.15 전까지 한국 영토에 설립되어, 해방한국의 대학과 불협화음을 내는 대학교들.   

 

1. 연세대. 출처는 두산백과임.

 

.........

한편, 연희대학교는 1915년 미국 북장로교·재한 남북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선교부연합위원회에서 서울 YMCA내 조선기독교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으로 개교하였다. 1917년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고, 1923년 신교육령에 따라 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변경하였다. 1944년 대학의 재산을 적산이라는 명목으로 몰수한 총독부가 교명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고쳤으나, 1945년 8.15광복이후 연희전문학교로 복귀하고 1946년 연희대학교로 승격하였다.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새롭게 발족하여 초대총장에 백낙준(白樂濬)이 취임하였으며, 1977년 원주에 제2캠퍼스를 설립하였다.

 

다음은 두산백과에 나오는 세브란스 의학교 부분입니다.

 

1885년 궁정어의(宮廷御醫)였던 H.N.앨런이 고종의 명으로 설립한 제중원(濟衆院:초기의 이름은 광혜원을 모체로 하여 1899년 한국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로 설립되었다. 교훈은 진리, 자유이다.

1904년 L.H.세브란스에게 기증받은 기부금으로 근대식 세브란스병원을 준공하고 의학교육기관으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 191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17년 전문학교 설립인가를 얻어 1922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42년 일제의 강요로 교명을 아사히의학전문학교로 변경하였으나 1945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복귀하였으며, 1947년 세브란스의과대학(6년제)으로 개편하였다.

  

* 필자의견 5). 연세대는 일본 강점기에 세워진 연희전문과 구한말에 세워진 제중원의학교(1909년 세브란스 의학교가 됨)가 1957년에 연세대로 통합된 대학입니다. 세브란스 의학교는 그렇지 않은데 연희대학교(연희전문에서 이어짐)가 한국인의 대학과 불협화음을 내고 있습니다. 연세대 전체가 불협화음 을 내는 대학으로 변했습니다.  

 

2. 고려대. 출처는 두산백과임.

 

1905년 이용익(李容翊)이 교육구국의 이념하에 설립한 보성전문학교로 개교하였다. 이는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당시 2년제 법률학·이재학(理財學)의 2개 전문과를 두었다가 1907년 법률학과와 이재학과를 법학과·경제학과로 고치고 3년제로 연장하였다. 교훈은 자유·정의·진리이다.

1915년 전문학교 시행규칙에 따라 교명을 보성법률상업학교로 하였다가 1921년 재단법인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여 보성전문학교로 다시 개명하였고, 1922년 조선교육령에 따라 전문학교로 정식 인가되었다.

1932년 총독부의 간섭과 재단의 경영부진으로 재정난에 빠진 학교를 김성수(金性洙)가 인수하여 중앙학원으로 재단을 확립하였다. 1934년 교사를 현 위치로 이전하고, 1944년 일제의 강요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보성전문학교로 환원하였다.

1946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교명을 고려대학교로 하고, 정법·상경·문과의 3개 단과대학을 두었다

* 필자의견 6). 고려대는 일본강점기에는 전문학교였었습니다. 평민출신 이용익이 설립한 전문학교였는데 친일파로 규정된 김성수가 인수하여 해방후에 대학교로 승격시키고나서 친일파 신문인 조선일보(방응모).동아일보(김성수, 고려대는 동아일보처럼 김성수가 소유하거나 운영함)에서 일본 강점기 잔재인 서울대 뒤에 붙어서 서울대.연세대.고려대(또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의 일본 강점기 카르텔을 형성해 온 대학입니다.     

* 필자의견 7). 위에서 사례로 든 대학들외에 일본 강점기에 뿌리를 두고 전문학교나 일반 교육기관에서 해방후에 대학으로 변한 대학들은 다수 있습니다. 서울대 뒤에 연세대.고려대등으로 일본 강점기 잔재의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여 을사조약이후 1945년까지의 일본 강점기 잔재로 지금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들 대학의 추종세력이 된 대학들이나 세력들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3]. 덧붙이는 말.

1. 을사조약은 무효입니다. 그리고 한일병합도 당연 무효입니다. 그런데 1910년 강제(강제면 무효임) 한일합병을 실시하고, 대한제국(조선) 최고대학 성균관의 최고대학으로서의 교육기능을 폐지시켜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 해방한국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을사조약 이후 성균관 출신 의병장들이 의병활동을 하고 그래서 그런건지, 아니면 한국인의 혼을 그 정점에서부터 송두리째 뽑아버리려고 교육기능을 폐지시킨건지는 잘 모르나, 이런게 모두 일본의 잘못입니다.      

 

한국 민족문화대백과는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이어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병탄된 지 1년 만에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강요당하여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면서, 최고학부로서의 교육기능을 상실당하고 석전향사(釋奠享祀)와 재산관리를 주임무로 하는 기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을사조약 당시 조선의 국제사회에 대한 호소노력으로 볼때 국내법상 을사조약은 분명 무효입니다. 국제법상으로는 그 당시 프랑스 법학자 프란시스 레이교수의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논문때문에 원천적으로 무효입니다. 또한 UN국제법위원회에서 을사조약이 무효라고 UN총회에 보고하여 국제관습법상 을사조약은 분명 무효입니다. 일본이 이에 반대하여 UN국제법 위원회의 의견을 무효로 하려면, UN에 군대등을 파견하여 그 법리적 의견을 철회하라고 압력을 넣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일본은 UN에 대한 항거조직이 되어 UN을 탈퇴하고, UN을 상대로 싸워야 합니다. 패전국에 전쟁범죄국가에, UN적국인 일본은 안보리 상임이사국도 아니라 그럴 능력도 자격도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UN의 의견대로 을사조약은 무효임을 인정하고 따라야 합니다.     

2. 2차대전때 일본이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항복하였기 때문, 을사조약과 한일합병 이후 1924년 한국에 강제로 설립된 경성제국대의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아무런 주권이 없고 한국 영토에서 축출해야 할 대상임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해방이후 미군정때 경성제대와 일본 관립전문학교를 주축으로 국립 서울대로 개편하려고 할때 한국인의 자주정부가 출현하기 전이라, 시기상조라하여 전국적인 반대를 당한 대학이 서울대입니다. 미군정은 한국인을 해방민족으로 하고, 점령군 형식으로 통치를 했는데  이 때의 점령대상은 일본 총독부,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들(그 후신이 서울대등), 일본군, 일본 헌병, 일본 경찰, 관변억압기구, 일본 신도 및 총독부 포교종교 단체들입니다. 국립 서울대는 한국인의 국립 서울대가 아니었고, 일본의 국립대처럼 점령대상 국립서울대며 이때는 한국인의 자주정부가 출현하기 전이고 한국인은 해방민족의 주권만 있었습니다. 미군정이나 소련군정은 그렇게 보고 일본 총독부나 일본 교육기구등 불법 통치기구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점령형태를 취한것 같음. 그렇게 보았다 해도 한국인들은 해방민족의 주권을 인정받았으며 해방 한국인의 대학은 성균관대고, 고종이 설립한 휘문고나 배재고등이었고, 양반을 위주로 한 고등학교 성격의 향교나 서원의 제사기능도 해방한국인의 주권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조선왕조나 국교였던 유교, 대한민국 임시정부, 보통 한국인등도 해방한국인에 해당됩니다(해방당시에는 미소군정이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측면을 간과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인의 자주정부가 출현하기 전이라 국립서울대(점령대상 일본 강점기 잔재에 불과하며 한국인의 자주정부가 출현하면 다시 포츠담선언과 카이로선언에 따라 주권을 없게 만들고, 한국영토에서 추방해야 할 대상)설치를 한국인들이 반대한것입니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이념보다 한국인의 자주정부가 출현하기 전이고, 시기상조며, 식민지교육이라 하여 반대한것(서울대의 전신 경성제대등이 애초부터 한일병합 이후에 한국인의 주권을 말살하고 들어온 성격임을 상기할것).   

 

3.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 따라, 한국영토에 아무 주권도 없고, 한국 영토에서 축출해야 할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이  입학시험 날짜조작을 어떻게 해놓았는지 몰라도, 주권없는 점령대상 패전국 잔재가 전기니 후기니 이런 용어를 만들어 한국에 불법으로 퍼뜨리는것도 인정해 줄 수 없습니다.

 

4. 을사조약이 무효고, 2차대전때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일본이 항복했으니, 한국은 다시 대한제국(조선)의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여, 조선왕실을 어느정도 복구시키고(현재도 황사손이 각종 국가제사를 치르고는 있음), 最古(最高)대학 성균관에서 이어진 성균관대학교를 국립대로 복구시켜 명실상부한 最古(最高)대학으로 복구시키고, 조선의 國敎였던 유교를 중심으로 하려는 조직과 제도를 도입해야 할것입니다. 京城帝大와 官立전문학교 후신인 서울대등(관립전문학교 후신이 전남대,경북대,부산대 해당부분,서울시립대등임)의 교육기능을 폐지하여 연구시설이나 기타 용도로 전환하고, 서울대 추종세력이 되어 연세대.고려대로 일본 강점기 카르텔을 만든  친일파 신문인 조선일보(방응모가 사주).동아일보(김성수가 사주)에 대한 사회적 반대운동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친일부왜배 잔재 동아.조선의 서울대중심(그 추종세력이 연세대.고려대가 됨) 언론기사가 해방 한국인의 권리를 잠식시키고 부정해왔으며 다른 대중언론으로도 이러한 친일부왜배 사고방식을 확산시켜 왔었습니다. 동아.조선 구독부수 줄이기운동은 문성근 전 시민대표가 주창한 운동인데, 호응이 상당했었습니다.    

 

5. 뻔히 아는 일본 강점기 잔재기때문 100번 서울대, 국시 110브 일본 연세라고 서강대출신 양희은씨가 발언한것 같은데, 100번 서울대로 살아가려는 어떤 징조도 없었던 게 서울대입니다.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 다음으로는 해방후의 비신분제 평민대학들(독립투사 개입)인 국민대나 인하대 및 해방후에 설립된 초급대형식의 육사(조선경비 사관학교 후신).경희대(신흥 초급대 후신), 독립투사 지명도가 없었고 늦게 훈장받은 단국대,영남대 설립자 뒤의 한국학교. 

 

연세대는 이런 대학들 뒤가 맞을 것입니다. 서울대등 일본 강점기 잔재는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고 한국 영토에서 축출해야 할 대상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6. 어찌되었든 을사조약이 무효고, 2차대전때 일본이 항복하였기때문, 대한제국(조선) 最古(最高)대학은 성균관에서 이어진 성균관대학교임은 분명합니다. 성균관대가 제대로 주권을 회복해야 이를 토대로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의 Royal대학 체제도 정착되는 것이고, 해방후에 독립투사들이 설립한 비신분제의 대학등도 인정받게 되는것입니다.     

 

 

* 이 글은 비영리적이며, 일본강점기로 인한 제반 모순과 피해.왜곡들을 타파하기 위해 공익적인 성격에서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으니, 이 점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