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초대 개인전
김정희 초대 개인전 ”Creative Abstraction” 전시기간: 2013년 08월 01일 – 08월 17일 전시 오프닝: 2013년 08월 03일 (토요일) 오후 5시 장소: Fremont Gallery (812 Fremont Ave. #100, S. Pasadena, CA 91030) 연락처: +1 626-403-9901 juhkim88@naver.com 한국의 추상미술 캘리포니아를 만나다. “공(空, nothing)”은 한국뿐 아니라 동양의 정신사에 단단한 기둥처럼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왔다.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한마디의 정의가 아닌 시대와 상황에 따라 무수히 많은 설명과 이해가 이루어지는 그 자체 유기체와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개념이며 사상이다. 즉, 존재와 비 존재, 있음과 없음, 비움과 채움과 같이 서로 반하는 의미들이 공존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자면 존재도 아니고 비 존재도 아니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이 바로 공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양분화 하는 논리로는 절대 설명될 수 없다. 모든 존재의 가능성으로서 공은 정신과 물질이 구분될 수 없는 그 자체 하나로 합쳐져 있는 시공간적인 상태이자 순간이다 . 이러한 공사상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한국 추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 온 김정희 작가의 개인전이 오는 8월 1일부터 캘리포니아 파사드나 (Pasadena)에 위치한 Fremont 갤러리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이민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는 캘리포니아의 문화와 미술은 그 기후만큼이나 추상에 대한 열정이 강렬하다. 그들에 있어 추상은 자국의 문화와 경험을 바탕으로 캘리포니아의 환경을 극복하고 융화되어 가는 일종의 육체적, 정신적 융합의 과정이다. 따라서 미국의 짧은 역사에 비해 미국 추상미술은 그 자체 역사를 자랑한다. 유럽에서도 추상미술의 깊이와 개념을 미국의 추상미술에서 찾을 정도로 일찍이 그 가치는 인정받았다. 따라서 ‘창조적 추상 (Creative Abstraction)”이란 타이틀로 캘리포니아 현지에서 진행될 김정희 작가의 전시는 한국 추상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매우 뜻 깊은 의미를 지닌다. 김정희 작가의 추상은 단순히 그리는 행위와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추상은 그 자체 삶에 대해 그리고 그를 둘러싼 주변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사고 행위다. 작가는 지나치기 쉬운 거리의 풍경이라든지 사람들의 표정 혹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들을 명상하듯이 바라본다. 단단한 콘크리트를 뚫고 생명의 싹을 틔운 잡초에 의해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저 깊은 산속에서 때에 따라 피고 지는 이름없는 수많은 식물들에 의해 우리는 존재한다. 요컨대 그것이 생명이 없는 무생물까지도 포함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에게 의지하여 존재한다. 내가 있어 네가 있고, 네가 있어 내가 있고 해서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이러한 삶의 태도와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이야말로 김정희 작가의 추상행위의 근간이기도 하다. 공사상이 작가의 철학적 바탕을 이루고 있다면 위의 연기는 행위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일상에서 얻어진 수없이 많은 경험과 기억의 정보들은 화려한 색으로 바탕에 옮겨진다. 모든 것은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작가의 경험들은 타자에게 이어지고 타자의 그것은 다시 작가의 경험과 기억들로 이어진다. 작가 작품이 지니고 있는 화려하면서도 거친 바탕은 바로 서로가 서로에 의해 원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인간 삶의 고독과 번뇌로 가득하다. 그리고 작가는 명상을 하듯 그 모든 희로애락 들을 지운다. 아니 비운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렇게 작가의 작품은 비우고 또 그 비움을 통해 삶의 새로운 에너지와 시작의 가능성들을 보여준다.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추상이 자국의 문화와 새로운 환경과의 극복과 적응으로 이루어졌다면 김정희 작가의 추상은 모든 대상을 원인으로 바라보고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삶의 에너지를 순화시키는 일종의 사고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추상을 단순히 형식적으로만 바라 봤을 때 이러한 차이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김정희 작가가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한국의 창조적 추상은 단순히 그리는 행위와 장르적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 사고하는 행위에서 시작되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 추상은 단순히 형용사와 명사의 범주가 아니라 동사로 기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추상에 국적을 두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겠지만, 그 행위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문화화 환경은 매우 긴밀하면서 깊숙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희 작가의 추상은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이 캘리포니아를 만났을 때, 캘리포니아 현지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그리고 한국의 화단에는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지 사뭇 기대가 크다. 작품평 창조적 추상에 내재된 이중적 공존과 관계투사 임대식 (아트사이드 큐레이터, 미술비평) 시각예술을 대표하고 있는 미술은 일반적으로 시 감각의 예민함 때문에 보여지는 대상에 대한 분석과 표현의 방법이 매우 치밀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각은 그 명확함과 사실성을 지닌 감각임에 비해 오히려 경험에서 비롯된 기억이나 간접적 체험인 학습효과에 의해 왜곡된 이해의 가능성을 지닌 감각이기도 하다. 물론, 다른 감각기관 역시 받아들이는 정보와 이미 지니고 있는 정보와의 매치과정에서 왜곡된 이해가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가장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는 시 감각에서도 왜곡된 이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미술에 있어 시각의 왜곡된 이해가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는 정도의 극단적인 사실적 표현과 대상을 느끼고 인식하는 사고행위의 결과에 대한 표현. 이렇게 크게 양극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의 표현 방법이 대립적이거나 반대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미술이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작가의 인식적 틀에 의해 이해하고 표현하는 과정은 모두 같기 때문이다. 확대경을 통해 바라볼 정도의 극단적인 사실적 표현은 우리의 눈이 볼 수 있는 대상의 일차적인 형태를 넘어 그 대상을 이루고 있는 가장 세밀한 요소까지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는 시 감각의 한계에 의해 발생하는 왜곡된 이해에 대한 극복의 반영이다. 모든 물질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원리와 요소가 정신으로 치환될 수 있음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대상을 인식하는 사고행위의 결과로서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추상미술은 단순히 그것이 지닌 형식과 지극히 작가 개인적인 성향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것을 사고행위의 결과라고 하는 미술의 커다란 형식적 근거를 놓고 본다면 추상미술을 단순히 형식에 함몰시키거나 뻔한 작가주의에 고립시킬 수 는 없다. 어쩌면 추상미술이야말로 시대를 살고 경험하고 있는 작가들의 진정한 메시지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대상의 객관적 가치를 넘어 인간 삶의 가치와 깨달음에 대한 표현으로서 시 감각의 맹목적인 믿음에 의해 발생하는 왜곡된 이해를 극복하는 과정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공(空, Nothing), 추상의 에너지로서 사고행위 김정희 (Junghi Kim)는 이와 같은 사고행위의 결과로서 추상에 대해 대상을 설명하고 꾸미기 위한 형용사나 그 자체 하나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 명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행위 하는 동사로 이해하는 작가다. 작가는 자신과 물질적 환경, 타인 그리고 그 자신의 정신과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사고한다. 즉, 추상한다. 사고는 그 자체의 특성에 따라 그 결과가 또 다시 다른 관계들과 연결되고 그 끝은 또 다시 다른 관계들로 연결되는 매우 지루한 반복 행위다. 다시 말해 사고는 사건의 결과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질문을 찾는 행위다. 그녀의 작품들이 시작은 바로 이 지점이다. 단순히 그리는 행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경험들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본질적인 질문에서부터 그녀의 회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 바탕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색과 행위의 흔적들은 그 본질적인 질문을 쫓는 과정이다. 거기엔 집을 나서며 그녀가 바라본 건물이라든지 지나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라든지 시멘트 사이에 피어난 들풀이라든지 자신이 의식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녀의 시선을 통해 뇌리에 남겨진 수없이 많은 이미지들이 있다. 또한, 그것은 이미지들이 의미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찾는 행위이며 색들이다. 때로는 화려하고, 때로는 복잡한 구조를 띄거나 색들이 뜨거울 정도로 엉켜져 있지만, 그 바탕의 이미지들은 우리 삶의 이면에 드리워져 있는 고통과 분노, 즐거움과 같이 수없이 많은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다. 김정희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모든 감정의 고통을 바로 우리의 생 자체에 두고 있다. 우리에게 행복한 감정을 가져다 주는 사랑이라는 감정 조차도 수 없이 많은 고통의 감정에 둘러싸여 있음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살고 있음에 대한 감정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작가는 작품의 바탕에 펼쳐져 있는 색과 행위들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지우면서 마음을 비우고 그 비워지는 과정에서 삶의 고통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발견한다. 이 지우는 행위야 말로 작가에 있어서는 궁극의 즐거움이며 사고행위 즉, 추상의 정점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추상행위의 근거를 공(空)에서 찾는다. “공(空, nothing)”은 한국뿐 아니라 동양의 정신사에 단단한 기둥처럼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왔다.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한마디의 정의가 아닌 시대와 상황에 따라 무수히 많은 설명과 이해가 이루어지는 그 자체 유기체와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개념이며 사상이다. 즉, 존재와 비 존재, 있음과 없음, 비움과 채움과 같이 서로 반하는 의미들이 공존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자면 존재도 아니고 비 존재도 아니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이 바로 공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양분화 하는 논리로는 절대 설명될 수 없다. 모든 존재의 가능성으로서 공은 정신과 물질이 구분될 수 없는 그 자체 하나로 합쳐져 있는 시공간적인 상태이자 순간이다. 작가는 2011년부터 이 공에 대한 사상들을 작품으로 실험해 왔고 지움과 비움의 표현기법을 통해 공사상의 조형언어를 완성했다. 연기(緣起, Causalities), 추상의 방법으로서 관계투사 김정희의 지움과 비움을 형성하는 또 다른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추상의 방법론으로서 관계투사에서 찾을 수 있다. 관계투사는 말 그대로 서로 다른 개체들이 관계를 통해 서로 호응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러한 호응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적 존재를 포함하여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있거나 존재하지 못한다는 연기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장자는 호접몽에서 이 세계가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 허구임을 깨닫는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는 충분히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철저하게 실체에 대해 집착한다. 분명히 우리의 고통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또한, 그것을 해결해 줄 절대적 실체를 갈망하며 자신 또한, 명확한 하나의 실체임을 굳게 믿고 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음에 대해 수없이 되 내이고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고 정신이다. 작가는 이러한 실체에 관한 믿음 즉,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시작된 구별의 세계를 부정한다. 그것은 구별이 아니라 서로의 융합적 관계를 방해하는 치명적인 사고행위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표현 방법으로서 관계투사는 행위에서 행위로 동시에 이어지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지는 순간 진행되는 표현기법이자 인식방법이다. 다시 말해 연기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유이며 방식이다. 자아가 구별되지 않는 무분별의 세계. 그것은 바로 정신과 물질이 합일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호응하는 세계를 말한다. 양쪽을 동시에 부정하는 순간이다. 있지 않고 없다. 있다를 부정한 후에 없다는 개념을 순차적으로 가져왔을 경우 없음이라는 실체가 생긴다. 이는 공이 아니다. 따라서 작가는 관계투사를 통해 그리는 행위와 지우는 행위를 동시에 진행한다. 그리는 것이 지우는 것이며 지우는 것이 곧 그리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이 세계를 이음새 마다 구슬이 달려 있는 한없이 넓은 그물인 인드라 그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구슬들은 서로를 비추고 비춤을 받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구슬은 이 세상의 인간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세상 만물을 의미한다. 이 세계는 그물과 같이 서로서로 얽혀있으며 심지어 미생물 조차도 인드라망의 한 구슬로 얽혀있음을 감안한다면 세상에서 나를 비추지 않는 것이 없으며 반대로 나는 이 세상 만물을 비추고 있다. 이 구슬에 먼지가 끼면 구슬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작가는 추상 행위를 통해 자신의 구슬에 낀 먼지를 닦아낸다. 추상의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창조적 추상 공사상과 관계투사에 의해 완성된 김정희의 작품은 창조적 추상으로 설명된다. 창조적 추상은 김정희의 작품이 하나의 형식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는 생명에너지로서 최초의 떨림이 어떠한 정신이나 물질과 같이 가능성을 만났을 때 그 에너지는 가능성에 의해 전혀 새로운 존재로 창조된다. 공이야 말로 바로 그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에너지다. 따라서 공사상을 바탕으로 진행되고 있는 김정희의 추상은 창조적 추상이다. 기존의 추상 개념이 회화의 형식이라든지 장르에 한정되어 있었다면 김정희의 창조적 추상은 그 개념을 뛰어넘는다. 그에게 있어 추상은 회화의 정신활동에 보다 더 깊은 관계를 지닌다. 즉,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과정 즉, 철학적 행위다. 또한, 관객들이 작가의 작품을 통해 그 사고의 흐름과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메시지를 추출해 내는 행위 역시 같은 개념으로 설명된다. 한마디로 창조적 추상은 동양의 정신사의 가장 굳건한 기둥과도 같은 공(空)사상에서 비롯된 시각예술을 위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김정희의 작품은 어떠한 형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는 사고의 과정이며 곧 시대를 읽고 느끼는 작가의 이야기들이며 삶의 고통을 극복하고 위로하는 신명 나는 굿판이기도 하다. 거기엔 시작과 끝이 공존하며 탄생과 죽음, 너와 나를 구별하는 일체의 시. 공간의 기준이 없다. 죽음을 연구한 어느 소설에는 “나지 마라 죽는 것이 고통이다. 죽지 마라 나는 것이 고통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는 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김정희의 추상은 어쩌면 우리의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작지만 쉽게 놓칠 수 있는 이 깨달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즉, 그녀가 지우고 있는 것이 단순히 색과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믿음 자체를 지우고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녀의 작품을 통해 그 깨달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김정희(金貞熙, kim jung-hi) 김정희는 홍익대학교 동양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국립전북대학교 미술대학 겸임조교수, 부산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정희는 2002년 공평아트센터에서 열린‘김정희展’을 시작으로 중국 서안 국제전람센터, 공갤러리, 라메르 갤러리, 인사아트센터, 갤러리 포스등에서 8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 이외에도 한국을 포함한 중국, 방글라데시를 오가며 약40여회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초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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