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한국미술

한국근대미술사 개괄

草霧 2013. 4. 14. 11:16

 

 

 

 

 

 

 

 

 

 

 

 

 

 

 

 

 

한국근대미술사 개괄

 

Ⅰ. 머리말

 

한국의 근대를 어느 시점으로 하는가에 대해 아직도 논의가 끝나지 않고 있다. 이유는 그 동안 이시기에 대한 자료와 연구가 부족하기도 하였지만, 역사 자체 내에서 볼 때, 구체제의 모순을 깨고 자생적 발전으로 인한 근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는 취약점이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사에서도 마찬가지로 근대편년의 문제는 앞으로도 무거운 숙제로 남으리라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년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연구와 더불어 동시에 근대시기의 미술 행적에 대한 연구도 끊임없이 필요한 것은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을 담보하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앞으로의 방향성을 타진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로서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그러한 연장선상으로 객관적 입장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한 근대미술사에 대한 서술과 그에 따른 풍부한 자료를 제시하기로 하였다. 이 글은 바로 그 첫 번째 작업으로 각 시기와 연대에 따른 간략한 설명으로 전반적 분위기를 파악하여 이 후에 진행될 각 연대별 심층적 서술과 그림 설명의 이해를 돕는 수준으로 하였다.

 

 

 

Ⅱ. 중세봉건제의 해체기

 

왜란과 호란이후에 왕조의 지배체제가 흔들리고 모든 허점이 드러났다. 그 허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배권력은 더욱 보수화 되고 귀족화 되어 급기야 당쟁이라는 말폐(末廢)를 보인다. 이에 정치권력에서 탈락된 지식인은 실학이라는 국가경영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였으나 역시 성리학이라는 기존 사상체계의 테두리 안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계로 커다란 영향력으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호란이후의 북벌론(北伐論적) 입장에서 북학론(北學論)적 인식으로 바뀌며 청나라를 통하여 서양의 근대문명을 접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으나 세도정권의 계속적인 탄압과 정전(政戰)으로 인하여 아무런 대책 없이 문호개방이 되면서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이시기의 화풍은 전대의 풍속화와 산수화와 비교하여 도식적이고 형식화된 모습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그 반대로 다소 소극적이기는 하나 서양화법이 보이는 참신한 작품과 서양의 영향과는 별개로 이색적인 구도와 화풍이 보이는 몇몇 작품이 눈에 띈다. 청조문화의 수용으로 남종 문인화의 계승이 더욱 심화되어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전대(前代)에 없던 현상으로 중인(中人)계층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사대부의 지식수준을 육박하는 중인출신의 화가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회변화와의 심한 괴리감으로 인하여 전통적인 화론을 대체하거나 뛰어넘을 만한 힘이 형성되지 못하고 이후 한일합방과 함께 밀려 온 유화(油畵)로서 대표되는 서양화에 경도 되는 위기에 처하였다.

 

 

 

 

Ⅲ. 일제침략기

 

1. 1910年代

전통회화 중심의 단체나 교습소가 생겨나는 등의 전통회화를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화가들이 있었다. 이에 반해 동경유학생 출신인 한국인 유화가(油畵家)가 탄생하였다.

 

2. 1920年代

3·1독립운동으로 항일정신이 고조로 일제는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1918년에 결성된 서화협회가 협회전을 여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조선미전을 압도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전통화로 불리는 수묵채색화는 모두 봉건적이고 낡은 것으로 간주되어 비하하는 상황이 되었다. 반면 총독부가 주최한 조선미전은 신인을 상대로 하는 공모전으로 점점 조선미술계에서의 위상이 커졌다. 또한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시작되면서 미술계에도 그 영향을 끼쳐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이 결성되었다.

3. 1930年代

20년대부터 시작된 미술소집단 활동은 화가의 증가로 인하여 30년대에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화가들 사이에서 현실주의와 유미(有美)주의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면서 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함께 조선향토색론이 미술계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이는 지식인들이 조선학 운동의 영향도 있었으나 일제의 부추김으로 인한 영향이 더 컸다. 30년대 후반에 들어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해지면서 허무와 냉소의 분위기 짙은 서양의 모던이즘 계열의 화풍이 도입되었고, 몇몇 화가들의 친일적 행위가 두드러졌다.

 

4. 1940年代

일제는 '내선일체와 일본정신'을 강요하였고, 미술계 내에서는 고전을 되찾자는 복고주의가 주장되었고, 따라서 전통 서화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또한 반면에 창씨개명 등의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하는 작가들이 속출하였다. 드디어 1945년에 한국은 해방되었고 해방된 자리에 또다시 미군과 소련이 주둔하여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명목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Ⅳ. 해방공간

8. 15해방으로부터 6. 25사변까지를 해방공간의 시대라고 말한다. 해방이후 모든 문화예술인들이 조선문화건설협의회를 창립하고 그 산하 단체로서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친일적 행위가 심하였던 몇몇 작가들은 제외되었다. 또한 조선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이 결성되고 이후 조선미술동맹으로 개편하였다. 조선미술건설본부는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분열되어 조선미술가협회가 분리 창립되었고 시기가 지나며 각 미술단체들이 난립하였다.


남한은 미군정과 보수 이익, 친일잔재 세력이 정국(政局)을 장악하면서 좌익예술인에 대한 탄압이 심하였다. 당시 조선미술동맹의 순회전을 우익테러집단이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등의 불안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월북을 감행하는 작가들이 속출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유엔이 남한만의 총선 실시를 결의하고 드디어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 혁신의 부진, 통일 무산, 친일 세력이 주요 요직을 장악하게되고 관의 주도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실시하고 그에 따라 미술계는 구습적 형태와 출세주의의 성향으로 나아갔다. 이후 6. 25사변이 발발하면서 미술계는 남과 북으로 완전한 단절 속으로 떨어진 것이다.

 

 

 

Ⅴ. 6.25사변 이후

6. 25사변 이후 미술계는 초토화되었다.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한 사상탄압으로 자유주의를 말살하여 예술지상주의라는 미명아래 아무 특징 없는 미술만이 판을 치게 되었다. 대한민국전람회는 일제시대의 조선미전을 그대로 계승하여 계속해서 실시되었으며 더욱더 미술계를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으로 이끌고 그로 인한 많은 숫자의 화가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또한 이후 유행한 한국의 모던이즘이라는 것은 오직 서양의 겉껍질만을 흉내내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가들은 제도권에서 벗어나 한국미술의 전통의 계승, 또는 혁신이라는 문제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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