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의 우리나무 이야기
창경궁은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 이방원의 처소로 세종이 지은 수강궁 터에 마련한 궁궐이다. 조선 9대 성종은 즉위할 때 세분의 대비를 모시고 있었다. 7대 세조비 정희왕후, 세조의 장남이었으나 일찍 죽어서 추존된 덕종비 소혜왕후(인수대비), 8대 예종비 안순왕후였다. 성종 14년(1483) 임금은 세분의 대비를 위하여 창경궁을 지었다.
창덕궁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의 역사가 이루어진 정무공간인 반면에 창경궁은 내조(內朝)의 공간이었다. 출발부터 권력에서 물러난 여인들의 공간임과 동시에 창덕궁의 보조궁궐로서 모자라는 주거공간을 보완해 주는 기능도 했다. 창건된 지 174년 후인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다른 궁궐과 함께 모든 전각이 불타버렸다. 전쟁 후 광해군 8년(1616)에 정궁(正宮)인 경복궁은 폐허로 놔 둔 채 창덕궁과 창경궁을 다시 지었다.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을 비롯한 일부 건물이 또 다시 소실되었다. 이후 복원과 중수를 거듭하여 조선후기 까지 궁궐로서 체면을 유지하였으나 1909년 일제강점기 직전 창경궁 남쪽 마랑(馬廊) 터 일원의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동물원을 만들고 춘당지란 연못을 팠으며, 대온실을 지어 창경궁이 아니라 창경원(昌慶園)으로서 서울시민의 놀이공간으로 변모시킨다.
이때 수많은 건물들이 없어졌으며 조선의 궁궐 중에 가장 파괴가 심했던 궁궐이 창경궁이다. 1984년 우리 손으로 복원을 하면서 동물원을 없애고 새로 많은 나무를 심어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춘당지와 대온실은 그대로다.
궁궐 나무 심기 원칙
도선국사 이후 풍수지리 사상은 우리 사회의 기본을 이루고 있었다. 조선왕조가 아무리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했지만 궁궐을 짓는데 흔히 말하는 ‘명당 찾기’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었을 터이다. ‘왼쪽에 물이 있고 오른 쪽에 길이 있으며 앞에는 못이 있고 뒤에는 언덕이 있다’면 그림 같은 집을 지을 장소로 모자람이 없다. 청룡(靑龍)과 백호(白虎), 주작(朱雀)과 현무(玄武)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한 조건을 갖춘 곳이란 쉽지 않다.
조선의 궁궐을 만든 사람들은 명당 사상을 기본으로 하나 더 첨가되는 원칙이 있었다. 우리와 함께하는 조경은 자연 순화의 개념이다. 일본이나 중국처럼 철저히 인위적이거나 자연을 압도하려는 거창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표현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결코 초라하지 않게 건물과 어울림을 한껏 고양시킨 것이 우리의 조경이다. 아울러서 지켜지는 또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집안에는 나무를 심지 않은 것이다. 이는 세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임금의 안전을 위함이다. 나무는 임금을 해치려는 자객이 숨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집안에 나무를 심으면 곤(困)이 되어 왕실이 어려움이 오고, 대문 안으로 심으면 한(閑)이 되어 왕가가 한미해진다는 생각이었다. 세 번째로는 집안에 나무를 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혹시 심더라도 지붕높이 보다 더 자라는 것을 꺼렸다. 집의 정기를 나무가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 탓이다.
조선의 궁궐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리면서 건물이 철저히 파괴되고 자라던 나무도 거의 없어졌다. 동궐의 몇 고목나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훗날 심겨진 나무들이다. 즉 20세기 초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어 의도적으로 조선왕조를 폄하할 목적으로 건물을 헐어내고 구조를 바꾸는 과정에 함부로 나무를 심었다. 가장 두드러진 나무 심기는 그들의 대표 꽃나무 벚나무를 궁궐에 들여오는 일이었다. 처음 창덕궁에 심겨지기 시작한 벚나무는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개방되면서 온통 벚나무 천지로 만들어 버렸다. 복원하면서 대부분의 벚나무는 제거되었으나 아직도 상당수가 남아있다.
《동궐도》로 만나는 나무
창덕궁과 창경궁은 합쳐서 동궐(東闕)이라고 하는데, 19C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라는 상세한 궁궐그림이 남아 있다. 적어도 2백여 년 전 궁궐에 어떤 나무를 심고 가꾸었는지를 짐작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귀중한 그림이다. 《동궐도》의 그림에서 나무 종류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소나무가 559, 향나무 등 기타 침엽수가 36, 활엽수 큰 나무가 1,620, 키 작은 관목이 600그루로서 전체 나무의 숫자는 2,815그루이다. 소나무가 20%를 점유하고 있다. 소나무 사이사이에 갓 잎이 피기 시작하여 길게 늘어진 버들이 유난히 눈에 띄고 분홍 꽃이 만개한 복숭아나무와 진달래로 짐작되는 작은 꽃나무가 궁궐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그 외 침엽수로는 잣나무, 전나무, 주목, 향나무, 활엽수로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참나무, 음나무, 뽕나무, 단풍나무 등이 여기저기 자라고 있었다. 꽃나무와 과일나무로서는 매화, 모란, 배나무, 앵두나무, 개암나무, 대추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밤나무 등이 있었으나 《동궐도》 그림으로 명확히 구분해 내기는 어렵다.
지금의 창경궁 나무
창경궁은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난 한참 후인 1984년에 들어서야 옛 건물을 새로 짓고 나무를 심는 등 본격적인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창경궁 나무의 가장 큰 변화는 일제가 심어둔 벚나무의 제거였다. 그 자리를 새로운 나무로 복원하면서 중부지방에 자라는 주요 나무들은 대부분 조경수로 심겨졌다. 홍화문에서 명정전, 함인전, 환경전, 통명전까지로 이어지는 복원 공간 이외는 모두 나무를 심었다. 궁궐 중 창경궁이 가장 많은 나무가 새롭게 심겨진 셈이다.
창경궁은 222,667㎡의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2005년 창경궁 수목 조사 자료를 보면 오늘날 창덕궁에 자라는 나무는 5만7천여 그루이다. 이 중 큰 나무인 교목이 98종 5,789그루이며 현황은 표1과 같다. 현재 교목으로서 가장 많은 수종은 소나무와 단풍나무이며 2579그루로서 전체 교목의 45%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느티나무, 참나무, 잣나무, 귀룽나무 순으로 이어진다. 키 작은 관목은 75종 48,879그루이며 현황은 표2와 같다. 가장 많은 나무는 철쭉과 산철쭉의 꽃나무이며 26,388그루로서 전체 관목의 54%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조릿대, 국수나무, 진달래의 순으로 이어진다.
한편 창경궁에는 궁궐 중 파괴가 가장 심하였던 탓에 남아 있는 고목나무가 다른 궁궐에 비하여 훨씬 적다. 창경궁의 100년 이상 된 고목나무는 느티나무 2그루, 회화나무 2그루, 주목 1그루, 황철나무 2그루, 백송 3그루로서 표3과 같다. 이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는 춘당지 남쪽에 자라는 느티나무로서 나이가 500년이다. 《동궐도》를 그릴 당시에도 고목나무이었을 터이나 찾기가 어렵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듣고 보면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약 400년된 선인문 앞의 회화나무 한 그루가 우리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번호 | 수 종 | 본 수 | 번호 | 수 종 | 본 수 | |
1 | 소나무 | 1469 | 25 | 물푸레나무 | 43 | |
2 | 단풍나무 | 1110 | 26 | 황벽나무 | 40 | |
3 | 느티나무 | 419 | 27 | 산수유 | 35 | |
4 | 상수리나무 | 99 | 참나무 340 | 28 | 자작나무 | 35 |
5 | 굴참나무 | 86 | 29 | 음나무 | 34 | |
6 | 갈참나무 | 84 | 30 | 주목 | 34 | |
7 | 신갈나무 | 40 | 31 | 수양버들 | 33 | |
8 | 졸참나무 | 31 | 32 | 팽나무 | 32 | |
9 | 잣나무 | 306 | 33 | 살구나무 | 30 | |
10 | 귀룽나무 | 242 | 34 | 자귀나무 | 26 | |
11 | 벚나무 | 159 | 35 | 측백나무 | 22 | |
12 | 말채나무 | 123 | 36 | 버드나무 | 21 | |
13 | 팥배나무 | 114 | 37 | 오리나무 | 20 | |
14 | 층층나무 | 98 | 38 | 주목 | 18 | |
15 | 때죽나무 | 96 | 39 | 모과나무 | 17 | |
16 | 회화나무 | 86 | 40 | 목련 | 15 | |
17 | 복자기 | 83 | 41 | 백송 | 14 | |
18 | 느릅나무 | 73 | 42 | 매실나무 | 13 | |
19 | 향나무 | 65 | 43 | 신나무 | 12 | |
20 | 서어나무 | 58 | 44 | 가죽나무 | 11 | |
21 | 쉬나무 | 57 | 45 | 주엽나무 | 10 | |
22 | 쪽동백나무 | 56 | 총계 |
| 5,789 | |
23 | 산사나무 | 55 | 종수 |
| 98 | |
24 | 은행나무 | 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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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수종 | 수량 | 번호 | 수종 | 수량 |
1 | 철쭉 | 14,541 | 18 | 앵두나무 | 70 |
2 | 산철쭉 | 11,847 | 19 | 눈주목 | 59 |
3 | 조릿대 | 8,388 | 20 | 찔레나무 | 56 |
4 | 국수나무 | 4,069 | 21 | 옥향 | 47 |
5 | 진달래 | 2,706 | 22 | 황매화 | 43 |
6 | 매자나무 | 1,332 | 23 | 화살나무 | 38 |
7 | 회양목 | 1,138 | 24 | 개암나무 | 35 |
8 | 영산홍 | 1,080 | 25 | 함박꽃나무 | 26 |
9 | 싸리나무 | 1,047 | 26 | 까치밥나무 | 21 |
10 | 생강나무 | 866 | 27 | 명자나무 | 21 |
11 | 개나리 | 422 | 28 | 개쉬땅나무 | 15 |
12 | 낙상홍 | 214 | 29 | 수국 | 15 |
13 | 라일락 | 157 | 30 | 오갈피나무 | 13 |
14 | 무궁화 | 155 | 31 | 보리수나무 | 13 |
15 | 조팝나무 | 112 | 32 | 쥐똥나무 | 12 |
16 | 좀작살나무 | 94 | 총계 |
| 48,879 |
17 | 병꽃나무 | 85 | 종수 |
| 75 |
수 종 | 나이 | 크기 | 위치 | |||
키(m) | 뿌리목 직경(cm) | 가슴높이 직경(cm) | 나무갓 폭(m) | |||
황철나무 | 100 | 17 | 145 | 120 | 13 | 관천대 옆 |
황철나무 | 100 | 16 | 125 | 140 | 13 | 관천대 옆 |
회화나무 | 300 | 16 | 190 | 160 | 13 | 남행각 옆 |
회화나무 | 400 | 13 | 90 | 35+45 | 11 | 선인문 앞 |
백송 | 100 | 12 | 71 | 45+42+30 | 10 | 춘당지 동측 |
백송 | 100 | 14 | 75 | 57+42+41 | 10 | 〃 |
백송 | 100 | 11 | 50 | 28+26+26+24 | 10 | 〃 |
느티나무 | 300 | 20 | 130 | 110 | 20 | 춘당지 서측 |
느티나무 | 500 | 11 | 165 | 140 | 12 | 춘당지 남측 |
주목 | 300 | 5 | 70+36 | 49+31 | 7 | 함인정 남측 |
향나무 | 150 | 13 | 79 | 96 | 11 | 함인정 남측 |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창경궁 나무
창덕궁에서 처음 건립목적대로 왕을 사별한 왕비가 이제 권력을 물려주고 대비(大妃)란 이름을 달고 물러나서 노후를 보내는 궁궐이다. 여인의 공간, 여인을 위한 공간이었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조선의 통치이념은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왕실이라고 다를 수 없었으며 여인은 집안에서 화목(花木)을 가꾸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것을 최선의 덕목으로 여겼다. 그러나 《동궐도》를 보면 특별히 꽃나무를 많이 심는 등 여인들을 위한 배려를 따로 한 것 같지는 않다. 창덕궁과 함께 이용한 후원을 제외하면, 창경궁도 거의 건물만 들어 서 있다.
1984년 복원을 하면서 건물 복원은 거의 이루어 지지 않았으므로 빈터에는 많은 나무를 심게 되었다. 중부지방에 흔히 자라는 나무를 중심으로 전통 수종도 대부분 찾아서 심었다. 새로 심은 나무가 많으므로 궁궐 중에는 나무 종류가 가장 많다. 일부 적절하지 않은 외국수입나무가 아직도 남아있으나 숫자가 적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창경궁과 특별한 역사적인 인연을 가진 몇 나무를 알아본다.
버들
창경궁을 짓고 난 다음 해인 성종 15년(1484) 임금은 장원서(掌苑署)의 노예들을 동원하여 궁 안이 들여도 보이지 않게 빨리 자라는 버들을 심으라고 한다. 《동궐도》를 보면 창경궁의 마구간이었던 마랑(馬廊) 앞, 홍화문과 선인문 앞(지금의 서울대 병원 자리) 등 여러 곳에 능수버들이 그려져 있고 지금도 궁궐의 곳곳에 능수버들이 심어져 있다. 능수버들은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활쏘기의 표적 나무가 되기도 했다. 최고의 명궁은 왕이 참석한 가운데 늘어진 능수버들의 잎을 맞히는 것으로 우열을 가렸다고 한다. 이렇게 창경궁에 심겨진 버들은 좋은 의미로는 사생활 보호를 위한 배려였겠으나, 임금과 사별하고 권력의 핵심에 밀려난 여인들에게 먼 산을 쳐다보고 가신님을 그리워하는 것 마저 제약을 둔 게 아닌가 싶다. 더욱이 한참 봄바람에 물오른 버들가지가 전하는 느낌 때문에 여인들은 왕비 시절의 추억을 ‘가슴 아프게’ 넘나들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역사 속에 버들은 대부분 여인의 나무다. 버들은 그 생김새부터 강인한 남성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봄이 무르익으면 가느다랗게 늘어진 버들가지는 산들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비튼다. 새싹이 틀 때 멀리서 바라보는 버들은 황금 실로 차양을 만들어 우아하고 기품 있게 늘어트린 듯하다. 버들에서 다가오는 느낌은 가냘픈 여인을 연상한다. 그래서 버들은 여인의 신체적 특징과 비유되는 말로 쓰인다. 가느다란 허리를 버들허리(柳腰), 예쁜 이마를 버들이마(柳眉), 우아하고 늘씬한 몸매를 버들맵시(柳態)라 한다. 옛 사람들이 연인과 헤어질 때 배웅하는 마지막 이별 장소는 나루터이다.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눈물을 감추고, 나루터에 흔히 자라는 버들가지를 꺾어주면서 눈빛으로 사랑을 주고받았다. 버들을 건네주는 깊은 뜻은, 산들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은근한 투정이 들어있다.
살아서 버들은 사랑의 징표로서 대접을 받았으나 죽어서는 저주의 징검다리가 되기도 했다. 성종 때 연산군의 어머니인 중궁 윤씨는 비방 주문과 비상을 버드나무상자에 넣어 권숙의 집에다 던지는 ‘비상 투척 사건’에 연루된다. 이는 성종의 사랑을 잃어버리는 빌미가 되었고 그 후에도 불같은 질투를 참지 못하여 급기야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게 된다. 결국 폐비가 되고 죽임을 당해 뒷날 갑자사화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숙종 때는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창경궁 통명전 연못가에 각시와 붕어를 넣은 버드나무상자를 묻었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았다. 가녀린 버들가지로 엮은 작은 버들궤짝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여인과 함께 했다.
회화나무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서 궁궐 담장을 따라 50m쯤 내려오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선인문이 있다. 문의 안쪽 금천 옆에는 줄기가 휘고 비틀리고 속까지 썩어버린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자란다. 옆에는 이런 설명 팻말이 붙어 있다.
‘한자로는 느티나무와 같이 괴목으로 불렀고 《동궐도》에도 보이는 나무이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죽은 곳이 이 근처이고 비극적인 사건이 많이 발생한 선인문과 역사를 같이한 나무이다.’
조선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임금은 자신의 손으로 세운 왕세자 사도세자를 8일 동안이나 뒤주 속에 가두어 죽여 버린다. 고통의 비명을 고스란히 듣고 보았을 비극의 현장 에 있던 나무가 지금의 선인문 회화나무라고 한다. 사도세자는 회화나무와의 인연이 또 있다. 죽기 2년 전인 1760년 피부병 치료를 위하여 지금의 온양관광호텔 자리인 ‘온양행궁(溫陽行宮)’에 잠시 머문다. 활을 쏘는 사대(射臺)에 그늘이 없음을 보고 온양군수를 시켜 품(品)자 모양으로 회화나무 3그루를 심게 했다고 한다. 사람은 비명에 갔지만 나무는 무성하게 자라 1795년 아들 정조가 손수 ‘영괴대(靈槐臺)’란 비석을 세운다.
이렇게 회화나무는 사도세자의 비극과 함께했지만 원래는 궁궐의 권위를 상징하는 나무다. 그 기원은 주나라 때 삼괴구극(三槐九棘)이라 하여 조정의 외조(外朝)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우리나라의 3정승에 해당되는 삼공(三公)이 이에 마주보고 앉았다는 ‘주례(周禮)’에서 기원한다. 또 좌우에 각각 아홉 그루의 대추나무를 심어 고관들이 둘러앉았다고 한다.
우리의 궁궐에도 중국의 예에 따라 심은 회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회화나무 고목들이 먼저 반겨준다. 창경궁에는 사도세자의 회화나무 이외에 남행각 남쪽으로 큰 나무가 한 그루 더 있다.
진달래
세조 3년(1457), 진달래가 만발할 즈음 남녀 7, 8명이 대궐문 앞을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지나갔으나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일이라 하여 이를 용서해주었다고 한다. 연산 12년(1504)에는 장의문(藏義門)에 탕춘정(蕩春亭)이란 새 정자를 짓고 산 안팎에는 진달래를 심었는데 왕과 왕비가 자주 거동하여 봄을 감상했다고 한다. 임금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예나 지금이나 진달래는 변함없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꽃임에 틀림없다.
음력 3월 3일의 삼짇날은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라 하여 봄을 맞는 마음으로 꽃전(花煎)을 부쳐 먹는 풍속이 있다. 꽃전이란 찹쌀가루 반죽에 꽃잎을 얹어서 지진 부침개를 말하는데, 이 풍속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삼짇날 비원에서 중전이 나인(內人)들과 함께 진달래꽃 꽃전을 부쳐 먹는 행사가 있었다 한다. 창경궁에는 진달래가 2천7백여 그루로서 다섯 번째로 많은 관목이다. 화목으로서 뿐만 아니라 꽃전의 전통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나무라고 생각한다.
청주에 진달래꽃을 넣어 빚는 술을 두견주(杜鵑酒)라 한다. 조선 말기 문신 김윤식의 시문집에 의하면 고려의 개국 공신 복지겸이 병에 걸려 휴양할 때 17세 된 딸이 꿈에 신선의 가르침을 받아 만든 술이라고 한다. 이 술은 진통, 해열, 류머티즘의 치료약으로 쓰였다. 또 진달래 꽃잎으로 녹말가루를 씌워 오미자 즙에 띄운 진달래 화채 역시 삼월 삼짇날의 계절음식이다.
단풍나무
궁궐을 일컫는 다른 말에 풍금(楓禁), 풍신(楓宸), 풍폐(楓陛) 등이 있다. 풍금은 단풍나무가 많으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 바로 궁궐을 나타낸다. 또 풍신이란 말도 마찬가지로 궁궐이란 뜻이다. 신宸은 하늘의 중심인 북극성이 거처하는 곳으로 임금이 머무는 땅으로 단풍나무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 외 풍폐 역시 단풍나무 섬돌을 뜻하며 궁궐을 말한다. 이렇게 궁궐을 나타내는 말에 단풍나무가 많이 들어가는 이유는 중국의 한나라 때 궁궐 안에 단풍나무를 많이 심은 탓이라고 한다. 이렇게 궁궐을 나타내는 말에 단풍나무가 많이 들어가는 이유는 중국의 한나라 때 궁궐 안에 단풍나무를 많이 심은 탓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궁궐에도 단풍나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창덕궁 후원에는 참나무, 때죽나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나무가 단풍나무다. 단풍나무는 습기가 좀 있고 햇볕이 바로 쪼이는 곳보다는 큰 나무 밑이나 나무와 나무사이에 잘 자란다. 후원은 단풍나무의 자람 터로서는 좋은 조건을 갖추었으므로 원래부터 자연적으로 자라고 있는 단풍나무도 많다. 여기에다 일부러 심기도 했으므로 단풍나무는 더욱 많아진 것이다. 일성록日省錄에서 정조 때의 기록을 보면 ‘단풍정’에서 활쏘기 등 여러 행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풍정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춘당대 곁에 있는데,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서 가을이 되면 난만하게 붉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었으나 정자는 없다.’고 했다. 춘당대는 부용지 동쪽 영화당暎花堂 앞마당인데 지금의 이 일대에는 참나무, 느티나무, 음나무 등이 자리 차지를 하고 단풍나무는 거의 없어져 아쉬움을 더한다.
창경궁에는 80년대 초에 복원하면서 단풍나무를 일부러 심었다. 특히 월근문 앞 창덕궁관리사무소 뒤쪽으로 심겨진 단풍나무들은 궁궐단풍의 백미다. 단풍드는 시기가 다른 곳보다 조금 늦어 11월 중순을 넘겨야 절정을 이룬다.
뽕나무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일은 예부터 농업과 함께 농상(農桑)이라 하여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다. 우리나라에 양잠이 시작된 것은 삼한시대 이전으로 짐작된다. 조선조에 들어오면서는 비단 생산을 더욱 늘려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처음 나라를 열어 불안정한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이 편안히 살게 하려면 산업생산을 통한 수입증대가 필요했다. ‘비단입국‘의 기치를 높이 들 수 있었던 이유는 명나라에 보내는 조공과 신흥귀족들의 품위를 높이기 위한 비단의 수요도 만만치 않아서다.
태종 때는 집집마다 뽕나무를 몇 그루 씩 나누어 주고 심기를 거의 강제하다 시피 하였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의 집안단속은 쉽지 않았을 터, 태종11년(1411) 임금은 이렇게 역정을 낸다. ‘옛날에는 후궁들이 부지런하고 알뜰하여 친히 누에를 쳤는데, 지금은 아래로 궁중 시녀까지 모두 배불리 먹고 할 일 없이 내 옷까지도 모두 사서 바친다. 앞으로는 시녀들로 하여금 길쌈을 맡아서 내용(內用)에 대비하게 하라.”고 한다. 이에 대한 신하들의 대답은 ‘주상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이다. 아마 궁녀들의 빈둥거리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인의 공간인 창경궁에도 기록에는 명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뽕나무를 심고 누에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세종으로 내려오면서 누에치기는 더욱 독려한다. 예부터 내려오던 친잠례(親蠶禮)를 강화하여 왕비가 직접 비단 짜는 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흔히 우리는 세상이 너무 변하여 옛 정취를 찾을 수도 없게 되면 상전벽해란 말을 쓴다. 잠실은 뽕나무 밭, 누에들의 터전이 바다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아파트촌이 되어있다. 구한말까지만 하여도 3-400년이나 된 뽕나무가 여럿 있었다하나 이제는 모두 죽어버렸다. ‘님도 보고 뽕도 따던’ 그 옛날의 청춘남녀들은, 무성한 잎으로 은밀한 사랑을 가려줄 뽕밭이 없어졌으니 모두 카페로, 피시(PC)방으로 가버릴 수밖에 없다.
벚나무
우리 문화로는 벚나무를 꽃나무 대접한 적은 없다. 벚나무와 자작나무는 서로 구분하지 않고 그 껍질을 화피(樺皮)라고 한 이름에서부터 벚나무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얇고 매끄러운 껍질을 벗겨 활을 만들 때 이용하거나 화피전이라 하는 것처럼 포장 재료서 쓰임이 같았기 때문이다. 《동국이상국집》을 비롯한 우리의 시가집 어디에도 벚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한 수가 없다. 그러나 일본은 그들의 《만요슈(萬葉集)》을 비롯한 수많은 시가집에 벚나무가 등장하고 국민 모두가 좋아하는 꽃나무이다. 벚나무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인들의 나무이다. 《동궐도》에도 벚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꽃의 계절 4월, 화려한 벚꽃은 멀리 제주도부터 서울의 여의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누비고 올라온다. 벚꽃은 이처럼 봄을 알리는 대명사처럼 우리에게 친숙해 있다. 그러나 벚꽃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며 그들의 역사와 문화 속에 너무 깊이 간직되어 있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대표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제주도 한라산이라서 우리의 꽃이므로 일본 꽃으로 알고 경원시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논리로 온통 나라가 벚나무 천지가 되어 간다. 하지만 원산지란 식물학적으로 값어치는 클지라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의미를 부여할 당위성을 찾기는 어렵다. 무궁화의 원산지는 우리나라가 아니지만 국화로 선정된 것을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지금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심는 가로수의 대부분은 제주도 원산이라는 왕벚나무다. 이렇게 가다 보면 우리나라는 오래지 않아 온통 벚나무 천지가 되기 십상이다.
창경궁에 동물원이 있던 시절에는 창경궁 전체가 온통 벚나무 천지 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벚꽃 축제는 서울의 명물로서 널리 알려졌고 특히 밤 벚꽃놀이가 유명하였다. 벚꽃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고 일본의 꽃 문화를 우리에게 전파시킨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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