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이 세상을 훔쳐본다./세상훔치기

홍릉(洪陵)... 고종(高宗)의 능

草霧 2013. 9. 5.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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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洪陵)... 고종(高宗)의 능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재위:1863~1907.. 출생:1852~1919)와 그의 부인 명성황후(1851~1895)민씨가 묻힌 곳이다.  홍릉은 왕릉이 아니라 조선 최초의 황제릉(皇帝陵)이다. 따라서 기왕의 조선 왕릉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高宗의 즉위

 

 

 

 

 

 

 

 

 

고종은 철종4년(1852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高宗이 익종(翼宗 .. 23대 순조의 세자이며, 헌종의 아버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한 것은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순종,헌종,철종의 3대에 걸쳐 세도정치를 한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철종의 후사가 없자 뒤를 이을 국왕의 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지극히 경계하였다. 이때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화(禍)를 피하여 시정(市井)무뢰한과 어울리고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면서 위험을 피하던 이하응은 조성하(趙成夏)를 통하여 궁중 최고의 어른인 趙大妃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哲宗이 죽자 趙大妃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 아들(命福 ..고종)으로 하여금 익종(翼宗)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여 그를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하여 국왕에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고, 흥선군(興宣君)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대섭하게 하였다. 고종은 즉위 후인 1866년 9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곧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이 長成하여 친정(親政)의 의욕을 가지고 차차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 뜻을 헤아린 명성황후와 老大臣들은 유림(儒林)들을 앞세워 대원군의 하야(下野)공세를 피게 되었다.1873년 마침내 서무친재(庶務親裁)의 命을 내려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성명(成命)을 환수하고, 高宗은 통치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환구단    園丘壇  .. 고종 황제즉위식이 거행되었다. 

 

 

 

 

 

 

 

 

 

명칭의 漢字 표기와 독음(讀音)을 환구단(園丘壇)과 원구단(園丘壇 또는 圓丘壇)으로 혼용하던 것을 2005년 문화재청에서 한자 표기는 "고종실록"에 기록된 "園丘壇"으로, 한글 표기는 高宗이 제사를 지낸 1897년 당시 "독립신문"의 표기에 따라 "환구단"으로 정하였다.

 

 

 

 

 

 

 

 

 

 

 

 

 

 

 

 

이 환구단은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으며, 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삼국시대부터 농업의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祈雨祭)르르 국가적으로 거행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제도화된 환구제(園丘祭)는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재위 981~997)때부터라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제천의례를 억제함으로써 世祖 때 환구제가 폐지되었다가 조선을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하고, 高宗이 황제로 즉위하여 천자(天子)가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지금의 환구단은 1897년(고종 34)에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단(壇)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이다. 그 후 단지 내에는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1899년에 축조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봉안(奉安)하였으며,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석고(石鼓)의 몸체에 부각된 용(龍)무늬는 조선 말기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처음 조성된 단지는 1913년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고, 이듬해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축소되었으며, 지금의 황궁우(皇穹宇)는 석고(石鼓)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石造 대문만이 보존되어 조선호텔 경내에 남아있다. 

 

 

 

 

 

 

 

 

 

 

 

 

 

 

 

 

 

 

                                                환구단의 옛날 모습

 

 

 

 

 

 

 

 

 

 

 

 

 

 

 

 

 

 

 

                                                                         홍릉 입구

 

 

 

  

 

 

 

고종은 재위기간 동안 청나라,일본,러시아의 각축 속에서 일련의 개화정책을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제(軍制)를 개혁하고, 젊은 개화파로 구성된 신사유람단(神士遊覽團)과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학습케 하였으며... 1897년에는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세계에 알리고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는 등 근대 자주국가를 이루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907년  일본에의 합병을 의미하는 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세계에 알리고자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실패하고 ...이를 빌미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매국노들과 일제(日帝)에 의하여,  그 해 1907년 7월 20일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12년 후 1월21일 덕수궁에서 승하한다.

 

 

 

 

 

 

 

 

 

 

 

 

 

                                    함녕전    咸寧殿   ... 보물 제82호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황제의 침전(寢殿)이다. 1897년(광무 1)에 지었는데, 1904년(광무 8)에 수리공사를 하던 중 불에 타버렸고,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그 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그리고 이 곳은 高宗이 아들 純宗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1919년 1월21일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듯 바닥에는 카펫트가 깔렸으며, 燈기구도 서양식이다. 동쪽 방에서 고종이 자고, 서쪽 방은 황후의 침실이었으며, 가운데 공간은 왕을 시중들던 상궁들의 침실이었다. 규모는 앞면 3칸, 측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여 평면이 "ㄱ"자형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지붕 모서리에 여러 잡상(雜像)들을 나열한 점은 침전의 건축에 잘 사용하지 않던 특이한 구성이다. 조선 후기의 마지막 寢殿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라고 한다. 

 

 

 

 

 

 

 

 

 

 

 

 

 

 

 

 

 

 

 

 

 

 

                                             왕릉이 아닌 황제릉

 

 

 

 

 

 

 

 

 

명성황후는 1866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1874년 고종의 뒤를 이을 순종을 낳았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자 명성황후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일제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하여 친청(親淸), 친러(親露) 정책을 펴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고 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자객을 보내 1895년 10월8일 경복궁 건천궁에서 민비를 살해한다. 명성황후는 처음에 서울 청량리에 묻히었으나 高宗이 승하하자 이 곳 홍릉에 합장된다.

 

 

 

 

 

 

 

 

 

 

 

 

 

 

 

 

 

 

 

  

 

   

 

이 홍릉은  역대 조선의 왕릉과는 모습이나 형식이 많이 다른 것은 高宗이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면서 왕을 황제로 격상시켰기 때문에 , 능도 명나라 태조의 효릉(曉陵)을 본 따왔다.  국호까지 고치며 황제로 격상시키면서 , 한편 능의 형식은 여전히 중국의 것을 흉내내는 것은 ????  기존의 왕릉과 큰 차이는..... 정자각이 없고 침전(寢殿)이 대신하고, 봉분 주위에 있던 여러 석물(石物)들이 홍살문과 침전 사이에 세우는 것...왕릉의 석물에는 양. 호랑이가 있었으나,  황제릉에는 기린, 코끼리, 해태,사자,낙타,말들을 순서대로 세워놓았다.

 

 

 

 

 

 

 

 

 

 

 

 

 

 

 

 

 

 

 

 

 

 

 

 

 

 

                                                高宗의 장례식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어 일본식으로

 

                                        쓸쓸하게 치루어진 高宗의 장례식

 

 

 

 

 

 

 

 

 

고종의 장례는 1919년 3월3일에 거행되었다.  3.1만세 운동 바로 이틀 후이었다. 온 나라가 만세운동으로 뒤숭숭한 가운데 , 장례식에 참석한 우리나라 사람은 불과 70여명이었고, 이완용,송병준 등 친일파 관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장례를 일본식으로 치루고, 복장도 일본 고유의 상복을 착용하도록 강요하였기 때문에, 순종을 비롯한 宗親들이 참석하기를 기피하였고, 일본은 억지로, 강제로 순종과 종친을 참석시켰다.  한산했던 장례식과는 달리 장례 행렬이 금곡에 도착하였을 때, 길가에는 수만명의 백성들이 나와 통곡을 하였으며, 밤이 되자 지나가는 마을마다 불을 밝혀 고종의 마지막 길을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이 陵은 高宗 스스로 설계하였다

 

 

 

 

 

 

 

高宗은 생존시에 이 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며, 이 릉의 도면을 침전에 두고 틈만 나면 꺼내 보며 좋아 했다고 한다. 고종은 고영희라는 사람을 직접 중국에 보내 명태조(明太祖)의 효릉(曉陵)을  그대로 본땄다. 고종이 죽자 친일파 신하 尹德榮은 금곡은 장례 경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의 홍릉으로 합장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곳 능은 이미 조성이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이 곳에 묻히고 명성황후가 이곳으로 이장하여 합장된다.  그래서 이름도 홍릉이다.

 

 

 

 

 

 

 

 

 

 

  

 

 

 

 

 

왕릉의 석물(石物)들은 조선의 전통 기법으로 세워져 낯설지 않으나, 홍릉이 석물들은 서양의 기법을 동원하여 만들어져  뭔가 이상하고,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高宗의 사진

 

 

 

 

 

 

 

 

 

 

 

 

 

 

 

 

 

 

 

 

 

                                                고종 49세 때의 모습

 

 

 

 

 

 

 

 

 

 

 

 

 

 

 

 

 

 

 

 

 

 

 

 

 

 

 

 

 

 

 

 

 

 

 

 

 

 

 

 

 

 

 

 

 

 

 

 

 

 

 

 

 

 

 

 

 

 

 

 

 

 

 

 

             1898년 미국 화가 "휴버트"가 고종의 반신상을 그린 다음 전신상을 그렸다. 

 

 

 

 

 

 

 

 

 

 

 

 

 

 

 

 

 

                                  패랭이를 쓰고있는 고종 그리고 영친왕 

 

 

 

 

 

 

 

 

 

 

군사관련 행사 등에 입는 활동하기 편한 철릭에 패랭이를 쓰고있는 고종의 모습으로 1902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책에 실린 삽화이다.

 

 

 

 

 

 

 

 

 

 

 

 

 

 

 

 

 

 

 

 

 

 

 

  

 

 

 

 

 

 

 

 

 

 

 

 

 

 

 

 

 

 

 

 

 

 

 

 

 

                                              

 

                                           高宗과 왕실가족 사진

 

 

 

 

 

 

 

 

 

 

 

 

 

 

 

 

1918년 1월21일 촬영한 사진으로 영친왕(英親王)의 일시 귀국을 기념하여 왕실가족이 모여 日食으로  식사를 한 직후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高宗을 중심으로 왼편에 순종과 영친왕 그리고 오른편에 純宗妃 순정효황후 그리고 덕혜옹주의 모습이 담겨 있다. 덕수궁 석조전 안에서 촬영..

 

 

 

 

 

  

 

 

 

 

 

 

 

 

 

 

 

 

 

 

 

 

 

 

 

 

 

 

 

 

 

 

 

 

 

 

 

 

 

 

 

 

 

 

 

 

 

 

 

 

 

 

 

 

 

  

 

 

 

 

 

                                                

 

                                                高宗의 女人들

 

 

 

 

 

 

 

 

 

고종에게는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 어 나이에 죽고 나중에 성인이 된 자녀는 4명 즉, 마지막 임금인 순종(생모, 명성황후), 궁녀 장씨(장귀인)의 소생인 의친왕(의친왕), 영친왕(생모, 순헌황후 엄씨) 그리고 양귀인(양귀인)이 낳은 덕혜옹주(덕혜옹주)뿐이었다.

 

 

 

 

 

 

 

 

 

 

 

                                                                                 명성황후

 

 

 

 

 

 

 

 

 

 

 

 

 

 

 

 

                                                                        양귀인   梁貴人

 

 

 

 

 

 

 

 

 

 

양씨(양씨 .. 1882~1929) ..고종의 6번째 후궁으로 1893년 그녀가 12살 되던 해에 입궐하여 상궁으로 있다고 고종의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덕혜옹주)를 낳았다. 위 사진의 왼쪽 여인.... 아래 사진은 그녀가 48세에 찍은 사진이다. 

 

 

 

 

 

 

 

 

 

 

 

 

 

 

 

 

 

 

 

 

 

 

                                                                        장귀인   張貴人 

 

 

 

 

 

 

 

 

                                                                           義親王을 낳았다

 

 

 

 

 

 

 

 

 

 

 

                                        엄상궁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명성황후가 죽은 뒤에 실질적으로 국모(국모)역할을 하였던 엄귀비(엄귀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그녀는 1854년(철종 5) 11월 증찬정(증찬정) "엄진삼"의 장녀로 태어나 5살의 어린 나이에 경복궁에 들어가 후에 명성황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지밀상궁(지밀상궁)이 되었다.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못생기고 뚱뚱하였던 엄상궁은 후에 황귀비가 된 후 신문화와 신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 등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못 생긴 궁녀에 불과했던 엄상궁이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게 되자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고, 궁궐 밖으로 ?겨 난다. 엄상궁이 32세 때의 일이었다.

 

 

 

 

 

궁녀의 나이로는 늙은 편이었던 엄상궁의 어떤 점이 고종의 승은을 입고 총애를 받은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뛰어난 지략과 대담한 배짱을 가진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소용돌이 속에 있던 고종으로서는 그녀의 두뇌와 지략을 의지했던 듯 싶다. 

 

  

 

 

 

 

 

 

 

 

                                     일본총독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여인과 함께 찍은 엄상궁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지 5일 후 고종은 엄상궁을 궁궐로 다시 불러들인다.명성황후에게 엄상궁이 내?긴 지 10년 후인 때이었다. 나라의 국모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은 궁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고, 그 중심에 엄상궁이 있었다. ... 이 일은 "아관파천"에서 자세히 기술한다.

 

 

 

 

 

 

 

 

 

 

 

 

"아관파천" 이듬해 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으며, 고종의 아기를 임신했던 엄상궁은 44세의 나이에 황제의 아이를 낳는다. 황제의 아들을 낳은 엄상궁은 황귀비(황귀비)로 책봉된다. 순종이 등극하자 마지막 황태자로 책봉되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는 비운을 맞은 영친왕(영친왕)이다.

 

 

 

 

 

 

 

 

                                                   영친왕  영친왕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엄귀비와 고종은 영친왕이 이등박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끌려가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는 해마다 방학 때 영친왕을 조선으로 보내겠다고 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아들을 그리워하던 엄귀비는 1911년 7월20일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王  그리고  皇帝

 

 

 

 

 

 

 

 

 

 高宗은 이웃 청나라, 일본 등과 대등한 국가 위상을 확립하고자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마치 한(漢)나라가 후한(後漢)으로 이어 것과 같다는 뜻으로 황제의 年號도 후한의 개창제(開創帝) 광무제(光武帝)의 年號를 빌려 광무(光武)라 하였다. 그러면 왕과 황제의 차이는 무엇일까?

 

 

 

 

 

 

 

 

 

 

 

                                                       왕 (王)

 

 

 

 

 

王은 우두머리 또는 최고 통치권자를 가르키는 말이다. 보통 군주(君主), 천자(天子), 큰제후(諸候)의 칭호로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왕에 대한 기록상의 용어는 중국 은(殷)나라 갑골문(甲骨文)에 처음 나타나는데....王의 三은 각각 천(天),지(地),인(人)을 의미하며..." ㅣ "는 天,地,人을 하나로 통괄하는 최고의 인격체를 상징한다. 즉 하늘과 땅, 그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이들 모두는 각각하나의 우주이며, 그 각각의 우주를 다스리는 者가 곧 王이라는 것이다.

 

 

 

 

 

 

 

 

 

 

 

 

  

 

                                                    황제 (皇帝)

 

 

 

 

 

황제란 한마디로 王中의 王이란 뜻으로 사용되며, 중국의 경우 진(秦)나라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이후 청나라에 이르는 역대 왕조에 계승되었다. 수백년간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며,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탄생시킨 秦나라 王은 이미 이전의 왕들과 같을 수가 없었다.

 

 

 

 

 

이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황(皇)은 빛나고 빛난다는 의미의 형용사이고, 제(帝)는 자연계와 인간계 모두를 지배하는 최고의 신(神)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따라서 황제란 빛나는 우주의 절대적 지배자라는 뜻이 된다. 왕이라는 칭호는 이때부터 황제라는 이름으로 바뀌는데, 보통 황제로부터 봉토를 하사받은 제후들을 왕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황제와 왕의 用語도 차별이 생겨난다.

 

 

 

 

 

 

 

황제는 자신을 부를 때 짐(朕)이라고 하지만, 왕은 고(孤) 또는 여(予)라고 하며, 황제의 도장은 옥새(玉璽), 왕은 어보(御寶)..신하가 황제를 부를 때에는 폐하(陛下), 왕은 전하(殿下), 신하가 왕에게 절을 할 때에는 세번, 왕에게는 한번을 한다.

 

 

 

황제를 칭송할 때에는 萬歲,萬歲 萬萬歲, 왕에게는 千歲,千歲,千千歲라고 한다. 황제를 계승할 자는 태자(太子), 왕을 계승할 자는 세자(世子)라고 한다.

 

 

 

 

 

 

 

 

 

 

                              위 사진은 1890년에 고종과 순종이 찍은 사진인데,

 

                              아직 대한제국을선포하기 전이므로, 입고있는 곤룡

 

                              포도 황(黃)룡포가 아닌 홍(紅)룡포를 입고 있다.

 

 

 

 

 

 

 

 

 

황제의  죽음은 붕(崩), 왕의 죽음은 몽(夢)...황제의 옷 색갈은 노란색, 왕의 그것은 푸른색이나  빨간색..황제의 상징은 용(龍), 왕은 봉황(鳳凰)..황제의 국가는 제국(帝國), 왕의 국가는 왕국이라고 하였다.

 

 

 

 

 

 

 

 

 

 

 

 

 

 

 

 

 

 

 

 

                                                   시호(諡號)

 

 

 

 

 

 

 

시호란 왕이나 황제가 죽으면, 그의 생전의 업적을 평가하여 이름을 붙여주는 제도이다. 삼국시대의 임금들 대부분이 ㅇㅇ왕이라고 하는데, 이때 왕 앞에 있는 ㅇㅇ이 시호이다. 그러나 시호제도는 왕에게 국한된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에는 왕비, 왕의 종친, 정2품이상의 문,무관,공신 등이 죽으면 생전의 행적을 칭송하여 왕이 시호를 내려 주었다. 후대에는 낮은 하급 관직자에게도 시호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충무공(忠武公) 시호만 해도 10여명이 넘으며, 문정공(文貞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은 100명이 훨씬 넘었다.

 

 

 

 

 

 

 

 

 

 

 

 

 

 

 

 

 

 

 

 

                                                 묘호(廟號)

 

 

 

 

 

 

 

묘호는 사망한 임금을 종묘에 모실 때 諡號와 함께 붙여 주는 이름을 말한다. 보통 ㅇ祖,ㅇ宗이라고 부르는 것이 묘호이다.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이라고 할 때 世宗은 묘호이고, 莊憲은 시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묘호의 사용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대개 창업자에게는 조(祖..創業之主는 祖), 그 후계자에게는 종(宗..守城之君은 宗)이 추증되었다.묘호를 추증할 때 어떤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며, 생전의 업적에 따라 지었다.

 

 

 

 

 

묘호도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고려가 몽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황제의 나라인 원나라 입장에서는 왕,제후의 나라인 고려가 묘호를 사용하는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시호만을 사용케 하였으며, 그 시호의 맨 앞에는 몽고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반드시 충(忠)을 들어가게 하였다.

 

 

 

 

 

 

 

그래서 고려 임금의 계보를 보면 조,종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충ㅇ왕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다시 묘호를 사용하였다. 임금은 여전히 황제의 상징인 용(龍)의 문양을 사용했다. 중국 명나라와의 역학관계에서 겉으로는 사대(事大)를 하면서도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할지.. 체면과 겉 모양을 중요시하는 우리의 허례인지는 모르지만....

 

 

 

 

 

 

 

 

 

 

 

 

 

 

 

 

 

 

 

 

 

 

 

 

                                         아관파천   俄館播遷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親日 개화파정권이 무너지고 親러派가 정권을 장악했다.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요동반도(遼東半島)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현하였다.

 

 

 

 

 

그러자 1860년 이후 끊임없이 南下政策을 펼치던 러시아는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케 하는 한편 조선의 왕실에도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부심하였다. 그동안 친일개혁파에 눌려있던 민비를 비롯한 척족세력과 구미공사관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러시아 영향력 강화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895년 일본군, 폭도,낭인들을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학살하는 등 "을미사변"을 일으키면서 단발령(斷髮令)을 실시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사업을 재개하였다.

 

 

 

민비가 학살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기화로 친미,친러 세력들은 고종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려 하였다. 고종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였다.

 

 

 

 

 

 

 

                                        춘생문 사건     춘생문 사건

 

 

 

 

 

 

 

 

 

 

 

 

                                   덕수궁 뒷편 정동에 있던 러시아공사관

 

 

 

 

 

 

 

 

 

 

 

 

                 아관파천이 일어난 후, 일본군은 러시아공사관 문 앞에 대포까지

 

                 동원하여, 고종(고종)의 환궁(환궁)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일본군이 대포까지 동원하여 高宗의 환궁(還宮)을 요구하지만, 고종은 이를 거절한다. 

 

 

 

 

 

 

 

 

 

 

 

 

 

 

 

 

           러시아공사관 안에 있는 고종의 침실 및 거실... 고종을 위한 더블베드 하나와

 

           황태자(후일, 순종)을 위한 싱글베드하나 그리고 응접셋트 하나가 전부이다.

 

            옆 방에서는 상궁들이 번갈아 기거하면서 고종,황태자의 수발을 들었다.

 

 

 

 

 

 

 

                                 

 

 

 

 

 

 

 

 

 

 

 

                                             高宗의 친서(親書)

 

 

 

 

 

 

 

 

 

 

  

 

 

 

러,일전쟁(露日戰爭)의 강화(講和) 이후,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列强들이 힘써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국가의 황제에게 조선의 自主獨立을 지지해 줄 것과 한일합방조약 이후 대한제국의 상황을 호소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덕국(德國 ..독일)의 황제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로서, 양국의 우호를 다짐함과 아울러 상호 협조를 기약하며 전권공사(全權公使)로 민영익(閔泳翊)을 파견한다는 내용이다.

 

 

 

 

 

 

 

 

 

 

 

 

 

 

 

 

독일황제에게 일본의 조선 자주권 침탈을 폭로하고, 조선의 독립 보장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독일황제 빌헤름 2세

 

 

 

 

 

 

 

 

 

 

 

 

 

 

고종이 경운서궁(慶運西宮)에 거처하면서, 러시아(俄羅斯)황제에게 황태자의 탄신을 축하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고종이 前 駐韓 러시아公使 파블로프(巴禹露厚. Pavloff)편에 러시아황제에게 보낸 친서로, 러일전쟁 이전에 조선은 이미 중립을 표명하여 각국의 승인을 받은바 있는데, 전쟁이 심화되어 조선이 무고하게 화를 입었으니 그 정황을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서 잘 설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프랑스(법란서. 法蘭書)공황국에 보내는 고종의 친서로 양국의 우호를 다짐하고, 상호간의 협조를 기약하기 위하여 전권공사(全權公使) 민영익(閔泳翊)을 보낸다는 내용의 고종 친서.

 

 

 

 

 

 

 

 

 

 

 

 

 

 

 

 

 

 

 

 

 

 

                                         高宗과 빌헤름2세 (독일)

 

 

 

 

 

 

 

 

 

 

 

 

 

 

 

 

 

 

 

 

 

 

 

 

 

 

 

 

 

 

 

 

 

 

 

 

 

 

 

 

 

 

 

 

 

 

 

 

 

 

 

 

 

 

                                                      황제어새    皇帝御璽  ... 보물 제1618호

 

 

 

 

 

 

 

 

 

高宗은 18917년 10월에 大韓帝國을 선포한다. 마치 한(漢)나라가 후한(後漢)으로 이어진 것과 같다는 뜻으로 황제의 연호(年號)도 후한의 개창제(開創帝) 광무제(光武帝)의 연호를 빌려 광무(光武)라고 하였다.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서 국사(國事)에 사용할 국새(國璽), 어새(御璽), 어보(御寶), 보인(寶印) 등을 모두 새로이 제작하였는데, 이들은 현존하는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를 통해 그 실제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 제1618호로 지정된 "황제어새(皇帝御璽)"는 이 책에 수록되어 있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대한제국의 어새류(御璽類)는 그 크기가 대략 10cm 전후로서, 큰 것은 12cm에서 작은 것은 9cm정도인데,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는 크기가 5,3cm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가의 安危가 풍전등화에 놓인 위급한 상황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이 어새(御璽)의 사용실례를 볼 때, 이 御璽가 공개적,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특별한 사정아래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볼 때, 이 어새(御璽)가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등록되지 않고, 또 그 크기가 다른 어새(御璽)들과 비교해 특별하게 작게 만들어졌으며 뿐만아니라 어새를 보관한 함(函)에 인주함(印朱函)까지 함께 들어 있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사용 실례

 

 

 

 

 

 

 

현재 남아있는 자료를 근거로 고종은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를 1903년부터 1909년까지 모두 15번 사용한 자료가 남아있는데(위 고종의 親書 사진 참조), 주로 비밀외교를 목적으로 발부한 친서(親書)들에 사용한 것들이다.

 

 

 

 

 

즉 러시아황제를 비롯하여 이태리, 프랑스, 오스트리아, 항가리 그리고 독일의 황제 또는 대통령에게 보낸 親書에 사용하였으며, 이는 1903년 이후 러일전쟁 발발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고종이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비밀 오교활동을 펼치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어새(御璽)를 새로 만들 필요성을 가지게 되고,

 

 

 

 

 

기밀의 유지를 위하여 내대신(內大臣)의 직제를 통하지 않고, 황제 자신이 직접 관장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휴대와 비장(秘藏)하기에 적합한 크기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高宗은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를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두 가지 자료가 현존하여 남아 있다.

 

 

 

 

 

즉, 1909년 1월1일 고종은 미국 헐버트공사에 미국으로 유학 간 조카(조남복)을 잘 돌보아 줄 것을 요청하는 친서와 1909년 10월20일 상하이 독일계 은행에 예치한 재산을 찾기 위하여 역시 헐버트에게 준 친서 위임장에 이 황금어새를 사용하였다.  

 

 

 

 

 

 

 

 

 

 

 

 

 

 

 

 

 

 

즉 고종은 황제 재위 시 여러나라 君主들에게 대한제국의 어려운 처지를 도와 줄 것을 요청하는 친서(親書)에 이 "황제어새"를 사용하였고, 일제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강제로 빼앗긴 이후에도 이 어새(御璽)를 私的으로 지니고 사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高宗 직속의 비밀 정보기관 설치

 

 

 

 

 

 

 

위와 같은 관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종이 1902년 6월에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라는 이름의 황제 직속의 비밀 정보기관을 창설한 사실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藏書각)에 소장되어 있는 "제국익문사비보장정(帝國益聞社秘報章程)"에 따르면,

 

 

 

 

 

通信社를 가장한 황제직속의 이 국가 정보기관은 서울에 본사를 두고, 61명의 통신원을 두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동경, 오사카, 나가사키, 북경, 상해, 해삼위, 여순 등지에 상주하는 외국 통신원도 9명을 배정하고 있다.

 

 

 

 

 

고종황제가 외국 국가원수들에게 보내는 비밀親書들은 이들 요원들의 손을 거쳐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기관의 창설 시기가 친서의 사용실례에 1년 前 정도라는 점도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해 주고있다. 

 

 

 

 

 

 

 

 

 

 

 

 

 

 

 

 

 

 

                                              전화로  3年喪을 치른 순종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純宗)은 아버지 고종의 3년상(3年喪)을 전화로 치루었다. 아버지의 묘가 있는 홍릉에 전화를 걸어 매일 아침 전화 수화기에 대고  "아이고, 아이고 " 곡(哭)을 한 것이다. 

 

 

 

 

 

홍릉에 있던 묘지기는 수화기를 高宗의 봉분에 향하게 들어 순종의 곡소리가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 3년상을 전화로 했다는 것이 발상도 기발하지만, 순종의 효심도 지극하다. 조선에서 전화를 가장 처음으로 사용한 王이 고종이었다.  

 

 

 

 

 

일제의 감시로 아버지 고종과 아들인 순종은 살아 있을때에도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高宗이 세상을 떠나자 일본은 일본식으로 제사를 치를 것을 강요한다. 순종은 이같은 일본의 강요에 반대하는 의미로 일본식으로 진행되는 여러 행사에 참석하기를 기피한다.

 

 

 

 

 

 

 

일본의 감시와 강요속에 아버지의 3년상을 치루기 어렵게 되자 전화를 이용해 그 마음을 전한 것이다, 純宗의 애절한 묘책이었던 것이다.

 

 

 

 

 

 

 

 

 

 

 

 

 

 

 

 

 

 

 

 

                                               高宗이 사용한 ...

 

 

 

 

 

 

 

 

 

 

 

 

 

 

 

 

 

 

 

 

 

 

 

 

                                             고종어차   고종어차

 

 

 

 

 

 

 

 

 

 

                              자동차가 들어오기 전 고종이 타고 다니던 가마 

 

 

 

 

 

 

 

 

 

1910년 치욕적인 한일합방에 따라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사내정의)는 자동차를 들여와 타고 다니고 싶어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 타기에 미안하였던지, 고종의 어차(어차)도 같이 들여 오도록 우리 왕실을 부추켜체면을 세우려 했다.

 

 

 

 

 

이렇게 하여 당시 군왕이 탈 수 있는 리무진자동차를 만들던 영국의 다임러사에 고종의 어차를, 그리고 영국의 위슬리사에 총독용 자동차를 각각 주문, 도입했던 것이다. 이 두 대의 자동차가 미로서 이 땅에 자동차시대를 열었던 최초의 자동차로 1911년이었다.

 

 

 

 

 

 

 

 

 

 

                                                      고종 어차

 

 

 

 

 

 

 

 

                                               데라우치 총독 차

 

 

 

 

 

 

 

이 중에서 고종이 타던 다임러리무진은 숱한 고난의 세파를 겪으면서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이 차의 복원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1996년 내한하였던 영국 다임러사의 노장 기술자들이 이 차를 보고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겉만 약간 헐었고 녹이 슬었을뿐, 부품하나 손상되지 않은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이 리무진은 10대만 생산되었던 귀한 차로서 지금까지 한대도 남아오지 않았는데, 한국이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어 영국이나 제작사인 다임러가 모두 부러워하고 탐내는 보물급 유물이 되었다. 고종어차는 6기통, 총독 차는 4기통 엔진을 얹었는데, 특히 고종의 자동차는 뒷부분에 무관들이 올라서서 고종을 호위할 수 있도록 발판이 달려 있었지만 지금은 발판이 없어  부서져 떼어저린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고종 어차

 

 

 

 

 

그 후 1913년 왕실에서는 황태자이었던 순종을 빼놓을수 없어 고종, 순종 용으로 미국 캐딜락 리무진 두대를 더 들여 온다. 그런데 이렇게 들여온 자동차를 고종은 거의 이용하지 않아 순종이 물려 받았고, 순종의 캐딜락은 순종의 妃인 순정효황후가 사용하였다. 이 캐딜락은 2001년부터 5년간 10억원의 비용을 사용하여 복원에 성공,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번시하고 있다. 당시 이 차는 20대밖에 만들지 않았고, 지금은 이 차를 포함하여 전세계에 4대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복원 전  

 

 

 

 

 

 

 

 

                                                                             복원 후                                                 

 

       

 

 

 

 

 

 

 

 

 

                                                            고종의 아침 ... 커피

 

 

 

 

 

 

 

 

 

 

 

 

 

 

 

 

 

                                조선 최초의 커피숍 .. 정관헌(정관헌)

 

 

 

 

 

 

 

 

 

 

 

 

 

 

 

 

 

 

 

 

 

 

 

 

 

 

 

 

 

 

 

 

 

 

 

 

 

 

 

 

 

 

 

 

 

                 고종, 동양 최대의 운산금광을 팔아 넘기고 캐딜락을 구입하다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稱慶記念碑) .. 사적 171호

 

 

 

 

 

 

 

 

 

 

 

 

 

 

 

 

高宗 (재위기간 1863~1907)이 왕으로 즉위한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 안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비석은 귀부(龜部)와 비신(碑身) 그리고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신(碑身) 앞면에는 황태자인 순종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碑文)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윤용선이 짓고, 글씨는 민병석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전(碑殿)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정자(停子)형 건물로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비(碑)를 보호하고 있는 비전(碑殿)은 20세기 초 전통적인 건축양식의 틀이 해체되기 직전에 세워진 건물로 당시 이러한 유형의 건물 중 대단히 아름다운 건물이며, 이 시기에 세워진 덕수궁의 다른 여러 건물과 함께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다고 한다.

 

 

 

 

 

 

 

 

 

 

 

 

 

                                                기로소    耆老所

 

 

 

 

 

 

 

기로소(耆老所)는정2품의 文官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서, 고려시절의 기영회(기영회)를 계승한 관제이다. 조선 태조가 60세 되던 해에 친히 기영회(耆英會 .. 후에 耆社로 바뀜)에 들어 갔는데, 이후 왕들이 오래 살지 못하여 기로소에 들어가는 왕이 없자, 숙종과 영조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해서 미리 앞당겨 들어 간 것을 본받아 高宗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숙종이 기로당상(耆老堂上)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있는 장면

 

 

 

 

 

 

 

 

 

기로소(耆老所)의 정식 명칭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이며 왕과 조정 元老의 친목, 연회 등을 주관하였으며, 英祖 때 수직관(守直官) 2명과 서리(胥吏) 2명, 고직(庫職) 1명, 사령(使令) 44명, 군사(軍士) 1명을 두었는데 수직관은 승문원(承文院)과 성균관에서 7품 이하의 관원이 차출되었다.

 

 

 

 

 

기로소의 유래는 1394년 조선의 태조가 60세를 넘자 기사(耆社)라는 명예관청을 만들어 文臣과 武臣을 가리지 않고 70세 내외의 2품관 이상의 관료를 선발하여 기사(耆社)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임금 스스로도 이름을 올려 전토(田土), 어전(漁箭), 염전(鹽田)과 노비를 하사하고 군신(君臣)이 함께 어울려 연회를 베풀며 즐기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고려의 기영회(耆英會)을 본 받은 것이다.

 

 

 

 

 

 

 

太宗이 즉위하면서 이것을 본격적으로 제도화하여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라고 하다가, 1428년에 世宗이 이름을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개칭하였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기로소에 들어 갈 수 있는 자격에 제한을 두어 정경(正卿)으로서 70세 이상된 文신으로 제한하였고, 숙종때에는 이들을 기로당상(耆老堂上)이라 하였으며, 군신(君臣)이 함께 참여하는 기로소의 특성상 관아의 서열에서는 기로소가 으뜸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로소가 맡은 일은 임금의 탄생일과 설날, 종지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왕이 행차할 때에 모여서 하례(賀禮)를 행하거나 중요한 국상의 논의에 참여하여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숙종이 60세 되던 1719년에 기로소에 들어 가면서 경내에 영수각(靈壽閣)을 지었다.

 

 

 

 

 

기로소에 들어가면 녹명안(錄名案)에 이름이 기록되는데, 조선 초,중기의 기록은 모두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후에 다시 편찬한 "기로소제목록후(耆老所題目錄後)"에 의하면 여기에 들어 온 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이었으며, 최고령자는 현종 때의 윤경(尹絅)으로 98세이었고, 다음으로는 숙종 때 97세의 이구원(李久源)과 96세의 민형남(閔馨男) 등이 있었다.

 

 

 

 

 

 

 

 

 

 

 

 

 

 

 

 

 

 

이 건물의 남쪽에 설치한 문(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 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만세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 문은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떼어 가서 자기 집 대문으로 사용하던 것을 광복 이후 찾아와 복원한 것이다.

 

 

 

 

 

 

 

 

 

 

 

 

 

 

 

 

 

 

 

 

                                                                칭경기념비전의 옛 모습

 

 

 

 

 

 

 

 

 

 

 

 

 

 

 

 

 

 

 

 

 

 

 

 

 

 

 

 

 

 

 

 

                                           고종어필    高宗御筆

 

 

 

 

 

 

 

 

 

 

 

 

 

 

 

 

 

 

 

 

 

 

 

 

 

 

 

 

 

 

 

 

 

 

 

 

 

 

 

 

 

 

 

 

 

 

 

 

 

 

 

 

                              高宗이 추위를 막기 위하여 입었던 저고리

 

 

 

 

 

 

 

 

 

 

 

자주색의 겉감에 흰색으로 안감을 받쳐서 얇게 솜을 두어 3mm정도의 간격으로 정교하게 손으로 누빈 저고리이다. 동정은 없으나 동정부분의 누빈 간격이 5mm정도로 넓어진 것으로 보아 원래 이 위치에 동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옷고름은 누비지 않은 상태이며 넓은 깃에 비하여 고대가 좁고 소매길이가 길어 방한용으로 알맞게 되어있다.  

 

 

 

 

 

 

 

 

 

 

 

 

 

 

 

 

참도 또는 신도, 어도....거칠게 울퉁불퉁 만들었다. 일부러... 후에 단장한 세종대왕릉을 제외하고 모두 그렇다. 저 길을 걸으며 넘어지지 않으려면 아래를 보며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자연히 고개를 숙여야 한다. 죽은 王에 대한 예의이다.

 

 

 

 

 

 

 

 

 

 

 

 

 

 

 

 

 

 

 

 

                                            丁字閣 대신 寢殿을 ...

 

 

 

 

 

 

 

 

 

 

 

 

 

 

 

 

 

 

 

 

 

 

 

  

 

 

 

 

 

 

 

 

 

 

 

 

정자각 (丁字閣) 대신 침전(寢殿)이다.  그래서 그 내부에는 용상(龍床)이 마련되어 있다. 王이라하더라도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중국 명나라 황제릉을 흉내 내어 설계한 조선 최초의 황제릉.... 그리하여 정자각을 없애고 대신 침전(寢殿)을 세운다.  침전의 의미는 ?  죽어서도 영원히 통치하겠다는 의미인데....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인데.......

 

 

 

  

 

 

 

 

 

 

 

 

 

 

 

 

 

 

 

 

 

 

 

 

 

 

 

 

 

 

 

 

 

                                    고영근 ... 고종의 碑를 지키다

 

 

 

 

 

 

 

 

 

 

 

 

 

 

 

 

 

 

 

 

이 비석에 얽힌 얘기는 더욱 애절하다.  고종의 陵에 이름도 붙이지 못하고, "대한고종황제홍릉"이라고 새긴 陵碑는 가마니에 둘둘 쌓여 그대로 비각(碑閣)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 碑가 지금처럼

 

세워진 것은 4년 후, 경기도 장연(長淵) 군수로 있던 고영근이라는 노인의 노력 덕분이었다.  고영근은 충신으로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하였던 우범선을 암살하고, 감옥에 다녀 온 사람이다. 고영근은 고종이 금곡, 이 곳에 묻히자 능참봉을 자원하여 능지기로 일하고 있었다.

 

 

 

 

 

 

 

이 碑를 세우는데 4년이나 걸린 이유는...高종을 안장한 후, 이 碑를 세우려 하자, 조선총독부는 반대한다. 세우려면 앞에 전(前)을 더 새겨 넣으라는 압력이었다. 

 

 

 

 

 

 

 

고영근은 4년동안 아침 저녁으로 거적에 쌓인 陵碑를 바라보다가 일단 세워놓고 보자는 생각에 인부를 불러 모았다. 고영근은 몹씨 추운 날, 어둠을 틈타 목욕재계를 한 후 능비를 세웠다.  고영근은 이제야 高宗의 성은에 보답했다 하면서... 상소문을 들고 純宗이 있는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다.  이 소식에 술렁이던 조정은 이미 세운 碑는 그대로 두고, 고영근을 참봉직에서 파면시키는 것으로 결정한다.  고영근은 홍릉 밖에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이듬해 죽어, 고종의 능 인근에 묻혀 있다.

 

 

 

 

 

  

 

 

 

 

 

 

 

 

 

 

 

 

 

 

 

 

 

 

 

 

 

  

 

 

 

 

 

 

 

 

 

 

 

 

 

 

 

 

 

 

 

 

 

 

 

 

 

 

 

 

 

 

 

 

 

 

 

 

 

 

 

 

 

 

 

 

 

 

 

 

 

 

 

 

 

 

 

 

 

                                          고종실록   高宗實錄 

 

                                                                             

 

 

 

 

 

 

 

 

 

 

 

 

 

 

 

 

 

 

 

 

 

 

 

 

 

 

 

 

 

 

 

 

 

 

 

 

 

 

 

 

 

 

 

 

 

 

 

 

   

 

                                        고종 독살설    高宗 毒殺設

 

 

 

 

 

 

 

 

 

고종은 1919년 1월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사망하였다. 67세이었다. 高宗의 사망 원인은 당시 일제에 의하여 뇌일혈(腦溢血)로 발표되지만, 그 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毒)때문에 사망하였다는 주장이 사망 당시부터 현재에도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고종독살설은 당대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3,1운동의 배경이 되었지만,  당시의 정국을 살펴보면 근거없는 소문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헤이그밀사 사건 이후,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 난 고종이 의병(義兵)이나 독립운동 세력에게 상징적 球心點이어서, 독립을 위한 무장 봉기를 계획하여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에서 고종을 망명시켜 항일운동을 활성화할 계획이 드러나는 등 일제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는 존재이었다.

 

 

 

 

 

 

 

 

 

 

 

 

 

 

 

 

더구나 고종은 덕수궁에서 망국의 한을 씹으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액의 내탕금 (內帑金...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으로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독살에 관련된 인물로는 이완용, 이기용, 한창수, 윤덕영, 민병석, 한상학등이 있으며, 어의(御醫) 안상호도 의심을 받고 있다. 이들 중 이완용과 이기용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친일파로써, 특히 이완용은 일본왕(日本王) 앞에서 高종을 독살하겠다고 맹세하기도 하였다. 

 

 

 

 

 

독을 탄 음료를 고종에게 직접 전달한 宮女는 일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여러가지 의혹만 있을 뿐, 사건의 실체가 정확히 밝혀진 것응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과 주변의 움직임들을 보아 틀림없을 것이라는 說이 요즈음의 시각이다.

 

 

 

 

 

 

 

 

 

 

 

 

 

 

 

 

 

 

 

 

 

 

 

 

 

 

 

 

 

 

 

 

 

 

 

 

 

 

 

 

 

 

 

 

 

 

 

 

 

 

 

 

 

  

 

홍릉(洪陵)... 고종(高宗)의 능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재위:1863~1907.. 출생:1852~1919)와 그의 부인 명성황후(1851~1895)민씨가 묻힌 곳이다.  홍릉은 왕릉이 아니라 조선 최초의 황제릉(皇帝陵)이다. 따라서 기왕의 조선 왕릉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高宗의 즉위

 

 

 

 

고종은 철종4년(1852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高宗이 익종(翼宗 .. 23대 순조의 세자이며, 헌종의 아버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한 것은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순종,헌종,철종의 3대에 걸쳐 세도정치를 한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철종의 후사가 없자 뒤를 이을 국왕의 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지극히 경계하였다. 이때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화(禍)를 피하여 시정(市井)무뢰한과 어울리고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면서 위험을 피하던 이하응은 조성하(趙成夏)를 통하여 궁중 최고의 어른인 趙大妃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哲宗이 죽자 趙大妃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 아들(命福 ..고종)으로 하여금 익종(翼宗)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여 그를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하여 국왕에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고, 흥선군(興宣君)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대섭하게 하였다. 고종은 즉위 후인 1866년 9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곧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이 長成하여 친정(親政)의 의욕을 가지고 차차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 뜻을 헤아린 명성황후와 老大臣들은 유림(儒林)들을 앞세워 대원군의 하야(下野)공세를 피게 되었다.1873년 마침내 서무친재(庶務親裁)의 命을 내려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성명(成命)을 환수하고, 高宗은 통치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환구단    園丘壇  .. 고종 황제즉위식이 거행되었다. 

 

 

 

 

명칭의 漢字 표기와 독음(讀音)을 환구단(園丘壇)과 원구단(園丘壇 또는 圓丘壇)으로 혼용하던 것을 2005년 문화재청에서 한자 표기는 "고종실록"에 기록된 "園丘壇"으로, 한글 표기는 高宗이 제사를 지낸 1897년 당시 "독립신문"의 표기에 따라 "환구단"으로 정하였다.

 

 

 

 

 

 

 

이 환구단은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으며, 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삼국시대부터 농업의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祈雨祭)르르 국가적으로 거행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제도화된 환구제(園丘祭)는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재위 981~997)때부터라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제천의례를 억제함으로써 世祖 때 환구제가 폐지되었다가 조선을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하고, 高宗이 황제로 즉위하여 천자(天子)가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지금의 환구단은 1897년(고종 34)에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단(壇)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이다. 그 후 단지 내에는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1899년에 축조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봉안(奉安)하였으며,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석고(石鼓)의 몸체에 부각된 용(龍)무늬는 조선 말기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처음 조성된 단지는 1913년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고, 이듬해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축소되었으며, 지금의 황궁우(皇穹宇)는 석고(石鼓)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石造 대문만이 보존되어 조선호텔 경내에 남아있다. 

 

 

 

 

 

 

 

 

                                                환구단의 옛날 모습

 

 

 

 

 

 

 

 

                                                                         홍릉 입구

 

  

 

고종은 재위기간 동안 청나라,일본,러시아의 각축 속에서 일련의 개화정책을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제(軍制)를 개혁하고, 젊은 개화파로 구성된 신사유람단(神士遊覽團)과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학습케 하였으며... 1897년에는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세계에 알리고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는 등 근대 자주국가를 이루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907년  일본에의 합병을 의미하는 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세계에 알리고자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실패하고 ...이를 빌미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매국노들과 일제(日帝)에 의하여,  그 해 1907년 7월 20일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12년 후 1월21일 덕수궁에서 승하한다.

 

 

 

 

 

 

                                    함녕전    咸寧殿   ... 보물 제82호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황제의 침전(寢殿)이다. 1897년(광무 1)에 지었는데, 1904년(광무 8)에 수리공사를 하던 중 불에 타버렸고,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그 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그리고 이 곳은 高宗이 아들 純宗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1919년 1월21일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듯 바닥에는 카펫트가 깔렸으며, 燈기구도 서양식이다. 동쪽 방에서 고종이 자고, 서쪽 방은 황후의 침실이었으며, 가운데 공간은 왕을 시중들던 상궁들의 침실이었다. 규모는 앞면 3칸, 측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여 평면이 "ㄱ"자형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지붕 모서리에 여러 잡상(雜像)들을 나열한 점은 침전의 건축에 잘 사용하지 않던 특이한 구성이다. 조선 후기의 마지막 寢殿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라고 한다. 

 

 

 

 

 

 

 

 

 

 

                                             왕릉이 아닌 황제릉

 

 

 

 

명성황후는 1866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1874년 고종의 뒤를 이을 순종을 낳았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자 명성황후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일제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하여 친청(親淸), 친러(親露) 정책을 펴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고 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자객을 보내 1895년 10월8일 경복궁 건천궁에서 민비를 살해한다. 명성황후는 처음에 서울 청량리에 묻히었으나 高宗이 승하하자 이 곳 홍릉에 합장된다.

 

 

 

 

 

 

 

 

  

   

이 홍릉은  역대 조선의 왕릉과는 모습이나 형식이 많이 다른 것은 高宗이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면서 왕을 황제로 격상시켰기 때문에 , 능도 명나라 태조의 효릉(曉陵)을 본 따왔다.  국호까지 고치며 황제로 격상시키면서 , 한편 능의 형식은 여전히 중국의 것을 흉내내는 것은 ????  기존의 왕릉과 큰 차이는..... 정자각이 없고 침전(寢殿)이 대신하고, 봉분 주위에 있던 여러 석물(石物)들이 홍살문과 침전 사이에 세우는 것...왕릉의 석물에는 양. 호랑이가 있었으나,  황제릉에는 기린, 코끼리, 해태,사자,낙타,말들을 순서대로 세워놓았다.

 

 

 

 

 

 

 

 

 

 

 

 

                                                高宗의 장례식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어 일본식으로

                                        쓸쓸하게 치루어진 高宗의 장례식

 

 

 

 

고종의 장례는 1919년 3월3일에 거행되었다.  3.1만세 운동 바로 이틀 후이었다. 온 나라가 만세운동으로 뒤숭숭한 가운데 , 장례식에 참석한 우리나라 사람은 불과 70여명이었고, 이완용,송병준 등 친일파 관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장례를 일본식으로 치루고, 복장도 일본 고유의 상복을 착용하도록 강요하였기 때문에, 순종을 비롯한 宗親들이 참석하기를 기피하였고, 일본은 억지로, 강제로 순종과 종친을 참석시켰다.  한산했던 장례식과는 달리 장례 행렬이 금곡에 도착하였을 때, 길가에는 수만명의 백성들이 나와 통곡을 하였으며, 밤이 되자 지나가는 마을마다 불을 밝혀 고종의 마지막 길을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이 陵은 高宗 스스로 설계하였다

 

 

 

高宗은 생존시에 이 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며, 이 릉의 도면을 침전에 두고 틈만 나면 꺼내 보며 좋아 했다고 한다. 고종은 고영희라는 사람을 직접 중국에 보내 명태조(明太祖)의 효릉(曉陵)을  그대로 본땄다. 고종이 죽자 친일파 신하 尹德榮은 금곡은 장례 경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의 홍릉으로 합장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곳 능은 이미 조성이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이 곳에 묻히고 명성황후가 이곳으로 이장하여 합장된다.  그래서 이름도 홍릉이다.

 

 

 

 

  

 

 

왕릉의 석물(石物)들은 조선의 전통 기법으로 세워져 낯설지 않으나, 홍릉이 석물들은 서양의 기법을 동원하여 만들어져  뭔가 이상하고,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高宗의 사진

 

 

 

 

 

 

 

 

 

                                                고종 49세 때의 모습

 

 

 

 

 

 

 

 

 

 

 

 

 

 

 

 

 

 

 

 

 

 

 

 

 

 

 

 

 

             1898년 미국 화가 "휴버트"가 고종의 반신상을 그린 다음 전신상을 그렸다. 

 

 

 

 

 

 

 

                                  패랭이를 쓰고있는 고종 그리고 영친왕 

 

 

 

 

군사관련 행사 등에 입는 활동하기 편한 철릭에 패랭이를 쓰고있는 고종의 모습으로 1902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책에 실린 삽화이다.

 

 

 

 

 

 

 

 

 

 

  

 

 

 

 

 

 

 

 

 

 

 

                                              

                                           高宗과 왕실가족 사진

 

 

 

 

 

 

 

1918년 1월21일 촬영한 사진으로 영친왕(英親王)의 일시 귀국을 기념하여 왕실가족이 모여 日食으로  식사를 한 직후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高宗을 중심으로 왼편에 순종과 영친왕 그리고 오른편에 純宗妃 순정효황후 그리고 덕혜옹주의 모습이 담겨 있다. 덕수궁 석조전 안에서 촬영..

 

 

  

 

 

 

 

 

 

 

 

 

 

 

 

 

 

 

 

 

 

 

 

 

 

  

 

 

                                                

                                                高宗의 女人들

 

 

 

 

고종에게는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 어 나이에 죽고 나중에 성인이 된 자녀는 4명 즉, 마지막 임금인 순종(생모, 명성황후), 궁녀 장씨(장귀인)의 소생인 의친왕(의친왕), 영친왕(생모, 순헌황후 엄씨) 그리고 양귀인(양귀인)이 낳은 덕혜옹주(덕혜옹주)뿐이었다.

 

 

 

 

 

                                                                                 명성황후

 

 

 

 

 

 

 

                                                                        양귀인   梁貴人

 

 

 

 

양씨(양씨 .. 1882~1929) ..고종의 6번째 후궁으로 1893년 그녀가 12살 되던 해에 입궐하여 상궁으로 있다고 고종의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덕혜옹주)를 낳았다. 위 사진의 왼쪽 여인.... 아래 사진은 그녀가 48세에 찍은 사진이다. 

 

 

 

 

 

 

 

 

 

 

                                                                        장귀인   張貴人 

 

 

 

                                                                           義親王을 낳았다

 

 

 

 

 

                                        엄상궁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명성황후가 죽은 뒤에 실질적으로 국모(국모)역할을 하였던 엄귀비(엄귀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그녀는 1854년(철종 5) 11월 증찬정(증찬정) "엄진삼"의 장녀로 태어나 5살의 어린 나이에 경복궁에 들어가 후에 명성황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지밀상궁(지밀상궁)이 되었다.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못생기고 뚱뚱하였던 엄상궁은 후에 황귀비가 된 후 신문화와 신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 등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못 생긴 궁녀에 불과했던 엄상궁이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게 되자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고, 궁궐 밖으로 ?겨 난다. 엄상궁이 32세 때의 일이었다.

 

 

궁녀의 나이로는 늙은 편이었던 엄상궁의 어떤 점이 고종의 승은을 입고 총애를 받은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뛰어난 지략과 대담한 배짱을 가진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소용돌이 속에 있던 고종으로서는 그녀의 두뇌와 지략을 의지했던 듯 싶다. 

  

 

 

 

                                     일본총독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여인과 함께 찍은 엄상궁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지 5일 후 고종은 엄상궁을 궁궐로 다시 불러들인다.명성황후에게 엄상궁이 내?긴 지 10년 후인 때이었다. 나라의 국모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은 궁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고, 그 중심에 엄상궁이 있었다. ... 이 일은 "아관파천"에서 자세히 기술한다.

 

 

 

 

 

"아관파천" 이듬해 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으며, 고종의 아기를 임신했던 엄상궁은 44세의 나이에 황제의 아이를 낳는다. 황제의 아들을 낳은 엄상궁은 황귀비(황귀비)로 책봉된다. 순종이 등극하자 마지막 황태자로 책봉되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는 비운을 맞은 영친왕(영친왕)이다.

 

 

 

                                                   영친왕  영친왕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엄귀비와 고종은 영친왕이 이등박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끌려가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는 해마다 방학 때 영친왕을 조선으로 보내겠다고 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아들을 그리워하던 엄귀비는 1911년 7월20일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王  그리고  皇帝

 

 

 

 

 高宗은 이웃 청나라, 일본 등과 대등한 국가 위상을 확립하고자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마치 한(漢)나라가 후한(後漢)으로 이어 것과 같다는 뜻으로 황제의 年號도 후한의 개창제(開創帝) 광무제(光武帝)의 年號를 빌려 광무(光武)라 하였다. 그러면 왕과 황제의 차이는 무엇일까?

 

 

 

 

 

                                                       왕 (王)

 

 

王은 우두머리 또는 최고 통치권자를 가르키는 말이다. 보통 군주(君主), 천자(天子), 큰제후(諸候)의 칭호로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왕에 대한 기록상의 용어는 중국 은(殷)나라 갑골문(甲骨文)에 처음 나타나는데....王의 三은 각각 천(天),지(地),인(人)을 의미하며..." ㅣ "는 天,地,人을 하나로 통괄하는 최고의 인격체를 상징한다. 즉 하늘과 땅, 그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이들 모두는 각각하나의 우주이며, 그 각각의 우주를 다스리는 者가 곧 王이라는 것이다.

 

 

 

 

 

  

                                                    황제 (皇帝)

 

 

황제란 한마디로 王中의 王이란 뜻으로 사용되며, 중국의 경우 진(秦)나라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이후 청나라에 이르는 역대 왕조에 계승되었다. 수백년간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며,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탄생시킨 秦나라 王은 이미 이전의 왕들과 같을 수가 없었다.

 

 

이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황(皇)은 빛나고 빛난다는 의미의 형용사이고, 제(帝)는 자연계와 인간계 모두를 지배하는 최고의 신(神)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따라서 황제란 빛나는 우주의 절대적 지배자라는 뜻이 된다. 왕이라는 칭호는 이때부터 황제라는 이름으로 바뀌는데, 보통 황제로부터 봉토를 하사받은 제후들을 왕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황제와 왕의 用語도 차별이 생겨난다.

 

 

 

황제는 자신을 부를 때 짐(朕)이라고 하지만, 왕은 고(孤) 또는 여(予)라고 하며, 황제의 도장은 옥새(玉璽), 왕은 어보(御寶)..신하가 황제를 부를 때에는 폐하(陛下), 왕은 전하(殿下), 신하가 왕에게 절을 할 때에는 세번, 왕에게는 한번을 한다.

 

황제를 칭송할 때에는 萬歲,萬歲 萬萬歲, 왕에게는 千歲,千歲,千千歲라고 한다. 황제를 계승할 자는 태자(太子), 왕을 계승할 자는 세자(世子)라고 한다.

 

 

 

 

                              위 사진은 1890년에 고종과 순종이 찍은 사진인데,

                              아직 대한제국을선포하기 전이므로, 입고있는 곤룡

                              포도 황(黃)룡포가 아닌 홍(紅)룡포를 입고 있다.

 

 

 

 

황제의  죽음은 붕(崩), 왕의 죽음은 몽(夢)...황제의 옷 색갈은 노란색, 왕의 그것은 푸른색이나  빨간색..황제의 상징은 용(龍), 왕은 봉황(鳳凰)..황제의 국가는 제국(帝國), 왕의 국가는 왕국이라고 하였다.

 

 

 

 

 

 

 

 

 

                                                   시호(諡號)

 

 

 

시호란 왕이나 황제가 죽으면, 그의 생전의 업적을 평가하여 이름을 붙여주는 제도이다. 삼국시대의 임금들 대부분이 ㅇㅇ왕이라고 하는데, 이때 왕 앞에 있는 ㅇㅇ이 시호이다. 그러나 시호제도는 왕에게 국한된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에는 왕비, 왕의 종친, 정2품이상의 문,무관,공신 등이 죽으면 생전의 행적을 칭송하여 왕이 시호를 내려 주었다. 후대에는 낮은 하급 관직자에게도 시호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충무공(忠武公) 시호만 해도 10여명이 넘으며, 문정공(文貞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은 100명이 훨씬 넘었다.

 

 

 

 

 

 

 

 

 

                                                 묘호(廟號)

 

 

 

묘호는 사망한 임금을 종묘에 모실 때 諡號와 함께 붙여 주는 이름을 말한다. 보통 ㅇ祖,ㅇ宗이라고 부르는 것이 묘호이다.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이라고 할 때 世宗은 묘호이고, 莊憲은 시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묘호의 사용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대개 창업자에게는 조(祖..創業之主는 祖), 그 후계자에게는 종(宗..守城之君은 宗)이 추증되었다.묘호를 추증할 때 어떤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며, 생전의 업적에 따라 지었다.

 

 

묘호도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고려가 몽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황제의 나라인 원나라 입장에서는 왕,제후의 나라인 고려가 묘호를 사용하는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시호만을 사용케 하였으며, 그 시호의 맨 앞에는 몽고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반드시 충(忠)을 들어가게 하였다.

 

 

 

그래서 고려 임금의 계보를 보면 조,종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충ㅇ왕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다시 묘호를 사용하였다. 임금은 여전히 황제의 상징인 용(龍)의 문양을 사용했다. 중국 명나라와의 역학관계에서 겉으로는 사대(事大)를 하면서도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할지.. 체면과 겉 모양을 중요시하는 우리의 허례인지는 모르지만....

 

 

 

 

 

 

 

 

 

 

 

                                         아관파천   俄館播遷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親日 개화파정권이 무너지고 親러派가 정권을 장악했다.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요동반도(遼東半島)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현하였다.

 

 

그러자 1860년 이후 끊임없이 南下政策을 펼치던 러시아는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케 하는 한편 조선의 왕실에도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부심하였다. 그동안 친일개혁파에 눌려있던 민비를 비롯한 척족세력과 구미공사관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러시아 영향력 강화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895년 일본군, 폭도,낭인들을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학살하는 등 "을미사변"을 일으키면서 단발령(斷髮令)을 실시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사업을 재개하였다.

 

민비가 학살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기화로 친미,친러 세력들은 고종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려 하였다. 고종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였다.

 

 

 

                                        춘생문 사건     춘생문 사건

 

 

 

 

 

                                   덕수궁 뒷편 정동에 있던 러시아공사관

 

 

 

 

 

                 아관파천이 일어난 후, 일본군은 러시아공사관 문 앞에 대포까지

                 동원하여, 고종(고종)의 환궁(환궁)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일본군이 대포까지 동원하여 高宗의 환궁(還宮)을 요구하지만, 고종은 이를 거절한다. 

 

 

 

 

 

 

 

           러시아공사관 안에 있는 고종의 침실 및 거실... 고종을 위한 더블베드 하나와

           황태자(후일, 순종)을 위한 싱글베드하나 그리고 응접셋트 하나가 전부이다.

            옆 방에서는 상궁들이 번갈아 기거하면서 고종,황태자의 수발을 들었다.

 

 

 

                                 

 

 

 

 

 

                                             高宗의 친서(親書)

 

 

 

 

  

 

러,일전쟁(露日戰爭)의 강화(講和) 이후,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列强들이 힘써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국가의 황제에게 조선의 自主獨立을 지지해 줄 것과 한일합방조약 이후 대한제국의 상황을 호소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덕국(德國 ..독일)의 황제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로서, 양국의 우호를 다짐함과 아울러 상호 협조를 기약하며 전권공사(全權公使)로 민영익(閔泳翊)을 파견한다는 내용이다.

 

 

 

 

 

 

 

독일황제에게 일본의 조선 자주권 침탈을 폭로하고, 조선의 독립 보장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독일황제 빌헤름 2세

 

 

 

 

 

 

고종이 경운서궁(慶運西宮)에 거처하면서, 러시아(俄羅斯)황제에게 황태자의 탄신을 축하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고종이 前 駐韓 러시아公使 파블로프(巴禹露厚. Pavloff)편에 러시아황제에게 보낸 친서로, 러일전쟁 이전에 조선은 이미 중립을 표명하여 각국의 승인을 받은바 있는데, 전쟁이 심화되어 조선이 무고하게 화를 입었으니 그 정황을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서 잘 설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프랑스(법란서. 法蘭書)공황국에 보내는 고종의 친서로 양국의 우호를 다짐하고, 상호간의 협조를 기약하기 위하여 전권공사(全權公使) 민영익(閔泳翊)을 보낸다는 내용의 고종 친서.

 

 

 

 

 

 

 

 

 

 

                                         高宗과 빌헤름2세 (독일)

 

 

 

 

 

 

 

 

 

 

 

 

 

 

 

 

 

 

 

 

 

 

 

 

 

                                                      황제어새    皇帝御璽  ... 보물 제1618호

 

 

 

 

高宗은 18917년 10월에 大韓帝國을 선포한다. 마치 한(漢)나라가 후한(後漢)으로 이어진 것과 같다는 뜻으로 황제의 연호(年號)도 후한의 개창제(開創帝) 광무제(光武帝)의 연호를 빌려 광무(光武)라고 하였다.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서 국사(國事)에 사용할 국새(國璽), 어새(御璽), 어보(御寶), 보인(寶印) 등을 모두 새로이 제작하였는데, 이들은 현존하는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를 통해 그 실제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 제1618호로 지정된 "황제어새(皇帝御璽)"는 이 책에 수록되어 있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대한제국의 어새류(御璽類)는 그 크기가 대략 10cm 전후로서, 큰 것은 12cm에서 작은 것은 9cm정도인데,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는 크기가 5,3cm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가의 安危가 풍전등화에 놓인 위급한 상황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이 어새(御璽)의 사용실례를 볼 때, 이 御璽가 공개적,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특별한 사정아래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볼 때, 이 어새(御璽)가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등록되지 않고, 또 그 크기가 다른 어새(御璽)들과 비교해 특별하게 작게 만들어졌으며 뿐만아니라 어새를 보관한 함(函)에 인주함(印朱函)까지 함께 들어 있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사용 실례

 

 

 

현재 남아있는 자료를 근거로 고종은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를 1903년부터 1909년까지 모두 15번 사용한 자료가 남아있는데(위 고종의 親書 사진 참조), 주로 비밀외교를 목적으로 발부한 친서(親書)들에 사용한 것들이다.

 

 

즉 러시아황제를 비롯하여 이태리, 프랑스, 오스트리아, 항가리 그리고 독일의 황제 또는 대통령에게 보낸 親書에 사용하였으며, 이는 1903년 이후 러일전쟁 발발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고종이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비밀 오교활동을 펼치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어새(御璽)를 새로 만들 필요성을 가지게 되고,

 

 

기밀의 유지를 위하여 내대신(內大臣)의 직제를 통하지 않고, 황제 자신이 직접 관장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휴대와 비장(秘藏)하기에 적합한 크기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高宗은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를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두 가지 자료가 현존하여 남아 있다.

 

 

즉, 1909년 1월1일 고종은 미국 헐버트공사에 미국으로 유학 간 조카(조남복)을 잘 돌보아 줄 것을 요청하는 친서와 1909년 10월20일 상하이 독일계 은행에 예치한 재산을 찾기 위하여 역시 헐버트에게 준 친서 위임장에 이 황금어새를 사용하였다.  

 

 

 

 

 

 

 

 

즉 고종은 황제 재위 시 여러나라 君主들에게 대한제국의 어려운 처지를 도와 줄 것을 요청하는 친서(親書)에 이 "황제어새"를 사용하였고, 일제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강제로 빼앗긴 이후에도 이 어새(御璽)를 私的으로 지니고 사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高宗 직속의 비밀 정보기관 설치

 

 

 

위와 같은 관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종이 1902년 6월에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라는 이름의 황제 직속의 비밀 정보기관을 창설한 사실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藏書각)에 소장되어 있는 "제국익문사비보장정(帝國益聞社秘報章程)"에 따르면,

 

 

通信社를 가장한 황제직속의 이 국가 정보기관은 서울에 본사를 두고, 61명의 통신원을 두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동경, 오사카, 나가사키, 북경, 상해, 해삼위, 여순 등지에 상주하는 외국 통신원도 9명을 배정하고 있다.

 

 

고종황제가 외국 국가원수들에게 보내는 비밀親書들은 이들 요원들의 손을 거쳐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기관의 창설 시기가 친서의 사용실례에 1년 前 정도라는 점도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해 주고있다. 

 

 

 

 

 

 

 

 

                                              전화로  3年喪을 치른 순종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純宗)은 아버지 고종의 3년상(3年喪)을 전화로 치루었다. 아버지의 묘가 있는 홍릉에 전화를 걸어 매일 아침 전화 수화기에 대고  "아이고, 아이고 " 곡(哭)을 한 것이다. 

 

 

홍릉에 있던 묘지기는 수화기를 高宗의 봉분에 향하게 들어 순종의 곡소리가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 3년상을 전화로 했다는 것이 발상도 기발하지만, 순종의 효심도 지극하다. 조선에서 전화를 가장 처음으로 사용한 王이 고종이었다.  

 

 

일제의 감시로 아버지 고종과 아들인 순종은 살아 있을때에도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高宗이 세상을 떠나자 일본은 일본식으로 제사를 치를 것을 강요한다. 순종은 이같은 일본의 강요에 반대하는 의미로 일본식으로 진행되는 여러 행사에 참석하기를 기피한다.

 

 

 

일본의 감시와 강요속에 아버지의 3년상을 치루기 어렵게 되자 전화를 이용해 그 마음을 전한 것이다, 純宗의 애절한 묘책이었던 것이다.

 

 

 

 

 

 

 

 

 

                                               高宗이 사용한 ...

 

 

 

 

 

 

 

 

 

 

 

                                             고종어차   고종어차

 

 

 

 

                              자동차가 들어오기 전 고종이 타고 다니던 가마 

 

 

 

 

1910년 치욕적인 한일합방에 따라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사내정의)는 자동차를 들여와 타고 다니고 싶어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 타기에 미안하였던지, 고종의 어차(어차)도 같이 들여 오도록 우리 왕실을 부추켜체면을 세우려 했다.

 

 

이렇게 하여 당시 군왕이 탈 수 있는 리무진자동차를 만들던 영국의 다임러사에 고종의 어차를, 그리고 영국의 위슬리사에 총독용 자동차를 각각 주문, 도입했던 것이다. 이 두 대의 자동차가 미로서 이 땅에 자동차시대를 열었던 최초의 자동차로 1911년이었다.

 

 

 

 

                                                      고종 어차

 

 

 

                                               데라우치 총독 차

 

 

 

이 중에서 고종이 타던 다임러리무진은 숱한 고난의 세파를 겪으면서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이 차의 복원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1996년 내한하였던 영국 다임러사의 노장 기술자들이 이 차를 보고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겉만 약간 헐었고 녹이 슬었을뿐, 부품하나 손상되지 않은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이 리무진은 10대만 생산되었던 귀한 차로서 지금까지 한대도 남아오지 않았는데, 한국이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어 영국이나 제작사인 다임러가 모두 부러워하고 탐내는 보물급 유물이 되었다. 고종어차는 6기통, 총독 차는 4기통 엔진을 얹었는데, 특히 고종의 자동차는 뒷부분에 무관들이 올라서서 고종을 호위할 수 있도록 발판이 달려 있었지만 지금은 발판이 없어  부서져 떼어저린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고종 어차

 

 

그 후 1913년 왕실에서는 황태자이었던 순종을 빼놓을수 없어 고종, 순종 용으로 미국 캐딜락 리무진 두대를 더 들여 온다. 그런데 이렇게 들여온 자동차를 고종은 거의 이용하지 않아 순종이 물려 받았고, 순종의 캐딜락은 순종의 妃인 순정효황후가 사용하였다. 이 캐딜락은 2001년부터 5년간 10억원의 비용을 사용하여 복원에 성공,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번시하고 있다. 당시 이 차는 20대밖에 만들지 않았고, 지금은 이 차를 포함하여 전세계에 4대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복원 전  

 

 

 

                                                                             복원 후                                                 

       

 

 

 

 

                                                            고종의 아침 ... 커피

 

 

 

 

 

 

 

 

                                조선 최초의 커피숍 .. 정관헌(정관헌)

 

 

 

 

 

 

 

 

 

 

 

 

 

 

 

 

 

 

 

 

                 고종, 동양 최대의 운산금광을 팔아 넘기고 캐딜락을 구입하다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稱慶記念碑) .. 사적 171호

 

 

 

 

 

 

 

高宗 (재위기간 1863~1907)이 왕으로 즉위한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 안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비석은 귀부(龜部)와 비신(碑身) 그리고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신(碑身) 앞면에는 황태자인 순종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碑文)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윤용선이 짓고, 글씨는 민병석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전(碑殿)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정자(停子)형 건물로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비(碑)를 보호하고 있는 비전(碑殿)은 20세기 초 전통적인 건축양식의 틀이 해체되기 직전에 세워진 건물로 당시 이러한 유형의 건물 중 대단히 아름다운 건물이며, 이 시기에 세워진 덕수궁의 다른 여러 건물과 함께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다고 한다.

 

 

 

 

 

 

                                                기로소    耆老所

 

 

 

기로소(耆老所)는정2품의 文官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서, 고려시절의 기영회(기영회)를 계승한 관제이다. 조선 태조가 60세 되던 해에 친히 기영회(耆英會 .. 후에 耆社로 바뀜)에 들어 갔는데, 이후 왕들이 오래 살지 못하여 기로소에 들어가는 왕이 없자, 숙종과 영조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해서 미리 앞당겨 들어 간 것을 본받아 高宗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숙종이 기로당상(耆老堂上)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있는 장면

 

 

 

 

기로소(耆老所)의 정식 명칭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이며 왕과 조정 元老의 친목, 연회 등을 주관하였으며, 英祖 때 수직관(守直官) 2명과 서리(胥吏) 2명, 고직(庫職) 1명, 사령(使令) 44명, 군사(軍士) 1명을 두었는데 수직관은 승문원(承文院)과 성균관에서 7품 이하의 관원이 차출되었다.

 

 

기로소의 유래는 1394년 조선의 태조가 60세를 넘자 기사(耆社)라는 명예관청을 만들어 文臣과 武臣을 가리지 않고 70세 내외의 2품관 이상의 관료를 선발하여 기사(耆社)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임금 스스로도 이름을 올려 전토(田土), 어전(漁箭), 염전(鹽田)과 노비를 하사하고 군신(君臣)이 함께 어울려 연회를 베풀며 즐기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고려의 기영회(耆英會)을 본 받은 것이다.

 

 

 

太宗이 즉위하면서 이것을 본격적으로 제도화하여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라고 하다가, 1428년에 世宗이 이름을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개칭하였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기로소에 들어 갈 수 있는 자격에 제한을 두어 정경(正卿)으로서 70세 이상된 文신으로 제한하였고, 숙종때에는 이들을 기로당상(耆老堂上)이라 하였으며, 군신(君臣)이 함께 참여하는 기로소의 특성상 관아의 서열에서는 기로소가 으뜸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로소가 맡은 일은 임금의 탄생일과 설날, 종지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왕이 행차할 때에 모여서 하례(賀禮)를 행하거나 중요한 국상의 논의에 참여하여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숙종이 60세 되던 1719년에 기로소에 들어 가면서 경내에 영수각(靈壽閣)을 지었다.

 

 

기로소에 들어가면 녹명안(錄名案)에 이름이 기록되는데, 조선 초,중기의 기록은 모두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후에 다시 편찬한 "기로소제목록후(耆老所題目錄後)"에 의하면 여기에 들어 온 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이었으며, 최고령자는 현종 때의 윤경(尹絅)으로 98세이었고, 다음으로는 숙종 때 97세의 이구원(李久源)과 96세의 민형남(閔馨男) 등이 있었다.

 

 

 

 

 

 

 

 

이 건물의 남쪽에 설치한 문(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 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만세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 문은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떼어 가서 자기 집 대문으로 사용하던 것을 광복 이후 찾아와 복원한 것이다.

 

 

 

 

 

 

 

 

 

                                                                칭경기념비전의 옛 모습

 

 

 

 

 

 

 

 

 

 

 

 

 

 

                                           고종어필    高宗御筆

 

 

 

 

 

 

 

 

 

 

 

 

 

 

 

 

 

 

 

 

 

 

 

 

                              高宗이 추위를 막기 위하여 입었던 저고리

 

 

 

 

 

자주색의 겉감에 흰색으로 안감을 받쳐서 얇게 솜을 두어 3mm정도의 간격으로 정교하게 손으로 누빈 저고리이다. 동정은 없으나 동정부분의 누빈 간격이 5mm정도로 넓어진 것으로 보아 원래 이 위치에 동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옷고름은 누비지 않은 상태이며 넓은 깃에 비하여 고대가 좁고 소매길이가 길어 방한용으로 알맞게 되어있다.  

 

 

 

 

 

 

 

참도 또는 신도, 어도....거칠게 울퉁불퉁 만들었다. 일부러... 후에 단장한 세종대왕릉을 제외하고 모두 그렇다. 저 길을 걸으며 넘어지지 않으려면 아래를 보며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자연히 고개를 숙여야 한다. 죽은 王에 대한 예의이다.

 

 

 

 

 

 

 

 

 

                                            丁字閣 대신 寢殿을 ...

 

 

 

 

 

 

 

 

 

 

  

 

 

 

 

 

정자각 (丁字閣) 대신 침전(寢殿)이다.  그래서 그 내부에는 용상(龍床)이 마련되어 있다. 王이라하더라도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중국 명나라 황제릉을 흉내 내어 설계한 조선 최초의 황제릉.... 그리하여 정자각을 없애고 대신 침전(寢殿)을 세운다.  침전의 의미는 ?  죽어서도 영원히 통치하겠다는 의미인데....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인데.......

 

  

 

 

 

 

 

 

 

 

 

 

 

 

 

                                    고영근 ... 고종의 碑를 지키다

 

 

 

 

 

 

 

 

 

이 비석에 얽힌 얘기는 더욱 애절하다.  고종의 陵에 이름도 붙이지 못하고, "대한고종황제홍릉"이라고 새긴 陵碑는 가마니에 둘둘 쌓여 그대로 비각(碑閣)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 碑가 지금처럼

세워진 것은 4년 후, 경기도 장연(長淵) 군수로 있던 고영근이라는 노인의 노력 덕분이었다.  고영근은 충신으로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하였던 우범선을 암살하고, 감옥에 다녀 온 사람이다. 고영근은 고종이 금곡, 이 곳에 묻히자 능참봉을 자원하여 능지기로 일하고 있었다.

 

 

 

이 碑를 세우는데 4년이나 걸린 이유는...高종을 안장한 후, 이 碑를 세우려 하자, 조선총독부는 반대한다. 세우려면 앞에 전(前)을 더 새겨 넣으라는 압력이었다. 

 

 

 

고영근은 4년동안 아침 저녁으로 거적에 쌓인 陵碑를 바라보다가 일단 세워놓고 보자는 생각에 인부를 불러 모았다. 고영근은 몹씨 추운 날, 어둠을 틈타 목욕재계를 한 후 능비를 세웠다.  고영근은 이제야 高宗의 성은에 보답했다 하면서... 상소문을 들고 純宗이 있는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다.  이 소식에 술렁이던 조정은 이미 세운 碑는 그대로 두고, 고영근을 참봉직에서 파면시키는 것으로 결정한다.  고영근은 홍릉 밖에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이듬해 죽어, 고종의 능 인근에 묻혀 있다.

 

 

  

 

 

 

 

 

 

 

 

 

  

 

 

 

 

 

 

 

 

 

 

 

 

 

 

 

 

 

 

 

 

 

 

 

 

 

 

                                          고종실록   高宗實錄 

                                                                             

 

 

 

 

 

 

 

 

 

 

 

 

 

 

 

 

 

 

 

 

 

 

   

                                        고종 독살설    高宗 毒殺設

 

 

 

 

고종은 1919년 1월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사망하였다. 67세이었다. 高宗의 사망 원인은 당시 일제에 의하여 뇌일혈(腦溢血)로 발표되지만, 그 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毒)때문에 사망하였다는 주장이 사망 당시부터 현재에도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고종독살설은 당대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3,1운동의 배경이 되었지만,  당시의 정국을 살펴보면 근거없는 소문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헤이그밀사 사건 이후,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 난 고종이 의병(義兵)이나 독립운동 세력에게 상징적 球心點이어서, 독립을 위한 무장 봉기를 계획하여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에서 고종을 망명시켜 항일운동을 활성화할 계획이 드러나는 등 일제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는 존재이었다.

 

 

 

 

 

 

 

더구나 고종은 덕수궁에서 망국의 한을 씹으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액의 내탕금 (內帑金...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으로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독살에 관련된 인물로는 이완용, 이기용, 한창수, 윤덕영, 민병석, 한상학등이 있으며, 어의(御醫) 안상호도 의심을 받고 있다. 이들 중 이완용과 이기용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친일파로써, 특히 이완용은 일본왕(日本王) 앞에서 高종을 독살하겠다고 맹세하기도 하였다. 

 

 

독을 탄 음료를 고종에게 직접 전달한 宮女는 일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여러가지 의혹만 있을 뿐, 사건의 실체가 정확히 밝혀진 것응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과 주변의 움직임들을 보아 틀림없을 것이라는 說이 요즈음의 시각이다.

 

 

 

 

 

 

 

 

 

 

 

 

 

 

 

 

 

 

 

 

 

 

 

  

 

 

 

홍릉(洪陵)... 고종(高宗)의 능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재위:1863~1907.. 출생:1852~1919)와 그의 부인 명성황후(1851~1895)민씨가 묻힌 곳이다.  홍릉은 왕릉이 아니라 조선 최초의 황제릉(皇帝陵)이다. 따라서 기왕의 조선 왕릉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高宗의 즉위

 

 

 

 

 

 

 

 

 

고종은 철종4년(1852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高宗이 익종(翼宗 .. 23대 순조의 세자이며, 헌종의 아버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한 것은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순종,헌종,철종의 3대에 걸쳐 세도정치를 한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철종의 후사가 없자 뒤를 이을 국왕의 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지극히 경계하였다. 이때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화(禍)를 피하여 시정(市井)무뢰한과 어울리고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면서 위험을 피하던 이하응은 조성하(趙成夏)를 통하여 궁중 최고의 어른인 趙大妃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哲宗이 죽자 趙大妃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 아들(命福 ..고종)으로 하여금 익종(翼宗)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여 그를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하여 국왕에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고, 흥선군(興宣君)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대섭하게 하였다. 고종은 즉위 후인 1866년 9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곧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이 長成하여 친정(親政)의 의욕을 가지고 차차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 뜻을 헤아린 명성황후와 老大臣들은 유림(儒林)들을 앞세워 대원군의 하야(下野)공세를 피게 되었다.1873년 마침내 서무친재(庶務親裁)의 命을 내려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성명(成命)을 환수하고, 高宗은 통치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환구단    園丘壇  .. 고종 황제즉위식이 거행되었다. 

 

 

 

 

 

 

 

 

 

명칭의 漢字 표기와 독음(讀音)을 환구단(園丘壇)과 원구단(園丘壇 또는 圓丘壇)으로 혼용하던 것을 2005년 문화재청에서 한자 표기는 "고종실록"에 기록된 "園丘壇"으로, 한글 표기는 高宗이 제사를 지낸 1897년 당시 "독립신문"의 표기에 따라 "환구단"으로 정하였다.

 

 

 

 

 

 

 

 

 

 

 

 

 

 

 

 

이 환구단은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으며, 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삼국시대부터 농업의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祈雨祭)르르 국가적으로 거행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제도화된 환구제(園丘祭)는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재위 981~997)때부터라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제천의례를 억제함으로써 世祖 때 환구제가 폐지되었다가 조선을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하고, 高宗이 황제로 즉위하여 천자(天子)가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지금의 환구단은 1897년(고종 34)에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단(壇)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이다. 그 후 단지 내에는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1899년에 축조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봉안(奉安)하였으며,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석고(石鼓)의 몸체에 부각된 용(龍)무늬는 조선 말기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처음 조성된 단지는 1913년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고, 이듬해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축소되었으며, 지금의 황궁우(皇穹宇)는 석고(石鼓)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石造 대문만이 보존되어 조선호텔 경내에 남아있다. 

 

 

 

 

 

 

 

 

 

 

 

 

 

 

 

 

 

 

                                                환구단의 옛날 모습

 

 

 

 

 

 

 

 

 

 

 

 

 

 

 

 

 

 

 

                                                                         홍릉 입구

 

 

 

  

 

 

 

고종은 재위기간 동안 청나라,일본,러시아의 각축 속에서 일련의 개화정책을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제(軍制)를 개혁하고, 젊은 개화파로 구성된 신사유람단(神士遊覽團)과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학습케 하였으며... 1897년에는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세계에 알리고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는 등 근대 자주국가를 이루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907년  일본에의 합병을 의미하는 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세계에 알리고자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실패하고 ...이를 빌미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매국노들과 일제(日帝)에 의하여,  그 해 1907년 7월 20일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12년 후 1월21일 덕수궁에서 승하한다.

 

 

 

 

 

 

 

 

 

 

 

 

 

                                    함녕전    咸寧殿   ... 보물 제82호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황제의 침전(寢殿)이다. 1897년(광무 1)에 지었는데, 1904년(광무 8)에 수리공사를 하던 중 불에 타버렸고,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그 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그리고 이 곳은 高宗이 아들 純宗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1919년 1월21일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듯 바닥에는 카펫트가 깔렸으며, 燈기구도 서양식이다. 동쪽 방에서 고종이 자고, 서쪽 방은 황후의 침실이었으며, 가운데 공간은 왕을 시중들던 상궁들의 침실이었다. 규모는 앞면 3칸, 측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여 평면이 "ㄱ"자형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지붕 모서리에 여러 잡상(雜像)들을 나열한 점은 침전의 건축에 잘 사용하지 않던 특이한 구성이다. 조선 후기의 마지막 寢殿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라고 한다. 

 

 

 

 

 

 

 

 

 

 

 

 

 

 

 

 

 

 

 

 

 

 

                                             왕릉이 아닌 황제릉

 

 

 

 

 

 

 

 

 

명성황후는 1866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1874년 고종의 뒤를 이을 순종을 낳았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자 명성황후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일제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하여 친청(親淸), 친러(親露) 정책을 펴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고 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자객을 보내 1895년 10월8일 경복궁 건천궁에서 민비를 살해한다. 명성황후는 처음에 서울 청량리에 묻히었으나 高宗이 승하하자 이 곳 홍릉에 합장된다.

 

 

 

 

 

 

 

 

 

 

 

 

 

 

 

 

 

 

 

  

 

   

 

이 홍릉은  역대 조선의 왕릉과는 모습이나 형식이 많이 다른 것은 高宗이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면서 왕을 황제로 격상시켰기 때문에 , 능도 명나라 태조의 효릉(曉陵)을 본 따왔다.  국호까지 고치며 황제로 격상시키면서 , 한편 능의 형식은 여전히 중국의 것을 흉내내는 것은 ????  기존의 왕릉과 큰 차이는..... 정자각이 없고 침전(寢殿)이 대신하고, 봉분 주위에 있던 여러 석물(石物)들이 홍살문과 침전 사이에 세우는 것...왕릉의 석물에는 양. 호랑이가 있었으나,  황제릉에는 기린, 코끼리, 해태,사자,낙타,말들을 순서대로 세워놓았다.

 

 

 

 

 

 

 

 

 

 

 

 

 

 

 

 

 

 

 

 

 

 

 

 

 

 

                                                高宗의 장례식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어 일본식으로

 

                                        쓸쓸하게 치루어진 高宗의 장례식

 

 

 

 

 

 

 

 

 

고종의 장례는 1919년 3월3일에 거행되었다.  3.1만세 운동 바로 이틀 후이었다. 온 나라가 만세운동으로 뒤숭숭한 가운데 , 장례식에 참석한 우리나라 사람은 불과 70여명이었고, 이완용,송병준 등 친일파 관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장례를 일본식으로 치루고, 복장도 일본 고유의 상복을 착용하도록 강요하였기 때문에, 순종을 비롯한 宗親들이 참석하기를 기피하였고, 일본은 억지로, 강제로 순종과 종친을 참석시켰다.  한산했던 장례식과는 달리 장례 행렬이 금곡에 도착하였을 때, 길가에는 수만명의 백성들이 나와 통곡을 하였으며, 밤이 되자 지나가는 마을마다 불을 밝혀 고종의 마지막 길을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이 陵은 高宗 스스로 설계하였다

 

 

 

 

 

 

 

高宗은 생존시에 이 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며, 이 릉의 도면을 침전에 두고 틈만 나면 꺼내 보며 좋아 했다고 한다. 고종은 고영희라는 사람을 직접 중국에 보내 명태조(明太祖)의 효릉(曉陵)을  그대로 본땄다. 고종이 죽자 친일파 신하 尹德榮은 금곡은 장례 경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의 홍릉으로 합장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곳 능은 이미 조성이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이 곳에 묻히고 명성황후가 이곳으로 이장하여 합장된다.  그래서 이름도 홍릉이다.

 

 

 

 

 

 

 

 

 

 

  

 

 

 

 

 

왕릉의 석물(石物)들은 조선의 전통 기법으로 세워져 낯설지 않으나, 홍릉이 석물들은 서양의 기법을 동원하여 만들어져  뭔가 이상하고,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高宗의 사진

 

 

 

 

 

 

 

 

 

 

 

 

 

 

 

 

 

 

 

 

 

                                                고종 49세 때의 모습

 

 

 

 

 

 

 

 

 

 

 

 

 

 

 

 

 

 

 

 

 

 

 

 

 

 

 

 

 

 

 

 

 

 

 

 

 

 

 

 

 

 

 

 

 

 

 

 

 

 

 

 

 

 

 

 

 

 

 

 

 

 

 

 

             1898년 미국 화가 "휴버트"가 고종의 반신상을 그린 다음 전신상을 그렸다. 

 

 

 

 

 

 

 

 

 

 

 

 

 

 

 

 

 

                                  패랭이를 쓰고있는 고종 그리고 영친왕 

 

 

 

 

 

 

 

 

 

 

군사관련 행사 등에 입는 활동하기 편한 철릭에 패랭이를 쓰고있는 고종의 모습으로 1902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책에 실린 삽화이다.

 

 

 

 

 

 

 

 

 

 

 

 

 

 

 

 

 

 

 

 

 

 

 

  

 

 

 

 

 

 

 

 

 

 

 

 

 

 

 

 

 

 

 

 

 

 

 

 

 

                                              

 

                                           高宗과 왕실가족 사진

 

 

 

 

 

 

 

 

 

 

 

 

 

 

 

 

1918년 1월21일 촬영한 사진으로 영친왕(英親王)의 일시 귀국을 기념하여 왕실가족이 모여 日食으로  식사를 한 직후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高宗을 중심으로 왼편에 순종과 영친왕 그리고 오른편에 純宗妃 순정효황후 그리고 덕혜옹주의 모습이 담겨 있다. 덕수궁 석조전 안에서 촬영..

 

 

 

 

 

  

 

 

 

 

 

 

 

 

 

 

 

 

 

 

 

 

 

 

 

 

 

 

 

 

 

 

 

 

 

 

 

 

 

 

 

 

 

 

 

 

 

 

 

 

 

 

 

 

 

  

 

 

 

 

 

                                                

 

                                                高宗의 女人들

 

 

 

 

 

 

 

 

 

고종에게는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 어 나이에 죽고 나중에 성인이 된 자녀는 4명 즉, 마지막 임금인 순종(생모, 명성황후), 궁녀 장씨(장귀인)의 소생인 의친왕(의친왕), 영친왕(생모, 순헌황후 엄씨) 그리고 양귀인(양귀인)이 낳은 덕혜옹주(덕혜옹주)뿐이었다.

 

 

 

 

 

 

 

 

 

 

 

                                                                                 명성황후

 

 

 

 

 

 

 

 

 

 

 

 

 

 

 

 

                                                                        양귀인   梁貴人

 

 

 

 

 

 

 

 

 

 

양씨(양씨 .. 1882~1929) ..고종의 6번째 후궁으로 1893년 그녀가 12살 되던 해에 입궐하여 상궁으로 있다고 고종의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덕혜옹주)를 낳았다. 위 사진의 왼쪽 여인.... 아래 사진은 그녀가 48세에 찍은 사진이다. 

 

 

 

 

 

 

 

 

 

 

 

 

 

 

 

 

 

 

 

 

 

 

                                                                        장귀인   張貴人 

 

 

 

 

 

 

 

 

                                                                           義親王을 낳았다

 

 

 

 

 

 

 

 

 

 

 

                                        엄상궁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명성황후가 죽은 뒤에 실질적으로 국모(국모)역할을 하였던 엄귀비(엄귀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그녀는 1854년(철종 5) 11월 증찬정(증찬정) "엄진삼"의 장녀로 태어나 5살의 어린 나이에 경복궁에 들어가 후에 명성황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지밀상궁(지밀상궁)이 되었다.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못생기고 뚱뚱하였던 엄상궁은 후에 황귀비가 된 후 신문화와 신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 등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못 생긴 궁녀에 불과했던 엄상궁이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게 되자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고, 궁궐 밖으로 ?겨 난다. 엄상궁이 32세 때의 일이었다.

 

 

 

 

 

궁녀의 나이로는 늙은 편이었던 엄상궁의 어떤 점이 고종의 승은을 입고 총애를 받은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뛰어난 지략과 대담한 배짱을 가진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소용돌이 속에 있던 고종으로서는 그녀의 두뇌와 지략을 의지했던 듯 싶다. 

 

  

 

 

 

 

 

 

 

 

                                     일본총독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여인과 함께 찍은 엄상궁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지 5일 후 고종은 엄상궁을 궁궐로 다시 불러들인다.명성황후에게 엄상궁이 내?긴 지 10년 후인 때이었다. 나라의 국모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은 궁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고, 그 중심에 엄상궁이 있었다. ... 이 일은 "아관파천"에서 자세히 기술한다.

 

 

 

 

 

 

 

 

 

 

 

 

"아관파천" 이듬해 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으며, 고종의 아기를 임신했던 엄상궁은 44세의 나이에 황제의 아이를 낳는다. 황제의 아들을 낳은 엄상궁은 황귀비(황귀비)로 책봉된다. 순종이 등극하자 마지막 황태자로 책봉되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는 비운을 맞은 영친왕(영친왕)이다.

 

 

 

 

 

 

 

 

                                                   영친왕  영친왕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엄귀비와 고종은 영친왕이 이등박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끌려가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는 해마다 방학 때 영친왕을 조선으로 보내겠다고 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아들을 그리워하던 엄귀비는 1911년 7월20일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王  그리고  皇帝

 

 

 

 

 

 

 

 

 

 高宗은 이웃 청나라, 일본 등과 대등한 국가 위상을 확립하고자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마치 한(漢)나라가 후한(後漢)으로 이어 것과 같다는 뜻으로 황제의 年號도 후한의 개창제(開創帝) 광무제(光武帝)의 年號를 빌려 광무(光武)라 하였다. 그러면 왕과 황제의 차이는 무엇일까?

 

 

 

 

 

 

 

 

 

 

 

                                                       왕 (王)

 

 

 

 

 

王은 우두머리 또는 최고 통치권자를 가르키는 말이다. 보통 군주(君主), 천자(天子), 큰제후(諸候)의 칭호로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왕에 대한 기록상의 용어는 중국 은(殷)나라 갑골문(甲骨文)에 처음 나타나는데....王의 三은 각각 천(天),지(地),인(人)을 의미하며..." ㅣ "는 天,地,人을 하나로 통괄하는 최고의 인격체를 상징한다. 즉 하늘과 땅, 그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이들 모두는 각각하나의 우주이며, 그 각각의 우주를 다스리는 者가 곧 王이라는 것이다.

 

 

 

 

 

 

 

 

 

 

 

 

  

 

                                                    황제 (皇帝)

 

 

 

 

 

황제란 한마디로 王中의 王이란 뜻으로 사용되며, 중국의 경우 진(秦)나라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이후 청나라에 이르는 역대 왕조에 계승되었다. 수백년간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며,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탄생시킨 秦나라 王은 이미 이전의 왕들과 같을 수가 없었다.

 

 

 

 

 

이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황(皇)은 빛나고 빛난다는 의미의 형용사이고, 제(帝)는 자연계와 인간계 모두를 지배하는 최고의 신(神)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따라서 황제란 빛나는 우주의 절대적 지배자라는 뜻이 된다. 왕이라는 칭호는 이때부터 황제라는 이름으로 바뀌는데, 보통 황제로부터 봉토를 하사받은 제후들을 왕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황제와 왕의 用語도 차별이 생겨난다.

 

 

 

 

 

 

 

황제는 자신을 부를 때 짐(朕)이라고 하지만, 왕은 고(孤) 또는 여(予)라고 하며, 황제의 도장은 옥새(玉璽), 왕은 어보(御寶)..신하가 황제를 부를 때에는 폐하(陛下), 왕은 전하(殿下), 신하가 왕에게 절을 할 때에는 세번, 왕에게는 한번을 한다.

 

 

 

황제를 칭송할 때에는 萬歲,萬歲 萬萬歲, 왕에게는 千歲,千歲,千千歲라고 한다. 황제를 계승할 자는 태자(太子), 왕을 계승할 자는 세자(世子)라고 한다.

 

 

 

 

 

 

 

 

 

 

                              위 사진은 1890년에 고종과 순종이 찍은 사진인데,

 

                              아직 대한제국을선포하기 전이므로, 입고있는 곤룡

 

                              포도 황(黃)룡포가 아닌 홍(紅)룡포를 입고 있다.

 

 

 

 

 

 

 

 

 

황제의  죽음은 붕(崩), 왕의 죽음은 몽(夢)...황제의 옷 색갈은 노란색, 왕의 그것은 푸른색이나  빨간색..황제의 상징은 용(龍), 왕은 봉황(鳳凰)..황제의 국가는 제국(帝國), 왕의 국가는 왕국이라고 하였다.

 

 

 

 

 

 

 

 

 

 

 

 

 

 

 

 

 

 

 

 

                                                   시호(諡號)

 

 

 

 

 

 

 

시호란 왕이나 황제가 죽으면, 그의 생전의 업적을 평가하여 이름을 붙여주는 제도이다. 삼국시대의 임금들 대부분이 ㅇㅇ왕이라고 하는데, 이때 왕 앞에 있는 ㅇㅇ이 시호이다. 그러나 시호제도는 왕에게 국한된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에는 왕비, 왕의 종친, 정2품이상의 문,무관,공신 등이 죽으면 생전의 행적을 칭송하여 왕이 시호를 내려 주었다. 후대에는 낮은 하급 관직자에게도 시호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충무공(忠武公) 시호만 해도 10여명이 넘으며, 문정공(文貞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은 100명이 훨씬 넘었다.

 

 

 

 

 

 

 

 

 

 

 

 

 

 

 

 

 

 

 

 

                                                 묘호(廟號)

 

 

 

 

 

 

 

묘호는 사망한 임금을 종묘에 모실 때 諡號와 함께 붙여 주는 이름을 말한다. 보통 ㅇ祖,ㅇ宗이라고 부르는 것이 묘호이다.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이라고 할 때 世宗은 묘호이고, 莊憲은 시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묘호의 사용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대개 창업자에게는 조(祖..創業之主는 祖), 그 후계자에게는 종(宗..守城之君은 宗)이 추증되었다.묘호를 추증할 때 어떤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며, 생전의 업적에 따라 지었다.

 

 

 

 

 

묘호도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고려가 몽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황제의 나라인 원나라 입장에서는 왕,제후의 나라인 고려가 묘호를 사용하는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시호만을 사용케 하였으며, 그 시호의 맨 앞에는 몽고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반드시 충(忠)을 들어가게 하였다.

 

 

 

 

 

 

 

그래서 고려 임금의 계보를 보면 조,종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충ㅇ왕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다시 묘호를 사용하였다. 임금은 여전히 황제의 상징인 용(龍)의 문양을 사용했다. 중국 명나라와의 역학관계에서 겉으로는 사대(事大)를 하면서도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할지.. 체면과 겉 모양을 중요시하는 우리의 허례인지는 모르지만....

 

 

 

 

 

 

 

 

 

 

 

 

 

 

 

 

 

 

 

 

 

 

 

 

                                         아관파천   俄館播遷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親日 개화파정권이 무너지고 親러派가 정권을 장악했다.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요동반도(遼東半島)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현하였다.

 

 

 

 

 

그러자 1860년 이후 끊임없이 南下政策을 펼치던 러시아는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케 하는 한편 조선의 왕실에도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부심하였다. 그동안 친일개혁파에 눌려있던 민비를 비롯한 척족세력과 구미공사관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러시아 영향력 강화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895년 일본군, 폭도,낭인들을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학살하는 등 "을미사변"을 일으키면서 단발령(斷髮令)을 실시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사업을 재개하였다.

 

 

 

민비가 학살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기화로 친미,친러 세력들은 고종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려 하였다. 고종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였다.

 

 

 

 

 

 

 

                                        춘생문 사건     춘생문 사건

 

 

 

 

 

 

 

 

 

 

 

 

                                   덕수궁 뒷편 정동에 있던 러시아공사관

 

 

 

 

 

 

 

 

 

 

 

 

                 아관파천이 일어난 후, 일본군은 러시아공사관 문 앞에 대포까지

 

                 동원하여, 고종(고종)의 환궁(환궁)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일본군이 대포까지 동원하여 高宗의 환궁(還宮)을 요구하지만, 고종은 이를 거절한다. 

 

 

 

 

 

 

 

 

 

 

 

 

 

 

 

 

           러시아공사관 안에 있는 고종의 침실 및 거실... 고종을 위한 더블베드 하나와

 

           황태자(후일, 순종)을 위한 싱글베드하나 그리고 응접셋트 하나가 전부이다.

 

            옆 방에서는 상궁들이 번갈아 기거하면서 고종,황태자의 수발을 들었다.

 

 

 

 

 

 

 

                                 

 

 

 

 

 

 

 

 

 

 

 

                                             高宗의 친서(親書)

 

 

 

 

 

 

 

 

 

 

  

 

 

 

러,일전쟁(露日戰爭)의 강화(講和) 이후,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列强들이 힘써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국가의 황제에게 조선의 自主獨立을 지지해 줄 것과 한일합방조약 이후 대한제국의 상황을 호소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덕국(德國 ..독일)의 황제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로서, 양국의 우호를 다짐함과 아울러 상호 협조를 기약하며 전권공사(全權公使)로 민영익(閔泳翊)을 파견한다는 내용이다.

 

 

 

 

 

 

 

 

 

 

 

 

 

 

 

 

독일황제에게 일본의 조선 자주권 침탈을 폭로하고, 조선의 독립 보장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독일황제 빌헤름 2세

 

 

 

 

 

 

 

 

 

 

 

 

 

 

고종이 경운서궁(慶運西宮)에 거처하면서, 러시아(俄羅斯)황제에게 황태자의 탄신을 축하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고종이 前 駐韓 러시아公使 파블로프(巴禹露厚. Pavloff)편에 러시아황제에게 보낸 친서로, 러일전쟁 이전에 조선은 이미 중립을 표명하여 각국의 승인을 받은바 있는데, 전쟁이 심화되어 조선이 무고하게 화를 입었으니 그 정황을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서 잘 설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프랑스(법란서. 法蘭書)공황국에 보내는 고종의 친서로 양국의 우호를 다짐하고, 상호간의 협조를 기약하기 위하여 전권공사(全權公使) 민영익(閔泳翊)을 보낸다는 내용의 고종 친서.

 

 

 

 

 

 

 

 

 

 

 

 

 

 

 

 

 

 

 

 

 

 

                                         高宗과 빌헤름2세 (독일)

 

 

 

 

 

 

 

 

 

 

 

 

 

 

 

 

 

 

 

 

 

 

 

 

 

 

 

 

 

 

 

 

 

 

 

 

 

 

 

 

 

 

 

 

 

 

 

 

 

 

 

 

 

 

                                                      황제어새    皇帝御璽  ... 보물 제1618호

 

 

 

 

 

 

 

 

 

高宗은 18917년 10월에 大韓帝國을 선포한다. 마치 한(漢)나라가 후한(後漢)으로 이어진 것과 같다는 뜻으로 황제의 연호(年號)도 후한의 개창제(開創帝) 광무제(光武帝)의 연호를 빌려 광무(光武)라고 하였다.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서 국사(國事)에 사용할 국새(國璽), 어새(御璽), 어보(御寶), 보인(寶印) 등을 모두 새로이 제작하였는데, 이들은 현존하는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를 통해 그 실제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 제1618호로 지정된 "황제어새(皇帝御璽)"는 이 책에 수록되어 있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대한제국의 어새류(御璽類)는 그 크기가 대략 10cm 전후로서, 큰 것은 12cm에서 작은 것은 9cm정도인데,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는 크기가 5,3cm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가의 安危가 풍전등화에 놓인 위급한 상황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이 어새(御璽)의 사용실례를 볼 때, 이 御璽가 공개적,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특별한 사정아래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볼 때, 이 어새(御璽)가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등록되지 않고, 또 그 크기가 다른 어새(御璽)들과 비교해 특별하게 작게 만들어졌으며 뿐만아니라 어새를 보관한 함(函)에 인주함(印朱函)까지 함께 들어 있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사용 실례

 

 

 

 

 

 

 

현재 남아있는 자료를 근거로 고종은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를 1903년부터 1909년까지 모두 15번 사용한 자료가 남아있는데(위 고종의 親書 사진 참조), 주로 비밀외교를 목적으로 발부한 친서(親書)들에 사용한 것들이다.

 

 

 

 

 

즉 러시아황제를 비롯하여 이태리, 프랑스, 오스트리아, 항가리 그리고 독일의 황제 또는 대통령에게 보낸 親書에 사용하였으며, 이는 1903년 이후 러일전쟁 발발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고종이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비밀 오교활동을 펼치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어새(御璽)를 새로 만들 필요성을 가지게 되고,

 

 

 

 

 

기밀의 유지를 위하여 내대신(內大臣)의 직제를 통하지 않고, 황제 자신이 직접 관장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휴대와 비장(秘藏)하기에 적합한 크기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高宗은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를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두 가지 자료가 현존하여 남아 있다.

 

 

 

 

 

즉, 1909년 1월1일 고종은 미국 헐버트공사에 미국으로 유학 간 조카(조남복)을 잘 돌보아 줄 것을 요청하는 친서와 1909년 10월20일 상하이 독일계 은행에 예치한 재산을 찾기 위하여 역시 헐버트에게 준 친서 위임장에 이 황금어새를 사용하였다.  

 

 

 

 

 

 

 

 

 

 

 

 

 

 

 

 

 

 

즉 고종은 황제 재위 시 여러나라 君主들에게 대한제국의 어려운 처지를 도와 줄 것을 요청하는 친서(親書)에 이 "황제어새"를 사용하였고, 일제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강제로 빼앗긴 이후에도 이 어새(御璽)를 私的으로 지니고 사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高宗 직속의 비밀 정보기관 설치

 

 

 

 

 

 

 

위와 같은 관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종이 1902년 6월에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라는 이름의 황제 직속의 비밀 정보기관을 창설한 사실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藏書각)에 소장되어 있는 "제국익문사비보장정(帝國益聞社秘報章程)"에 따르면,

 

 

 

 

 

通信社를 가장한 황제직속의 이 국가 정보기관은 서울에 본사를 두고, 61명의 통신원을 두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동경, 오사카, 나가사키, 북경, 상해, 해삼위, 여순 등지에 상주하는 외국 통신원도 9명을 배정하고 있다.

 

 

 

 

 

고종황제가 외국 국가원수들에게 보내는 비밀親書들은 이들 요원들의 손을 거쳐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기관의 창설 시기가 친서의 사용실례에 1년 前 정도라는 점도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해 주고있다. 

 

 

 

 

 

 

 

 

 

 

 

 

 

 

 

 

 

 

                                              전화로  3年喪을 치른 순종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純宗)은 아버지 고종의 3년상(3年喪)을 전화로 치루었다. 아버지의 묘가 있는 홍릉에 전화를 걸어 매일 아침 전화 수화기에 대고  "아이고, 아이고 " 곡(哭)을 한 것이다. 

 

 

 

 

 

홍릉에 있던 묘지기는 수화기를 高宗의 봉분에 향하게 들어 순종의 곡소리가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 3년상을 전화로 했다는 것이 발상도 기발하지만, 순종의 효심도 지극하다. 조선에서 전화를 가장 처음으로 사용한 王이 고종이었다.  

 

 

 

 

 

일제의 감시로 아버지 고종과 아들인 순종은 살아 있을때에도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高宗이 세상을 떠나자 일본은 일본식으로 제사를 치를 것을 강요한다. 순종은 이같은 일본의 강요에 반대하는 의미로 일본식으로 진행되는 여러 행사에 참석하기를 기피한다.

 

 

 

 

 

 

 

일본의 감시와 강요속에 아버지의 3년상을 치루기 어렵게 되자 전화를 이용해 그 마음을 전한 것이다, 純宗의 애절한 묘책이었던 것이다.

 

 

 

 

 

 

 

 

 

 

 

 

 

 

 

 

 

 

 

 

                                               高宗이 사용한 ...

 

 

 

 

 

 

 

 

 

 

 

 

 

 

 

 

 

 

 

 

 

 

 

 

                                             고종어차   고종어차

 

 

 

 

 

 

 

 

 

 

                              자동차가 들어오기 전 고종이 타고 다니던 가마 

 

 

 

 

 

 

 

 

 

1910년 치욕적인 한일합방에 따라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사내정의)는 자동차를 들여와 타고 다니고 싶어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 타기에 미안하였던지, 고종의 어차(어차)도 같이 들여 오도록 우리 왕실을 부추켜체면을 세우려 했다.

 

 

 

 

 

이렇게 하여 당시 군왕이 탈 수 있는 리무진자동차를 만들던 영국의 다임러사에 고종의 어차를, 그리고 영국의 위슬리사에 총독용 자동차를 각각 주문, 도입했던 것이다. 이 두 대의 자동차가 미로서 이 땅에 자동차시대를 열었던 최초의 자동차로 1911년이었다.

 

 

 

 

 

 

 

 

 

 

                                                      고종 어차

 

 

 

 

 

 

 

 

                                               데라우치 총독 차

 

 

 

 

 

 

 

이 중에서 고종이 타던 다임러리무진은 숱한 고난의 세파를 겪으면서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이 차의 복원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1996년 내한하였던 영국 다임러사의 노장 기술자들이 이 차를 보고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겉만 약간 헐었고 녹이 슬었을뿐, 부품하나 손상되지 않은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이 리무진은 10대만 생산되었던 귀한 차로서 지금까지 한대도 남아오지 않았는데, 한국이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어 영국이나 제작사인 다임러가 모두 부러워하고 탐내는 보물급 유물이 되었다. 고종어차는 6기통, 총독 차는 4기통 엔진을 얹었는데, 특히 고종의 자동차는 뒷부분에 무관들이 올라서서 고종을 호위할 수 있도록 발판이 달려 있었지만 지금은 발판이 없어  부서져 떼어저린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고종 어차

 

 

 

 

 

그 후 1913년 왕실에서는 황태자이었던 순종을 빼놓을수 없어 고종, 순종 용으로 미국 캐딜락 리무진 두대를 더 들여 온다. 그런데 이렇게 들여온 자동차를 고종은 거의 이용하지 않아 순종이 물려 받았고, 순종의 캐딜락은 순종의 妃인 순정효황후가 사용하였다. 이 캐딜락은 2001년부터 5년간 10억원의 비용을 사용하여 복원에 성공,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번시하고 있다. 당시 이 차는 20대밖에 만들지 않았고, 지금은 이 차를 포함하여 전세계에 4대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복원 전  

 

 

 

 

 

 

 

 

                                                                             복원 후                                                 

 

       

 

 

 

 

 

 

 

 

 

                                                            고종의 아침 ... 커피

 

 

 

 

 

 

 

 

 

 

 

 

 

 

 

 

 

                                조선 최초의 커피숍 .. 정관헌(정관헌)

 

 

 

 

 

 

 

 

 

 

 

 

 

 

 

 

 

 

 

 

 

 

 

 

 

 

 

 

 

 

 

 

 

 

 

 

 

 

 

 

 

 

 

 

 

                 고종, 동양 최대의 운산금광을 팔아 넘기고 캐딜락을 구입하다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稱慶記念碑) .. 사적 171호

 

 

 

 

 

 

 

 

 

 

 

 

 

 

 

 

高宗 (재위기간 1863~1907)이 왕으로 즉위한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 안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비석은 귀부(龜部)와 비신(碑身) 그리고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신(碑身) 앞면에는 황태자인 순종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碑文)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윤용선이 짓고, 글씨는 민병석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전(碑殿)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정자(停子)형 건물로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비(碑)를 보호하고 있는 비전(碑殿)은 20세기 초 전통적인 건축양식의 틀이 해체되기 직전에 세워진 건물로 당시 이러한 유형의 건물 중 대단히 아름다운 건물이며, 이 시기에 세워진 덕수궁의 다른 여러 건물과 함께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다고 한다.

 

 

 

 

 

 

 

 

 

 

 

 

 

                                                기로소    耆老所

 

 

 

 

 

 

 

기로소(耆老所)는정2품의 文官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서, 고려시절의 기영회(기영회)를 계승한 관제이다. 조선 태조가 60세 되던 해에 친히 기영회(耆英會 .. 후에 耆社로 바뀜)에 들어 갔는데, 이후 왕들이 오래 살지 못하여 기로소에 들어가는 왕이 없자, 숙종과 영조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해서 미리 앞당겨 들어 간 것을 본받아 高宗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숙종이 기로당상(耆老堂上)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있는 장면

 

 

 

 

 

 

 

 

 

기로소(耆老所)의 정식 명칭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이며 왕과 조정 元老의 친목, 연회 등을 주관하였으며, 英祖 때 수직관(守直官) 2명과 서리(胥吏) 2명, 고직(庫職) 1명, 사령(使令) 44명, 군사(軍士) 1명을 두었는데 수직관은 승문원(承文院)과 성균관에서 7품 이하의 관원이 차출되었다.

 

 

 

 

 

기로소의 유래는 1394년 조선의 태조가 60세를 넘자 기사(耆社)라는 명예관청을 만들어 文臣과 武臣을 가리지 않고 70세 내외의 2품관 이상의 관료를 선발하여 기사(耆社)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임금 스스로도 이름을 올려 전토(田土), 어전(漁箭), 염전(鹽田)과 노비를 하사하고 군신(君臣)이 함께 어울려 연회를 베풀며 즐기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고려의 기영회(耆英會)을 본 받은 것이다.

 

 

 

 

 

 

 

太宗이 즉위하면서 이것을 본격적으로 제도화하여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라고 하다가, 1428년에 世宗이 이름을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개칭하였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기로소에 들어 갈 수 있는 자격에 제한을 두어 정경(正卿)으로서 70세 이상된 文신으로 제한하였고, 숙종때에는 이들을 기로당상(耆老堂上)이라 하였으며, 군신(君臣)이 함께 참여하는 기로소의 특성상 관아의 서열에서는 기로소가 으뜸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로소가 맡은 일은 임금의 탄생일과 설날, 종지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왕이 행차할 때에 모여서 하례(賀禮)를 행하거나 중요한 국상의 논의에 참여하여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숙종이 60세 되던 1719년에 기로소에 들어 가면서 경내에 영수각(靈壽閣)을 지었다.

 

 

 

 

 

기로소에 들어가면 녹명안(錄名案)에 이름이 기록되는데, 조선 초,중기의 기록은 모두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후에 다시 편찬한 "기로소제목록후(耆老所題目錄後)"에 의하면 여기에 들어 온 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이었으며, 최고령자는 현종 때의 윤경(尹絅)으로 98세이었고, 다음으로는 숙종 때 97세의 이구원(李久源)과 96세의 민형남(閔馨男) 등이 있었다.

 

 

 

 

 

 

 

 

 

 

 

 

 

 

 

 

 

 

이 건물의 남쪽에 설치한 문(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 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만세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 문은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떼어 가서 자기 집 대문으로 사용하던 것을 광복 이후 찾아와 복원한 것이다.

 

 

 

 

 

 

 

 

 

 

 

 

 

 

 

 

 

 

 

 

                                                                칭경기념비전의 옛 모습

 

 

 

 

 

 

 

 

 

 

 

 

 

 

 

 

 

 

 

 

 

 

 

 

 

 

 

 

 

 

 

 

                                           고종어필    高宗御筆

 

 

 

 

 

 

 

 

 

 

 

 

 

 

 

 

 

 

 

 

 

 

 

 

 

 

 

 

 

 

 

 

 

 

 

 

 

 

 

 

 

 

 

 

 

 

 

 

 

 

 

 

                              高宗이 추위를 막기 위하여 입었던 저고리

 

 

 

 

 

 

 

 

 

 

 

자주색의 겉감에 흰색으로 안감을 받쳐서 얇게 솜을 두어 3mm정도의 간격으로 정교하게 손으로 누빈 저고리이다. 동정은 없으나 동정부분의 누빈 간격이 5mm정도로 넓어진 것으로 보아 원래 이 위치에 동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옷고름은 누비지 않은 상태이며 넓은 깃에 비하여 고대가 좁고 소매길이가 길어 방한용으로 알맞게 되어있다.  

 

 

 

 

 

 

 

 

 

 

 

 

 

 

 

 

참도 또는 신도, 어도....거칠게 울퉁불퉁 만들었다. 일부러... 후에 단장한 세종대왕릉을 제외하고 모두 그렇다. 저 길을 걸으며 넘어지지 않으려면 아래를 보며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자연히 고개를 숙여야 한다. 죽은 王에 대한 예의이다.

 

 

 

 

 

 

 

 

 

 

 

 

 

 

 

 

 

 

 

 

                                            丁字閣 대신 寢殿을 ...

 

 

 

 

 

 

 

 

 

 

 

 

 

 

 

 

 

 

 

 

 

 

 

  

 

 

 

 

 

 

 

 

 

 

 

 

정자각 (丁字閣) 대신 침전(寢殿)이다.  그래서 그 내부에는 용상(龍床)이 마련되어 있다. 王이라하더라도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중국 명나라 황제릉을 흉내 내어 설계한 조선 최초의 황제릉.... 그리하여 정자각을 없애고 대신 침전(寢殿)을 세운다.  침전의 의미는 ?  죽어서도 영원히 통치하겠다는 의미인데....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인데.......

 

 

 

  

 

 

 

 

 

 

 

 

 

 

 

 

 

 

 

 

 

 

 

 

 

 

 

 

 

 

 

 

 

                                    고영근 ... 고종의 碑를 지키다

 

 

 

 

 

 

 

 

 

 

 

 

 

 

 

 

 

 

 

 

이 비석에 얽힌 얘기는 더욱 애절하다.  고종의 陵에 이름도 붙이지 못하고, "대한고종황제홍릉"이라고 새긴 陵碑는 가마니에 둘둘 쌓여 그대로 비각(碑閣)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 碑가 지금처럼

 

세워진 것은 4년 후, 경기도 장연(長淵) 군수로 있던 고영근이라는 노인의 노력 덕분이었다.  고영근은 충신으로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하였던 우범선을 암살하고, 감옥에 다녀 온 사람이다. 고영근은 고종이 금곡, 이 곳에 묻히자 능참봉을 자원하여 능지기로 일하고 있었다.

 

 

 

 

 

 

 

이 碑를 세우는데 4년이나 걸린 이유는...高종을 안장한 후, 이 碑를 세우려 하자, 조선총독부는 반대한다. 세우려면 앞에 전(前)을 더 새겨 넣으라는 압력이었다. 

 

 

 

 

 

 

 

고영근은 4년동안 아침 저녁으로 거적에 쌓인 陵碑를 바라보다가 일단 세워놓고 보자는 생각에 인부를 불러 모았다. 고영근은 몹씨 추운 날, 어둠을 틈타 목욕재계를 한 후 능비를 세웠다.  고영근은 이제야 高宗의 성은에 보답했다 하면서... 상소문을 들고 純宗이 있는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다.  이 소식에 술렁이던 조정은 이미 세운 碑는 그대로 두고, 고영근을 참봉직에서 파면시키는 것으로 결정한다.  고영근은 홍릉 밖에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이듬해 죽어, 고종의 능 인근에 묻혀 있다.

 

 

 

 

 

  

 

 

 

 

 

 

 

 

 

 

 

 

 

 

 

 

 

 

 

 

 

  

 

 

 

 

 

 

 

 

 

 

 

 

 

 

 

 

 

 

 

 

 

 

 

 

 

 

 

 

 

 

 

 

 

 

 

 

 

 

 

 

 

 

 

 

 

 

 

 

 

 

 

 

 

 

 

 

 

                                          고종실록   高宗實錄 

 

                                                                             

 

 

 

 

 

 

 

 

 

 

 

 

 

 

 

 

 

 

 

 

 

 

 

 

 

 

 

 

 

 

 

 

 

 

 

 

 

 

 

 

 

 

 

 

 

 

 

 

   

 

                                        고종 독살설    高宗 毒殺設

 

 

 

 

 

 

 

 

 

고종은 1919년 1월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사망하였다. 67세이었다. 高宗의 사망 원인은 당시 일제에 의하여 뇌일혈(腦溢血)로 발표되지만, 그 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毒)때문에 사망하였다는 주장이 사망 당시부터 현재에도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고종독살설은 당대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3,1운동의 배경이 되었지만,  당시의 정국을 살펴보면 근거없는 소문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헤이그밀사 사건 이후,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 난 고종이 의병(義兵)이나 독립운동 세력에게 상징적 球心點이어서, 독립을 위한 무장 봉기를 계획하여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에서 고종을 망명시켜 항일운동을 활성화할 계획이 드러나는 등 일제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는 존재이었다.

 

 

 

 

 

 

 

 

 

 

 

 

 

 

 

 

더구나 고종은 덕수궁에서 망국의 한을 씹으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액의 내탕금 (內帑金...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으로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독살에 관련된 인물로는 이완용, 이기용, 한창수, 윤덕영, 민병석, 한상학등이 있으며, 어의(御醫) 안상호도 의심을 받고 있다. 이들 중 이완용과 이기용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친일파로써, 특히 이완용은 일본왕(日本王) 앞에서 高종을 독살하겠다고 맹세하기도 하였다. 

 

 

 

 

 

독을 탄 음료를 고종에게 직접 전달한 宮女는 일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여러가지 의혹만 있을 뿐, 사건의 실체가 정확히 밝혀진 것응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과 주변의 움직임들을 보아 틀림없을 것이라는 說이 요즈음의 시각이다.

 

 

 

 

 

 

 

 

 

 

 

 

 

 

 

 

 

 

 

 

 

 

 

 

 

 

 

 

 

 

 

 

 

 

 

 

 

 

 

 

 

 

 

 

 

 

 

 

 

 

 

 

 

  

 

 

 

홍릉(洪陵)... 고종(高宗)의 능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재위:1863~1907.. 출생:1852~1919)와 그의 부인 명성황후(1851~1895)민씨가 묻힌 곳이다.  홍릉은 왕릉이 아니라 조선 최초의 황제릉(皇帝陵)이다. 따라서 기왕의 조선 왕릉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高宗의 즉위

 

 

 

 

 

 

 

 

 

고종은 철종4년(1852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高宗이 익종(翼宗 .. 23대 순조의 세자이며, 헌종의 아버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한 것은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순종,헌종,철종의 3대에 걸쳐 세도정치를 한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철종의 후사가 없자 뒤를 이을 국왕의 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지극히 경계하였다. 이때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화(禍)를 피하여 시정(市井)무뢰한과 어울리고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면서 위험을 피하던 이하응은 조성하(趙成夏)를 통하여 궁중 최고의 어른인 趙大妃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哲宗이 죽자 趙大妃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 아들(命福 ..고종)으로 하여금 익종(翼宗)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여 그를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하여 국왕에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고, 흥선군(興宣君)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대섭하게 하였다. 고종은 즉위 후인 1866년 9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곧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이 長成하여 친정(親政)의 의욕을 가지고 차차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 뜻을 헤아린 명성황후와 老大臣들은 유림(儒林)들을 앞세워 대원군의 하야(下野)공세를 피게 되었다.1873년 마침내 서무친재(庶務親裁)의 命을 내려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성명(成命)을 환수하고, 高宗은 통치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환구단    園丘壇  .. 고종 황제즉위식이 거행되었다. 

 

 

 

 

 

 

 

 

 

명칭의 漢字 표기와 독음(讀音)을 환구단(園丘壇)과 원구단(園丘壇 또는 圓丘壇)으로 혼용하던 것을 2005년 문화재청에서 한자 표기는 "고종실록"에 기록된 "園丘壇"으로, 한글 표기는 高宗이 제사를 지낸 1897년 당시 "독립신문"의 표기에 따라 "환구단"으로 정하였다.

 

 

 

 

 

 

 

 

 

 

 

 

 

 

 

 

이 환구단은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으며, 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삼국시대부터 농업의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祈雨祭)르르 국가적으로 거행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제도화된 환구제(園丘祭)는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재위 981~997)때부터라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제천의례를 억제함으로써 世祖 때 환구제가 폐지되었다가 조선을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하고, 高宗이 황제로 즉위하여 천자(天子)가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지금의 환구단은 1897년(고종 34)에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단(壇)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이다. 그 후 단지 내에는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1899년에 축조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봉안(奉安)하였으며,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석고(石鼓)의 몸체에 부각된 용(龍)무늬는 조선 말기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처음 조성된 단지는 1913년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고, 이듬해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축소되었으며, 지금의 황궁우(皇穹宇)는 석고(石鼓)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石造 대문만이 보존되어 조선호텔 경내에 남아있다. 

 

 

 

 

 

 

 

 

 

 

 

 

 

 

 

 

 

 

                                                환구단의 옛날 모습

 

 

 

 

 

 

 

 

 

 

 

 

 

 

 

 

 

 

 

                                                                         홍릉 입구

 

 

 

  

 

 

 

고종은 재위기간 동안 청나라,일본,러시아의 각축 속에서 일련의 개화정책을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제(軍制)를 개혁하고, 젊은 개화파로 구성된 신사유람단(神士遊覽團)과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학습케 하였으며... 1897년에는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세계에 알리고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는 등 근대 자주국가를 이루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907년  일본에의 합병을 의미하는 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세계에 알리고자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실패하고 ...이를 빌미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매국노들과 일제(日帝)에 의하여,  그 해 1907년 7월 20일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12년 후 1월21일 덕수궁에서 승하한다.

 

 

 

 

 

 

 

 

 

 

 

 

 

                                    함녕전    咸寧殿   ... 보물 제82호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황제의 침전(寢殿)이다. 1897년(광무 1)에 지었는데, 1904년(광무 8)에 수리공사를 하던 중 불에 타버렸고,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그 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그리고 이 곳은 高宗이 아들 純宗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1919년 1월21일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듯 바닥에는 카펫트가 깔렸으며, 燈기구도 서양식이다. 동쪽 방에서 고종이 자고, 서쪽 방은 황후의 침실이었으며, 가운데 공간은 왕을 시중들던 상궁들의 침실이었다. 규모는 앞면 3칸, 측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여 평면이 "ㄱ"자형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지붕 모서리에 여러 잡상(雜像)들을 나열한 점은 침전의 건축에 잘 사용하지 않던 특이한 구성이다. 조선 후기의 마지막 寢殿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라고 한다. 

 

 

 

 

 

 

 

 

 

 

 

 

 

 

 

 

 

 

 

 

 

 

                                             왕릉이 아닌 황제릉

 

 

 

 

 

 

 

 

 

명성황후는 1866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1874년 고종의 뒤를 이을 순종을 낳았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자 명성황후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일제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하여 친청(親淸), 친러(親露) 정책을 펴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고 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자객을 보내 1895년 10월8일 경복궁 건천궁에서 민비를 살해한다. 명성황후는 처음에 서울 청량리에 묻히었으나 高宗이 승하하자 이 곳 홍릉에 합장된다.

 

 

 

 

 

 

 

 

 

 

 

 

 

 

 

 

 

 

 

  

 

   

 

이 홍릉은  역대 조선의 왕릉과는 모습이나 형식이 많이 다른 것은 高宗이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면서 왕을 황제로 격상시켰기 때문에 , 능도 명나라 태조의 효릉(曉陵)을 본 따왔다.  국호까지 고치며 황제로 격상시키면서 , 한편 능의 형식은 여전히 중국의 것을 흉내내는 것은 ????  기존의 왕릉과 큰 차이는..... 정자각이 없고 침전(寢殿)이 대신하고, 봉분 주위에 있던 여러 석물(石物)들이 홍살문과 침전 사이에 세우는 것...왕릉의 석물에는 양. 호랑이가 있었으나,  황제릉에는 기린, 코끼리, 해태,사자,낙타,말들을 순서대로 세워놓았다.

 

 

 

 

 

 

 

 

 

 

 

 

 

 

 

 

 

 

 

 

 

 

 

 

 

 

                                                高宗의 장례식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어 일본식으로

 

                                        쓸쓸하게 치루어진 高宗의 장례식

 

 

 

 

 

 

 

 

 

고종의 장례는 1919년 3월3일에 거행되었다.  3.1만세 운동 바로 이틀 후이었다. 온 나라가 만세운동으로 뒤숭숭한 가운데 , 장례식에 참석한 우리나라 사람은 불과 70여명이었고, 이완용,송병준 등 친일파 관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장례를 일본식으로 치루고, 복장도 일본 고유의 상복을 착용하도록 강요하였기 때문에, 순종을 비롯한 宗親들이 참석하기를 기피하였고, 일본은 억지로, 강제로 순종과 종친을 참석시켰다.  한산했던 장례식과는 달리 장례 행렬이 금곡에 도착하였을 때, 길가에는 수만명의 백성들이 나와 통곡을 하였으며, 밤이 되자 지나가는 마을마다 불을 밝혀 고종의 마지막 길을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이 陵은 高宗 스스로 설계하였다

 

 

 

 

 

 

 

高宗은 생존시에 이 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며, 이 릉의 도면을 침전에 두고 틈만 나면 꺼내 보며 좋아 했다고 한다. 고종은 고영희라는 사람을 직접 중국에 보내 명태조(明太祖)의 효릉(曉陵)을  그대로 본땄다. 고종이 죽자 친일파 신하 尹德榮은 금곡은 장례 경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의 홍릉으로 합장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곳 능은 이미 조성이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이 곳에 묻히고 명성황후가 이곳으로 이장하여 합장된다.  그래서 이름도 홍릉이다.

 

 

 

 

 

 

 

 

 

 

  

 

 

 

 

 

왕릉의 석물(石物)들은 조선의 전통 기법으로 세워져 낯설지 않으나, 홍릉이 석물들은 서양의 기법을 동원하여 만들어져  뭔가 이상하고,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高宗의 사진

 

 

 

 

 

 

 

 

 

 

 

 

 

 

 

 

 

 

 

 

 

                                                고종 49세 때의 모습

 

 

 

 

 

 

 

 

 

 

 

 

 

 

 

 

 

 

 

 

 

 

 

 

 

 

 

 

 

 

 

 

 

 

 

 

 

 

 

 

 

 

 

 

 

 

 

 

 

 

 

 

 

 

 

 

 

 

 

 

 

 

 

 

             1898년 미국 화가 "휴버트"가 고종의 반신상을 그린 다음 전신상을 그렸다. 

 

 

 

 

 

 

 

 

 

 

 

 

 

 

 

 

 

                                  패랭이를 쓰고있는 고종 그리고 영친왕 

 

 

 

 

 

 

 

 

 

 

군사관련 행사 등에 입는 활동하기 편한 철릭에 패랭이를 쓰고있는 고종의 모습으로 1902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책에 실린 삽화이다.

 

 

 

 

 

 

 

 

 

 

 

 

 

 

 

 

 

 

 

 

 

 

 

  

 

 

 

 

 

 

 

 

 

 

 

 

 

 

 

 

 

 

 

 

 

 

 

 

 

                                              

 

                                           高宗과 왕실가족 사진

 

 

 

 

 

 

 

 

 

 

 

 

 

 

 

 

1918년 1월21일 촬영한 사진으로 영친왕(英親王)의 일시 귀국을 기념하여 왕실가족이 모여 日食으로  식사를 한 직후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高宗을 중심으로 왼편에 순종과 영친왕 그리고 오른편에 純宗妃 순정효황후 그리고 덕혜옹주의 모습이 담겨 있다. 덕수궁 석조전 안에서 촬영..

 

 

 

 

 

  

 

 

 

 

 

 

 

 

 

 

 

 

 

 

 

 

 

 

 

 

 

 

 

 

 

 

 

 

 

 

 

 

 

 

 

 

 

 

 

 

 

 

 

 

 

 

 

 

 

  

 

 

 

 

 

                                                

 

                                                高宗의 女人들

 

 

 

 

 

 

 

 

 

고종에게는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 어 나이에 죽고 나중에 성인이 된 자녀는 4명 즉, 마지막 임금인 순종(생모, 명성황후), 궁녀 장씨(장귀인)의 소생인 의친왕(의친왕), 영친왕(생모, 순헌황후 엄씨) 그리고 양귀인(양귀인)이 낳은 덕혜옹주(덕혜옹주)뿐이었다.

 

 

 

 

 

 

 

 

 

 

 

                                                                                 명성황후

 

 

 

 

 

 

 

 

 

 

 

 

 

 

 

 

                                                                        양귀인   梁貴人

 

 

 

 

 

 

 

 

 

 

양씨(양씨 .. 1882~1929) ..고종의 6번째 후궁으로 1893년 그녀가 12살 되던 해에 입궐하여 상궁으로 있다고 고종의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덕혜옹주)를 낳았다. 위 사진의 왼쪽 여인.... 아래 사진은 그녀가 48세에 찍은 사진이다. 

 

 

 

 

 

 

 

 

 

 

 

 

 

 

 

 

 

 

 

 

 

 

                                                                        장귀인   張貴人 

 

 

 

 

 

 

 

 

                                                                           義親王을 낳았다

 

 

 

 

 

 

 

 

 

 

 

                                        엄상궁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명성황후가 죽은 뒤에 실질적으로 국모(국모)역할을 하였던 엄귀비(엄귀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그녀는 1854년(철종 5) 11월 증찬정(증찬정) "엄진삼"의 장녀로 태어나 5살의 어린 나이에 경복궁에 들어가 후에 명성황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지밀상궁(지밀상궁)이 되었다.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못생기고 뚱뚱하였던 엄상궁은 후에 황귀비가 된 후 신문화와 신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 등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못 생긴 궁녀에 불과했던 엄상궁이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게 되자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고, 궁궐 밖으로 ?겨 난다. 엄상궁이 32세 때의 일이었다.

 

 

 

 

 

궁녀의 나이로는 늙은 편이었던 엄상궁의 어떤 점이 고종의 승은을 입고 총애를 받은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뛰어난 지략과 대담한 배짱을 가진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소용돌이 속에 있던 고종으로서는 그녀의 두뇌와 지략을 의지했던 듯 싶다. 

 

  

 

 

 

 

 

 

 

 

                                     일본총독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여인과 함께 찍은 엄상궁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지 5일 후 고종은 엄상궁을 궁궐로 다시 불러들인다.명성황후에게 엄상궁이 내?긴 지 10년 후인 때이었다. 나라의 국모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은 궁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고, 그 중심에 엄상궁이 있었다. ... 이 일은 "아관파천"에서 자세히 기술한다.

 

 

 

 

 

 

 

 

 

 

 

 

"아관파천" 이듬해 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으며, 고종의 아기를 임신했던 엄상궁은 44세의 나이에 황제의 아이를 낳는다. 황제의 아들을 낳은 엄상궁은 황귀비(황귀비)로 책봉된다. 순종이 등극하자 마지막 황태자로 책봉되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는 비운을 맞은 영친왕(영친왕)이다.

 

 

 

 

 

 

 

 

                                                   영친왕  영친왕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엄귀비와 고종은 영친왕이 이등박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끌려가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는 해마다 방학 때 영친왕을 조선으로 보내겠다고 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아들을 그리워하던 엄귀비는 1911년 7월20일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王  그리고  皇帝

 

 

 

 

 

 

 

 

 

 高宗은 이웃 청나라, 일본 등과 대등한 국가 위상을 확립하고자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마치 한(漢)나라가 후한(後漢)으로 이어 것과 같다는 뜻으로 황제의 年號도 후한의 개창제(開創帝) 광무제(光武帝)의 年號를 빌려 광무(光武)라 하였다. 그러면 왕과 황제의 차이는 무엇일까?

 

 

 

 

 

 

 

 

 

 

 

                                                       왕 (王)

 

 

 

 

 

王은 우두머리 또는 최고 통치권자를 가르키는 말이다. 보통 군주(君主), 천자(天子), 큰제후(諸候)의 칭호로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왕에 대한 기록상의 용어는 중국 은(殷)나라 갑골문(甲骨文)에 처음 나타나는데....王의 三은 각각 천(天),지(地),인(人)을 의미하며..." ㅣ "는 天,地,人을 하나로 통괄하는 최고의 인격체를 상징한다. 즉 하늘과 땅, 그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이들 모두는 각각하나의 우주이며, 그 각각의 우주를 다스리는 者가 곧 王이라는 것이다.

 

 

 

 

 

 

 

 

 

 

 

 

  

 

                                                    황제 (皇帝)

 

 

 

 

 

황제란 한마디로 王中의 王이란 뜻으로 사용되며, 중국의 경우 진(秦)나라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이후 청나라에 이르는 역대 왕조에 계승되었다. 수백년간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며,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탄생시킨 秦나라 王은 이미 이전의 왕들과 같을 수가 없었다.

 

 

 

 

 

이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황(皇)은 빛나고 빛난다는 의미의 형용사이고, 제(帝)는 자연계와 인간계 모두를 지배하는 최고의 신(神)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따라서 황제란 빛나는 우주의 절대적 지배자라는 뜻이 된다. 왕이라는 칭호는 이때부터 황제라는 이름으로 바뀌는데, 보통 황제로부터 봉토를 하사받은 제후들을 왕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황제와 왕의 用語도 차별이 생겨난다.

 

 

 

 

 

 

 

황제는 자신을 부를 때 짐(朕)이라고 하지만, 왕은 고(孤) 또는 여(予)라고 하며, 황제의 도장은 옥새(玉璽), 왕은 어보(御寶)..신하가 황제를 부를 때에는 폐하(陛下), 왕은 전하(殿下), 신하가 왕에게 절을 할 때에는 세번, 왕에게는 한번을 한다.

 

 

 

황제를 칭송할 때에는 萬歲,萬歲 萬萬歲, 왕에게는 千歲,千歲,千千歲라고 한다. 황제를 계승할 자는 태자(太子), 왕을 계승할 자는 세자(世子)라고 한다.

 

 

 

 

 

 

 

 

 

 

                              위 사진은 1890년에 고종과 순종이 찍은 사진인데,

 

                              아직 대한제국을선포하기 전이므로, 입고있는 곤룡

 

                              포도 황(黃)룡포가 아닌 홍(紅)룡포를 입고 있다.

 

 

 

 

 

 

 

 

 

황제의  죽음은 붕(崩), 왕의 죽음은 몽(夢)...황제의 옷 색갈은 노란색, 왕의 그것은 푸른색이나  빨간색..황제의 상징은 용(龍), 왕은 봉황(鳳凰)..황제의 국가는 제국(帝國), 왕의 국가는 왕국이라고 하였다.

 

 

 

 

 

 

 

 

 

 

 

 

 

 

 

 

 

 

 

 

                                                   시호(諡號)

 

 

 

 

 

 

 

시호란 왕이나 황제가 죽으면, 그의 생전의 업적을 평가하여 이름을 붙여주는 제도이다. 삼국시대의 임금들 대부분이 ㅇㅇ왕이라고 하는데, 이때 왕 앞에 있는 ㅇㅇ이 시호이다. 그러나 시호제도는 왕에게 국한된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에는 왕비, 왕의 종친, 정2품이상의 문,무관,공신 등이 죽으면 생전의 행적을 칭송하여 왕이 시호를 내려 주었다. 후대에는 낮은 하급 관직자에게도 시호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충무공(忠武公) 시호만 해도 10여명이 넘으며, 문정공(文貞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은 100명이 훨씬 넘었다.

 

 

 

 

 

 

 

 

 

 

 

 

 

 

 

 

 

 

 

 

                                                 묘호(廟號)

 

 

 

 

 

 

 

묘호는 사망한 임금을 종묘에 모실 때 諡號와 함께 붙여 주는 이름을 말한다. 보통 ㅇ祖,ㅇ宗이라고 부르는 것이 묘호이다.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이라고 할 때 世宗은 묘호이고, 莊憲은 시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묘호의 사용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대개 창업자에게는 조(祖..創業之主는 祖), 그 후계자에게는 종(宗..守城之君은 宗)이 추증되었다.묘호를 추증할 때 어떤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며, 생전의 업적에 따라 지었다.

 

 

 

 

 

묘호도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고려가 몽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황제의 나라인 원나라 입장에서는 왕,제후의 나라인 고려가 묘호를 사용하는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시호만을 사용케 하였으며, 그 시호의 맨 앞에는 몽고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반드시 충(忠)을 들어가게 하였다.

 

 

 

 

 

 

 

그래서 고려 임금의 계보를 보면 조,종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충ㅇ왕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다시 묘호를 사용하였다. 임금은 여전히 황제의 상징인 용(龍)의 문양을 사용했다. 중국 명나라와의 역학관계에서 겉으로는 사대(事大)를 하면서도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할지.. 체면과 겉 모양을 중요시하는 우리의 허례인지는 모르지만....

 

 

 

 

 

 

 

 

 

 

 

 

 

 

 

 

 

 

 

 

 

 

 

 

                                         아관파천   俄館播遷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親日 개화파정권이 무너지고 親러派가 정권을 장악했다.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요동반도(遼東半島)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현하였다.

 

 

 

 

 

그러자 1860년 이후 끊임없이 南下政策을 펼치던 러시아는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케 하는 한편 조선의 왕실에도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부심하였다. 그동안 친일개혁파에 눌려있던 민비를 비롯한 척족세력과 구미공사관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러시아 영향력 강화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895년 일본군, 폭도,낭인들을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학살하는 등 "을미사변"을 일으키면서 단발령(斷髮令)을 실시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사업을 재개하였다.

 

 

 

민비가 학살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기화로 친미,친러 세력들은 고종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려 하였다. 고종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였다.

 

 

 

 

 

 

 

                                        춘생문 사건     춘생문 사건

 

 

 

 

 

 

 

 

 

 

 

 

                                   덕수궁 뒷편 정동에 있던 러시아공사관

 

 

 

 

 

 

 

 

 

 

 

 

                 아관파천이 일어난 후, 일본군은 러시아공사관 문 앞에 대포까지

 

                 동원하여, 고종(고종)의 환궁(환궁)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일본군이 대포까지 동원하여 高宗의 환궁(還宮)을 요구하지만, 고종은 이를 거절한다. 

 

 

 

 

 

 

 

 

 

 

 

 

 

 

 

 

           러시아공사관 안에 있는 고종의 침실 및 거실... 고종을 위한 더블베드 하나와

 

           황태자(후일, 순종)을 위한 싱글베드하나 그리고 응접셋트 하나가 전부이다.

 

            옆 방에서는 상궁들이 번갈아 기거하면서 고종,황태자의 수발을 들었다.

 

 

 

 

 

 

 

                                 

 

 

 

 

 

 

 

 

 

 

 

                                             高宗의 친서(親書)

 

 

 

 

 

 

 

 

 

 

  

 

 

 

러,일전쟁(露日戰爭)의 강화(講和) 이후,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列强들이 힘써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국가의 황제에게 조선의 自主獨立을 지지해 줄 것과 한일합방조약 이후 대한제국의 상황을 호소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덕국(德國 ..독일)의 황제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로서, 양국의 우호를 다짐함과 아울러 상호 협조를 기약하며 전권공사(全權公使)로 민영익(閔泳翊)을 파견한다는 내용이다.

 

 

 

 

 

 

 

 

 

 

 

 

 

 

 

 

독일황제에게 일본의 조선 자주권 침탈을 폭로하고, 조선의 독립 보장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독일황제 빌헤름 2세

 

 

 

 

 

 

 

 

 

 

 

 

 

 

고종이 경운서궁(慶運西宮)에 거처하면서, 러시아(俄羅斯)황제에게 황태자의 탄신을 축하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고종이 前 駐韓 러시아公使 파블로프(巴禹露厚. Pavloff)편에 러시아황제에게 보낸 친서로, 러일전쟁 이전에 조선은 이미 중립을 표명하여 각국의 승인을 받은바 있는데, 전쟁이 심화되어 조선이 무고하게 화를 입었으니 그 정황을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서 잘 설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고종 친서.

 

  

 

 

 

 

 

 

 

 

 

 

 

 

프랑스(법란서. 法蘭書)공황국에 보내는 고종의 친서로 양국의 우호를 다짐하고, 상호간의 협조를 기약하기 위하여 전권공사(全權公使) 민영익(閔泳翊)을 보낸다는 내용의 고종 친서.

 

 

 

 

 

 

 

 

 

 

 

 

 

 

 

 

 

 

 

 

 

 

                                         高宗과 빌헤름2세 (독일)

 

 

 

 

 

 

 

 

 

 

 

 

 

 

 

 

 

 

 

 

 

 

 

 

 

 

 

 

 

 

 

 

 

 

 

 

 

 

 

 

 

 

 

 

 

 

 

 

 

 

 

 

 

 

                                                      황제어새    皇帝御璽  ... 보물 제1618호

 

 

 

 

 

 

 

 

 

高宗은 18917년 10월에 大韓帝國을 선포한다. 마치 한(漢)나라가 후한(後漢)으로 이어진 것과 같다는 뜻으로 황제의 연호(年號)도 후한의 개창제(開創帝) 광무제(光武帝)의 연호를 빌려 광무(光武)라고 하였다.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서 국사(國事)에 사용할 국새(國璽), 어새(御璽), 어보(御寶), 보인(寶印) 등을 모두 새로이 제작하였는데, 이들은 현존하는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를 통해 그 실제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 제1618호로 지정된 "황제어새(皇帝御璽)"는 이 책에 수록되어 있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대한제국의 어새류(御璽類)는 그 크기가 대략 10cm 전후로서, 큰 것은 12cm에서 작은 것은 9cm정도인데,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는 크기가 5,3cm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가의 安危가 풍전등화에 놓인 위급한 상황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이 어새(御璽)의 사용실례를 볼 때, 이 御璽가 공개적,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특별한 사정아래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볼 때, 이 어새(御璽)가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등록되지 않고, 또 그 크기가 다른 어새(御璽)들과 비교해 특별하게 작게 만들어졌으며 뿐만아니라 어새를 보관한 함(函)에 인주함(印朱函)까지 함께 들어 있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사용 실례

 

 

 

 

 

 

 

현재 남아있는 자료를 근거로 고종은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를 1903년부터 1909년까지 모두 15번 사용한 자료가 남아있는데(위 고종의 親書 사진 참조), 주로 비밀외교를 목적으로 발부한 친서(親書)들에 사용한 것들이다.

 

 

 

 

 

즉 러시아황제를 비롯하여 이태리, 프랑스, 오스트리아, 항가리 그리고 독일의 황제 또는 대통령에게 보낸 親書에 사용하였으며, 이는 1903년 이후 러일전쟁 발발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고종이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비밀 오교활동을 펼치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어새(御璽)를 새로 만들 필요성을 가지게 되고,

 

 

 

 

 

기밀의 유지를 위하여 내대신(內大臣)의 직제를 통하지 않고, 황제 자신이 직접 관장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휴대와 비장(秘藏)하기에 적합한 크기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高宗은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를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두 가지 자료가 현존하여 남아 있다.

 

 

 

 

 

즉, 1909년 1월1일 고종은 미국 헐버트공사에 미국으로 유학 간 조카(조남복)을 잘 돌보아 줄 것을 요청하는 친서와 1909년 10월20일 상하이 독일계 은행에 예치한 재산을 찾기 위하여 역시 헐버트에게 준 친서 위임장에 이 황금어새를 사용하였다.  

 

 

 

 

 

 

 

 

 

 

 

 

 

 

 

 

 

 

즉 고종은 황제 재위 시 여러나라 君主들에게 대한제국의 어려운 처지를 도와 줄 것을 요청하는 친서(親書)에 이 "황제어새"를 사용하였고, 일제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강제로 빼앗긴 이후에도 이 어새(御璽)를 私的으로 지니고 사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高宗 직속의 비밀 정보기관 설치

 

 

 

 

 

 

 

위와 같은 관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종이 1902년 6월에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라는 이름의 황제 직속의 비밀 정보기관을 창설한 사실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藏書각)에 소장되어 있는 "제국익문사비보장정(帝國益聞社秘報章程)"에 따르면,

 

 

 

 

 

通信社를 가장한 황제직속의 이 국가 정보기관은 서울에 본사를 두고, 61명의 통신원을 두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동경, 오사카, 나가사키, 북경, 상해, 해삼위, 여순 등지에 상주하는 외국 통신원도 9명을 배정하고 있다.

 

 

 

 

 

고종황제가 외국 국가원수들에게 보내는 비밀親書들은 이들 요원들의 손을 거쳐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기관의 창설 시기가 친서의 사용실례에 1년 前 정도라는 점도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해 주고있다. 

 

 

 

 

 

 

 

 

 

 

 

 

 

 

 

 

 

 

                                              전화로  3年喪을 치른 순종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純宗)은 아버지 고종의 3년상(3年喪)을 전화로 치루었다. 아버지의 묘가 있는 홍릉에 전화를 걸어 매일 아침 전화 수화기에 대고  "아이고, 아이고 " 곡(哭)을 한 것이다. 

 

 

 

 

 

홍릉에 있던 묘지기는 수화기를 高宗의 봉분에 향하게 들어 순종의 곡소리가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 3년상을 전화로 했다는 것이 발상도 기발하지만, 순종의 효심도 지극하다. 조선에서 전화를 가장 처음으로 사용한 王이 고종이었다.  

 

 

 

 

 

일제의 감시로 아버지 고종과 아들인 순종은 살아 있을때에도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高宗이 세상을 떠나자 일본은 일본식으로 제사를 치를 것을 강요한다. 순종은 이같은 일본의 강요에 반대하는 의미로 일본식으로 진행되는 여러 행사에 참석하기를 기피한다.

 

 

 

 

 

 

 

일본의 감시와 강요속에 아버지의 3년상을 치루기 어렵게 되자 전화를 이용해 그 마음을 전한 것이다, 純宗의 애절한 묘책이었던 것이다.

 

 

 

 

 

 

 

 

 

 

 

 

 

 

 

 

 

 

 

 

                                               高宗이 사용한 ...

 

 

 

 

 

 

 

 

 

 

 

 

 

 

 

 

 

 

 

 

 

 

 

 

                                             고종어차   고종어차

 

 

 

 

 

 

 

 

 

 

                              자동차가 들어오기 전 고종이 타고 다니던 가마 

 

 

 

 

 

 

 

 

 

1910년 치욕적인 한일합방에 따라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사내정의)는 자동차를 들여와 타고 다니고 싶어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 타기에 미안하였던지, 고종의 어차(어차)도 같이 들여 오도록 우리 왕실을 부추켜체면을 세우려 했다.

 

 

 

 

 

이렇게 하여 당시 군왕이 탈 수 있는 리무진자동차를 만들던 영국의 다임러사에 고종의 어차를, 그리고 영국의 위슬리사에 총독용 자동차를 각각 주문, 도입했던 것이다. 이 두 대의 자동차가 미로서 이 땅에 자동차시대를 열었던 최초의 자동차로 1911년이었다.

 

 

 

 

 

 

 

 

 

 

                                                      고종 어차

 

 

 

 

 

 

 

 

                                               데라우치 총독 차

 

 

 

 

 

 

 

이 중에서 고종이 타던 다임러리무진은 숱한 고난의 세파를 겪으면서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이 차의 복원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1996년 내한하였던 영국 다임러사의 노장 기술자들이 이 차를 보고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겉만 약간 헐었고 녹이 슬었을뿐, 부품하나 손상되지 않은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이 리무진은 10대만 생산되었던 귀한 차로서 지금까지 한대도 남아오지 않았는데, 한국이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어 영국이나 제작사인 다임러가 모두 부러워하고 탐내는 보물급 유물이 되었다. 고종어차는 6기통, 총독 차는 4기통 엔진을 얹었는데, 특히 고종의 자동차는 뒷부분에 무관들이 올라서서 고종을 호위할 수 있도록 발판이 달려 있었지만 지금은 발판이 없어  부서져 떼어저린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고종 어차

 

 

 

 

 

그 후 1913년 왕실에서는 황태자이었던 순종을 빼놓을수 없어 고종, 순종 용으로 미국 캐딜락 리무진 두대를 더 들여 온다. 그런데 이렇게 들여온 자동차를 고종은 거의 이용하지 않아 순종이 물려 받았고, 순종의 캐딜락은 순종의 妃인 순정효황후가 사용하였다. 이 캐딜락은 2001년부터 5년간 10억원의 비용을 사용하여 복원에 성공,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번시하고 있다. 당시 이 차는 20대밖에 만들지 않았고, 지금은 이 차를 포함하여 전세계에 4대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복원 전  

 

 

 

 

 

 

 

 

                                                                             복원 후                                                 

 

       

 

 

 

 

 

 

 

 

 

                                                            고종의 아침 ... 커피

 

 

 

 

 

 

 

 

 

 

 

 

 

 

 

 

 

                                조선 최초의 커피숍 .. 정관헌(정관헌)

 

 

 

 

 

 

 

 

 

 

 

 

 

 

 

 

 

 

 

 

 

 

 

 

 

 

 

 

 

 

 

 

 

 

 

 

 

 

 

 

 

 

 

 

 

                 고종, 동양 최대의 운산금광을 팔아 넘기고 캐딜락을 구입하다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稱慶記念碑) .. 사적 171호

 

 

 

 

 

 

 

 

 

 

 

 

 

 

 

 

高宗 (재위기간 1863~1907)이 왕으로 즉위한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 안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비석은 귀부(龜部)와 비신(碑身) 그리고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신(碑身) 앞면에는 황태자인 순종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碑文)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윤용선이 짓고, 글씨는 민병석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전(碑殿)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정자(停子)형 건물로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비(碑)를 보호하고 있는 비전(碑殿)은 20세기 초 전통적인 건축양식의 틀이 해체되기 직전에 세워진 건물로 당시 이러한 유형의 건물 중 대단히 아름다운 건물이며, 이 시기에 세워진 덕수궁의 다른 여러 건물과 함께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다고 한다.

 

 

 

 

 

 

 

 

 

 

 

 

 

                                                기로소    耆老所

 

 

 

 

 

 

 

기로소(耆老所)는정2품의 文官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서, 고려시절의 기영회(기영회)를 계승한 관제이다. 조선 태조가 60세 되던 해에 친히 기영회(耆英會 .. 후에 耆社로 바뀜)에 들어 갔는데, 이후 왕들이 오래 살지 못하여 기로소에 들어가는 왕이 없자, 숙종과 영조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해서 미리 앞당겨 들어 간 것을 본받아 高宗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숙종이 기로당상(耆老堂上)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있는 장면

 

 

 

 

 

 

 

 

 

기로소(耆老所)의 정식 명칭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이며 왕과 조정 元老의 친목, 연회 등을 주관하였으며, 英祖 때 수직관(守直官) 2명과 서리(胥吏) 2명, 고직(庫職) 1명, 사령(使令) 44명, 군사(軍士) 1명을 두었는데 수직관은 승문원(承文院)과 성균관에서 7품 이하의 관원이 차출되었다.

 

 

 

 

 

기로소의 유래는 1394년 조선의 태조가 60세를 넘자 기사(耆社)라는 명예관청을 만들어 文臣과 武臣을 가리지 않고 70세 내외의 2품관 이상의 관료를 선발하여 기사(耆社)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임금 스스로도 이름을 올려 전토(田土), 어전(漁箭), 염전(鹽田)과 노비를 하사하고 군신(君臣)이 함께 어울려 연회를 베풀며 즐기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고려의 기영회(耆英會)을 본 받은 것이다.

 

 

 

 

 

 

 

太宗이 즉위하면서 이것을 본격적으로 제도화하여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라고 하다가, 1428년에 世宗이 이름을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개칭하였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기로소에 들어 갈 수 있는 자격에 제한을 두어 정경(正卿)으로서 70세 이상된 文신으로 제한하였고, 숙종때에는 이들을 기로당상(耆老堂上)이라 하였으며, 군신(君臣)이 함께 참여하는 기로소의 특성상 관아의 서열에서는 기로소가 으뜸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로소가 맡은 일은 임금의 탄생일과 설날, 종지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왕이 행차할 때에 모여서 하례(賀禮)를 행하거나 중요한 국상의 논의에 참여하여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숙종이 60세 되던 1719년에 기로소에 들어 가면서 경내에 영수각(靈壽閣)을 지었다.

 

 

 

 

 

기로소에 들어가면 녹명안(錄名案)에 이름이 기록되는데, 조선 초,중기의 기록은 모두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후에 다시 편찬한 "기로소제목록후(耆老所題目錄後)"에 의하면 여기에 들어 온 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이었으며, 최고령자는 현종 때의 윤경(尹絅)으로 98세이었고, 다음으로는 숙종 때 97세의 이구원(李久源)과 96세의 민형남(閔馨男) 등이 있었다.

 

 

 

 

 

 

 

 

 

 

 

 

 

 

 

 

 

 

이 건물의 남쪽에 설치한 문(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 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만세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 문은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떼어 가서 자기 집 대문으로 사용하던 것을 광복 이후 찾아와 복원한 것이다.

 

 

 

 

 

 

 

 

 

 

 

 

 

 

 

 

 

 

 

 

                                                                칭경기념비전의 옛 모습

 

 

 

 

 

 

 

 

 

 

 

 

 

 

 

 

 

 

 

 

 

 

 

 

 

 

 

 

 

 

 

 

                                           고종어필    高宗御筆

 

 

 

 

 

 

 

 

 

 

 

 

 

 

 

 

 

 

 

 

 

 

 

 

 

 

 

 

 

 

 

 

 

 

 

 

 

 

 

 

 

 

 

 

 

 

 

 

 

 

 

 

                              高宗이 추위를 막기 위하여 입었던 저고리

 

 

 

 

 

 

 

 

 

 

 

자주색의 겉감에 흰색으로 안감을 받쳐서 얇게 솜을 두어 3mm정도의 간격으로 정교하게 손으로 누빈 저고리이다. 동정은 없으나 동정부분의 누빈 간격이 5mm정도로 넓어진 것으로 보아 원래 이 위치에 동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옷고름은 누비지 않은 상태이며 넓은 깃에 비하여 고대가 좁고 소매길이가 길어 방한용으로 알맞게 되어있다.  

 

 

 

 

 

 

 

 

 

 

 

 

 

 

 

 

참도 또는 신도, 어도....거칠게 울퉁불퉁 만들었다. 일부러... 후에 단장한 세종대왕릉을 제외하고 모두 그렇다. 저 길을 걸으며 넘어지지 않으려면 아래를 보며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자연히 고개를 숙여야 한다. 죽은 王에 대한 예의이다.

 

 

 

 

 

 

 

 

 

 

 

 

 

 

 

 

 

 

 

 

                                            丁字閣 대신 寢殿을 ...

 

 

 

 

 

 

 

 

 

 

 

 

 

 

 

 

 

 

 

 

 

 

 

  

 

 

 

 

 

 

 

 

 

 

 

 

정자각 (丁字閣) 대신 침전(寢殿)이다.  그래서 그 내부에는 용상(龍床)이 마련되어 있다. 王이라하더라도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중국 명나라 황제릉을 흉내 내어 설계한 조선 최초의 황제릉.... 그리하여 정자각을 없애고 대신 침전(寢殿)을 세운다.  침전의 의미는 ?  죽어서도 영원히 통치하겠다는 의미인데....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인데.......

 

 

 

  

 

 

 

 

 

 

 

 

 

 

 

 

 

 

 

 

 

 

 

 

 

 

 

 

 

 

 

 

 

                                    고영근 ... 고종의 碑를 지키다

 

 

 

 

 

 

 

 

 

 

 

 

 

 

 

 

 

 

 

 

이 비석에 얽힌 얘기는 더욱 애절하다.  고종의 陵에 이름도 붙이지 못하고, "대한고종황제홍릉"이라고 새긴 陵碑는 가마니에 둘둘 쌓여 그대로 비각(碑閣)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 碑가 지금처럼

 

세워진 것은 4년 후, 경기도 장연(長淵) 군수로 있던 고영근이라는 노인의 노력 덕분이었다.  고영근은 충신으로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하였던 우범선을 암살하고, 감옥에 다녀 온 사람이다. 고영근은 고종이 금곡, 이 곳에 묻히자 능참봉을 자원하여 능지기로 일하고 있었다.

 

 

 

 

 

 

 

이 碑를 세우는데 4년이나 걸린 이유는...高종을 안장한 후, 이 碑를 세우려 하자, 조선총독부는 반대한다. 세우려면 앞에 전(前)을 더 새겨 넣으라는 압력이었다. 

 

 

 

 

 

 

 

고영근은 4년동안 아침 저녁으로 거적에 쌓인 陵碑를 바라보다가 일단 세워놓고 보자는 생각에 인부를 불러 모았다. 고영근은 몹씨 추운 날, 어둠을 틈타 목욕재계를 한 후 능비를 세웠다.  고영근은 이제야 高宗의 성은에 보답했다 하면서... 상소문을 들고 純宗이 있는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빌었다.  이 소식에 술렁이던 조정은 이미 세운 碑는 그대로 두고, 고영근을 참봉직에서 파면시키는 것으로 결정한다.  고영근은 홍릉 밖에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이듬해 죽어, 고종의 능 인근에 묻혀 있다.

 

 

 

 

 

  

 

 

 

 

 

 

 

 

 

 

 

 

 

 

 

 

 

 

 

 

 

  

 

 

 

 

 

 

 

 

 

 

 

 

 

 

 

 

 

 

 

 

 

 

 

 

 

 

 

 

 

 

 

 

 

 

 

 

 

 

 

 

 

 

 

 

 

 

 

 

 

 

 

 

 

 

 

 

 

                                          고종실록   高宗實錄 

 

                                                                             

 

 

 

 

 

 

 

 

 

 

 

 

 

 

 

 

 

 

 

 

 

 

 

 

 

 

 

 

 

 

 

 

 

 

 

 

 

 

 

 

 

 

 

 

 

 

 

 

   

 

                                        고종 독살설    高宗 毒殺設

 

 

 

 

 

 

 

 

 

고종은 1919년 1월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사망하였다. 67세이었다. 高宗의 사망 원인은 당시 일제에 의하여 뇌일혈(腦溢血)로 발표되지만, 그 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毒)때문에 사망하였다는 주장이 사망 당시부터 현재에도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고종독살설은 당대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3,1운동의 배경이 되었지만,  당시의 정국을 살펴보면 근거없는 소문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헤이그밀사 사건 이후,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 난 고종이 의병(義兵)이나 독립운동 세력에게 상징적 球心點이어서, 독립을 위한 무장 봉기를 계획하여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에서 고종을 망명시켜 항일운동을 활성화할 계획이 드러나는 등 일제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는 존재이었다.

 

 

 

 

 

 

 

 

 

 

 

 

 

 

 

 

더구나 고종은 덕수궁에서 망국의 한을 씹으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액의 내탕금 (內帑金...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으로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독살에 관련된 인물로는 이완용, 이기용, 한창수, 윤덕영, 민병석, 한상학등이 있으며, 어의(御醫) 안상호도 의심을 받고 있다. 이들 중 이완용과 이기용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친일파로써, 특히 이완용은 일본왕(日本王) 앞에서 高종을 독살하겠다고 맹세하기도 하였다. 

 

 

 

 

 

독을 탄 음료를 고종에게 직접 전달한 宮女는 일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여러가지 의혹만 있을 뿐, 사건의 실체가 정확히 밝혀진 것응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과 주변의 움직임들을 보아 틀림없을 것이라는 說이 요즈음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