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동, 푸른 언덕의 추억골목길 기행 ① 청파동
[서울톡톡]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중략) 그리고 지금, 주인없는 해진 신발 마냥 /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중에서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라디오에서 들었던 시 한편은 유난히도 기억 속에 오래 남았다. 몇 번이고 시를 되뇌이며 시인이 느꼈을 뜨거운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지만 치열한 삶을 살아온 여류 시인의 가슴 속 세계를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머릿속에 남게 된 건 '청파동'이라는 지명 뿐.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지명이 발걸음을 이끌었다. 서울역 서편 서부역에서 내려 맞은편에 있는 숙명여대 건물을 바라보면 빼곡히 늘어선 집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서울시 용산구 북쪽에 위치한 청파동(靑坡洞)이다. 지명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푸른 야산이 많아 '푸른 언덕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조선 세종 때 청파(靑坡) 기건(奇虔)이라는 명신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후자가 설득력이 있다. 이야기야 어찌됐든 청파동의 '푸른 언덕' 이미지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 1970년대 이후 개발 붐을 타고 현대식 주택들이 많이 들어서면서 청파동의 풍경은 점차 바뀌어간다. 특히 숙명여대 캠퍼스와 인접한 청파동3가는 하숙생들을 수용하기 위한 연립주택과 빌라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옛 골목의 정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청파동1가에는 아직 개발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은 오래된 집들이 많이 남아 골목길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잊혀져 가는 골목길의 흔적 지하철을 이용해 청파동 골목길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서부역에서 내려 6차선 청파대로를 건너 골목으로 들어가는 방법과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갈월 지하차도를 지나 골목길로 가는 것인데, 서부역의 옛 정취도 느껴볼 요량으로 첫 번째 방법을 택했다. 청파대로를 중심으로 다시 청파길, 새싹길, 감동산길, 미나리길, 배다리길 등 정겨운 이름의 골목길들이 모세혈관처럼 뻗어 나가는데, 이 길을 걸어 올라가면 미로처럼 얽힌 청파동의 면면을 만날 수 있다. 청파동 골목길의 첫 인상은 비교적 단정했다. 자동차가 쉽게 지날 수 있을 정도의 반듯하고 넓은 골목길이 이어지는데다 곳곳에 새로 지은 빌라들이 유난히 많아서 개발 이전의 골목길 정취와는 사뭇 달랐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주택과 한옥, 무허가 판자 주택들이 섞여 특이한 풍경을 연출했다던 1970년대 풍경은 완전히 사라진 듯 했다. 대신 저마다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이 유난히 많아졌는데, 모두 같은 건축업자의 손길을 거쳤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보자 하니 옛날 집들 찍으러 오셨나본데, 청파동1가 쪽으로 가 봐요. 내가 거기 사는데 거긴 오래된 집들이 많아 주말에 젊은 분들이 많이들 오시더라고..." 서운한 마음으로 사진기 셔터를 눌러대던 필자의 심정을 이해한 것일까. 어디선가 나타난 아주머니 한분이 말을 건넸다. 청파동에 자리를 잡은 지 어느덧 40년째에 접어들었다는 아주머니는 개발 바람을 타고 동네 풍경이 참 많이도 바뀌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집을 다시 짓고 싶어도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거나 입지 상 공사가 쉽지 않은 곳들만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나마 그런 풍경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주머니가 가르쳐 준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옛 골목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만리시장길과 청파동길을 사이에 두고 허름한 주택들이 만들어 낸 좁은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눈높이 보다 낮은 작은 창문들, 성인 남성이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작은 대문, 집집마다 드리워진 대나무 발이 소박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오토바이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을 듯한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운다. "어찌하다보니 여기서 60년 넘게 살았어. 그래도 살아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고 이 정도면 만족해. 무엇보다 동네가 참 조용하고 좋아. 개발 얘기들 하는데 우리는 이대로가 좋아. 그냥 여기서 편안하게 남은 시간 보내고 싶어." 백발이 성성한 올해 82살의 어르신이 낯선 여행자에게 소박한 바람을 털어놓았다. 비교적 반듯하게 이어지는 골목길을 지나 청파동에서 지대가 가장 높다는 새싹길에 들어섰다. 청파동과 서울역 일대, 그리고 저 멀리 남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푸른 하늘 아래 한옥과 다세대 주택, 빌라 등이 조화를 이루며, 각기 다른 시대의 색깔을 뿜어낸다.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단면과 닮았다고나 할까. 한참 동안 서서 풍경을 음미했다. 무엇보다 한눈에 보이는 남산의 풍경이 참 좋았다. 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까닭에 이곳에선 한적한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하니, 연인과 함께 나만의 아지트로 활용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골목길마다 마주하는 삶의 흔적 청파동 여행의 묘미는 여러 갈래의 골목길을 지날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색다른 풍경이다. 낡고 허술한 간판과 울퉁불퉁한 계단, 주택 담장마다 드리운 나무들은 마치 갤러리를 돌며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청파 초등학교 옆에 나란히 마주앉은 허름한 문구점과 주민센터 앞의 세탁소 간판은 고풍스럽기까지 하다. 수십 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삶을 이어온 이곳의 주인장들이야 말로 문화를 지켜가는 진정한 장인들이 아닐까. 청파동 골목의 느낌은 봄바람처럼 따스하다. 높은 건물이 없어 골고루 햇볕이 잘 들고 오래된 주택가 담장 너머에는 어김없이 나무가 늘어져 초록의 기운을 더해준다. 집과 집 사이를 수놓은 빨래들과 스티로폼 상자에 정성껏 심은 채소, 낡은 자전거와 오토바이는 삭막한 도시 풍경을 극복하는 생활 소품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집값이 떨어진다며 빨래를 밖에 내걸지 말라던 현수막을 내걸었다던 어느 아파트 부녀회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모양새는 깨끗하게 보일는지 모르겠으나, 사람보다 건물의 가치를 위해 삶의 흔적마저 애써 지워야 하는 씁쓸한 현실에 한동안 가슴 아파했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청파동에서 만난 생활의 흔적들은 서민적이라기보다 삭막한 도시에 사람의 온기를 더하는 멋, 그 자체다. 진정한 멋은 자연스러움을 존중하고 추억을 나누는 것이라 믿기에.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는 동네 청파동 골목길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저 멀리 계단을 수놓은 희미한 그림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연어 '비란이'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모습을 타일을 붙여 표현한 공공 미술 작품. 시간이 흘러 빛은 바랬지만 그 역동성은 우리들의 고단한 삶에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청파동 언덕 너머에서 내려다 본 숙명여대 캠퍼스엔 푸르름이 가득하다. 수다를 떨며 삼삼오오 캠퍼스를 누비는 여대생들의 모습이 무척 싱그럽다. 도시화로 푸른 언덕의 추억은 저 멀리 사라졌지만, 대신 그 자리는 삶의 흔적으로 채워졌다. 골목길을 걸으며 그 흔적 하나하나를 발견하는 과정은 '숨은 그림 찾기'처럼 매력적이다. 서울의 골목길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빽빽한 고층 아파트와 반듯하고 넓은 대로가 골목길 풍경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청파동 골목길 풍경도 머지않아 없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오래된 이야기가 담긴 골목길을 걸으며 이를 추억하는 건 그래서 더 소중하다.
채경민 리포터는 기자 · PD 생활을 거쳐 현재도 방송 관련 일을 계속 하고 있다. 도시화로 인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골목길, 그 길에 담긴 우리 이웃들의 따뜻한 삶을 기록하기 위해 그가 카메라를 들었다. 골목길에 오면 늘 마음이 편해진다는 채경민 리포터, 우리가 살았던 삶의 흔적이 덧없이 사라지기 전에 그와 함께 마음이 편해지는 골목길 기행을 떠나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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