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밥 먹고 도시여행

서울 골목길 산책, 서촌

草霧 2013. 7. 23. 11:11

 

 

궁궐 옆 서쪽 동네에서 500년 된 길과 골목을 만나다

서울 골목길 산책, 서촌

서울사랑 이정은 | 2013.07.19

서울 도심에 조선 시대의 지적도와 가장 근접한 지적도를 가진 곳이 있다. 바로 서촌이다. 청와대 때문에 개발되지 못했지만, 그래서 더 사람 냄새 나는 곳. 서촌의 골목은 깊은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품고 있다.

[서울톡톡]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보며 흐뭇했습니다. '후덜덜' 섹시한 주인공들 때문에? 아니요, 영화의 배경이 된 동네 때문이었습니다. 키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동네, 예전에 우리가 살던 그 집, 그 골목이 거기에 있었거든요.

오래된 철문과 낡은 기와를 인 허름한 양옥집, 아이들이 숨바꼭질과 다방구를 하던 골목, 빨래 날리던 장독대, 여름이면 할머니들이 평상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겨울이면 흰 연탄재가 수북이 쌓이던 곳….

간첩이자 슈퍼마켓 배달원인 주인공은 골목골목을 누비며 동네 사람들을 살핍니다. 그런데 간첩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늘 상기하며 그들을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어느새 그들과 동화되고 정이 들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칠지만 속 정 깊은 사람들이 사는 달동네이기에 그런 설정이 가능했을 거예요.

영화 촬영지는 인천 섭정동이라는 동네인데, 서울에도 그런 곳이 몇 곳 남아 있습니다. 반듯반듯 길을 낸 아파트 단지가 서울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찬찬히 둘러보면 의외로 우리 가까운 곳에 예전의 그 골목과 집들이 있답니다. 서울의 숨은 골목을 찾아갑니다. 사람 냄새 가득한 서울 골목길 기행 첫 번째 여행지는 경복궁 옆 서쪽 동네, 서촌입니다.

서촌을 아시나요?

경복궁 서문 영추문에서 인왕산 사이에 자리한 청운효자동, 통인동, 체부동, 옥인동, 사직동 등을 서촌이라고 부른다. 권세 높은 양반들이 모여 살던 북촌과 달리 이곳은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중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근대에 들어서도 윤동주, 노천명, 이상, 박노수, 이상범 등 문인과 예술가들이 서촌에 머물며 예술 활동을 펼쳤다.

청와대 옆이라 개발 제한, 고도 제한에 묶여 개발하지 못한 탓에 아직까지도 그들이 살던 집터나 예전의 골목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요즘 서촌이 뜨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발이 덜 돼 불편한 점도 많지만 덕분에 서촌은 또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옛 동네의 매력에 빠진 예술가와 젊은이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면서 미술관도 생기고, 개성 있는 카페와 가게도 생겨나고 있다. 그런데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내·외부 수리만 하는 까닭에 서촌의 수십 년 된 집들과 서로 어긋나지 않고 잘 어우러진다. 옛것과 새것이 서로 소통하며 서촌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행의 시작은 통인동 미술관들. 트렌드를 앞서가는 젊은 기획전을 여는 대림미술관, 과거 서정주·이중섭 등이 장기 투숙한 여관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는 보안여관, 한옥에서 사진을 전시하는 류가헌, 통의동의 터줏대감 진화랑 등이다.

통의동에서 자하문대로를 건너면 삼계탕으로 유명한 토속촌이 나온다. 대통령들이 즐겨 찾았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인데, 걸쭉한 국물맛이 일품이다. 내국인은 물론 일본인 관광객도 많아 평일에도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

토속촌에서 통인시장 쪽으로 올라오다 우리은행 골목으로 들어서면 천재 시인 이상의 집 일부를 개조한 제비다방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문학, 음악, 영화 등이 어우러진 문화 행사를 개최하기도 한다. 제비다방 맞은편에는 다양한 타르트와 벨기에 차, 프랑스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오 쁘띠 베르가 있다. 타르트를 굽는 박준우 셰프는 케이블TV <마스터셰프 코리아 시즌 1>에서 준우승을 한 실력자이기도 하다.

50년은 돼야 터줏대감 노릇 하지

오 쁘띠 베르에서 자하문로 9길을 건너가면 서촌 명물인 대오서점이 나온다. 권오남 할머니가 60년 동안 운영하는 한옥 헌책방으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옥 현관과 집 곳곳에 헌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최근에는 드라마 <상어>를 촬영하기도 했다. 대오서점에서 효자동 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터줏대감 중국집 영화루, 아버지들의 사랑방인 효자동이발소, 아씨고전의상실 등이 예전 모습 그대로 있어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마저 든다.

영화루에서 효자동 쪽으로 더 올라가면 유명한 효자베이커리와 통인시장 입구가 나온다. 효자베이커리는 빵을 옛날 방식 그대로 구워내는 동네 빵집. 26년간 청와대에 빵을 납품하며 입소문이 났다. 통인시장이 유명해진 것은 기름떡볶이 때문. 최근에는 쿠폰을 구입해 시장 반찬 가게에서 반찬을 골라 담는 도시락 카페도 명성을 얻고 있다.

서촌에는 통인시장 말고도 재래시장이 하나 더 있다. 경복궁역 2번 출구 가까이 있는 금천교시장. 이곳에는 진짜 원조 기름떡볶이 할머니가 있다. 시장 입구에 비닐 천막을 치고 철판 하나 놓고 떡볶이를 파는 김정연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개성의 부잣집 딸로 태어나 결혼해서 아이 3명을 낳고 행복하게 살던 김정연 할머니는 밀린 외상값 받으러 홀로 서울에 왔다가 전쟁 통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혼자 살면서 50년 전부터 개성식 떡볶음을 만들어 팔았는데, 그것이 지금의 기름떡볶이다. 간장과 고춧가루를 넣고 기름에 볶은 떡볶이는 짭조름하면서 개운하며, 특히 할머니가 직접 쌀을 담가 뽑는 떡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다. 김정연 할머니는 50년 동안 떡볶이를 팔아서 번 돈을 모두 사회에 기부했으며, 70대에 신체 전부도 기증했다. 그리고 100세가 가까운 지금도 여전히 한 평짜리 가게에 앉아 떡을 볶으신다.

골목에서 위로받고 치유된다

이제 필운대로를 건너 사직동으로 향한다. 20세기 초 서양 건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배화여고 생활관은 물론, 백사 이항복의 집터인 필운대를 만날 수 있다. 배화여고로 가는 언덕배기 중간에는 티베트 난민을 지원하는 사직동 그 가게가 있다.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하는 비정부기구 '록빠'에서 운영하는 이곳은 인도식 밀크 티 '짜이'와 커리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현지 여성들이 직접 제작한 수공예품과 식음료를 팔아 후원금으로 보내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커피 한잔은 숯불로 커피콩을 볶는 것으로 유명한 카페다.

"서촌은 힐링 플레이스(healing place)다. 서촌에는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치유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힐링 플레이스의 근원은 바로 골목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길에서 우리는 모진 풍파를 견디고 버티며 힘겹게 살아왔던 시간 동안 잊고 지낸, 이제는 다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추억과 순수함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에 정화되는 것이 아닐까?" 서촌 토박이 설재우 씨는 <서촌 방향>(이덴슬리벨 펴냄)에서 고백한 것처럼 서촌 골목길을 걸으며 위로받고 치유한다고 한다. 거미줄처럼 얽힌 서촌 골목에는 사람 냄새 살가운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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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는 1980년 영등포구에서 분구한 구로구에서 1995년 재분구한 구로, 광진구(성동구에서 분구)와 강북구(도봉구에서 분구) 등 서울시 자치구 막내 삼총사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금천은 유서 깊은 고장임을 알 수 있다.
글 윤재석(언론인) 사진 나영완 일러스트 문수민
금천예술공장 오픈 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오픈 스튜디오

삼국시대 초기 백제가 다스린 것으로 추정하는 이곳은 4세기 말부터 고구려의 지배를 받으면서 잉벌노현(仍伐奴縣)으로 불렸다. ‘뻗어나가는 땅’ 또는 ‘너른 들’이란 뜻이다. 삼국 통일 후 경덕왕 16년(757년)에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곡양현(穀壤縣)으로 개명하는데, ‘비옥한 땅’이라는 뜻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940년 이를 다시 금주(衿州)로 개칭한다. 이 일대가 ‘옷깃 금(衿)’ 자와 인연을 맺은 시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정조 19년(1795년) 시흥현(始興縣)으로 변경되기까지 이곳은 태종이 1413년에 하명한 금천현(衿川縣)으로 불렸다. 고려와 조선조 전반 등 무려 800여 년 동안 쓰던 ‘금(衿)’ 자가 분구로 부활한 셈이다.
금천은 “하이얀 옷깃 같은 냇물이 흐르던”이라고 한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의 ‘금천 예찬’에서 보듯 안양천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옷깃 금’ 자에 숨겨놓은 조상의 예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개발 연대 이곳은 섬유·봉제 등 의류 공장이 즐비한 공단이었다. 우리의 나이 어린 오누이들이 밤잠을 설쳐가며 수출용 의류를 한 땀 한 땀 직조하던 처절한 삶의 현장이던 곳이다.
금천구 유일의 전통 사찰, 호압사▲ 금천구 유일의 전통 사찰, 호압사
고기 도매시장인 독산동 우시장 / 금천예술공장의 공동 작업실▲ 고기 도매시장인 독산동 우시장 / 금천예술공장의 공동 작업실
‘옷깃’과의 절묘한 인연
오늘날 이곳은 서울 최대의 의류 할인 매장인 금천패션타운(옛 가리봉 아웃렛)으로 변모했다. 약 1km에 이르는 가산디지털단지-마리오아울렛사거리가 2011년 11월 패션과 IT가 공존하는 패션·IT 문화 존으로 조성된 이후다.
세계 최대의 패션 타운일지도 모를 이곳은 평일 10만 명, 주말 20만 명의 고객이 찾는 쇼핑 명소다. 중국, 일본, 동남아 등지에서 온 관광객이 관광버스를 타고 줄줄이 찾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금주→금천현→의류 공단→패션 아웃렛으로 이어지는 ‘옷깃의 연(緣)’은 얼마나 절묘하며 또한 질긴가!
또 하나 절묘한 것이 있다. 금천과 신발의 색다른 인연이다. 구로공단 시절 이곳엔 의류뿐 아니라 신발 공장도 많았다. 그런데 금천구의 행정구역을 지도로 보면, 영락없는 신발 형국이다. 그것도 아주 정밀하게 그린 탄탄한 스포츠화를 빼닮았다.
일반 회화보다는 설치미술, 미디어 아트, 커뮤니티 아트 등 디지털단지의 특성에 걸맞은 실험적 장르에 몸담은 아티스트가 많이 입주해 있다. 20여 명의 입주 작가 중엔 네덜란드, 터키, 대만 등에서 온 외국 작가도 있다. 재미있는 건 ‘금천 미세스’의 존재. 금천 미세스는 금천구에 거주하는 아줌마 작가를 말한다. 자체 큐레이터를 두고 연극팀까지 입주해 있는 것도 이 공간의 독특한 점이다.
금천예술공장은 매년 오픈 하우스를 진행하는 등 작품 활동뿐 아니라 주민과의 스킨십에 정성을 쏟고 있다. 지난 5월 23일에 2013년 오픈 하우스 행사를 열었는데, 인근 노동자가 축사를 읽어 예술 공장이 공단 안의 유리된 공간이 아니라 공장, 노동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공간임을 부각했다. 자칫 정서가 척박하기 쉬운 공단 노동자들에게 예술이 감성적으로 다가가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웅변해주는 사례다.
작품 활동 실적을 발표하는 ‘오픈 스튜디오’를 비롯해 해외 작가 교환 프로그램, 시각예술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지역 연계 교육 프로그램, 커뮤니티 아트 프로그램 등 예술가에게 안정된 작업 공간을 제공하고, 지역 주민에게는 문화 예술의 문턱을 낮추고 있다. 구(區)가 나서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예술가를 보듬어준다는 측면에서 타 지자체가 본받을 만한 프로젝트다.
예술 공장 입주하다
구로구 편에 소개했듯, 옛 구로공단 자리는 지금 정보통신기술(ICT) 등 첨단 산업 중심의 서울디지털산업단지(G밸리)로 변모했다. 그런데 이곳이 예술 공간으로 또 다른 변모를 시도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시 창작 공간 ‘금천예술공장’이다. 2009년 독산동의 한 인쇄 공장을 개조해 서울시가 운영하는 창작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 국철 1호선 독산역 1번 출구 쪽 두산초등학교와 가산중학교 사이에 위치한 이곳엔 레지던스 스튜디오 19실, 호스텔 5실, 공동 작업실, 공연 연습실 등을 갖추고 있어 공모를 통해 선발한 작가 20여 명이 다양한 분야의 예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뛰어난 품질의 고기로 유명한 독산동 우시장
이제 금천구의 명소를 한 곳 한 곳 탐방해보자. 금천예술공장에서 가산중학교를 끼고 돌아 나오면 연도에 고깃집이 늘어선 독산동 우시장이 시작된다. 요란한 집, 예컨대 지상파 TV에 나온 사진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데는 피하자. 저기 조금 허름한 집, 그래 그 집이다.
스테이크, 등심, 주물럭, 차돌박이, 삼겹살, 항정살 등도 좋지만, 개인적으론 소·돼지 부속 쪽이 더 좋다. 예컨대 간, 천엽, 등골(소), 갈매기살 등. 물론 육사시미(양념 안 한 것)나 육회(양념한 것)는 독산동에 온 기념으로 한 점씩 해야지. 아무튼 이곳 고기는 품질은 말할 것 없고 가격도 꽤나 착하다. 내가 잘 다니는 용산 삼각지의 한 고깃집도 이곳에서 물건을 떼온단다.
배도 부르고 하니 산책을 시작하자. 독산역에서 금천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시흥동 은행나무사거리에서 내린다. 길 한복판에 밑동이 어른 서너 아름은 됨 직한 은행 고목이 서 있는데, 수령 830년의 시 보호수다. 인도에도 더 큰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가을이면 더 아름다워지는 보도교 / 서울 시내 최대 의류 할인 매장이 들어선 금천패션타운▲ 가을이면 더 아름다워지는 보도교 / 서울 시내 최대 의류 할인 매장이 들어선 금천패션타운
호랑이 기운 누른 호압사
은행나무를 뒤로하고 산 쪽을 향해 관악산 벽산타운 5단지와 2단지를 지나 30분쯤 걸어 올라가면 고색창연한 사찰을 만난다. 이름 하여 호압사(虎壓寺). 금천구 유일의 전통 사찰인 이 절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인 무학대사가 태조 2년(1393년)에 창건했다.
호압사 창건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궁궐(경복궁)을 짓는 과정에서 기이한 꿈을 꾸었다. 반은 호랑이고, 반은 모양을 알 수 없는 괴물이 나타나 눈에서 불을 뿜으며 궁궐을 들이받으려고 하여 군사들이 화살을 쏘아댔지만 괴물은 짓던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졌다.
태조가 침통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었는데, 어디선가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라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한 노인이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호암산(虎巖山)이었다.
태조는 노인에게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노인은 “호랑이는 본디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니 저 호랑이 산봉우리의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태조는 왕사(王師)인 무학대사로 하여금 호암산 꼬리 부분에 절을 짓게 했고 ‘호압사’라 이름 붙였다.
호압사엔 서울시 문화재 제8호인 석약사여래부처를 모셔놓았다. 따라서 약사전이 절의 중심이다. 도량 내에 있는 600년 수령의 서울시 보호수 느티나무 두 그루는 이 절의 깊은 역사를 입증하는 자료이자, 절을 찾는 중생에게 편안한 쉼터를 마련해주는 안식처다.
절을 뒤로하고 가파른 구름발치길을 오르면 곧바로 정상에 이르는데, 바로 호암산(해발 393m)이다. 관악산(冠岳山, 해발 632m)에서 이어진 삼성산(三聖山, 해발 481m)의 지맥(支脈)으로 금주산(衿州山)으로도 불리는 이 산은 금천구의 진산(鎭山)으로 관악산처럼 바위산이다. 그래서인지 은비녀, 돌고래, 새, 칼, 주먹, 토끼 등 갖가지 기묘한 형상의 바위가 나그네를 반긴다.
독산교는 서울 8경 후보에 오를 정도로 경치가 뛰어나다 / 호암산 정상에 있는 직사각형 연못, 한우물▲ 독산교는 서울 8경 후보에 오를 정도로 경치가 뛰어나다 / 호암산 정상에 있는 직사각형 연못, 한우물
통일신라시대 산성, 직사각형 연못 한우물
이 산에는 많은 사적이 있다. 호암산성은 통일신라 문무왕 12년(672년) 나당전쟁 때 한강과 서해 남양만에서 들어오는 길목을 효과적으로 방어·공격하기 위해 산 정상 부근 능선을 따라 1천260m를 축성한 요새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300m 정도 남아 있다.
한우물〔天井〕은 호암산 정상에 있는 길이 22m, 폭 12m의 직사각형 연못으로 주변을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산 정상에 있는데도 늘 수량이 변함없고, 항상 맑은 상태로 고여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용보(龍洑) 또는 용추(龍湫)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가뭄 때는 기우제를 지냈고, 전시에는 군사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호암산에 옛 성이 있고, 그 성안에 못이 있어 날씨가 가물면 비 오기를 빌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때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행주산성의 권율(權慄) 장군과 합세해 왜군과 싸우면서 이 우물을 군사용수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연못이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보수를 하기 위해 발굴한 당시 신라시대에 만든 연못이 지금 연못 밑에 묻혀 있었고, 그 위에 어긋나게 축석한 연못이 다시 조선 초기에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호암산성과 더불어 사적 제343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이 밖에도 호암산에는 시흥계곡, 송진 냄새가 그윽해 마음과 몸을 어루만져주는 치유의 길, 약수터가 곳곳에 있어 휴식 공간과 등산로로 명성을 더하고 있다. 금천구는 특히 작년에 시흥계곡에 덮여 있던 콘크리트 구조물을 벗겨내고 자연석을 깔아 자연형 물 순환 생태 계곡으로 복원함으로써 도롱뇽을 비롯한 각종 희귀종이 서식하는 청정 구역으로 살려놓았다.
금천구 야경▲ 금천구 야경
금천의 명소는 역시 안양천
금천의 이곳저곳을 돌아봤다. 하지만 금천의 명소는 역시 ‘옷깃 금’ 자의 유래가 된 안양천이다. 안양에서 금천과 광명을 양쪽에 두고 영등포와 양천을 끼고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이 하천은 한동안 오염과 범람의 대명사였다. 2008년 대대적인 안양천 제방 정비 공사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금천(衿川)’으로의 명성을 되찾았다. 가을이면 안양천에는 각종 겨울 철새가 몰려든다. 생태 복원을 위해 심어놓은 갈대밭의 수변 공간이 운치를 더하고, 쇠오리·청둥오리 등 겨울 철새가 유유히 물살을 가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부 철새는 아예 터를 잡고 눌러앉았다. 그 사이로 왜가리, 백로가 한가로이 거니는 풍경도 쉽게 볼 수 있다.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물억새, 코스모스 등 각종 풀꽃도 볼거리를 더한다. 특히 독산교와 보도교 사이는 2007년 서울시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서울 8경 후보에도 올랐을 정도로 경치가 그만이다.
1978년 개통한 남부순환로가 동서를 따라 구로구, 관악구와 경계를 이루고, 남북으로는 광명시와 경계를 이루면서 경부철도가 나란히 지나며, 고속철도 광명역을 지척에 둔 서울 남서부 교통의 요충지 금천. 칙칙한 공단에서 화려한 패션·IT 문화 벨트로 변신 중인 금천은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도시다.
+ 주민과 함께하는 금천구
금천구는 공단이라는 칙칙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주민이 친근한 이웃으로 화합하도록 축제를 열기도 한다. 서울에서 벚꽃이 가장 빨리 개화하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매년 4월 중순 금천구청역에서 가산디지털단지역에 이르는 3.1km에 총 639그루의 벚나무를 심어놓은 기찻길을 따라 ‘금천하모니 벚꽃축제’를 연다. 9회째인 올해는 4월 11~13일에 열렸다.
이 행사는 각종 체험 등 주민 참여 주도로 열린다. 벚꽃 향기 아래 주민이 더 이상 객이 아니라 축제의 주인공으로 꾸며가도록 하는 것이다. 일례로 2011년 ‘구민 하모니 오케스트라 기록 도전 콘서트’에는 주민 710명이 단원으로 참여해 ‘가장 많은 사람이 동시에 오케스트라 연주하기’ 한국 기록을 세웠다. 그런가 하면 패션 IT 문화 존에선 매주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오후 4시에 거리 공연을 상설 진행해 그 자체가 패션 타운의 확실한 콘텐츠로 자리 잡았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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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준공한 명동성당은 한국 가톨릭의 상징이자 총본산이다. 고딕 양식의 정수인 석조가 아니라, 한국식 연와조로 지은 우리나라 유일의 순수한 고딕 양식 건축물로 가치가 높다. 준공 당시 뾰족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장안의 명물이었다고 한다.
글 이정은 사진 문덕관, 홍하얀 자료 제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명동 언덕배기에 우뚝 서서 고딕건축의 장중함과 위용을 자랑하는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다. 프랑스 신부 코스트가 설계해 1898년에 준공한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교회당 건물로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종현성당, 명동천주교당이라고도 하며 한국 가톨릭의 상징이자 총본산이다.
명동성당이 위치한 지역은 조선 시대 명례방에 속해 있었다. 명례방은 천주교 신앙이 유입된 이후 천주교 신도들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곳으로, 이승훈이 세례를 주었고 신앙 집회를 열었다. 1830년 이후에는 선교사들이 비밀리에 선교 활동을 하던 중심지였으며, 1845년 귀국한 김대건 신부가 활동하기도 했다.
현 명동성당 터는 조선 시대 판서를 지낸 윤정현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바깥채만 60여 칸이 되는 큰 한옥이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자 당시 교구장이던 주교 블랑이 성당 부지로 이곳을 매입해 종현 본당을 설립, 성당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1888년 조선 정부는 이곳이 열왕의 영정을 모신 영회전의 주맥에 해당하는 곳으로, 영회전을 내려다보는 지역이라 건축을 할 수 없다는 풍수적 이유를 들어 건립 중지와 토지소유권 포기를 요청했다. 이 분쟁은 1890년까지 계속되다가 프랑스 공사관의 노력으로 토지소유권이 천주교 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후 1892년에 착공해 6년 만인 1898년에 준공했다.
뒤에서 바라본 명동성당▲ 뒤에서 바라본 명동성당
박해 속에서 성장한 한국 천주교의 상징
설계와 공사 감독은 신부 코스트가 직접 맡았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양옥 건축 기술자가 없었으므로 벽돌공·미장이·목수 등을 중국에서 데려다가 일을 맡겼고, 도중에 재정난과 청일전쟁으로 공사를 한때 중단하기도 했다.
1896년 벽체 공사가 끝날 무렵 설계와 감독을 맡은 코스트가 죽자, 잠시 공사를 중단했다가 코스트 신부를 돕던 위돌박 신부가 일부 설계를 변경하고 공사를 감독해 드디어 준공했다. 특히 실내 건축은 대부분 위돌박 신부가 마무리했다. 그는 1913년 명동성당의 여학교를 설계·감독했으며, 코스트 이후 한국에서 가장 많은 천주교 건물을 설계한 신부로 알려져 있다.
1898년 5월 29일에 준공식을 한 명동성당은 ‘뾰족집’이라는 이름으로 장안의 명물이 되어 매일 많은 구경꾼이 몰려왔다고 한다.
명동성당의 평면은 라틴 십자형 삼랑식(三廊式)이나 건축양식은 고딕 양식의 정수인 석조가 아니고 연와조다. 따라서 고딕 양식의 장중함은 덜하지만 우리나라 유일의 순수한 고딕 양식 건축물로 가치가 높다. 또 성당 건립 과정에 무보수로 공사에 참여하거나 헌금을 한 조선인 신도 1천여 명과 조선에서 사역한 선교사 명단을 이 성당의 머릿돌과 함께 묻었다.
이 건물의 준공은 박해와 성장으로 점철된 천주교 유입 2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출발을 다지는 의미가 있다.
명동성당 관람 정보
● 위치 :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명동2가)
● 관람 시간 :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오후 9시, 토요일 오전 9시~오후 8시
● 휴무일 : 매주 월요일
● 문의 : 02-774-1784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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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막을 울리는 쇳소리와 매캐한 공기로 가득하던 문래동 58번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장이 하나 둘 떠나고 그 공간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서울시가 버려진 공간을 개조해 예술가들의 창작·전시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예술로 힐링되는 서울시 창작 공간을 사진에 담았다.
글 이정은 사진 문덕관

 

교통 정체로 고생하고 사람들에 치여 지치기 일쑤인 여름휴가. 안 가면 섭섭하고 가자니 부담스럽다. 올여름엔 여름휴가를 한강에서 즐겨보자. 서울시가 저렴한 비용으로 가족 중심의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는 ‘한강 행복몽땅 프로젝트’를 다양하게 진행할 예정이다. 이 프로젝트는 절정기인 7월 20일부터 8월 20일까지 한 달간 한강 전역을 무대로 펼쳐진다.
글 이선민 문의 서울시 다산콜센터 ☎120 (홈페이지 hangang,seoul.go.kr)

낮엔 수영장 물놀이와 래프팅, 윈드서핑 같은 수상 스포츠를 만끽하고, 해가 진 이후엔 다리 밑에서 이색 영화나 비보이, 재즈, 클래식 같은 거리 공연을 무료로 즐겨보자. 그리고 밤이 깊으면 여의도 · 뚝섬 한강공원에 마련된 400동의 캠핑장에서 별도 보고 매미 소리도 들으며 1박을 해보자. 23.3km에 걸쳐 펼쳐지는 형형색색의 꽃길, 2만5천m2 잔디밭은 자전거 라이딩과 산책길의 선물이다. 서울시는 서울 시민이 휴가지로 이용할 수 있도록 연중 운영하는 난지캠핑장 200동 이외에도 여의도 300동, 뚝섬 100동 규모의 임시 캠핑장을 운영한다. 특히 여의도·뚝섬 캠핑장은 ‘아껴 쓰고 나눠 쓰는’ 공유 경제를 도입한 일명 ‘셰어링 텐트’ 개념을 도입했다.

1) 23.3km에 백일홍, 수레국화, 황화코스모스 등 여름 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길을 조성했다.
2) 초·중·고등학생과 동반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해양 레저스포츠체험교실이 열려 카약, 요트, 고무보트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재미 백배! 다양한 공연이 가득해요
한남대교(남단) 등 6개 한강 다리 밑에서 ‘다리 밑 영화제’라는 이름으로 매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무료로 영화를 상영한다. 또 한 달간 총 54회에 걸쳐 20여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강변 영화제’가 열려 취향에 따라 영화를 선택할 수 있다. 여의도 물빛무대에서는 애니메이션, 코믹 오락영화 등 유쾌한 작품을, 광진교 8번가에서는 ‘독립·예술 영화와 로맨틱 영화의 만남’을 주제로 한 영화를, 반포 달빛광장에서는 ‘서울시 좋은 영화 감상회’를 통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를 상영한다. 또 이 기간 중에는 사전에 선발한 67개 팀의 거리 예술가들이 거리극, 마임, 댄스, 악기 연주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칠 예정이다.
흥미 백배! 이색 체험을 해봐요
한강의 역사를 쉽고 재밌게 이해하는 퀴즈 프로그램 ‘빅 게임’, 밤하늘의 별을 관측하는 ‘별 보기 체험’ 등을 새롭게 진행한다. 빅 게임은 7월 24일부터 8월 14일까지 매주 수요일 진행하며, 별 보기 체험은 뚝섬 전망문화콤플렉스(자벌레)와 반포 동작대교 노을카페 등에서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대학생 천체 관측 동아리 회원들의 자세한 설명과 천체망원경을 통해 낮에는 태양흑점을, 밤에는 여름밤 별을 관찰할 수 있다.

3) 래프팅, 윈드서핑 등을 즐길 수 있는 한강수상레포츠교실.
4) 다양한 공연과 영화 등을 즐길 수 있는 무대가 한강 곳곳에 마련된다.
모험 백배! 수상·레저 스포츠가 풍성해요
여름이면 가장 사랑받는 뚝섬·난지 등 7개 한강 수영장과 물놀이장을 8월 25일까지 운영한다. 스포츠 체험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 교실을 진행하는 것도 또 다른 특징. 이촌·양화한강공원 수상 훈련장에서는 카약, 요트, 고무보트 등을 무료로 즐길 수 있는 ‘해양수산부와 함께하는 해양레저스포츠체험교실’이 열린다. 망원한강공원에서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윈드서핑 체험 행사’를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무료로 진행하며, 어린이들이 수상 레저 체험과 함께 안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어린이 수상안전교실’은 양화한강공원에서 개최한다.

시민청에서 놀자!
시민청 여름 프로그램
▶시민청에서 뜨거운 여름을 날려버릴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시민청 지하 2층 바스락홀에서 인기몰이 중인 인디 밴드가 참여하는 록 페스티벌이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오후 5시~8시에 열린다. 로맨틱펀치, 이나밴드, 슈퍼키드, 주말엔블루스, 와이낫, 밴드그릇 등 신인 밴드와 유명 인디 밴드 간의 뜨거운 밴드 열전이 펼쳐질 예정이다. 스탠딩 공연으로 열리는 록 페스티벌은 모두 무료다. (문의 02-739-5815)

▶한편 지하 1층 시민청갤러리에서는 8월 1일부터 18일까지 애니메이션 로봇 전시 <아빠, 같이 가>를 진행한다. 아이와 함께 떠나는 아빠의 추억 여행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 전시에서는 시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피겨와 포스터, 서울시 랜드마크 레고전, 애니메이션 히스토리 월, 한여름 밤의 야외 영화관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문의 02-739-5810)

▶유명인사를 초청해 삶과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관객과 나누고 소통하는 토크 콘서트는 7월 31일과 8월 28일 등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오후 7시 시민청 지하 2층 이벤트홀에서 열린다. 7월에는 ‘효재’ 한복집을 운영하고, ‘시가 있는 효재 밥상’을 쓴 패션디자이너 이효재 씨, 8월에는 국민 배우 이순재 씨를 만나본다. (문의 02-739-5811)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한마음 살림장이 매월 둘째 주와 넷째 주 주말에 펼쳐진다. 수공예품이나 디자인 상품 등을 판매하고, 관람할 수 있는 한마음 살림장 아트 마켓은 7월 13일~14일, 8월 10일~11일 열리고, 식품과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생활 시장은 7월 20일~21일, 8월 24일~25일에 들어선다. 시민청 지하 1층 활짝 라운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 (문의 : 02-739-5816)

 

불에 탄 숭례문이 최근 복원 공사를 마치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5년 전 한 정신 나간 노인의 방화로 불타던 숭례문은 서울 시민은 물론 국민 모두를 충격과 비통에 빠뜨렸다. 불길에 휩싸인 남대문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맥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던 국민은 분노와 안타까움에 더해 누구나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참화가 조선 시대 한두 건물이 아니라 서울 전역, 아니 전국에서 일어난 적도 있었다. 그것도 두 차례나!
글 이상배(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사진 제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는 1952년(선조 25년)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부사▲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는 1952년(선조 25년)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부사
동아시아를 뒤흔든 임진왜란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한 7년간의 전쟁은 동아시아 국제사회에 대대적인 변화를 몰고 온 근세 최대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정권이 붕괴되었고, 전국이 전쟁터가 된 조선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으며,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한 명나라도 결국 멸망의 운명을 맞이했다.
동아시아 삼국이 전쟁에 휘말려 피 흘리는 동안 만주에 웅거하고 있던 여진족은 서서히 힘을 비축해 통일 제국의 토대를 마련하고 청나라를 세워 명을 멸망시킨 후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각국의 흥망성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일대 사건이었다.
나라 전체가 온통 전쟁터가 된 조선은 정권 교체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전국이 초토화되었으며, 특히 서울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도성 수복 직후 명나라 군대와 함께 서울로 돌아온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모화관에서부터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성안에는 죽어 넘어진 사람과 말이 수를 셀 수 없으며, 냄새와 더러움이 길에 가득하여 사람이 가까이 갈 수조차 없다”라고 탄식하고 있다. 그만큼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극심했다.
죽은 왕들이 살아 있는 왜군 쫓아내기도
한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군한 일본군은 한강을 건너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동대문을 통해 손쉽게 도성을 점령했다. 도성을 수호한다던 조선의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백성을 버리고 이미 개성으로 달아난 뒤였다. 이 전쟁으로 200년을 지켜온 조선 왕조의 권위와 상징인 궁궐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궁궐 외에도 각종 관공서 건물과 성균관·종묘 등도 모두 일본군에게 짓밟혀 크게 훼손되었다. 오희문(吳希文)이 쓴 전란 일기인 <쇄미록(鎖尾錄)>을 보면 “성균관 건물 가운데 대성전·명륜당·존경각·식당·정록청 등이 전소되었고, 대성전 앞에 있던 비도 세 동강으로 잘려 나뒹굴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왜군은 또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도 불태웠다. 당시 서울에 입성한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통솔하는 1만 군대는 종묘에 주둔했는데, 그들은 종묘 건물이 조선 역대 왕의 신주를 봉안한 곳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상하게도 종묘에 주둔한 일본군이 밤마다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참혹한 괴변이 계속되면서 군사들이 연일 악몽에 시달리자 우키다 히데이에는 두려운 마음에 정전과 영녕전을 불사르고, 지금의 조선 호텔 자리에 있던 남별궁(南別宮)으로 진영을 옮겼다. 이는 아마 종묘의 신령이 나타나 일본군을 무찔러주었으면 하는 조선 민중의 염원이 빚어낸 이야기겠지만, 어쨌든 일본군이 종묘를 불태운 것은 사실이다.
그 밖에 북촌 일대의 전각을 비롯해 조선의 200년 건축 문화가 모두 이때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도성 안에 있던 백성의 민가는 전체의 70~80%가 불타 없어졌으니 그 참상은 이루 형언할 길이 없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정부는 궁궐과 종묘를 비롯해 불타 없어진 수많은 건물을 중건하는 등 전후 복구를 위해 인적·물적으로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부어야 했다.
천인공노할 만행의 참상
도성을 장악한 일본군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宣陵)과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파헤치고 도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선릉의 경우 시신이 없어지고 타다 남은 뼈만 있었으나 그것도 성종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릉의 경우 시신만 남았는데, 얼굴의 살은 녹아 없어지고 털이 빠졌으며, 콧대는 깨어지고 두 눈이 모두 빠졌으며, 턱이 떨어져 나가 입술도 없었다. 이 역시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런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이는 보화를 찾으려는 병졸의 계책이 아니고, 왜적의 장수들이 우리나라를 깊이 원수로 삼으려는 행위”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일본군이 우리의 유적에 대해 대규모 파괴 행위를 조직적으로 일삼았음을 말한 것이다. 오늘날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선정릉이 당시 큰 피해를 입은 현장이다. 그 밖에도 강릉(康陵)이 반쯤 파헤쳐졌으며, 명종의 큰아들인 순회세자(順懷世子)와 덕빈(德嬪) 윤 씨의 시신은 전쟁 통에 장사도 지내지 못한 채 사라진 후 그 행방을 알지 못할 정도로 임진왜란의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왕족이 이러하니 힘없는 서민이야 오죽했을까!
선릉 / 남한산성 서문▲ 선릉 / 남한산성 서문
남한산성과 삼전도의 굴욕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조선은 다시 전쟁에 휩싸였다. 1636년 12월 8일, 청나라 태종이 약 13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니, 바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청나라는 파죽지세로 진격해 이레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인조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12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45일간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는 적과 소규모 접전을 벌이면서 결사 항전의 의지를 보였고, 한편으로는 강화 교섭을 전개하는 등 화전(和戰) 양면책을 구사했다. 이에 조선군의 열 배에 달하는 막강한 전력을 갖춘 청나라는 남한산성이 험난한 지형임을 고려해 전략상 산성을 포위한 채 고립 작전을 펼쳤다. 그러면서 강화 교섭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두 달도 안 되어 끝난 이 전쟁은 사실 시작부터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략 전술, 정보력, 군사력, 군수물자 등 모든 면에서 조선군은 청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외교를 통해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이었음에도 조선은 현실을 무시한 채 명나라와의 대의명분에만 집착한 나머지 청나라와의 외교 교섭을 거부함으로써 화를 자초한 측면도 있었다. 자존심을 내세워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큰소리치던 조선은 막상 청군이 쳐들어오자 속수무책으로 이레 만에 도성을 내준 채 남한산성으로 도망치고 만 것이다.
남한산성에 고립된 상황에서도 조선은 화전(和戰) 양론으로 여론이 갈려 팽팽하게 대립했으나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자와 대신들이 적군에 붙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후에야 여론이 강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으로서는 사실상 무조건 항복 외에는 전란을 타개할 어떤 방책도 갖고 있지 못했다. 결국 인조는 겨우 왕권 유지만 보장받은 채 청나라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힌 지 45일 만에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갖추었다.
천태종공덕비 / 수어장대▲ 천태종공덕비 / 수어장대
삼전도비와 환향녀의 유래
병자호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서울이었다.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옮겨간 후 45일 내내 무방비 상태로 버려진 도성은 청군의 무자비한 노략질로 텅텅 비고 폐허가 되었다. 도성 안 여염집과 상가들이 불탔고, 가축이나 곡식은 모두 약탈당했다. 미처 피란하지 못한 여인들은 겁탈당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저항하다가 살해되기도 했다. 항복 후 도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가장 먼저 도성에 널브러진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내는 일부터 해야 할 지경이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청군은 수많은 여성을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조선에서 끌려간 포로들은 노예 시장에서 노예로 팔려나갔다. 포로로 끌려간 여성들을 다시 데려오려면 돈을 지불해야 했는데, 무기력한 조정에서 대책을 세웠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끌려간 여자들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다 해도 ‘정절을 잃은’ 이들을 받아줄 곳은 조선 어디에도 없었다.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 패하고, 연약한 여성들이 노예로 끌려가는 것을 눈뜨고 지켜보기만 하던 조선의 나라님과 잘난 양반들은 이들에게 오히려 ‘정절을 잃었다’는 굴레를 씌워 문전박대하거나 백안시했으니, 이들을 두 번 죽인 꼴이었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에서 ‘환향녀(還鄕女)’로 불렸는데, 냉대를 견디다 못해 많은 이가 자결하거나 평생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조선을 굴복시킨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세자와 왕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질을 끌고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전쟁의 전말을 기록한 비문을 건립하라고 조선에 요구했다. 이른바 ‘청태종공덕비’가 그것이다. 이 비는 1639년(인조 17년) 삼전도에 세웠기 때문에 ‘삼전도비’라고도 불렀으며, 한문과 만주어 그리고 몽골어로 글자를 새겼다. 이 비가 우리 민족의 치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여 한때 땅속에 묻어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페인트칠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치욕스러운 역사라도 엄연한 우리의 역사다. 비문을 없앤다고 해서 삼전도의 굴욕을 역사에서 지울 수는 없는 일. 오히려 이 비문을 보존해 대대로 지켜보며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그날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전쟁을 경험한 바 있다. 유익한 경험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명백하다. 결코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 8월호에는 ‘18세기 서울의 인문학적 사조’를 실을 예정입니다.
18세기 서울에 나타난 인문학의 새로운 경향으로 실학, 특히 북학파로 널리 알려진 백탑파의 이야기와 한문학의 새로운 풍조 그리고 중인을 중심으로 나타난 시단과 한글 소설의 유행 등을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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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한자리에 모이는 고갱의 3대 걸작을 만나다,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그리고 그 이후
고갱의 작품은 그의 오랜 방랑과 힘들었던 타국에서의 삶을 말해주듯 현재 세계 도처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 그런 만큼 고갱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 역시 어떤 전시보다 어렵고 힘들다. 이번 전시는 고갱 최초의 회고전으로, 올여름 서울시립미술관을 찾는 관객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파리 오르세 미술관,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30여 곳의 미술관에서 빌려온 고갱의 진품 60여 점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이혜민 큐레이터는 “현재 전 연령층이 이번 고갱전에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관객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공간에 고갱의 3대 걸작 중 하나인 ‘설교 후의 환상(천사와 씨름하는 야곱)’(1888년 작 ,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소장)을 걸었다. 또 다른 두 작품 ‘황색 그리스도’(1889년 작, 올브라이트 녹스 아트 갤러리 소장)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1897-1898년 작)도 순서대로 자리하고 있다. 고갱의 작품 다음으로는 그의 정신을 계승해 고갱을 재해석한 21세기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이어진다. 암막 커튼으로 구분한 어두운 공간 안에서 상영하는 라샤드 뉴섬의 <그늘진 구성>이 관객의 눈에 흥미롭게 비친다. 이혜민 큐레이터는 “지금이 가장 관람하기 좋은 시기”라고 조언했다. 특히 비 오는 장마철에는 전시회장이 한산해 여유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정보도 전해주었다.

• 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
• 기간 : 2013. 6. 14~9. 29
• 관람료 : 8천~1만3천 원
• 문의 : 02-2124-8928

mini interview_고갱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어 좋았어요
백문주(부천시 오정구), 김미리(부천시 소사구)

고갱의 예술 세계는 아주 심오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전시에서도 그의 심오한 예술 세계가 잘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작품이 제일 감동적이었어요.
커다란 캔버스 위에 탄생부터 죽음까지 다룬 이야기를 그린 점이 인상 깊었어요.
작품 옆에 써놓은 해설도 작품을 감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온 가족이 즐기는 세계의 아동극 제21회 아시테지 국제 여름 축제
세종문화회관에서는 7월 아시테지(국제 아동청소년연극협회) 한국본부와 함께 ‘제21회 아시테지 국제 여름 축제’를 개최한다. 이번 축제에는 한독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독일 작품을 대거 전시할 예정이다. 축제 개막작인 하이델베르크 아동청소년 극단의 <엘제 이야기>는 8세 소녀 엘제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은 실화를 이야기한다. 이탈리아 바라카 극단의 <달빛 작은 배>, 네덜란드 드 당세 무용단의 <테트리스>, 일본 전통 인형극 <우라시마> 등도 관람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미디어 체험극 <종이 창문>, 극단 학전의 <우리는 친구다>를 공연한다.

• 장소 : 세종문화회관
• 기간 : 2013. 7. 18~28
• 입장료 : 2만~3만 원
• 문의 : 02-745-5682~3

● 문화가 흐르는 서울 7월 1째주 영상 보러 가기- http://sculture.seoul.go.kr/archives/21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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