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군, 윤봉길과 함께 3대 의사는?잊혀져가는 우국지사(憂國之士), 왈우 강우규 의사
[서울톡톡] 서울역 광장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동상, 폭탄을 오른손에 든 채 비장함이 가득한 표정이 마치 당장이라도 행동을 취할 기세다. 동상 아래에는 '왈우 강우규 의사'란 이름과 함께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어찌 감회가 없으리오(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壹無感想)'란 의미심장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에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 형장에서 강우규 의사가 순국 직전에 남긴 유시'란 글귀가 있다.
그런데 왜 동상이 여기 구 서울역 광장에 세워졌을까? 그리고 오른손에 움켜쥔 저 폭탄은 누구를 겨냥할 것일까?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구 서울역)에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제3대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맞이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수천 군중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다수가 조선인이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사이토의 환영 행렬에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발발해 애국운동이 고취된 상황에서 힘을 모아도 모자를 판에 억지로 웃으며 적의 수장을 맞이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누구 하나 대항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 없어 그저 속으로 분통만 터트리고 있을 즈음, 갑자기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이토가 열렬히 환영을 받으며 서울 땅을 밟은 뒤 마지막으로 마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누군가 참다못해 울분을 터뜨리듯 폭탄이 던져진 것이다. 순식간에 축제와 같았던 신임총독 환영 행사는 아수라장이 됐고, 군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쉽게도 폭탄은 사이토를 비껴갔다. 외려 사이토 총독 주변에 있던 수행원, 일본경찰, 신문기자 등 37명이 다치거나 죽었을 뿐 총독에게는 가벼운 상처만 남겼다.
1919년 9월 2일 제3대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목표로 폭탄을 던진 왈우 강우규 의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강우규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 그 이듬해인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강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강의사는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자들 사이에선 꽤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학계에서 안중근, 윤봉길 의사와 함께 3대 의사로 꼽힌다. 조국을 위한 그의 죽음이 이제라도 안중근, 윤봉길 의사와 같은 맥락에서 조명되는 것이 강우규 의사에 대한 명예회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65세의 나이에 청년의 용기로 조국을 위해 몸 바친 강우규 의사 강우규(1855~1920)의사는 65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은 용기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또한 나라 잃은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그는 무엇보다도 청년교육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조국을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의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는 게 그의 한결같은 지론이었다.
특히 서울역 의거를 시도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같은 청년교육을 위해서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그동안 가르친 교육을 실천함으로써 살아있는 교육자의 본이 되고자 의거를 택했던 것이다.
서울역 광장에 저렇게 외롭게 홀로 서 있는 강우규 의사는 결코 외롭지가 않다. 그는 날로 발전하는 조국을 지켜보며 날마다 여기 광장을 찾는 수많은 군중과 무언의 대화를 하고 있다. 그 대화는 우리 대한민국을 세계 속의 대한민국, 아니 대한민국 품속에 전 세계를 담는 거대한 한국을 일궈낼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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