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밥 먹고 도시여행

1천년 전 신라인(新羅人)이 되어보는, 신비한 체험

草霧 2013. 5. 20. 20:54

 

경주남산의 속속들이까지경주남산학교

    

 

“1천년 전 신라인(新羅人)이 되어보는, 신비한 체험

    

 <동남산 기슭을 수놓은 걸작(傑作) 문화유산들>

<미술사의 보고(寶庫), 삼릉에서 용장까지>

"1천여 년 전 신라인(新羅人)들의 꿈을 만난다"

"절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하고(寺寺星張),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늘어섰다(塔塔雁行)"

    

 

<삼국유사>는 신라의 불교 공인 후, 서라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현재의 경주남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서라벌의 황금시절, 시가지가 남산의 동서 양쪽으로 뻗어나가면서 곳곳에 절과 탑들을 세워 남산을 에워쌌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 절과 탑들이 남산을 에워싸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남산 속으로 파고들어가, 남산 자체가 온통 절과 탑들로 장엄(莊嚴)되기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절과 탑의 행렬은,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히 퍼지면서 남산의 북단 동서 양쪽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절터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옛날 남산의 풍성했던 시절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주남산의 유적들은 주로 석탑과 석불들인데, 그것들이 자연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데에 큰 매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온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 드문드문 있기도 하지만, 많은 유적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부서지고 무너지고 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고 있는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온전히 남아 있는 것들은 그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가 하면, 온전치 못한 것들 - 폐탑과 폐불들은 그 처연함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도 합니다.

 

남산 골짜기에 쳐박힌 폐탑재나 남산 바위 위에 조각되어 마모되어 가는 불상들은 고요히 천년 세월을 증언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남산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탑과 불상, 폐탑과 파불 등은 대부분 깊은 골짜기 같은 데에 고요히 숨어 있지만, 서남산 용장골의 용장사 터 같은 경우에는 삼층석탑과 마애불이 시원한 전망을 거느리고 온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남산 곳곳에 남아 있는 불상들의 형상 속에서 우리는 신라 이후 이 땅의 갑남을녀(甲男乙女), 민초들의 초상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남산 곳곳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들, 그 얼굴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상의 토착화>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이러한 현상은 특히 경주남산에서 풍부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남산 곳곳에 조성되어 있는 불상들은 거개가 노천에서 천년의 세월을 거친 것들인데, 이들 불상들을 유심히 살피다보면 햇빛이 그 참모습을 보여 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거기 바위 속에 없는 듯이 있던 부처가 어느 순간 한 줄기 햇빛을 받음으로써 느닷없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술이 행해지고 있는 곳이 바로 경주의, 남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야외박물관>이라 할 경주남산은 2000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우리의 귀중한 <보물>입니다. 남산에는 왕릉 13, 산성지(山城址) 4개소, 사지(寺址) 150여 개소, 불상 130여 구, 100여 기, 석등 22, 연화대 19점 등 무려 700여 점의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습니다.

 

서라벌의 남쪽에 솟았다 하여 <남산>이라 불리는 경주남산은 높이가 500m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코 높지 않은 산이지만 역사적, 문화·예술적, 종교·철학적 측면에서는 매우 크고 위대한 산입니다. 따라서 경주남산은 단순히 걷는 산이 아닙니다. 산모롱이를 돌면 불상을 만나고, 언덕을 타고 넘으면 석탑이 기다리고 있는, 그리하여 1천여 년 전 신라인(新羅人)이 되어보는, 마음 설레면서도 신비한 체험길입니다.

    

 

 

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 소장

그는 경주사람입니다. 경주에서 나고 자랐고 경주남산 밑에서 살고 있습니다. 30년 세월을 경주의 문화유산과 남산을 답사하고 있습니다. 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같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다녔고, 대학에서 문화유산을 가르쳤고, 지금은 경주남산연구소를 운영하며, 경주의 문화유산 답사와 남산 답사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동남산 기슭을 수놓은 걸작(傑作) 문화유산들,

 

http://www.kjnamsan.org/

    

 

부처골 감실불상탑골 부처바위보리사미륵골 마애여래좌상

 

화랑교육원헌강왕릉정강왕릉통일전서출지남산리 절터 쌍탑(양피사지)

 

남리 절터(염불사지)칠불암 마애불상군신선암 마애보살유희좌상백운암

 

고위산 정상천룡사와룡사관음사안압지 야경 산책

    

 

이 길은 남산의 깊은 솔숲 향기를 맡으면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의 전성기까지 신라 불교미술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 7세기 초에 조성된 신라 최초의 마애불상인 부처골 감실여래좌상, 높이 10m 둘레 40m의 거대한 바위에 만다라적인 기법으로 부처님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조각한 탑골 부처바위 마애불상군, 8세기 말 신라불상의 걸작이며 남산에서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미륵골 석조여래좌상, 산 중턱에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서라벌 벌판 백성들을 굽어 살피고 계시는 마애여래좌상을 만납니다.

 

솔숲에 숨어있는 헌강왕릉과 통일신라의 아름다운 탑 중의 하나인 남산리 절터 동서 쌍탑, 염불사지에 부처님 진신사리로 새로 복원된 쌍탑, 통일신라 전성기의 신라마애불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칠불암 마애불상군, 수십 길 벼랑 위 하늘나라에서 구름을 타고 도솔천 하늘을 유유히 노니시는 신선암 마애보살유희좌상 등 신라 전성기의 걸작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소요시간 : 6시간 정도(단순 등산이면 3시간 정도)

부처골 감실불상부터 남리 절터까지는 도보 또는 차량으로 답사가 가능하고, 천동골과 승소골은 등산을 하면서 문화유적을 답사할 수 있는 코스이며, 신선암에서는 하산을 하여도 되고, 천룡사지로 넘어가는 코스도 있으니 시간에 따라 연장을 할 수도 있다. 불교유적 순례 답사라면, 헌강왕릉, 정강왕릉, 통일전은 코스에서 제외하여도 무방하며, 천룡사 가는 길은 백운암을 거쳐서 갈 수도 있고, 고위산 정상을 택할 수도 있으며, 내려가는 길도 와룡사 또는 관음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이 코스 역시 남산의 깊은 솔숲 향기를 맡으면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의 전성기까지 신라 불교미술을 만날 수 있는 코스 이다. 7세기 초에 조성된 신라 최초의 마애불상인 부처골 감실여래좌상, 높이 10여미터 둘레 40여미터의 거대한 바위에 만다라적인 기법으로 부처님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조각한 탑골 부처바위 마애조상군, 8세기 말의 신라불상의 걸작이며 남산에서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미륵골 석조여래좌상, 산중턱에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서라벌 벌판 백성들을 굽어살피고 계시는 마애여래좌상, 헌강/정강왕릉과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통일전, 통일신라의 아름다운 탑중의 하나인 남산리 절터 동서 쌍탑, 염불사지에 무너진 채로 남아 있는 염불사지 쌍탑, 통일신라 전성기의 신라마애불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칠불암 마애불상군, 수십길 벼랑위 하늘나라에서 구름을 타고 도솔천 하늘을 유유히 노니시는 신선암 마애보살유희좌상 등 통일신라 전성기의 걸작들을 만날 수 있는 코스이다.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 : 경주시내에서 통일전 경유 불국사행 버스를 타고, 보리사 입구에서 하차하여 오른쪽으로 난 뚝길을 따라 900m 정도(600m 지점에는 탑골마애조상군 입구이다) 가면 부처골 입구가 보인다. 돌아올 때는 칠불암에서 내려올려면, 통일전에서 시내행 버스를 타면되고, 천룡사까지 간다면 틈수골에서 시내행 버스를 타면 된다.

 

승용차 : 경주시내에서는 불국사 가는 7번 국도로 가다가 통일전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450m 지점의 다리를 건너 바로 우회전 뚝길을 따라 900m 정도 가면 부처골 입구의 작은 주차공간이 보인다. 계속하여 차로 이동을 하면서 칠불암 갈 때는 차를 통일전 주차장에 주차하고(주차비 1일 승용차 2,000, 버스 4,000- 일요일 무료) 갔다가 칠불암에서 하산하여야 한다(천룡사로 넘어가면 주차장까지 오는데 상당히 불편하다). 고속도로에서 나오면 보이는 산이 남산이며, 남산 고개 너머 큰 사거리(네 번째 신호등)에서 우회전 하면 불국사 가는 7번 국도가 된다.

 

 

 


 

 

 

 

미술사의 보고(寶庫), 삼릉에서 용장까지,

 

http://www.kjnamsan.org/

  

  

 

 

배동삼존석불입상삼릉냉골 석조여래좌상마애관음보살입상

 

선각육존불마애여래좌상석조여래좌상선각마애여래상

 

상선암 선각보살상상선암 마애대좌불금송정터와 바둑바위

 

상사바위와 소석불금오산 정상대연화대(전 삼화령)탑기단석

 

용장사지 삼층석탑마애여래좌상삼륜대좌불용장사터

 

탑재와 석등대석용장계 절골 석조약사여래좌상용장마을

    

 

이 길은 신라시대의 석불을 시대적으로 모두 만날 수 있는 신라석불의 보고입니다. 먼저 삼국시대의 대표적 걸작인 배리삼존불, 통일신라의 문화적 성숙기에 조성된 풍만하면서도 늠름한 기상이 보이는 냉골 석조여래좌상, 하늘에서 하강하는 모습의 마애관음입상, 힘 있는 붓으로 한 번에 그린 듯한 선각육존불, 남산에서 유일한 고려 초기의 마애여래좌상, 통일 직후의 아름다우면서도 힘차게 타오르는 불꽃이 아름다운 석조여래좌상, 산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살며시 그림자를 보여주는 듯한 선각마애여래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크며 바위 속에서 현신(現身)하는 순간을 새긴 마애여래대좌불,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면서도 거대한 바위산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우뚝 선 용장사 삼층석탑, 남산에서 가장 씩씩하고 아름다운 청년기의 마애여래좌상, 대현스님께서 기도하면서 돌면 불상 또한 고개를 돌렸다는 삼륜대좌불, 김시습이 머물면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집필한 용장사지, 신라 하대 방형대좌의 약사여래좌상 등 실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기까지 신라불상을 두루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

 

소요시간 : 6시간 정도(단순 등산은 3.5시간 정도)

이 코스는 배리 삼존불에서 시작하여 산기슭을 따라 삼릉을 답사하고, 냉골(삼릉계곡)을 따라 금오산 정상을 거쳐 용장계곡으로 하산하는, 등산을 하면서 문화유적을 관광할 수 있는 코스로서 도시락 및 음료를 준비하여야 하고 등산 차림이 필요하다. 이 코스는 편의상 서남산주차장에 주차하고 삼릉에서 부터 시작하여도 좋다.

 

이 코스는 시간에 따라 자유로운 이용이 가능하다. 3시간 정도라면 상선암 위 바둑바위까지 갔다가 서남산주차장으로 돌아오면 되고, 2시간 정도라면 석조여래좌상(보물 666)까지 왕복하면 되며, 1시간 정도라면 선각육존불까지 왕복하면 된다.

 

이 코스는 신라시대의 석불을 시대적으로 모두 만날 수 있는 신라석불의 보고이다. 먼저 삼국시대의 대표적 걸작인 배리삼존불, 통일신라의 문화적 성숙기에 조성된 풍만하면서도 늠름한 기상이 보이는 냉골 석조여래좌상, 하늘에서 하강하는 모습의 마애관음입상, 힘있는 붓으로 한번에 그린 듯한 선각육존불, 남산에서 유일한 고려초기의 마애여래좌상, 통일직후의 아름다우면서도 힘차게 타오르는 불꽃이 아름다운 석조여래좌상, 산길을 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살며시 그림자를 보여주는 듯한 선각마애여래상,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크며 바위 속에서 현신하는 순간을 새긴 마애여래대좌불,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면서도 거대한 바위산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우뚝 선 용장사 삼층석탑, 남산에서 가장 씩씩하고 아름다운 청년기의 마애여래좌상, 대현스님께서 기도하면서 돌면 불상 또한 고개를 돌렸다는 삼륜대좌불, 김시습이 머물면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용장사지, 신라하대 방형대좌의 약사여래좌상 등 실로 삼국시대부터 고려초기까지 신라불상을 두루 만날 수 있는 코스이다.

 

찾아가는길

대중교통 : 경주시내에서 내남행 버스를 타고, 삼불사 앞(또는 삼릉)에서 하차하면 된다(30분 소요). 돌아올 때는 용장마을에서 시내행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30분 소요). 택시는 삼릉(또는 삼불사)를 가자면 되며, 요금은 5,000-7,000원 정도이다.

 

승용차 : 경주시내에서는 오릉을 지나, 35번 국도를 따라 1.3 km 거리의 왼쪽에는 포석정이 있으며, 2.2 km 지점의 오른쪽에 서남산 주차장이 있는데, 이 곳에 주차하면 된다.

 

고속도로에서 나오면 보이는 산이 남산이며, 세 번째 신호등 못 미쳐 우회전을 하면 35호 국도가 된다. 돌아올 때는 용장마을에서 경주시내행 시내버스를 타고, 삼릉에서 내리면 된다.(5분 소요)..

배리 삼존불만 들릴 때는 삼불사 주차장으로 바로 들어가면 된다.(주차비 무료 - 버스 주차 불가).

 

탑골 마애불상군 앞에서 경주남산연구소

아득한 절벽 위에 조성된 봉화골 신선암 마애보살유희좌상 경주남산연구소

가파른 바위에 조성된 칠불암 마애불상군(국보 312) 경주남산연구소

바위 속에서 바로 나오는 듯한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경주남산연구소

    

 

 


 

 

 

 

포석정에서 금오정까지,

 

http://www.kjnamsan.org/

   

 

 

포석정 - 유느리골 마애삼체불 - (상실절터) - 부엉골 마애여래좌상 -

 

부흥사 - 늠비봉 오층석탑 - 금오정 - 국사골 상사바위 - 사자봉(팔각정터) -

 

남산 부석 - 금오산

 

본 코스는 포석정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남산 순환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유느리골 마애삼존불과 상실절터를 보고, 부엉골 마애여래좌상을 본 후 부흥사와 늠비봉 석탑지를 거쳐 금오정에 이르는 코스로서, 순환도로와 오솔길을 등산하며 걸어야 한다.

 

금오정에서는 땀을 식히면서 서라벌을 굽어보며 쉴 수 있으며, 그곳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하산하거나, 남산신성을 거쳐 탑골이나, 부처골로 하산하여도 되고, 계속하여 순환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국사골 상사바위와 사자봉 옆을 지나 금오산 정상에 이르게 된다. 사자봉에서는 남산부석을 거쳐 국사골이나 지바위골을 거쳐 통일전으로 하산하는 길도 있고, 금오산 정상에서는 냉골, 약수골, 용장계, 칠불암 등 많은 골짜기를 선택하여 답사할 수 있다.

 

소요시간 : 4시간(금오정까지 왕복)

본 코스는 나라의 번영을 천신에게 제사지내던 포석정에서 시작하여, 가족이 손을 잡고 짙은 솔향기를 맡으면서 숲속을 거닐 수 있으며, 남산에서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불상 유느리골 마애삼체불(835년 조성), 폐허가 된 상실절터, 석양무렵이면 부처님과 바위 전체가 황금빛을 발하는 부엉골 마애여래좌상, 옛 절터에 새로이 세워진 부흥사와, 늠비봉 바위산을 기단으로 한 백제계통의 늠비봉 오층석탑 등을 만날 수 있는 가족끼리 가볍게 등산과 문화재답사를 겹할 수 있는 코스이다.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 : 경주시내에서 내남행 버스를 타고, 포석정 입구에서 하차하면 된다.(20분 소요). 택시는 포석정으로 가자면 되며, 요금은 5,000원 정도이다.

 

승용차 : 경주시내에서는 오릉을 지나, 35번 국도를 따라 오릉사거리에서 1.3 km 지점에 포석정 입구 표지판이 보인다.(주차비 1일 승용차 2,000, 버스 4,000) 고속도로에서 나오면 보이는 산이 남산이며, 세 번째 신호등 못 미쳐 우회전을 하면 35호 국도가 된다.

 

 

 


 

 

 

약수골거쳐 금오산까지,

 

http://www.kjnamsan.org/

    

 

 

2절터 - 석조여래좌상 - 약수골 마애대불 - 1선방터

 

 

 

 

 


 

 

  

남산자전거 하이킹,

 

 http://www.kjnamsan.org/

    

 

오릉 - 나정 - 양산재 - 창림사지 - 남간사지 당간지주 - 포석정 -

 

지마왕릉 - 삼릉 - 경애왕릉 - 삿갓골 석조여래입상 천관사지

 

인용사지 - 상서장 - 부처골 감실불상 - 탑골 부처바위 마애조상군 -

 

보리사 석조여래좌상 - 통일전 - 서출지 - 남산리 사지 쌍탑

    

 

본 코스는 자전거로 남산 기슭을 돌면서 답사할 수 있는 코스로서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마음껏 느끼면서 문화유적을 관광할 수 있는 코스로서 가족 또는 연인끼리 천년을 거슬러 여행할 수 있는 좋은 코스이다. 코스 1은 서남산 기슭 이며, 코스 2는 동남산 기슭 입니다.

    

 

소요시간 : 7시간 (각 코스별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 입니다)

신라시조 혁거세왕과 왕비, 남해·유리·파사왕릉이 있는 오릉, 시조 혁거세왕의 탄강지인 나정, 육부촌장을 모신 양산재, 초기 왕궁터인 창림사지, 아름다운 성남이궁터인 포석정, 통일신라의 아름다우면서도 풍만한 삿갓골 석조여래입상, 천관사지, 인용사지, 신라말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 고려 태조에게 글을 올렸다고 전해 오는 상서장, 인심 좋은 시골 할머니 같은 신라 최고의 부처골 감실불상, 탑골 부처바위 마애조상군, 보리사 석조여래좌상, 통일전, 연꽃과 백일홍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서출지, 남산리사지 쌍탑 등 문화유적과 아름다운 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코스이다.

    

 

 

 


 

 

 

 

 

 

경주남산

서라벌의 남쪽에 솟았다 하여 '남산'이라 불리는 남산은 높이가 500m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코 높지 않은 산이지만 역사적, 문화 예술, 종교와 철학적이라는 측면에서는 크고 위대한 산이다. 신라 최초의 왕 박혁거세거서간이 탄강하신 나정과 초기 궁궐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창림사터에서부터 신라 천 년의 역사를 마감하는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까지 신라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되는 곳이 모두 남산이며, 석탑 하나 놓을 자리만 있으면 모두 절터가 되고, 바위는 모두가 불상이라 할 정도로 산 곳곳에 수많은 절터와 불상, 석탑을 품고 있는, 흔히 말하는 노천박물관이 바로 남산이기도 하다. 또한, 신라 박씨 세 왕의 능과 유난히 불상들이 많은 삼릉곡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며, 용장곡 용장사지는 조선 초 매월당 김시습이금오신화를 집필한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남산은 서라벌의 진산(鎭山)이다. 북의 금오봉(金鰲峰, 468m)과 남의 고위봉(高位峰, 494m)을 중심으로 동서 너비 4km, 남북 길이 10km의 타원형으로, 한 마리의 거북이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이다. 골은 깊고 능선은 변화무쌍하여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었으니 작으면서도 큰 산이다.

 

남산에는 온갖 전설이 남아 있고,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역사의 산이며, 선조들의 숨결이 가득한 민족문화의 산실이다. 이 산 주변에는 신석기 말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고, 신라시조 박혁거세거서간이 탄강(誕降)한 나정(蘿井)과 초기 왕궁, 나을신궁(奈乙神宮), 왕릉이 즐비하며, 도성(都城)을 지켜온 남산신성(南山新城)을 비롯한 4곳의 산성과,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지(鮑石亭趾)가 있어 남산은 실로 신라 천년의 역사와 함께 한 산이라 할 수 있다.

    

 

 

화랑교육원

삼릉곡 반대편에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데 큰 공헌을 한 김유신, 김춘추 등을 기리고 그 정신을 배우기 위해 건립한 화랑교육원과 통일전이 있으며 한여름 연꽃이 만발할 때 사진사들의 출사지로도 유명한 서출지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다소 힘들더라도 산행을 통하여 둘러본다면 남산의 경관과 신라 불교 유적의 백미를 모두 볼 수 있는 권역이기도 하다. 남산에서 부처의 마음과 미소를 배워보자.

    

 

마애불(磨崖佛)

남산에는 많은 불상과 탑들이 남아 있다. 그 대부분은 석탑(石塔)과 석불(石佛)로서 특히 마애불(磨崖佛)이 많다. 이처럼 많은 유물들이 돌로 만들어진 데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도 하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신앙된 바위 신앙과도 관련이 깊다.

 

아득한 옛날부터 남산 바위 속에는 하늘나라의 신들과 땅위의 선신(善神) 들이 머물면서 이 땅의 백성들을 지켜준다고 믿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산 속, 바위 속의 신들이 부처와 보살로 바뀌어 불교의 성산(聖山)으로 신앙되어 왔다. 이러한 신앙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비파바위(琵琶巖)의 부처님이 망덕사(望德寺)의 낙성재(落成齋)에 누추한 옷차림으로 참석하였는데, 왕이 그 누추함을 업신여기자, 왕을 꾸짖고는 진신석가(眞身釋迦)의 모습으로 바뀌어 홀연히 남산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누추한 승복을 입고 광주리에 물고기를 담아 들고 나타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경흥국사(景興國師)의 제자가 나무라자, 말을 타며 호사스럽게 지내는 경흥국사를 크게 꾸짖고는 다시 남산 속으로 숨어버린 문수보살의 이야기도 있으며, 충담(忠談)스님은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다공양(茶供養)을 올린 후 경덕왕(景德王)에게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올려 군신(君臣)과 백성이 서로의 본분을 다할 때 나라가 태평하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설화들은 곧 남산과 남산 바위 속에는 부처와 보살이 머물면서 권세있는 자나, 존경받는 지식인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는 산에서 내려와 호되게 꾸짖고 가르침을 주고는 다시 산 속, 바위 속에 숨었다가, 백성들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려와 보살펴 준다고 신앙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또한 예술로 승화되고 표현되어, 골마다 절이 세워지고, 바위마다 불상(佛像)이 조성되며, 수많은 탑이 세워져 불국토(佛國土)를 이루었다.

 

남산에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7세기 초에 조성된 동남산 부처골 감실여래좌상(佛谷龕室如來坐像)은 투박한 시골 할머니가 돌로 만든 집 속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고즈넉한 주변 분위기와 어울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온하게 해주는 한국 최고(最古)의 감실불(龕室佛)이며, 7세기 중엽의 장창곡 석조미륵삼존불의상(石造彌勒三尊佛倚像)과 선방곡 석조여래삼존불(石造如來三尊佛)은 티없이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웃음으로 잘 알려져 있다.

 

7세기 후반에 불세계(佛世界)를 만다라적(曼多羅的)인 기법으로 새겨 놓은 탑곡 마애조상군(磨崖造像群)은 사방의 불보살과 비천(飛天)들이 시시각각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나타나는 웃는 모습들은 가히 환상적인 불세계를 표현하고도 남음이 있다. 삼국통일후 남산은 불보살이 머무는 신령스런 성산(聖山)으로 신앙되어 더욱 많은 탑과 불상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에 사방불(四方佛)을 더하여 조성한 칠불암(七佛庵) 마애조상군은 심산궁곡 바위 절벽을 부처님들이 머무는 하늘 나라로 보고 험준한 산등성이에 절을 세운 용기와 큰 바위를 쪼아 대불(大佛)들을 조성하여 화엄세계(華嚴世界)를 구현해 낸 신앙의 열정에는 그저 감격 할 뿐이다.

 

조선초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집필한 용장계곡 용장사지(茸長寺址)의 석조삼륜대좌불(石造三輪臺坐佛)은 자연석 바위를 하대석으로 삼고 둥글둥글한 대좌를 삼단으로 놓아 그 위 연꽃 방석에 부처님을 모셨으니 바로 수미산(須彌山) 위 도솔천(兜率天)의 미륵보살을 모신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불상은 유가종(瑜伽宗)의 대덕(大德)이신 대현(大賢)스님께서 염불하면서 돌면 이 미륵상 또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냉골(삼릉계곡)

남산 전체가 마애불의 보고(寶庫)이지만, 특히 냉골(삼릉계곡)은 마애불이 많다. 입가에 방글방글 미소를 머금은 채 금방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마애관음보살입상(磨崖觀音菩薩立像), 다듬지 않은 넓은 바위 면에 사바세계(裟婆世界)에서 설법하고 있는 석가삼존불과, 극락으로 왕생(往生)하는 중생을 마중 나오시는 신비스런 모습의 내영아미타여래(來迎阿彌陀如來)를 한 폭의 그림으로 새긴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 얼굴은 원만상으로 조각하고 몸은 억센 선으로, 연화대좌는 부드럽고 희미한 선으로 처리하여, 기도하는 중생을 위하여 바위 속에서 모습을 들어내는 듯한 높이 6m의 상선암 마애대좌불(磨崖大坐佛) 등 남산 전체가 불보살의 세계를 옮겨 놓은 듯하다.

 

   

 

용장사지 삼층석탑

부처님 나라를 그리는 간절한 신앙은 탑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용장계곡의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200m가 넘는 높은 바위 봉우리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상층기단을 쌓고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얹어 삼층석탑을 쌓았으니 하층기단인 바위산은 바로 8만 유순(由旬)이나 되는 수미산이 되는 것이요, 탑 위 푸른 하늘이 수미산정(須彌山頂)의 부처님 세계가 되니, 서라벌 벌판은 부처님이 굽어보는 복된 땅이 되는 것이다. 위 산을 기단으로 삼은 탑은 최근 복원한 잠늠골 삼층석탑과 늠비봉 오층석탑에서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초기 왕궁지였던 창림사지(昌林寺址) 삼층석탑과 남산리 사지(寺址) 서삼층석탑에 이르러서는 상층기단부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의 조각으로 나타나고 있다. 팔부중상은 사천왕(四天王)의 장수(將帥)이니 탑의 기단부가 수미산이 되는 것이다.

 

남산에 있는 불교유적의 가치는 자연과의 조화와 다양성에 있다. 편편한 바위가 있으면 불상을 새기고, 반반한 터가 있으면 절을 세우고, 높은 봉이 있으면 탑을 세우되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조성하였다. 비록 바위 속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믿고 있어도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에 적정하지 않으면 불상을 새기지 않고 예배하였으며, 절을 세워도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운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있는 부처를 보고, ()을 들고 바위 속에 숨어 계신 부처님을 찾아낸 것이다. 남산은 자연과 예술이 조화되어 산 전체가 보물이니 세계에 그 유례가 없다. 남산을 아니 보고 어찌 경주를 보았다 할 것이며, 몇 번 오르고 어찌 남산을 안다고 할 것인가?

 

남산에는 왕릉 13, 산성지(山城址) 4개소, 사지(寺址) 150여개소, 불상 130여구, 100여기, 석등 22, 연화대 19점 등 700여점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으며, 이들 문화유적은 국보 1, 보물 12, 사적 14개소, 중요민속자료 1개소 등 44점이 지정되어 있고, 2000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보호받고 있다.

 

남산에는 고위봉과 금오봉 2개의 봉우리에 남북 8, 동서 4의 크기로, 완만한 동남산과 골이 깊고 가파른 서남산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40여 계곡이 있고, 동쪽에는 낭산, 명활산, 서쪽에는 선도산, 벽도산, 옥녀봉, 북쪽에는 금강산, 금학산이 솟아 있다. 뿐만 아니라 토함산 줄기가 동해를 막는 성벽 구실을 하고 있어 남산은 옛 서라벌을 지키는 요새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

 

경주남산에는 150여 개소의 절터, 100여기의 석탑, 130여구의 불상이 있다. 일찍이 인간은 바위 속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대한 바위 앞에 섰을 때 외경심(畏敬心)을 갖게 된다. 고인돌(dolmen)이나 선돌(menhir)이 성스럽게 상징되는 것은 그 바위가 영적인 힘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터전을 지키고 증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조상이나 사자(死者)를 돌에 고정시키게 된다. 그리고 불임의 여성은 자식을 갖기 위해서나, 집안의 큰일을 앞두고 공물을 바치며 거암(巨岩)에 치성을 드려 왔던 것이다.

 

"바위는 어떤 원리를 나누어 갖거나 상징을 구현하거나 우주적 공감을 표현한다. 바위는 영적 실재의 표식 혹은 성스러운 힘의 도구이며, 바위 자체는 그 성스러운 힘의 용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미르시아 일리아테(Mircea Eliaed)의 암석 신앙에 대한 해석은 인도에서 비롯하여 한국에까지 유행한 석굴조영이나 마애불의 유행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와 같이 바위라는 초월적 존재에 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감동적이며 야심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원시 신앙과 고등 종교가 합쳐져서 아잔타석굴, 돈황석굴 같은 인류의 종교적 정열이 집약된 거대한 신체(神體)가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견지에서 볼 때 경주 분지의 시가지 한 복판에 우뚝 서 있으며 접근이 용이했던 남산에도 수많은 기암괴석이 가득 차 있으니 그 암석에 수많은 불상을 새기고 또한 탑을 세우며 한편으로 나라와 집안의 풍요를 기원하였던 것 같다.

 

이와 같이 계곡마다 토속신앙과 불교신앙의 흔적이 보이며 종교적 정열이 한군데 집중된 암석 산은 경주 남산 이외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러기에 남산은 어떤 신비한 세계를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것이니 야외박물관으로 소중히 보존해야 할 것이다.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원성왕 11(795)에 당나라 사신이 한달 가량 서라벌에 머물렀다가 돌아갔는데, 그 다음날 두 여자가 나타나 원성왕에게 아뢰기를 "임금님, 저희들은 동지(東池)와 청지(靑池)에 있는 두 용()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저희의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바꾸어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사람에게 명령하여 저희들의 남편인 나라를 지키는 용을 여기에 머물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원성왕은 하양관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는 하서국 사람에게 "너희들은 어찌하여 우리나라의 세용을 잡아서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은 물고기 세 마리를 원성왕에게 다시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원성왕이 물고기를 받아서 다시 세곳에 놓아주자, 세 마리의 용은 각각 물 속에서 한길이나 뛰고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해 당나라 사람들은 원성왕의 명철함에 감탄하였고, 이때부터 분황사의 우물을 세 마리의 용이 물고기로 변했다는 뜻의 삼룡변어 정(三龍變魚井)이라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신라의 호국룡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이 우물은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으며, 높이 70cm8각으로 되어 있는 우물틀의 외부는 팔정도를 상징하고, 원형으로 조성된 내부는 원륭의 진리를 상징하고 있으며,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사성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천사옥대(天使玉帶)

진평왕이 즉위한 해인 서기 579년 어느날 하늘의 천사(天使)가 대궐의 뜰에 내려와서, "하늘에 계신 상제께서 왕께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천사의 말을 전해들은 진평왕이 꿇어앉아 공손히 옥대를 받으니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후로 진평왕은 교사(郊社)나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마다 이 옥대를 둘렀다고 합니다.

 

그 후에 고구려왕이 신라를 치려고 계획하며 신하들에게 "신라에는 세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니 신하들이 "황룡사(皇龍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天使玉帶) 가 세가지 보물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고구려의 왕은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중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라 사람들은 이 천사옥대에 얽힌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노래로 지어 불렀다고 합니다.

 

구름밖에 하늘이 주신 긴 옥대(玉帶),(저 구름 위에 계신 하느님이 주신 옥대는)

임금의 곤룡포(袞龍袍)에 알맞게 둘려 있네.(임금님께서 입고 계신 곤룡포에 잘 어울린다네)

우리 임금 이제부터 몸 더 무거우니,(우리 임금 이로 인해 몸이 더욱 무거워 지셨으니)

이 다음날엔 쇠로 섬돌을 만들 것이네.(내일은 쇠로 섬돌을 만들어야 하네)

 

 

거인 진평왕

진평왕은 신라 제26대왕(579632)으로서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백정(白淨)입니다. 그의 작은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되자 5798월에 즉위하였는데 키가 11(3m 30cm)이나 되는 거구였다고 합니다. 진평왕이 얼마나 거구였는지 그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루는 진평왕이 자신이 세운 내제석궁(內帝釋宮)이라는 절에 갔을 때였습니다. 돌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진평왕이 발을 내딛자 체중을 견디지 못한 섬돌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진평왕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자신의 장대한 기골을 과시하기 위해 그러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그후로 성안에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못하는 돌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이때 부러졌던 돌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慶州三奇八怪

慶州三奇八怪 경주남산지도 경주남산 문화유적 통계 포석정 연회장설과 수리학적 고찰 남산신성비 보도자료 山經表상의 慶州南山 慶州南山指定 文化財 現況 남산보호비 남산 탑곡 제2마애조상군

 

慶州三奇八怪는 자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어, 여기서는 모두 적어 둔다.

 

三奇(삼기)

1) 金尺(금척) - 박혁거세 때 하늘에서 천사를 시켜 내려주었다.

2) 玉笛(옥적) - 동해에서 문무왕이 화한 해룡과 김유신장군의 혼령이 합하여 신문왕에게 준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알 길이 없고, 현재 경주박물관에 보관된 옥피리를 만파식적이라고도 한다.

3) 火珠(화주) - 선덕여왕이 갖고 있던 수정구슬인데, 분황사 석탑에서 나온 것을 백률사에 보관했다 하나 지금은 없다.

4) 聖德大王神鐘(성덕대왕신종) - 성덕왕의 위업을 찬양하여 아들인 경덕왕이 주조하려다 완성하지 못하고, 혜공왕이 완성하였다.

5) 眞平王天賜玉帶(진평왕의 천사옥대) - 진평왕 즉위 원년에 上帝께서 天使를 시켜 하사한 옥으로 만든 허리띠. 후에 고려 태조에게 헌납하였다.

 

八怪(팔괴)

1) 南山浮石(남산부석) - 남산 국사골에는 공중에 뜬 바위가 있다.

2) 蚊川到沙(문천도사) - 문천(남천)의 물은 맑고 모래가 고와, 물은 아래로 흐르나 모래는 거꾸로 흘렀다고 한다.

3) 鷄林黃葉(계림황엽) - 최치원의 鵠嶺靑松 鷄林己黃葉이라는 말에서 유래. 송악은 솔과 같이 성하고, 계림은 국운이 다 되었다는 말. 또 계림은 사계절 아름답지만 단풍이 들었을 때 더욱 아름답다 한다.

4) 柏栗松筍(백률송순) - 백률사의 송순은 거꾸로 자란다. 또 백률사의 소나무는 잘라도 송순이 다시 났다고 한다.

5) 鴨池浮萍(압지부평) - 안압지에는 부평초가 떠 다녔다고 한다.

6) 金藏()落雁(금장낙안) - 금장대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기러기도 쉬었다 갔다 한다.

7) 佛國影池(불국영지) - 영지에 비친 불국사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한다.

8) 羅原白塔(나원백탑) - 나원리 절터에 있는 화강암으로 된 오층석탑은 그 모습이 아름답다 한다.

9) 西山煙暮(서산연모)(또는 仙桃曉色선도효색) - 선도산에 아침의 붉은 햇살이 일찍 들고 오래 있어 그 광경이 황홀했다 한다.

10) 鰲山晩霞(오산만하)(또는 金鰲晩霞금오만하) - 금오산은 저녁의 노을에 황금빛을 발하여 아름답다 했다.

 

http://www.kjnamsan.org/

<출처 : 경주남산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