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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역사탐방 21탄, 문화양념통 6 · 25 전쟁 (1950년 ~ 1952년) - 1

草霧 2012. 10. 23. 19:22

 

 

근현대사 역사탐방 21

 

 

문화양념통

 

 

 

 

6 · 25 전쟁 (1950~ 1952) - 1

 

 

민족상잔전시 작전통제권 상실

 

 

 

1950625일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

전쟁기간 | 1950625~ 1953727(휴전 협정)

기념행사 | 6.25 전쟁 기념식

6.25 전쟁사 | 해방과 분단, 북한의 남침준비, 남침에서 휴전까지, UN군 참전

관련정보 | 전쟁기념관 | 국립서울현충원 | 6.25 6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 | 국가보훈처 | 6월 기념일

추천영상 | [역사특강] -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한국전쟁[ 韓國戰爭 ]

 

http://ebs.daum.net/historylecture/episode/7102

http://www.koreanwar60.go.kr/

http://www.kbs.co.kr/section/adTest.html

http://www.warmemo.or.kr/main.jsp

http://www.keons.com.ne.kr/Kwphoto/kwphotos.htm

http://www.625.in/

http://www.abductions625.go.kr/

http://blog.naver.com/kimseogk/

http://www.kwari.org/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57700&mobile&categoryId=3065

http://100.daum.net/search/search_media_popup.do?lo=p&id=0_k17a000101a4.flv&type=video

 

6 · 25 전쟁 [Korean War, 六二五戰爭]

 

 

한국 전쟁(韓國戰爭) (Korean war, 韓戰)1950625일 이 후에 발생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전쟁 또는 내전이다. 1950625일 일요일 새벽 4, 한반도를 지나는 북위 38도선 이북을 점유하고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이남의 대한민국을 남침함으로써 발발하였다. 1953727일의 정전 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정전 중이지만, 정전 이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1950625일 새벽 4시경,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과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제조한 탱크로 38도선을 넘어 남침해 왔다. 오전 9시경에는 개성 방어선을 격파하고 당일 오전에 동두천, 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 도봉구의 창동 방어선을 넘고 있었다. 창동 방어선이 뚫린 대한민국 국군은 강북구의 미아동에 있는 미아리 고개에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결국 조선인민군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새벽 230분에는 한강에 있던 한강대교가 폭파되었고, 이후 서울에는 공산군이 주둔하였다. 714일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전하였다. 1950915일에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같은 해 928일에 낙동강 방어선을 넘었고, 101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에 다다랐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으며, 그 와중에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1953727일에는 휴전선을 중심으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한국 전쟁은 원칙적으로 현재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 결과로 남북 간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6·25 사변(六二五事變) 혹은 6.25 전쟁(六二五戰爭),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동란(六二五動亂)으로 부르기도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으로 부른다. 조선 전쟁(朝鮮戦争 일본),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중국) 등 입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미국는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으로도 부르기도 한다.

 

배경

1945년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군에 의해 남북분단

1949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38도선 분쟁

  

 

 

한국전쟁 직전 남북 군사상황

1948년 소련과 1949년 미군 (군사고문단)이 점령군 철수

1948년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미 군부의 전략

미 군부는 한반도 '전략적으로 포기할' 계획과 도서방위선 애치슨 라인을 구축해 소련과 3차 대전을 수행한다는 계획 수립의 1946년 수립한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

 

 

1949년 김일성의 스탈린 설득과 마오쩌둥의 지지로 소련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쟁 원조

좌와 우의 대한민국 내부의 혼란

조선노둥당의 독재와 숙청

이승만의 허황된 북진통일론

1950일본 공산당의 과격시위

 

 

 

한국 전쟁 전에 있던 전투

1949~1950, ‘작은전쟁옹진 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강릉부근에서 전투 수행

194843: 제주 4·3 사건

19481019: 여수·순천 사건

19491224: 문경 양민학살 사건.

 

 

 

원인

김일성의 남침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대한민국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과거의 한국전쟁 원인 가설

스탈린 주도설

한미 공모설

내란 확전설

1.작은 전쟁( ~ 1950625):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 무력 충돌

 

2.제한 전쟁(1950625~ 19507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규모 무력 동원을 통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전격 침탈하여 불법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

 

3.전면 전쟁(195071~ 195010):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대대규모의 미군 스미스부대가 참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7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발령

 

4.확대 전쟁(195010~ 19516):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UN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함. 이후 항복을 재차 권고했으나 대답이 없어,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 시작, 곧 국제연합군(UN)도 진격시작, 평양수복,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국 인민해방군 참전

 

5.고착 전쟁(19516~ ): 중국 인민해방군의 2차례에 걸친 춘계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에 공산측이 정전협정

 

전쟁준비

·소 비밀회담과 '·소 경제·문화협정' 체결

4 야전군 휘하 제 55군단 166사단과 조선인민군 제 7사단(12사단), 오토바이 연대의 조선 의용군 입북

 

 

준비 과정 수립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도로, 김책, 무정, 리승엽 등 남로당,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이권무, 김창덕, 유경수의 적극 찬성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 반대와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소극적 찬성

 

경과

 

경위

1949930일 이승만은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 하였다. 이 발언은 미국이무기를 한국군에게 제공하지 않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19506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 주말에 병력이 외출했다.

 

박정희의 군사반란 모의 시도 실패

이형근은 저서 군번 1번의 외길인생에서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를 제기, 지휘관을 교체, 전방 부대의 위치 변경, 전방 부대의 중화기와 차량 중 60%가량을 후방 배치

 

발발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

627, 정부는 대전 이리 목포 - 부산 피신

628, 한강 철교 폭파

627일 보도연맹원 처형

 

 

1950,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 설치방안 모색

1950628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3일의 의문점

첫째 춘천전투의 패전으로 인한 포위계획 실패, 둘째 도하장비 부족, 셋째 남로당 책임자인 박헌영이 전쟁 발발시 20만 명의 남로당원의 일제 봉기로 대한민국 자체가 조기 붕괴시키겠다고 주장 하였다는 설

 

 

 

유엔군의 참전

626, 주미 한국대사 장면

 

 

UN 안전보장이사회는 626일 소집 "조선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

 

 

 

UN군의 참전 결의

몽클라르 장군 ()

타흐신 야즈즈 장군 ()

콜롬비아의 게릴라 용병부대

에티오피아의 황제 친위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미군의 참전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

630일 해리 S. 트루먼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권한부여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 의 오산전투와 패배

 

710,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

713, 이승만은"조선인민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 투입과 패배

 

 

대구 후퇴와 다부동 전투

8월까지 조선인민군은 대구 점령

1사단장 백선엽은 다부동 전투와 승리

83일 유엔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 구축

 

 

 

UN에서의 설득 작업

장면와 소련 말리크의 충돌

 

 

‘1950년 소련제라는 철인이 찍힌 소련제 소총 한 정을 증거물로 제시

대한민국의 북침주장과 한국민들끼리의 내란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연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