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역사탐방 19탄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년~1945년)
한국의 독립운동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8m0452a 무장독립운동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8m2183b002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http://directory.search.daum.net/site_list.daum?dirseq=18813&ord=0&page=2
http://ko.wikipedia.org/wiki/%EC%9D%BC%EC%A0%9C_%EA%B0%95%EC%A0%90%EA%B8%B0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56042.html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929
http://www.gocj.net/news/articleView.html?idxno=46684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26299
1. 독립운동의 전개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평양의 송죽회
간도와 연해주로 이주후 신한촌 등의 한인촌을 형성
북간도의 대종교
2. 민족해방운동의 모색
독립운동가들은 해외에서 민족해방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연해주, 이범윤(李範允)의 권업회(1912년)
연해주,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의 대한광복군정부(1914)
북간도,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미주지역, 안창호(安昌浩)와 박용만(朴容萬)의 대한인국민회
3. 3.1운동
근현대사 역사탐방 17탄 문화양념통 3· 1 운동 (1919년) 만세소리가 하늘에 닿다 참조
4. 1920년대의 민족해방운동
3.1운동 후,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에 따라 각 지역에 존재한 망명 정부의 통합을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에 따라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한반도의 한성정부, 상해의 상하이정부 등이 한민족의 광복의지를 담아 1919년 4월 중국의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발족시켰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3도 대표회의로 결성된 한성 정부의 법통을 이어 정부가 수립되었다. 당시 상하이는 프랑스 조계지로서 당시 세계의 외교의 각축장이었는데 1차 대전 이후 각종 국제회의에 영향을 받아 외교적으로 독립을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상하이에 기반을 두었다. 임시정부는 초반 대통령제를 표방하였으며,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나 1921년 워싱턴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호소했다.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으나, 개조파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창조파가 대립하였는데, 결국 이탈하게 되었다. 이후 김구의 활약으로 부활하기까지 오랜시기가 걸렸다.
독립군 토벌 간도참변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노동쟁의·소작쟁의·학생운동·사상운동 등 일련의 항일투쟁 전개
만주 교민회
5. 계급투쟁
노동자·농민들에 의해 계급투쟁이 급격히 발전했다. 생존권 확보에서 출발한 민중의 투쟁이었지만, 일제의 식민지 착취와 지배구조를 반대하는 항일의 성격을 띤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이었다.
1921년 9월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투쟁
1923년 8월 평양 양말공장 노동자 파업
1929년 1월 원산 총파업
1930년 1월 부산 조선방직 파업투쟁
1930년 5월 함경남도 신흥 장풍탄광 노동자의 노동조합의 설립과 폭동
1930년 7월 함경남도 단천 농민들이 일제의 산림정책을 반대 투쟁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59 문화양념통 국토개발 참조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 계열 내 자치 운동을 주장하는 타협적 민족개량주의자가 분화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1927년 2월 신간회를 결성 후, 각 지방에서 신간회 지회가 결성, 1928년 말 143개의 지회가 조직, 회원 수는 2만 명에 이르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과 서울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준비와 탄압, 1931년 5월 해소되었다.
1920년대에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한반도 유입
서울청년회 ·신사상연구회· 북풍회 등 사회주의 사상단체가 대거 조직
1924년 4월 조선공산당 결성
중국 1차 국공합작
7. 근우회
1927년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가 결성되었다. 근우회는 계몽을 주장하는 기독교계와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계의 대립이 있었지만,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주의적 사회구조로 차별과 억압을 받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었다는 의미가 있는 단체였다.
8.혁명적 대중조직 건설운동
1931~35년까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활동가들은 1930년대 경성트로이카등 조직하여 지하에서 비합법적인 준비조직을 결성, 표면으로는 합법적인 노동조합, 파업본부, 노동자 친목회 등을 결성하여 운동을 지도했다. 또한 공장신문·팜플렛·전단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선전, 민족해방운동을 선동했다. 흥남·함흥·원산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농민조합 운동가들은 농촌 내 기존 청년동맹·여성동맹·소년동맹을 편입해 각각 농민조합의 청년부·부녀부·소년부로 만들어 투쟁했다. 격렬한 반일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는데, 특히 함경북도 명천의 농민들은 계엄대·동지탈환대·규찰대·연락대 등을 조직하고 대중적 폭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전국 70여 개 군에 조직되었다.
9. 임시정부의 활동
1920년대 중반 침체 되었으나, 김구의 주도하에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의열단을 조직하여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 이덕주와 유진식의 일본 총독의 암살시도,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 1933년에는 장제스와 항일전선협력에 합의한다. 양기탁이 1933년 10월~ 1935년 국무령에 재직했으며 중일전쟁 중 상하이, 난징과 창사, 충칭으로 본거지 이동한다.
1940년 충칭에서 국민당과 미국의 도움으로 광복군 총사령부 창설, 1941년 12월 9일 연합군에 가담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 발표하지만, 본국 탈환 작전의 준비 중에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게 된다.
10. 항일무장투쟁과 민족의 해방
일제의 1931년 9월 만주 점령
양세봉(梁世鳳)· 이청천(李靑天)의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 항쟁
1932년 사회주의자들은 동만주 거점의 유격대를 결성하고 반일 투쟁
보합단(평북), 천마산대(평북,1919), 구월산대(황해도)
1937년 중일전쟁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창설
김원봉(金元鳳)· 윤세주(尹世胄)· 한빈(韓斌)· 김학무(金學武) 등이 중국 국민당의 공식적 지원으로 창설 후 일본군 포로 심문 대적 심리전, 적후방에서 벌이는 첩보 및 공작활동했다. 1941년 화베이(華北)지방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이곳에서 팔로군과 협력하여 호가장 전투, 반소탕전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크게 활약했다.
1940년 9월 한국 광복군 창설
중일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0년 충칭에 안착, 9월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다. 1942년 조선의용대의 잔류부대를 흡수하여 대열을 늘리는 한편, 1943년 8월 구(舊) 조선의용대원 출신 광복군 선발대로 심리, 선전전 특수요원을 인도, 버마 전선에 파견해 영국군을 도와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미국 전략첩보기관인 OSS와 합작하여 조선 진입작전을 추진했다.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을 매개로 하여 1945년 5월 완료되었다.
11. 1940
년대 조선에서의 독립운동1930년대 중후반 중일전쟁과 수양동우회 사건 등을 계기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변절자가 속출했다. 1939년 10월 말 요주의 인물로 등재된 인원은 약 7600여명 중 전향자는 3076명으로 약 40%를 차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한반도의 반일운동은 민족주의자들의 비중이 커졌다. 이무렵 일제는 전시체제였고 강제 징집, 징용 등등 끌려가는데도 불구하고 유언비어 유포, 태업, 공출 기피, 징용 및 학병 기피 거부 등 소극적인 반일 움직임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1944년 건국동맹 결성
1944년 8월 10일, 여운형, 조동호이 결성되었다. 중앙과 지방조직을 세우면서 치안대와 군사단체 조직,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제휴 활동을 벌였다. 조동호의 군사위원회 조직하여 후방 교란 활동, 박승환 등 만주군 장교들을 규합했으며 북경을 거점으로하여 화북 조선의용군과 연결했고, 충칭 임시정부와도 연락하고자 했다. 이어 1944년 10월에는 농민동맹 조직, 여운형은 학생, 교사, 철도원, 여성 등도 조직하였고, 징용, 징병 거부자들의 조직에 관여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8월 15일 조선총독부 요청에 따라 엔도 류사쿠을 만난 여운형은 5가지 조건을 요구하였고, 그리고 전국의 정치범이 석방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직후 기구를 확대 개편하여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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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하이[上海]에 수립·선포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金九) 등이 환국할 때까지 일제의 강제점령을 거부하고 국내외를 통할·통치했던 3권분립의 민주공화정부.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1919. 4. 13), 대한국민의회정부(1919. 3. 17, 러시아령), 천도교 중심의 대한민간정부(1919. 4. 1, 서울), 조선민국임시정부(1919. 4. 9, 서울), 신한민국임시정부(1919. 4. 17, 평안도), 한성임시정부(1919. 4. 23, 서울·인천), 그리고 동삼성(東三省:만주일대)의 고려임시공화국 등 6개 지역 이상에서 임시정부가 준비되었다. 이 가운데 상하이·러시아령·서울의 3개 지역에서 성립된 임시정부가 헌법·의회·서고문(誓告文)·정강·강령 등을 갖추었고 나머지 정부는 전단적(傳單的)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은 상하이에 집결, 1919년 9월 15일 통합임시정부를 구성하고 1945년까지 각종 광복정책을 펴나갔다.
신규식(申圭植)의 터잡기와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의 다양한 민주공화적 전력을 승화·연결시켜 3권분립의 민주공화정부를 탄생시켰다. 먼저 이동녕의 주도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여기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제정·공포한 뒤 국무총리와 6부의 행정부, 국무원을 구성했다. 이어 1919년 4월 13일 의정원과 사법부의 3권분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민주정부를 출범시켰다.
임시정부는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통제·통할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민족자주독립을 최대의 목표로 내걸었다. 이때 임시정부가 내걸고 투쟁했던 독립운동은 단순한 소집단적 항쟁차원이 아닌, 이념을 동반한 광복정책적 측면에서 국가적·정부적 기능으로서의 면모와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 각처에서 수립되어 상하이에서 통합된 임시정부는 군주국의 지도체제가 순수한 민간, 즉 국민국가의 민주공화제적 지도체제로 전환되는 민주정치사의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어놓았다
임시정부 27년
1932년 5월 이후 1940년까지 8년 동안 이동
1935년 한국국민당 조직
1939년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 조직
1940년 한국독립당 통합
광복군 창설
김구, 지청천(池靑天), 이범석, 김학규, 김원봉
1945년 7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탈환작전 결정
장준하(張俊河)·김준엽(金俊燁) 등 학병
1941년 11월 주미외교위원부를 워싱턴에 설치
12월 10일 공식적으로 '대일선전포고'를 발표
1942년 3월 1일 각국에 임시정부의 승인 요구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정식 승인
1945년 포츠담 선언에서 재차 확인
대한국민의회
미군정
민족혁명당
북경군사통일회와 대립
상해대한인거류민단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대한애국부인회
독립공채의 발행
독립신문 간행
만국사회당대회 참가
국민대표회의
위임통치론
김구, 김규식, 박은식, 박찬익, 선우혁, 송병조, 신규식, 신채호, 안창호, 오의선, 유자명, 윤현진, 여순근, 여운형, 원세훈, 이규갑, 이규채, 이동녕, 이동휘, 이상룡, 이세영, 이유필, 이회영, 장건상, 장덕진, 장해평, 정태희, 조소앙, 차병수, 최영만, 한국독립당
http://zjlibrary.tistory.com/209?top3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unglass0405&logNo=90148491979
http://k.daum.net/qna/view.html?qid=2gFS6
http://k.daum.net/qna/view.html?qid=0BrKR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orps593&logNo=120152584798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ju0508&logNo=130149567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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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59hjh&logNo=40157801075
http://www.tutork.com/yh32-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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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460666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301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10/17/0200000000AKR20121017181100001.HTML?did=1179m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42640765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44620179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10814_0008974758&cID=10201&pID=10200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50814028257770&outlink=1
http://local.segye.com/articles/view.asp?aid=20110812003321&cid=6101100000000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hpss&logNo=10133294337
1. 백범 김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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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
2. 안중근의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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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매헌 윤봉길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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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산 안창호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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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
5. 유관순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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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
6. 한국증권거래소 증권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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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
7. 천안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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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 |
8. 안동 독립운동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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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대문 형무소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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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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