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중세 미술 2,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 1 - 다

草霧 2013. 2. 28. 00:00

 

 

 

 

중세 미술 2

 

 

교황과 황제, 충돌과 협력 그리고 새로운 유럽의 시대

  

. 중세유럽이 기독교를 이야기하다.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 1 - 다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편에서는 2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로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된 종교이야기와 문화를 통하여 미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 새로운 유럽의 시대

 

 

 

(다)

 

 

1.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교회권력과 정치권력, 권력을 탐하다

  

1. 박해와 순교의 시대 _ 정치권력과 거리두기

    

 

2. 제국의 교회 _ 정치권력에의 복속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

로마제국에 의한 지속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교세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박해가 거듭될수록 교인의 숫자는 오히려 늘어났으며 로마 전역으로 기독교가 확산되어 갔다. 특히 원형경기장에 끌려가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히 맞이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당시의 정치권력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기독교의 이러한 저력을 간파한 로마의 정치세력 중 일부는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로마의 장군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황제가 된 직후 기독교를 공인하였고,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는 300여 년 만에 피해자의 종교에서 가해자의 종교로 탈바꿈하였고 성직자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군사적, 법적,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종교사의 자리에서 보면 기독교의 국교화는 기독교에 의한 로마의 정복이지만, 정치사의 자리에서 보면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의 활용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개인적 신심의 발로보다는 정치적 동기에 의한 것이다. 거대한 제국의 통합을 위해서는 보편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고,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이러한 요구에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신, 하나의 황제라는 보편주의의 전략 속에서 기독교가 정치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기독교의 국교화 이후 교회가 정치권력에 복속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기독교 제국이 된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신으로 추앙되지는 않았지만 세속적 종교적 영역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나는 황제이고 나는 사제이다(I am emperor and I am priest).”라고 말했다. 로마의 황제들은 교회회의를 주재하고 고위 성직자들을 임명하였으며 다양한 법령의 제정을 통해 교회재산을 관장하였다. 황제가 교회 위에 군림하는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당시 궁중 교회사가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 260~340)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하느님의 친구이자 하느님의 말씀의 해석자로 칭송하는 등 국가교회를 정당화하였다.

 

물론 이 시기의 교회가 황제를 예찬하는 어용신학(official theology)’만 생산한 것은 아니다.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양민 학살 사건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그의 공개적인 죄 고백을 받아 낸 이후에야 비로소 성찬을 허락하였다. 어떤 황제가 성당 하나를 아리우스파에게 양도하라고 명령했을 때도 그는 이를 교회 간섭으로 간주하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암브로시우스의 논리에 의하면 궁전은 황제에게 속하고 교회는 사제에게 속한다. 따라서 교회와 신앙의 문제에서는 황제가 감독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교황 겔라시우스 1(Gelasius I)도 황제의 교회 간섭을 막고자 하였다. 그는 494년 비잔티움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Anastsius)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세상을 지배하는 두 권력이 있는데 하나는 사제의 신성한 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왕의 주권적 권력이다. 공적 질서의 영역에서는 주교가 황제에게 복종해야 하지만 성례의 집행과 관련해서는 황제가 주교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처럼 암브로시우스와 같은 주교나 겔라시우스 같은 교황이 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투했지만 당시 교회는 로마 제국에 복속되어 있었다.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도 이러한 역학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기독교로 개종한 게르만족의 왕들은 과거와 같은 신적 지위는 상실했지만 자신들의 왕국에서는 교회의 통치자로서 군림했다. 프랑크 왕국의 황제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나 앵글로 색슨의 왕 알프레드(Alfred the King, 849~899)와 같은 인물은 특히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에는 교회가 황제의 세속적 권력에 도전할 만한 정치적 힘을 키우지 못했다. 여기에는 중세 기독교의 세계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까지 기독교의 지배적 세계관은 타계지향적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에 따르면 이 지상에서의 삶은 과도기적인 것이며 기독교인은 지상의 나그네이자 순례자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궁극적 관심은 이 지상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도시 즉 내세의 삶을 지향해야 한다. 이러한 타계적 신앙의 분위기 때문에 당시 교회는 스스로를 정치적 법적 기구로 확립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 결과 정치권력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교황 혁명(papal revolution)과 양검 이론(two swords theory), 권력을 독점하다.

 

 

 

중세 후반기에 접어들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급진적인 변화가 초래된다. 11세기 중엽에 성직자들이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화를 추진하였고, 12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드디어 가톨릭교회가 독자적인 정치적법적 실체(political-legal entity)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황 혁명(papal revolution)’으로서 저 유명한 서임권 논쟁(Investiture Controversy)’을 불러 일으켰다. 이 혁명을 주도한 교황 그레고리(Gregory) 7세는 <교황의 명령>(Dictates of the Pope, 1075)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황제와 왕은 교회에 대해 권위를 갖지 못한다. 로마의 주교만이 주교를 임명하고 감시시키고 파문하고 재임용할 권한을 지닌다. 교황만이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중재할 수 있다. 교황만이 수도원을 건축할 수 있고 새로운 법을 제정할 수 있다. 교황의 법정이 기독교세계의 법정이다. 교황은 황제를 해임할 수 있으며 모든 군주는 그의 발에 입을 맞추어야 한다.

 

요컨대 교황이 성직 임명권과 황제 해임권을 동시에 갖는다는 주장이다. 원래 성직 서임권은 교황과 교회에 속한 것이었으나 그 동안 세속 군주들의 권력이 강했기 때문에 군주나 황제가 관행의 차원에서 서임권을 행사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교회쇄신 운동을 통해 교황권의 강화에 성공한 그레고리 7세가 서임권을 되찾기 위해 이러한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 7세 교황의 이러한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였다.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간파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머무는 카노사 성으로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그는 눈 덮인 성문 앞에서 3일 낮과 밤을 참회하면서 교황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카노사의 굴욕’(1077)으로 알려진 것으로서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이 시기 교황권의 강화를 위해 등장한 신학적 담론이 양검 이론(two swords theory)’이다. 원래 양검 이론은 5세기에 겔라시우스가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사제의 권위를 해방시키기 위해 제창한 이론이었는데 이 시기에 와서 새롭게 변형되었다. 성 베르나르(St.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는 교황이 영적 검세속적 검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적 검은 사제의 권한을 의미하고 세속적 검은 왕의 권한을 의미한다. 그런데 교황이 대관식을 통해 황제에게 세속적 검을 위임한 것이기 때문에 제국의 지배권은 교황으로부터 유래한다는 논리였다. 비유하자면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이다. 태양은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있지만 달은 해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솔즈베리의 존(John of Salisbury, 1115~1180)은 양검 이론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교황을 대리자로 지명하고 그에게 신적 힘을 부여하였다. 따라서 교황은 신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체를 분배하고 구원에 필요한 영적 법과 전례를 제정할 수 있다. 그러나 교황은 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성스럽지 못한 세속적 검을 휘두를 수 없다. 따라서 신은 세속적 통치자를 임명했고 교황은 그에게 세속적 검을 위임하였다. 이처럼 세속적 통치자는 교황으로부터 권위를 받았기 때문에 교황의 신민이다.

 

중세 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체계 역시 이와 비슷한 논리를 보이고 있다. 아퀴나스는 초자연과 자연의 이분법에 근거하여 교회와 국가, 교황과 황제의 관계를 설정했다. 그에 의하면 교회가 국가 위에, 교황이 황제 위에 존재한다. 요컨대 국가와 황제는 교회와 교황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처럼 이 시기에는 교권속권을 압도했지만 구체적 현실 속에서는 양자가 서로 협조하였다. 교회가 불신자 응징을 위한 십자군을 요청했을 때 세속 당국은 군대를 파견하였고 교회가 이단 선고를 내린 자들에 대해서는 국가가 사형을 집행하였다. 교황과 주교는 왕과 영주의 군대를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세속법과 질서를 대체로 존중하였다.

 

4. 두 왕국설(two kingdoms theory)과 국가교회, 성공회(Anglican Church)

중세 후기, 근대 초기로 접어들면서 유럽 전역에서는 다시 세속 군주의 힘이 증대하는 반면 교황권이 쇠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아비뇽의 유수대립 교황이라는 용어에서 잘 나타나듯이 중세 말기는 교황들이 프랑스의 아비뇽에 유폐되거나 교황이 난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교황권의 급속한 추락을 보여주는 상징적 현상들이며 이러한 교황권의 약화를 틈타 세속 군주들의 힘이 급격히 증대한 것이다.

 

급진적 왕실주의자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Padusa, 1275~1342)는 전례, 교의, 교회 조직 등의 문제에서도 평신도 군주가 우월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시기스문트(Sigismund, 1368~1437)는 일련의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황제가 교회정치와 교회법에 대한 권위를 갖는다고 선포하였다.

 

16세기에 시작되는 종교개혁은 바티칸을 정점으로 하는 기독교세계를 내부로부터 분열시킴으로써 교황의 위상을 더욱 추락시켰다. 종교개혁이 가톨릭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가장 중요한 점은 정치적 법적 관할권을 행사하는 가시적이고 위계적이고 실체적인 교회 개념의 붕괴였다. 루터는 교황권주의자들의 신학적 무기로 원용된 양검 이론두 왕국설(two kingdoms theory)’로 대체하였다. 두 왕국설에 의하면 교회는 두 종류이다. 하나는 천상에 있는 비가시적 교회이며 다른 하나는 지상에 있는 가시적 교회이다. 천상의 교회는 의인들로만 이루어진 참된 교회인 반면, 지상의 교회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 타락한 교회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지상의 타락한 교회는 세속 군주의 통치에 따라야 한다는 논리이다. 루터는 세속 군주에게 국가에 대한 법적 정치적 권력만이 아니라 지상의 교회에 대한 법적 정치적 권위도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군주는 자신의 영토 안에서 교회를 보호하며 교리와 전례의 제정에 개입하고 사악한 가르침과 잘못된 성례를 규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관을 지닌 루터교는 정치적 법적 실체로서 교회를 이해하는 가톨릭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교와 가톨릭 사이의 갈등은 아우구스부르크화약(1555)에 의해 해결되었는데 이 화약에 따라 각 군주는 자신의 영토에서 가톨릭이나 루터교를 국교로 삼을 수 있었다. 여기서 군주의 종교가 백성의 종교(cuius regio eius religio)”라는 원칙이 생겨났다. 이후 유럽 각지에서는 국가가 교회 위에 군림하는 국가교회(state church)’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는 성공회(Anglican Church)가 국가교회로 탄생했는데 수장령(Acts of Supremacy, 1534)’을 통해 왕이 국가교회의 대표자로 되었다. 헨리 8세와 그 후계자들은 로마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그 자체의 예배의식, 교리, 성례를 확립하고 자국어로 <공동기도서>를 간행했다. 이러한 왕실의 종교정책에 대한 반항은 모두 반역행위로 간주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Huguenot)라 불린 칼뱅주의자들이 등장하여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절대군주의 권력을 동시에 비난했다. 이들은 위그노 전쟁의 산물인 낭트칙령’(1598)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얻었지만 이 과정에서 프랑스의 군주들은 로마 교황과 대립하는 민족적 가톨릭교회를 조직했다. 이것이 알프스 산맥 너머에 있는 로마 교황의 권위를 수호하려고 하는 가톨릭 세력(Ultramontanes)과 대결하는 고올주의(Gaullicanism)이다. 고올주의는 프랑스 군주의 치하에 존재하는 국가교회의 형태를 취하면서 교회재산, 교회법정, 성직 임명 등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철저하게 제거하였다. 루이 14세는 퐁텐블로(Fontainebleau, 1685)칙령을 통해 낭트칙령을 폐기하고 모든 개신교 교회와 학교의 철거명령을 내리고 공식적으로 인정된 고올주의에서 벗어난 모든 의식과 신학을 금지시켰다.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움직임들이 나타났는데 독일 지역에서 등장한 페브로니우스주의(Febronianism)가 그 하나이다. 이 주의는 교회의 최종 권위는 교황이 아니라 주교들의 회의에 있다고 하면서 국가주의와 결합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조셉 2세가 전통적인 수도원들을 폐쇄하고 새로운 교회들을 세우는 과정에서 성직자들의 교육을 국가가 담당하는 국가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조셉주의(Josephism)이다.

 

이처럼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절대주의 시대는 세속 군주가 종교를 강력한 국가통합의 엔진으로 적극 활용하는 시대였다. “종교 통일 없이 국가 통일 없다는 표현이 이 시기의 구호이며 이 시대의 국가종교를 특히 에라스티아니즘(Erastianism)이라고 부른다. 요컨대 이 시기의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의 제국교회와 매우 유사한 국가교회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5. 17세기 종교전쟁이 정교 분리와 종교 자유을 낳다.

17세기 전반 유럽 대륙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초토화되었는데 이러한 참화의 결과 베스트팔렌 조약(1648)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아우스부르크화약과 낭트칙령의 원리를 확증하면서 각 지역의 군주가 가톨릭, 루터교, 칼뱅주의 중 어느 하나를 국교로 설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교 이외의 집단들에게도 사적인 집회와 예배,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종교교육의 자유가 허용되었으며 그들은 더 이상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박탈당하지도 않았다. 교황청의 강력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은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는 1806년까지 유럽의 근본적인 종교법으로 유지되었다.

 

영국에서는 청교도 혁명을 통해 모든 개신교 교파에게 관용정책이 펼쳐졌다. 이 정책은 1660년 성공회의 재국교화 이후에도 그대로 지켜졌다. 1689년 권리장전과 관용령에서 의회는 모든 개신교 종파에 결사와 예배의 자유를 부여했다. 다음 10년 동안에는 개신교에 대한 나머지 시민적 정치적 자유에 대한 제한이 대부분 철폐되었다. 이처럼 영국은 성공회라는 국교제도를 유지했지만 사실상 모든 국민에게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했다.

 

프랑스에서는 1801년 교황 비오 7세와 제1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협약(Concordat)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교황에게 성직자 임명 및 관리권이 부여되고 교구 획정과 교회 재산, 종교교육에 대한 교황의 권리도 인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공식적으로 국교로 남아 있었으며 19세기 내내 국가의 총체적 감독하에 있었다. 성직자들은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았고 교육 프로그램과 교구도 정부의 재정에 계속 의존했다. 190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교분리령이 선포되면서 국가교회가 폐지되고 국가에 의한 교회 통제 혹은 교회 지지가 완전히 철회되었다.

 

이처럼 유럽 각국에서 종교의 관용을 넘어 종교의 자유로 패러다임이 이행한 것에는 이신론(Deism)과 합리주의의 영향이 컸다. 종교적 관용은 지배종교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 타종교들의 활동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인 반면, 종교의 자유는 모든 종교의 동등성을 전제한다. 종교의 자유는 특히 개인의 자유에서부터 출발한다. 볼테르와 같은 철학자들이 개인의 자율성,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 자신의 의견과 의지를 표현할 개인의 권리를 강조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종교의 자유가 한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라는 추상적 명제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제도적 차원에서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요청된다. 따라서 근대 국가들은 종교의 자유를 확립하기 위해 국교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는데 이것이 정교분리원칙으로 표현되었다. 정교분리원칙은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념들과 제도들이 가장 먼저 구현된 국가가 미국이다.

    

미국 헌법 수정1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의회는 국교 수립에 관한 법을 제정할 수 없고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or prohibiting the free exercise thereof).” 이 조항은 학자들 사이에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지만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통한 종교자유의 보장을 의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근대 국가들의 종교자유 문제를 논할 때 누락시키면 안 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들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소련은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정치와 종교, 즉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정교분리가 국가의 종교 간섭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인 반면, 소련의 경우는 러시아정교회로 대변되는 교회의 정치 개입을 봉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자리잡은 정교분리 원칙은 각국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진구

 

중세 교회의 수도원과 신앙운동은, 종교적 광기를 야기 시킨다.

오직 신만이 관심을 끌던 중세기에 들어서서 교회 내부에서 영성운동이라고 하는 관심이 증폭되고 있었다. 교회 내부에서 영성운동이 증폭되면서 로마제국의 운명과 멸망에 대하여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새로운 관점이 등장하고 있었다. AD 313년에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한 후부터 중세기에 있어서 기독교의 고유한 특징인 교황의 교권과 황제의 정치세력이 서로 융합할 수밖에 없었다. 중세기 로마카톨릭교회는 막강한 정치력을 이용하면서 이 세상에서 신국건설을 성취한다고 주장했다. 카톨릭교회의 고유한 사명을 강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권이 정치력과 야합한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부패의 근원이며 종교적 타락의 온상이 되고 있을 뿐이었다. 로마제국의 정치세력과 융합한 카톨릭교회는 세상을 다스린다고 역설했다.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그리스도의 대행자라고 하는 권위를 악용하여 황제의 왕관을 좌우하는 권한을 주장함으로서 항상 정치적 논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때 당시 교황이 임명한 대주교는 감독을 억압하고, 감독은 신부들을 억압하고 신부들은 평교인들 민중을 억압했다. 교황청을 비롯하여 성직자들은 고하를 막론하고 탐욕과 횡포와 음모가 횡행하여 로마카톨릭교회는 틀림없이 악마의 회당이었다라고 역사는 전해주고 있다.

로마의 귀족들은 큰 세력을 가지고 있으며 부유한 귀족의 가문들이 교황과 황제의 임명과 계승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으로 교황의 영적 권한은 차츰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1075년에 그레고리우스 교황 교서가 개인 비망록의 형식으로 하달됐다. 이 교서를 통하여 중세기 로마카톨릭교회의 부패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두 27개 항목으로 되어 있는 그 교서중에서 중요한 것을 간추려서 기록한다. 로마카톨릭교회의 성직을 돈으로 팔고 사는 악행이 특히 9-10세기에 유행하고 있었다. 교황은 법으로 성직 매매의 금지령을 내렸다.

    

(1) 로마교황은 지상의 최고의 권한을 가진 보편적 권한의 소유자이다.

(2) 오직 교황만이 주교를 임명할 수 있고 파문할 수 있다. 일단 파문된 자와 관계를 가지거나 거처를 함께 하는 것을 엄금한다.

(3) 오직 교황만이 로마제국의 휘장을 사용할 수 있다.

(4) 오직 교황에게만 군주들은 그의 발에 입맞춘다.

(5) 오직 교황만이 황제를 폐위시킬 수 있다.

(6) 로마교황은 결코 오류를 범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다.

(7) 교황은 성베드로의 권한을 이어 받았음으로 최고의 지상권을 가진다.

중세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는 겉에서 보는 것처럼 화려하고 위세가 당당한 교회가 아니었다. 교회가 권력과 재산은 막강하게 소유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교회 내부는 심각하게 부패하고 있었다. 교회의 교권 내부의 분열과 그리고 유럽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카톨릭교회의 부패는 전체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세기에 등장한 것이 바로 교회의 영성운동 이었다. 영성운동만이 부패한 교회를 구출해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성운동의 등장으로 인하여 로마카톨릭교회는 양측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 두 축은 교황권축과 영성운동축이 양립하여 서로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수도원운동이라고 하는 형태로 처음 로마에서 시작됐다. 수도원영성운동의 위대한 창설자는 베네딕트였다. 베네딕트는 529년에 해발 519m의 높은 산에 수도원을 세웠다. 베네딕트는 당시로부터 250년 전의 성어거스틴의 수도정신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베네딕트는 로마에서 잠시 동안 수학하였으나 로마의 죄악에 실망하여 로마의 복잡한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깊은 산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 은거하기 시작했다. 베네딕트의 은거생활의 유명한 규범과 엄격한 규칙은 보통 성실한 사람들도 절대로 추종하기 불가능한 과격한 은거생활과 금욕주의였다. 하지만 그 당시는 물론이고 역사적으로 베네딕트수도원의 엄격한 전통은 수백년 동안 전설적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베네딕트 시대 이후에 많은 유사한 수도원들이 유럽전역에 퍼져 나갔다.

수도원운동에 있어서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또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성프란치스코(1182-1226)였다. 성프란치스코는 베네딕트수도원운동 이후 약 700년 후에 등장한 사람인데 그는 그때 당시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한데 대항하여 사랑의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성프란치스코는 부패하고 타락한 거대한 교회를 와르르 헐어버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는 다만 그 거대한 로마카톨릭교회의 성벽 밑에 자기의 조그마한 수도의 영적인 오두막 암자를 건설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그마한 영적인 오두막에 칩거하고 있는 성프란치스코의 수도사로서의 거룩한 모습은 교황을 비롯하여 도둑놈들과 심지어 짐승들, 새와 곤충들 까지도 그에게 감화를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때 당시 교황 피오11세는 말하기를 프라치스코는 또 하나의 예수라고 극찬을 했으며 또 그는 프란치스코를 예수의 거울이라고 하면서 존경을 표했다.

 

성프란치스코의 수도원운동 이후 300년 후에 이번에는 독일에서 또 하나의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항하여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는 그때 당시 한 수도원의 수도사이었는데 그는 수도원의 한 작은 고요한 방안에서 깨달음의 체험을 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교황청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교황청의 개혁을 주장함과 동시에 독일 카톨릭교회들의 거듭남을 크게 외치면서 총체적인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하여 결국 중세기유럽에서 기독교 개신교를 창설하는데 성공했다.

중세기는 교황들의 정치싸움과 성직매매 등 카톨릭교회의 교권이 극도로 타락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도원영성운동은 메마른 광야에서 한줄기 샘물이었다. 하지만 8세기 카로링커 왕조시대에 이르러서 교회의 수도원영성운동에 있어서 주객이 뒤바뀌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객이 뒤바뀌는 기이한 현상은 이 시기에 엘리트단체들이 수도원을 지배하는 주도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수도원의 주객이 뒤바뀌는 꼴이 되어 유명한 교황들과 주교들이 수도원에 접근하고 탈취하여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서 수도원이 오히려 중세문화와 종교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본래의 수도원 정신인 영성운동은 증발되어 사라져 없어지고 오히려 수도원이 귀족들과 주교들의 개인적인 출세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원의 본래의 모습을 다시 되찾으려하는 수도원 개혁운동이 수도원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수도원 개혁운동의 대표적인 수도원은 910년에 윌리암 공작이 창설하고 주도한 클루니수도원이었다. 수도원들의 변질과 타락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된 클루니수도원은 옛날 400년 전에 창설된 초기 베네딕트수도원의 엄격한 전통을 그대로 본받아 엄격한 수도생활을 강행하고 있었다. 성직매매 반대운동, 수도사들의 독신주의, 수도원에서 원장에게 절대복종, 엄격한 묵상과 기도생활등 철저한 금욕을 강조하는 수도원개혁을 실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클루니수도원의 개혁운동도 모순된 한계선을 도저히 넘어설 수는 없었다. 그 모순된 한계선은 그때 당시 모든 교회들이 교황에게 복종을 하는 것처럼 클루니수도원도 역시 교황에게 절대 복종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모순에 봉착한 클루니수도원의 수도원 개혁운동은 그때 당시 로마카톨릭교회가 총체적으로 쇠퇴하고 있는 시대적 조류에 따라서 클루니수도원의 진실된 개혁운동도 역시 벽에 부딪혀서 쇠퇴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초기의 수도원의 영성이란 말은 영어로 Spirituality라고 하는 말의 뜻으로 종교적인 가치에 의거하여 사는 영적 삶의 상태를 가리킨다. 또한 초기의 영성운동은 그 시대의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한다. 수도원운동 초기의 영성이라는 말은 카톨릭의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카톨릭의 영성운동은 예수의 삶과 인격을 본받아 예수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고 죽는 것을 의미한다. 카톨릭 영성운동은 정신훈련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인본주의적인 요소를 가질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세기 수도원의 영성운동은 교회갱신과 교육제도발전 그리고 위대한 종교사상가 배출 등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월적 존재에 의하여 달성할 수 있는 사랑의 역사적 실현을 갈망하고 있었다. 영성의 체험은 인간의 행동으로 표출되는데 수도사들의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초월적 삶이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성어거스틴의 영성운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모든 율법을 완성시킨다고 주장하면서 율법 대신 사랑을 주장하여 믿음보다 사랑을 강조했다. 중세기 영성운동의 핵심적 중요성도 역시 성어거스틴의 사랑공동체의 실현을 줄곧 강조하고 있었다.

교회가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일 첫번째 오점은 도덕적 부패로 인하여 성직자들이 개인재산을 엄청나게 축적하고 있었다. 유명한 성직자가 죽으면 그의 후계자들이 그를 기념하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구실로 많은 헌금을 강요함으로 헌금이 오히려 부패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주교들이 호화롭게 치장한 말을 타고 다녔는데 구걸하면서 살던 성프란체스코의 전통을 이어 받은 수도사들의 참된 모습을 중세기의 수도사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때 당시 수도원마다 막대한 재산이 축척됨으로 수도사들이 담당하던 노동을 모두 하인들에게 떠넘기고 말았다. 수도원이 기부를 받아 소유하고 있는 비옥한 목장에서 생산되는 모피로 인하여 황금들판을 소유한 수도원들이 되고 있었다. 중세기 로마카톨릭교회는 제도권교회로 고착되어 교리와 예전만을 강조하여 위계질서만을 유지하려고 노력할 뿐이고 평신도들 즉 민중의 비참한 삶에 대하여는 아예 무관심이었다.

교회가 제도권과 물질주의로 타락한데 대하여 반항적으로 수도원운동이 자연적으로 발생했다. 하지만 중세기 수도원영성운동은 하나의 현실도피적인 영성운동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중세기 수도원영성운동은 병든 사람을 돌보는 일, 불의한 정권에 대하여 선지자적인 투쟁의 의무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중세기 수도원영성운동의 특색은 단순히 집단적인 은둔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영성운동의 명분인 것 뿐 이었다. 주로 개인적인영적 경험을 중요시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개인의 영성을 지나치게 중요시함으로서 결과적으로 반사회적이며 또 반역사적이었다. 그럼으로 중세기의 수도원의 영성운동은 반지성적인 미신적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교황

http://ko.wikipedia.org/wiki/%EB%A1%9C%EB%A7%88_%EA%B3%B5%EA%B5%AD로마 공국

http://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EB%A0%B9교황령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2g1774a 교황제 [papacy, 敎皇制]

http://ko.wikipedia.org/wiki/%EC%BD%98%EC%8A%A4%ED%83%84%ED%8B%B0%EB%88%84%EC%8A%A4%EC%9D%98_%EA%B8%B0%EC%A6%9D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http://ko.wikipedia.org/wiki/%EC%95%84%EB%B9%84%EB%87%BD_%EC%9C%A0%EC%88%98%EA%B8%B0 아비뇽 유수

http://ko.wikipedia.org/wiki/%EC%B9%B4%EB%85%B8%EC%82%AC%EC%9D%98_%EA%B5%B4%EC%9A%95 카노사의 굴욕

http://ko.wikipedia.org/wiki/%EB%B3%B4%EB%A6%84%EC%8A%A4_%ED%98%91%EC%95%BD 보름스 협약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D%83%88%EB%A6%AC%EC%95%84_%ED%86%B5%EC%9D%BC 이탈리아의 통일

http://ko.wikipedia.org/wiki/%EC%8B%A0%EC%84%B1_%EB%A1%9C%EB%A7%88_%EC%A0%9C%EA%B5%AD신성 로마 제국

http://ko.wikipedia.org/wiki/%EB%A1%9C%EB%A7%88_%EA%B0%80%ED%86%A8%EB%A6%AD%EA%B5%90%ED%9A%8C 로마 가톨릭교회

http://church.catholic.or.kr/kuro3/histroy8.html 십자군 운동

http://church.catholic.or.kr/kuro3/histroy9.html 대사(大赦)

http://church.catholic.or.kr/kuro3/histroy6.html 그레고리오 개혁- 특징과 배경

http://church.catholic.or.kr/kuro3/histroy7.html 레고리오 개혁- 그레고리오 7세와 개혁교황들

http://ko.wikipedia.org/wiki/%ED%99%A9%EC%A0%9C%EA%B5%90%ED%99%A9%EC%A3%BC%EC%9D%98황제교황주의

http://cafe.daum.net/bulwon/NV3z/91?docid=1B062NV3z9120111111105653 교회권력과 정치권력, 그 만남과 갈등의 역사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2g3864b009 중세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http://ask.nate.com/qna/view.html?n=11093364 중세 유럽의 사회와 문화적 특징

http://church.catholic.or.kr/kuro3/histroy1.html역사속의 교회

http://rikszine.korea.ac.kr/front/article/humanList.minyeon?selectArticle_id=249&selectCategory_id=41그레고리우스 개혁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bna5&articleno=4351&_bloghome_menu=recenttext#ajax_history_home 교황과 추기경의 역사 진짜 황제는 교황이다?

http://www.jajuminbo.net/serial_read.html?uid=9957§ion=sc8중세카톨릭교회의 수도원과 영성운동

http://ko.wikipedia.org/wiki/%EC%B9%B4%EB%A1%A4%EB%A3%A8%EC%8A%A4_%EB%8C%80%EC%A0%9C카롤루스 대제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Inquisition?uselang=ko

http://ko.wikipedia.org/wiki/%EC%A2%85%EA%B5%90%EC%9E%AC%ED%8C%90 종교 재판

http://www.jajuminbo.net/serial_read.html?uid=9957§ion=sc8 중세카톨릭교회의 수도원과 영성운동

http://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0001§ion=sc8 중세기 서구 기독교제국 망친 십자군전쟁

http://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0067§ion=sc8중세기 분쟁일으킨 성상숭배와 성상파괴

    

 

() . ()에서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