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장정 격려의 글‘호국보훈의 달’ 시리즈 4- 숨 쉬는 유물, 말문을 열다(3)
용산고등학교를 출발하는 10여대의 GMC트럭 위에 새파란 장정들이 올라타 있습니다. 늦은 밤 그들을 환송하는 시민은 없습니다. 그저 그들의 가족들이 애끓는 심정으로 배웅을 할 뿐입니다. 꼭 살아 돌아오겠노라고 약속하는 장정들의 소리가 웅웅거리는 트럭의 엔진 소음에 묻히며 멀어져갑니다.
손자는 파주 집에 계신 조부모님 생각에 눈을 감아 봅니다. 10월의 밤공기를 가르며 트럭은 북쪽 평양을 향해 달리고 있지만, 눈을 뜨면 꼭 제 고향집이 나올 듯합니다. 햇살 좋은 날 고향집 마당 빨래줄에는 무명 이불호청이 눈이 부시게 걸려 있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릴 적 손자는 할머니의 치마폭에 휘감겨 물기를 머금은 이불끝자락을 빨아먹었지요.
이불의 비누냄새와 할머니의 품 내음이 나는 듯합니다. 아마도 고향을 떠나오기 전 할머니가 깨끗이 빨아주신 내의를 입은 탓이겠지요. 그리고 손자의 품에 할아버지의 글이 쓰인 무명천이 곱게 접혀 있기 때문이겠지요.
할머니가 무명천을 잘라왔습니다. 할아버지가 그려 넣은 태극기가 그 무명천에 번지듯 손자의 마음에도 뭔지 모를 뭉클함이 함께 스밉니다. 할아버지는 '축입대(祝入隊)'라 적고 손자의 이름 석 자를 적습니다. '김원준(金元俊)'. 으뜸이 되고 뛰어난 사람이 되라고 지어주고는 이날 이때껏 수천 번 불렀을 손자의 이름. 전장의 경험이 전무(全無)한 어린 손자를 '용사(勇士)'라 적습니다. 혹 죽음의 순간을 만나더라도 부디 두려움에 떨지 않기를. 이 늙은 두 노인네보다 먼저 이승의 길을 떠나더라도 억울해하지 않기를. 이 나라 이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희생임을 자랑스러워하길.
어느덧 38선을 통과하고 있다고 소리치는 중사의 말에 손자는 눈을 뜹니다. 일제히 학도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좋아합니다. 영락없이 어린 티가 흐르는 소년병들의 함성이 한밤의 어둠을 뚫습니다. 꿈 많은 사춘기 학생들은 각각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평양의 광경을, 혹은 압록강 국경선을? 마치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듯 가슴이 설레어옵니다. 그러다 매캐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콧구멍에 흘러들어옵니다.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들 속에 인민군의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까맣게 불에 탄 시체 한 구. 손자는 느닷없이 그것이 꼭 제 모습으로 보이면서 떠나오던 날 오열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주내면(州內面) 봉서리(棲鳳里)'. 할머니는 기어코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주소를 적어 넣자, 참다못한 할머니의 울음이 일순 해제되듯 신음과 함께 흐느껴 터져 나왔습니다. 품에 지니고 갈 이 글이 손자의 유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손자는 틀림없이 돌아올 것입니다. 살아서 두 발로 남북통일의 기쁨을 안고 오든, 혹은 죽음을 맞더라도 이 주소 덕에 손자는 가족들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군번 없는 손자의 시신이라도 품어볼 수 있으니 할머니는 그걸로 됐다 생각합니다. 그래도 할머니의 눈물은 멈추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피가 심장과 함께 끓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전필승공필취(戰必勝攻必取)'.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다.' 손자는 꼭 동족상잔의 비극을 끝내고 돌아오겠노라고 다짐해보입니다. 꼭 크리스마스 전까지 돌아와 안기겠노라고. 할아버지는 염원을 담아 '남북통일완수(南北統一完遂)라 적고 긴 쓰기를 마칩니다. 글에는 할아버지의 격려보다는 미안함과 비통함이 묻어납니다. 일본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 주었던 것도, 한 나라가 나뉘어 서로 총질을 하게 된 것도 본인의 탓이 아니거늘, 손자의 할아버지는 어른들이 세상을 잘못 다스려 어린 학생들에게 막중한 임무를 떠넘긴다며 쓰는 내내 떨어트린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학도병들을 태운 GMC트럭이 평양시내에 들어왔습니다. 손자는 그 물음에 답을 생각하기 전에 서둘러 잠자리에 듭니다. 날이 밝으면 총을 받아들고 바로 적진에 뛰어들어 누군가를 죽이게 될까요? 북한에는 저보다 훨씬 더 어린 아이들이 입대를 한다는데 그 아이들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손자는 품에 있는 나를 할머니의 치맛자락마냥, 온 가족을 덮어주던 이불자락마냥 안고 잠이 듭니다. 왠지 아침햇살에 눈을 뜨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집에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십시오. 건강하십시오. 아니, 긴 인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침에 다시 문안 올릴 테니까요.
글·사진 제공 : 전쟁기념관(http://www.warmemo.or.kr) 사보 편집팀
|
'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밥 먹고 도시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화로 듣고 손으로 체험하는 서울도보관광 (0) | 2013.06.19 |
---|---|
교과서 연계 역사문화재 역사탐방 (0) | 2013.06.18 |
'마포 전차길 따라 걷는 근대 서울의 풍경' 서울역사문화탐방 7회차 현장답사 (0) | 2013.06.14 |
지도의 나라, 조선 (0) | 2013.06.14 |
서울 한양도성 탐방 프로그램 (0) | 2013.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